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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합창단의 시몽 샘과 함께 '참을 알아가는 것에 대한 단상-
김정식 로제리오(가수 겸 작곡가)
1989년 가을.
성체대회 개막을 뒤로하고 저는 PARIS 로 떠났읍니다.
그땐 정말 너무 가난해서, 파리그레고리안(CGP/Choeur Gregorian de Paris-The Gregorian Choir of Paris)의 초청이라고는 하지만 그쪽에서 계약 조건으로 배려해 주는 것 외에, 건강이 너무 나쁘고 CGD(선천성 면역결핍)인 저로서는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어서(물론 그곳 공기가 한국보다는 좋아서 싱겁게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났지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까봐 비상금을 가지고 가고 싶은데 없었습니다. 그 때 이런 사정을 듣고 선뜻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돈을 빌려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지요. 저희 <가톨릭 생활성가회> 음악단장인 김영조 미카엘이 100만원, 건반과 알토 Vocal 그리고 먹고 놀 때 늘 총무로 피선된(순전히 너무 잘 먹고 너무 잘 놀아서) 윤경련 아가다님께서 50만원.-한양대 대학원 학생신분으로 어디서 그런 돈이 났는지 알 수 없지만-그 당시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지요.
이런 고마움을 뒤로하고 저의 외로운 Paris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더듬거리는 영어 외에는 소통 수단이 없는데 초청자들은 무자비(자비가 없다는 뜻)하게 첫 날부터 무조건 불어로 쌔리 갈기....(약간 격해지려 하는 감정 자제 및 수습) 아무리 영어로 말해도 대답은 불어 뿐... 이 상황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고 필수인 라틴어를 불어로 배웠습니다. 두 나라 말을 동시에 몰라서 졸면 악착같이 깨웁니다. 왜냐구요? 퍼들인 돈이 아까우니까. 아닐까요?
주중엔 이렇게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주말엔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의 연주 여행 일정이 거의 매주 있습니다. 물론 가끔씩 솔렘 수도원이나 남서쪽 Bordeaux 근처의 Saint Martin(Saint Morning)이라는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잘 전수된 그레고리안을 몸과 마음으로 익히기도 하지요. 주중 수업이 없는 시간엔 Paris 시내 곳곳에서 진행되는 음악회를 다녔습니다. 아예 한 달 동안의 Concert Plan 이 Radio France 에서 나오는데, 그걸 보고 미리 체크해 두었다가 직업적으로 다녔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Concert가 셋 있습니다.
하나는 파리음악원에서 졸업 연주회를 하는 소프라노인데, 그녀는 이미 비엔나 음악학교에서 1등 졸업을 하고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리부터 연주가 너무 궁금했지요. 참고로 저는 어릴 때 부터 벨칸토 창법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입니다. 연주가 시작되었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가슴이 뛰네요. 피아노 곁에 선 그녀의 옷차림은 평상복, 그것도 아주 소박한 일상복을, 그러나 매우 단정하게 입고 있어서 가슴이 뭉클했고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이를테면 얼굴 표정이 일그러 진다거나 , 소리를 내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거나 이런 일은 상상할 수 도 없도록, 그녀는 마치 얘기를 하듯, 무대 위의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며, 가끔씩은 새가 본연의 의무로 노래를 하듯, 마치 내가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이 일어날만큼, 그렇게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있었읍니다. 이것은 그 때까지 거부만 해 왔던 성악에 대한 저의 편견을 한 방에 날려 버린 계기가 되었지요.
두 번 째는 Ecole Normale 에서 입니다. 그 날도 Frederic Chiu 라는 젊은 학생이 Piano 졸업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RAVEL 을 연주했는데, 제가 그날 숨을 쉬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자그마하고 가녀린 동양남자가 손이 쫙쫙 벌어져야 가능한 RAVEL을 어떻게 저토록 아름답게 연주하고 있는지... 서양인과는 곡 해석이 약간 다른데 제 생각으로는 그의 해석이 훨씬 원작자인 RAVEL에 가까운 것 같애서 나름대로 유추를 해 보았읍니다. RAVEL은 동양음악 특별히 일본음악에 심취되어 그의 작품 안에 많이 이입되어 있는데, 동양인의 피가 흐르는 Chiu 가 손가락만 벌어지고 잘 돌아간다면 RAVEL에 관한 한 서양 사람보다 훨씬 원작에 가까운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일 수도 있구요. 연주가 끝난 후 그를 만났습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당신을 초대하고 싶은데 응할 수 있느냐? Oui d'acord.(Yes. Why not?) 그렇다면 그 때 서로 알아볼 수 있게 서명을 해 주면 좋겠다. 그래서 받은 그의 싸인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첫 번 째입니다. 실제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 그의 초청을 추진해 보았지만, 한국 음악인들의 배타적인 반응과 태도에 질려 포기해 버렸읍니다. 그런데도 가끔씩 그의 연주가 환청으로 들려 왔으니 그날의 연주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지요?
다음 날 그토록 고고하고, 이방인에게는 칭찬을 애써 아끼는 아니 아예 칭찬을 잘 하지않는 Parisien 들이, 모든 매스컴의 1면 TOP에 그를 올렸읍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인이고, 음악하는 아버지가 CHOPIN을 좋아하여 그의 이름마저도 Frederic 으로 지었으며 어릴 때 부터 재능을 보여 11살 때 Paris로 건너온 천재였읍니다.
제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13년이 흐른 어느 날, 우연히 용산 전자상가 앞을 지나다가 어느 수입AUDIO 가게에서 들려오는 CHOPIN을 듣는 순간 바로 그의 연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만이 지닌 고유의 색깔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가게에 들어가 물어보니 Frederic Chiu 그였고, 그는 이미 여러 장의 음반을 녹음했더라구요. 라벨 프로코피에프 명달손(어릴 때 보았던 '멘델스존'악보집에 한자말로 그렇게 표기되어 있었음) 등등... 벌써 유럽에서는 대가가 되어 있었구요.
아! 흐뭇하다. 꿈나무를 알아보는 안목이 내게 있었다니....
마지막은 Radio France 에서 매달 말에 진행하는 ‘젊은 음악인들의 밤'에서입니다. Paris는 세계적인 진짜 음악 천재들(미국에 비하면)이 모여 있어서, 에콜 노말은 나이나 학력에 제한이 없지만(그래서 이 학교 피아노과에는 한 때 한국 학생이 80%나 될 때도 있었으며, 성악과에는 현직 우편배달부도 있었음) 파리음악원은 나이 제한이 엄격합니다.
물론 저는 특별 초청이어서 해당이 안 되지만, 입학 자격이 제 기억으로 작곡은 20살 이하, 성악이나 기악은 18세 이하로 알고 있어요. 이런 차세대 음악을 이끌어 갈 어린 천재들에게 발표와 연주기회를 주는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그날은 어떤 학생이 ‘메시앙을 연주한다’고 해서 갔는데, 메시앙은 윤이상과 함께 유일하게 제가 ‘끝까지 졸지않고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두 분의 음악을 거의 대부분 광처럼 수집하여 듣고 있지요. 어떤 작품은 2~3 가지의 다른 연주(연주자가 다른)를 듣기도 하구요. 이분들의 음악언어와 소통하고 있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는 다음에 기회 닿으면 다시 말씀드리지요.
아뭏튼 그날 어린 학생에 의해 연주되는 자신의 작품을 듣기 위해 그가 부인과 함께 왔습니다. 제가 귀국한 얼마 후에 그 분이 타계하셨으니, 일생을 통해 이런 기회가 그리 자주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미 95세의 고령에 약간의 치매가 있다는 그를 가까이 다가가서 5분 정도 바라보았습니다. 노 음악가의 눈에서 감지되는 섬뜩이는 광채, 이 눈빛을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에꼴 노말에 갔다가 복도에서 친구를 만났읍니다. 계명대 작곡과 대학원을 마치고 후학을 양성하던 중, 갑자기 곡을 쓰고 싶은 열망이 너무 강하게 밀려 와, 노모와 아이 둘을 대구 시향에서 첼로를 하는 아내 데레사에게 맡기고, 무작정 PARIS 에 온 고승익(크리스토 폴/현 효성 가톨릭 음대)입니다. 나이가 저보다 한 살 많아서 형이라고 부르는 우리는, 대구 2군사령부 군악대에서 고문관으로 몰린 선임,후임으로 만나(클라리넷 파트였는데 제가 그토록 좋아했던 클라리넷을, 그 이후로는 소리만 들어도 악몽이 되살아나 왠만하면 건강상 삼가하고 있음), ‘음악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같다’는 이유로 너무 친해져서, 자주 그가 악기 파트에서 내쳐져 맡게 된 보급계 창고 안에서, 음악 같지 않은 소리를 빽빽 불어대며 서로 잘난 체 으르렁대는 대원들을 피해 건빵을 축내가며 끝없이 낄낄댔읍니다. 제대 후, 프라도 노동사제회 지원자(관심자)로 구미 신평 성당에서 노동자들과 실습을 하고있을 때, 아내와 한 번 찾아온 이후 소식이 끊겼는데, 세상에. 어머나 / 으메 우쨔쓰끄나 / 울랄라~ / 맘마미야~ / Oh your God! 10 년 만에 에꼴 노말의 복도에서 만난 우리는 함께 부등켜 안고 공중부양을 몇 차례나 했읍니다.
며칠 후 , 저는 초청자들이 마련해 준 숙소를 뒤로하고, 파리 외곽 Saux(쏘)공원 근처 Bourg la heine(부흘 라 엔느/'여왕의 관'이라는 뜻임)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지요. 초청받아 왔기에 모든 면에서 비교적 시간이 여유로운 저에 비해, 정해진 시간 내에 곡을 쓰고 돌아가야 하는 그를 돕기 위해서 밥과 빨래를 하고 시장을 보며, 가끔씩 그가 써 가는 곡을 지켜보다가 필요할 때 도움 말을 해 주는, 말하자면 불란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동성연애자의 아내 역할이지요. 매일 한 두 도막의 곡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가끔씩 식사를 거르는 것은 물론, 가끔씩은 몰려오는 잠과 대소변을 참고 낑낑대며 곡에만 매달려 있는 그에게 ‘왜 그러느냐?' 고 물었더니, ‘곡에 매달려 있으면 먹고 자는 것을 잊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Stress를 쌓이게 해야 견디지 못해 응집된 무엇이 터져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순식간에 곡이 떠올라서 머릿 속을 지나가던데?”
이것은 열살 무렵 부터의 일이었지요. 그렇게 저는 350 개의 노래와 몇 편의 연주곡이 떠올라 기록해 두었거든요. 곡을 쓰기 위해 애를 쓰고 부러 Stress를 쌓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곡을 쓰려고 의도하는 것’ 조차 저는 짐작을 잘 못했지요. ‘왜? 그래야 하는지...’
살아오면서 고2 때 까지 음악시간에 공부로 배운 지식 외에는 단 한 차례도 타인에게 음악 지도를 받아 본 기억이 없고, 스스로도 전문적인 음악공부를 해 본 적은 더더욱 없는, 그러니까 화성악이나 대위법은 물론이고 통론조차 맘 먹고 읽어본 적이 없어서, 가끔씩 내 머리 속을 지나가는 선율과 화성을 그대로 오선지에 붙잡아 둘 뿐, 화성진행이나 심지어 화성 자체도 모를 때가 허다하며, 어쩔 수 없이 떠오른 대로 펼친화음으로 기록해 두는 게 최선일 때가 많지요.
이 지경인 내가 곡의 흐름을 잡지못해 낑낑대는 그에게 마지못해 도움말을 해 주면, 다음 날 수업 중에 교수님으로부터 ‘거의 흡사한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그는 가끔씩 경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군대에 함께 지낼 때, ‘음악에 대한 감각을 타고 난 사람’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작품을 직접 대한 적은 없었는데, PARIS 에서 처음 대하는 저의 <김정식 로제리오 생활성가>라는 악보집을 훑어보고 나서, 그가 탄성을 지르며 토해낸 말은,
“곡의 작품성은 둘 째 문제다. 그런데 어떻게 한 곡 한 곡이 어느 한 부분 손 볼 곳이 없이 완성되어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였읍니다.
싱거운 내 답변.
“원래 그러는 거 아니야?. 한 번 떠 오른 곡을 왜 손질을 해?"
전라도 장성 시골 깡촌에 살았던 저는, 양호실에 한 대 있는 오르간과 악대부에서 연주하던 피리며 멜로디언, 북, 실로폰, 그리고 또 하나 삼촌이 불다 버려서 잡안에 굴러다니던 하모니카를 깨끗이 닦아 학교 안에 있는 느릅나무 가지에 꽂아 놓았다가, ‘밤에 악기를 불면 귀신이 나온다’는 동네 어른들의 으름장 때문에 해질 녘이면 나무에 올라가 혼자 불었던 것이 전부여서, 중학교로 진학을 해 광주로 갔을 때, 그러니까 13살 때 그림이 아닌 진짜 피아노를 첨 보았는데, 내 느낌으로는 악기라기 보다는 커다랗고 쌔까만 것이 전쟁터에서 쓰는 무기로 여겨졌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Sound of Music' 이라는 영화를 단체관람을 하였습니다. 관람이 끝난 후에도 영화음악이 너무 좋아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우리 학교 다음으로 단체관람을 온 여학교 학생들 틈에 끼어서 한 번 더 보았는데, 그 날 밤은 새도록 그 음악들이 제 머리를 지나 다녔읍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점심 시간을 기다렸다가 음악실에 가서 Piano 를 가만히 만져 보았지요. 오르간과 멜로디온을 만진 경험으로 어제 들었던 선율과 화성들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갑자기 음악 선생님이 다가오더니,
“얘. 너 그 악보 어디서 구했니?”
그 당시는 악보를 살 만한 곳이 없었거든요. 더구나 지금 상영중인 OST 라면 더 더욱...
“악보는 없어요. 어제 영화에서 들었잖아요.”
“어머. 그러니까, 어제 들은 것을 기억해서 쳤다는 거야? 얘가 사람 잡네. 다시 한 번 쳐 볼래? 어머 어머 맞다. 그래 그래 어쩜 그걸 다 외우고 있니? 나도 분명히 함께 들었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얘. 기억이 나도 그렇지. 악보도 없이 어떻게... 가만. 너 피아노 치고 싶니? 치고 싶으면 서점에 가서 바이엘 한 권 사 와. 내가 가르쳐 줄께.”
이렇게 해서 중고 서점에서 구한 책으로 피아노를 쳐 보았지만 약속과는 달리 레슨을 해 주신 적은 없었고, 점심 시간이면 음악실 문을 밖에서 잠궈 다른 학생들이 못 들어 오게 했다가 점심시간이 끝나면 열어주시는 게 다였어요. 그러면서도 가끔씩 학교 행사에는 꼭 나를 불러 <뻐꾹 왈츠>나<알프스의 저녁 노을> 같은 것을 연주하게 하셨지요.
세월이 흘러 최근, 졸업 35년 만에 ‘경기도 고양시 교육장으로 계시다’는 선생님께서 다른 동창들을 통해 ‘김정식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 하셨다기에 모임에 나가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 때 피아노 가르쳐 주신다더니 왜 안 가르쳐 주신 거예요?”
“어머 얘. 너 몰랐니? 내가 그 때 말 안 했나 보구나. 너 같은 애들은 잘못 가르치면 오히려 음악성을 망쳐 놓을 수가 있어. 나는 조선대 음대 피아노과를 나오긴 했지만 음악성이 별로 없었어. 그래서 내 딴에는 너를 돕느라고 혼자서 있게 그냥 놔 둔거야. 혼자서도 잘 쳤잖아.”
어머 어머. 이 할머니 정말 사람잡네. 그러면 그렇다고 말씀을 하셨어야지... 하긴 그 때 레슨을 해 주셨더라도 거의 건성으로 듣거나 졸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그런 상황을 빨리 알아차린 이 할머니를 정말 음악성이 없는 걸루 쳐야 되나? 선생님은 ‘자신은 음악성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되어 행정 쪽으로 공부를 하셔서 오늘에 이르셨다는데...
Any way.
그 후 저는 혼자서 음악실에 앉아 그야말로 ‘음악과 놀기’를 하였지요. 무엇이든 내 맘대로 하다가 옆 건물인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다 보기도 하고, 잠이 오면 자고 일어나 건반을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가끔씩은 내 머리 속을 지나가는 선율을 붙잡아 한참을 놀다가 다시 보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영어 수업 중에, 2층에 있는 우리 반 교실보다도 더 높이 자란 왕백합나무의 싱그러운 이파리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음악과 놀기’에 빠진 저는, ‘세 번씩이나 큰 소리로 부르셨다’는 선생님의 음성을 전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전에도 이런 일을 겪으신 선생님께서 ‘이번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셨던지 정말로 화를 내시며,
“야! 김정식. 너 나갓! 그렇게 좋으면 나가 버린란 말이얏!”
교실 문을 나서며 흐뭇한 미소를 뒷통수로 날리며(앞 쪽은 전혀 아님) 음악실로 달려가 피아노에게 들려주었던 얘기가 바로 '초여름의 미풍'이라는 피아노 소품곡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날들의 행복.
그렇게 4년을 음악실에서 혼자 지내다가 어느 날 스토커를 만났습니다. 그 시절, 남학교에서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가끔씩 유리창 너머로 구경하는 학생들의 호기심을 애써 모르는 체 하며 혼자 노는 기쁨은 어디에도 비길 수 없었는 데, 선배임을 자처한 이 스토커는 무단으로 침입하여, 두 대가 고작인 피아노 중 꼭 좋은 것을 꿰차고 앉아, 아무 말도 없이 나와 비슷한 행동들(음악과 놀기)을 하다가, 나에게 나머지 한 대의 피아노에 앉게 하고서는 ‘함께 대화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자기가 즉흥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다시 나 더러 ‘대답을 피아노로 하라’는 것이지요. 사전 작업으로 그는 먼저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고 ‘무엇을 표현하려 한 것인지?’ 내 생각을 물었읍니다. 내가 느낀대로 답하면 그는 ‘경이롭다’는 반응을 보이며 ‘어쩌면 그렇게 다른 사람이 표현하려 했던 것을 느껴낼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것은, 그게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외로운 그가 자신의 음악 도반으로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작업이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쑥스럽기도 하고 침입자 때문에 ‘혼자 놀기'에 쫑을 친 나는 뒤로 그에 대해 알아 보았읍니다. 현직 음악 교사인 광주 출신 작곡가의 아들. 1년 전인 고2 때 전국 작곡 경연대회에 나가서 1등 당선. 그 당시 새롭게 Modern한 풍으로 바뀌어 전국적으로 쓰고 있는 국민체조곡의 작곡자.
그러나 실제의 그는 이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고, 잘난 체를 하거나 선배라고 기득권을 행사한 적도 없고, 오히려 통론 책을 사다 주면서 ‘이론 공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꼭 해 두어야 한다' 며 간식을 챙겨 주고, 그 당시에는 매우 값 나가던 분무용 살층제를 뿌려 모기를 쫒아내 주기 까지 했지요. 정통 작곡대회 우승자이지만 가끔씩 내가 혼자서 즐겨 부르던 샹송이나 재즈를 부르게 하고서, 황홀경에 빠질 만큼 환상적으로 반주를 해 주었읍니다.
이런 그의 신선한 음악 작업들은, 후일 우리나라 음악계의 고질적 병폐인 ‘학벌과 계보에 줄서기’에 맞서 싸우다 날개를 다친 그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전남대 작곡과를 졸업한 후, KBS 교향악단의 피아노 주자와 신라호텔의 연주자로 일하게 했고, 지금은 반포 터미널 상가에 작업실을 내어 새로운 스타일의 연주법과 성가 반주법에 관한 책을 많이 내었으며, 서양에서(특별히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와서도 악보 없이는 변변히 반주 한 곡도 못해내는 짝퉁 Pihanist(피하니스트/이 순간 급조해 낸 신조어임/저작권은 당근 김정식에게 있음)들에게 새로운 공부를 시켜 애써 한 공부가 헛되지 않게 도와주고 있어서, 그들이 속한 공동체(교회나 학교) 안에서 정체성을 확보하게 해 주는 참 스승이 될 수 있도록 좋은 밑거름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집에 온 그에게 내 노래들과 몇 편의 연주곡 소품을 들려주었지요. 그 중 '제비꽃이 핀 언덕'이라는 연주곡에 그가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곡은 천주교 원주교구 원동 성당 출신 신학생이었다가 지금은 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혀있는, 여성하(스테파노)의 죽음을 생각다가 떠오른 바이올린 소품곡입니다. 사실은 그의 죽음이라기 보다, ‘그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린 학생들의 알 수 없는 슬픔의 시선’ 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여름 캠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목에 잠시 개울물에 들어갔던 그가 죽을 위험에 처했는데도 평소의 익살을 잃지 않고 ‘헬프 미~!’ 를 연신 외쳐 대었는데, 책임 신부님께서 ‘저 녀석 또 장난친다.’며 내버려 두는 바람에 그 길로 하늘길을 갔습니다. 그 후 꼬마학사님을 그토록 좋아하며 따르던 어린 학생들은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 매주 수십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다음 주에는 꼭 성당에 나타나셔야 된다’ 고... 이 아름답도록 슬픈 얘기가 담긴 3분 정도의 짦은 곡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피아노로 쳐 보던 그가 웃으며,
“이렇게 깔끔하고 심플한 곡이 바그너나 부르크너 손에 가면 딱 네 시간 짜리가 될거야. 전개 발전 절정을 거치고 때로 반복과 변주에다 돌림까지 해서, 소나타나 변주곡이 되기도 하고 실내악곡이나 협주곡 마침내 심포니까지... 네 시간으로 부족할 수도 있을걸?. 하하하.”
이토록 간이 크고 호탕한 그가, 그 당시 비록 낙방(광주 음악인들은 서울 세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믿고 있음)했지만, 지방에서 서울대 작곡과에 지망한 사람이 교수들에게 레슨 한 번 안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광주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왜 나에게 다가온 거예요?”
“언젠가 음악실 앞을 지나다가 네가 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었는데, 그 테마의 끝 부분이 계속 ‘미도시라' 되어 있다가 맨 마지막에 딱 한 번 ‘레도시라'로 되어 있어. 그런데 지금까지 그 곳을 그렇게 맞게 친 사람을 첨 보았거든. 음반으로 녹음된 연주에도 그런 실수가 발견되기도 해. 그래서 나는 너를 알아 보았어.”
사실 그도 집에서 늘 피아노를 가지고 혼자 놀았었나 봅니다.
“근데요. 사실은 제가 악보를 잘 못 보거든요. 저는 단지 다른 이의 연주를 듣고 악보를 참고 삼아 외워서 치는 거예요.”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정확하게 듣는 거. 그리고 정확하게 연주하는 거. 그 한 음이 그 음악의 전체를 표현해 줄 수도 있거든.”
이 얘기를 듣고 난 후 오늘 날까지, 저는 어떤 연주든지 끝까지 듣지 않고 일어서지 않으며, 심지어 영화를 보고나서도 모든 사람들이 다 나간 후까지 혼자 앉아서 나머지 음악과 자막에 뜨는 이름들을 살펴봅니다. 그것까지를 포함하여 그 영화는 완성 되었을테니까요.
저의 PARIS 생활에서 파리음악원을 빼 놓을 수 없지요.
Conservatoire de Nationale Superior Musique de Paris(국립파리고등음악학교)
너무 길어서 CNSP 라고 표기하고 부르는 단연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 제가 다녀온 이후로는 모르겠지만 그 전까지는 한국학생이 한 번도 졸업을 못했고, 유일하게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뻔 했던 성악전공 학생 한 사람이 모스크바 여행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한국 학생들이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서로 음악교육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재능이 있건 없건 무조건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을 주입식으로 시켜댐으로써, 재능이 없는 사람도 떠 밀려서 음대와 유학을 다녀온 다음 전문인이나 교수가 되어 있고, 오히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그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반면, 유럽 전체의 분위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불란서에서 만큼은, 재능이 확인되지 않는 어린이에게 음악교육을 시키는 일은 상식 밖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재능이 확인된 학생은 주변의 모든 음악인들이 공을 들여, 그 재능이 반드시 꽃을 피우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지요. 레슨비 또한 매우 저렴하여 가르치겠다고 결정만 되면(이 결정이 그야말로 결정적이지만) 아무리 훌륭한 대가 선생님도 한 번 레슨에 그 당시 우리 돈으로 3만원을 넘지 않았습니다. 하기야 사회보장이 잘 된 그 나라에서 ‘돈맛’이란 우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를테지만요. 돈을 쓰고 남아도 걱정인 게 은행에 예금을 하면 이자는 커녕 보관료를 내야 한다니까요. 그 레슨비도 내기 어려우면 동네마다 국립학원같은 것이 있어서(결코 사설은 아님) 형편에 맞게 조금 내거나 아예 안 내고도 얼마든지 레슨을 받을 수 있지요. 그래서 불란서에서는 음대를 나왔다고 해서 성악가라든가 Pianist 라고 말하는 것은 Nonsex(역주:실수로 잘못썼슴. 넌센스라고 발음함)가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들은 곧 바로 Specialist(대가)를 연상하니까요. 음악가에 대한 그런 사회 통념이 우리의 그것과는 너무 달라서, 한국에서 뛰어난(때로 빼어난) 성적으로 최고학부를 졸업한 후 유학간 사람들이, 입학 오디션에서 대부분 너무 개성없고 기계적인 연주를 하다가 고배를...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나이 제한이 엄격해서, 우리 한국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거나 고교 2학년 쯤 되어야 하는데, 그 나이 쯤에는 한국적인 교육 풍토와 잣대로 훈련된 학생들의 음악적인 완성도가 매우 낮고, 파리에서 유학한다는 것이 한국의 음악계보에 비추어 이롭지 않을 뿐 아니라, 언어 또한 벽이 높아서 대부분은 엄두를 못 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가지 상황에 비추어 이로운 점이 많고, 쉽고 넓은 길인 미국행을 선택하거나, 굳이 파리라면 나이제한이 없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간단한 오디션 후 대부분 입학이 허가되는 Ecole Normale 로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어쨌든 저는 초청학생 자격이니 그런 제한사항과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꿈에서도 그려보지 않은(몰라서 그릴 수도 없었던) 파리음악원의 조건부 단기초청 유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레고리안과 지휘법 그리고 라틴어, 이렇게 3과목을 2학기에 걸쳐 공부하는데, 그 학교 편제에서는 교양 선택과목에 해당되어 있어서, 파리음악원에 다니는 학생들 중 이 과목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수강신청을 하여 우리(한국과 리투아니아에서 초청된 다섯 사람)와 함께 수업을 받는 것입니다.
세계 각처에서 영재들이 모여 있지만, 그래도 불란서, 그 중에서도 Paris세가 강한 이 학교 학생들 중에는 학점을 따기가 쉬워서 온 학생은 없는 것 같고, 대부분은 ‘그레고리안의 참 맛과 향기를 아는 것이 자신의 음악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읍니다. 가끔씩 소풍을 가거나(물론 이럴 때도 말이 소풍이지 근처 수도원으로 그레고리안 견학을 가는 것임) 학내에서 그레고리안 콘서트가 있을 때면 자주 만나게 되고 많은 대화를 나눈 결과로 얻은 결론인데, 그들은 하나같이 ‘이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쉽지않고, 가끔씩은 시험에 떨어져서 학점을 따는 것은 실패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좋으면 선택을 하고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있을 때는 40~50명이나 되었으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수업은 요일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르지만, 본관의 오래된 건물에서 하거나 전체 연습이 필요하면 연주 홀에서 하고, 가끔씩은 ‘가브리엘 포레의 방'에서 하게 됩니다. 이 건물들에서 풍기는 인상 또한 음악적 감흥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건물들의 조화가 제 감각으로는 완벽에 가깝습니다. 하긴 Paris 시내에서는 이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건물도 자기 맘대로 지을 수 없고, 외벽 색깔이나 밖으로 보이는 커튼의 색깔 조차 제한을 받습니다. 그래서 도시 전체의 분위기를 항상 같은 느낌으로(그것이 꼭 다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유지하는 것이지요.
언젠가 도심 한 복판인 몽빠르나스에 Paris에서는 최고로 높은, 말하자면 서울의 남산 Tower 같은 건물을 시에서 짓기로 했는데, 도시 경관을 해친다고 너무 반대가 심하여 투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어디에나 꼭 한 쪽 사람들만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투표에서 이겨 짓기로 결정되었고, 마침내 엄청난 건물이 들어섰는데, 찬성과 반대를 한 쌍방 모두의 합의하에 ‘이 건물을 끝으로 다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명문화 해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연주 홀에서는 거의 매일 학생들의 Concert가 있는데, 그 수준이 가히 놀라울 정도의 절정입니다. 어느 날 이곳에서 학내 미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Gymnopedie를 듣고 울어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Eric Satie.
그는 불란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드넒은 모로코 땅과도 안 바꾼다'고 했을만큼 그들의 자랑이고 긍지입니다. Satie 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가히 편집증적이어서, 종종 동네 카페에서도 막일을 끝내고 돌아온 이들이 앉아 그의 음악을 들으며, 함께 서로의 감흥을 나누고 그의 비보편적인 음악여정을 얘기합니다. ‘피아노를 기가 막히게 잘 친다’는 것 말고는 한 번도 작곡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는 그가 Gymnopedie 세 곡으로 명성을 얻어, 마침내 Ecole Normale로 가서 '화성법''대위법'등 작곡기법을 공부한 이후 한 곡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의 음악은 여전히 프랑스 사람들에게 자존심과 함께 남아있고 우리에게도 전설같은 감동을 줍니다. 아마도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제 좁은 소견으로 피력하건데,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의 가교 역할을 해 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가브리엘 포레의 방’에서의 수업도 오래도록 진한 인상을 남기고 있지요.
친구따라 강남 간다더니, 저 또한 고승익 형을 따라 가끔씩 에꼴노말 음악학교에 가서 교수님의 허락을 얻고 수업에 참관하게 되었습니다. 전체 학생은 8명인데 불란서 사람이 넷이고 나머지가 이방인입니다. 수업방식은 한 주일 동안 진행된 한 사람 한 사람 마다의 곡을 함께 얘기하고, 선생님께서 도움말을(지시나 지적이 아닌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것) 하시는 겁니다. 대부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만큼 천재들이고 모두가 수업에 깊은 흥미를 보입니다. 그 중 딱 한 사람, 그리스에서 왔다는 매력적인 아가씨를 빼면요.
그녀는 영화음악을 하겠다는 학생인데, 그녀가 써온 곡들을 듣고 있으면 우리나라 포크 가요의 반주부분을 아르페지오로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들으면 유치하기까지 한 이런 작품에도, 교수님은 똑 같은 애정과 열정으로 지도를 해 주십니다. 그 사람이 선택한 곡의 장르와 그 사람의 음악적 소양과 재능에 꼭 맞게...
이 분이 바로 그 유명한 작곡가 Merler. (액센트 표시를 못 했지만 ‘메흘레' 라고 발음합니다).
불란서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음악가 Ravel 도 못 받았다는 로마대상을 받은 분이시지요. 19세기 말 부터 프랑스 최고 작곡가에게 주는, 로마에서 유학할 수 있는 일종의 스칼라쉽 같은...(요즘에도 프랑스의 작곡가들이 로마로 유학을 가는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작곡가에게는 최고의 영예가 되는 상으로서, ‘환상교항곡'을 작곡한 베를리오즈도 이 상을 받았었지요.
이 분은 보고있는 것 만으로도 공부가 됩니다. 음악적인 예지 뿐 아니라 인격, 그리고 학생을 대하는 선생의 태도, 이 모든 것에 A+ 아니 알파 제곱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 분도 수업 후에 따로 받는 레슨비는 250~300프랑(당시 우리돈으로 3만원 정도)을 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이하로 내는것은 언제든지 허락 되지만, 멋 모르고 더 많이 낸 학생은 다음 레슨 때, ‘지난 번에 돈을 잘못 넣은 것 같다’ 고 웃으며 보이는 그들 특유의 머쓱한 제스쳐와 함께 정확히 돌려받게 됩니다. 아마도 이분의 작품이 여러 개 CD로 나와 있고, 그 중 몇 개를 들어 보았는데, 작품은 더 말 할 나위없이 훌륭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어서 사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수업을 청강하면서(청강생은 그저 청강생으로 참관할 뿐 수업 자체를 할 수는 없음)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중 매우 뛰어나 보이는 18~21세 가량의 불란서 학생들 작품들의 진행을 수업을 통해 들으며,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어떤 알 수 없는 느낌이 꿈틀거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써 가고 있는 곡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선생님과의 수업 중에 오가는 대화를 통해 짐작할 때 확실히 천재들인 것 같은데, 그들의 곡 진행 흐름을 제가 미리 짐작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에 따른 교수님의 생각 또한 저와 꼭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지요.
그제서야, 나이 서른 다섯이 되어서야, 저는 제 안에 잠재된 어떤 종류의 음악감각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나 보다 훨씬 어리고 번뜩이는 재능을 닦고 있는 그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무릇 재능이란 비교의 개념이 아니겠지만요. 그 때 까지 저는 그저 머릿 속에 떠오르는 음악만을 붙잡고 있었을 뿐, 사실은 아무런 음악작업이나 행위도 한 적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보잘 것 없으나마 ‘음악 공부도 안 한 사람이 쓴 작품’이라고 칭찬을 할 때면 늘 부담스러웠고, 다른 사람이 나를 ‘작곡하는 사람’이라 소개하면 특유에 결벽증이 발동하여 애써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냥 떠오르는 곡을 적은 것일 뿐, 작곡가는 아니다’ 라고, 그 말이 그 말인 것을 알면서도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았었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표현의 법을 익히지 못했을 뿐 틀림없는 작곡가이고 예술창작인이라는 자각.
그 때 이후로 저를 소개할 때 마다 저는 거리낌없이 ‘가수 겸 작곡가(Singer & Song writer)'라고 말했고 스스로도 그리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때부터 곡이 떠오르는 일이 잘, 아니 자주 안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33곡을 쓴 일이 있으며, 박달재를 넘어오는 버스 속에서 <가톨릭생활성가회>에서 출반한 <김정식 로제리오 생활성가 8집 -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부르는 노래> 20곡을 한꺼번에 쓴 일이 있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이제 그런 일은 더 이상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말 안다는게 무엇인지?
물론 저는 그 때나 그 전이나 그 이후나 곡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 본 적이 없어서 하나도 안타까울 일도 아니고, 이미 써 놓은 곡이 제 능력으로는 관리하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따져 보더라도 ‘만든 노래의 60~70%가 음반으로 녹음되어 세상에 전해졌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미 ‘전설'이 아닐까 생각하지요. 물론 저와 함께 음악작업을 했던 <가톨릭 생활성가회> 도반들의 아름다운 도움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분들께 신의 축복은 물론 저의 축복도 드리고 싶네요. 뒤엣 것은 받아 주실라나?
언젠가 포항의 어느 성당에서 ‘제 음악을 사랑하신다’는 신부님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몇 해전, 아직은 이른 65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의 별이 되신 박병해 신부님이시지요. 그 분은 마지막 사목을 대구 계산동에서 하셨지만, 오랜 시간을 신학교에서 교수로 계셨고, 제가 알기로 초대교회의 어떤 자료를 번역하셔서 우리 한국교회사에 족적을 남긴 분이신데,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간이 나빠지신 것이 화근이 되었읍니다.
초청행사를 마치고 교우가 운영하는 구룡포 자연산 횟집에 가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로제리오는 주로 어떤 때 곡을 쓰느냐?” 고 물으십니다.
“특별하게 때가 있는 것이 아니구요. 그러니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 떤 음악이 순식간에 제 머릿 속을 지나가는데, 아마 한 3초 쯤 되는 것 같아요. 가끔씩 다른 이의 시를 보다가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게 어떤 작용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만든 <예수 내 작은 기쁨>이라는 노래의 경우, 3절 까지로 되어있는 가사를 읽는 것만 해도 적어도 2분은 걸 릴 것 같은데, 가사 뿐 아니라 선율, 화성이나 악기 편성까지 순식간에 함께 지나갔고, 그렇게 지나간 후로는 바로 입력되어 지워지지 않거든요. 제가 시인도 아닌데 그런 가사를 다듬을 겨를도 없이 어떻게 순식간에 음악과 함께 어우러져 지나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껄껄껄 웃으시면서,
“3초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천만분의 1초야. 그리고 내가 한 공부 중에 <아우구스티노의 예술 창작론>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예술창작은
신의 ‘계시(Revelution)’가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인간의 ‘감흥(Inspiration)’이 있어야 하며,
이 두 가지가 예술창작인의 내면에서 어우러져 ‘내적 조망(illumination)’ 이 이루어질 때 찰나적으로 창작이 이루어진다는 거야. 그러니까 천만분의 1초 보다 더 짧은 찰나일 수도 있지.”
제가 그 때 까지 들었던 어떤 설명 보다도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 2004년 어느 날,
잠원 성당에서 초청한 '에덴합창단' 성음악미사를 만났습니다. 처음 제게 감지된 것은 에덴합창단의 소리가 아니라 지휘자의 눈빛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한 사람을 오래도록 속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한순간에 잠깐 속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을 오래도록 속이기는 어렵다’
지금 이 말이 적당하게 떠오른 것인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 때 제 느낌이 에덴의 지휘자 시몽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남아있을 흔치않은 분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도 제가 에덴의 가족이 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는데, 우연히 게시판에서 ‘에덴 시민 모집 광고’ 를 보게 되었고, 가슴에 차 오르는 출렁임을 느껴 신청을 하고, 절차에 따라 오디션을 하였고, 드디어 테너 파트의 신입단원이 되는 영광이 제게 찾아 왔읍니다.
그 당시 이미 계획된 제 국내외 초청 일정과, 가끔씩 CGD로 인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Pain & Fever shock 로 욕심껏 연습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그간의 연습과 레슨을 통해 확실한 ‘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안다는 게 무엇이지?’ 는 또렷이 알게 되었다는 거지요.
아는 것은 어떤 것이며, 알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내 노력이 아니라 그분께서 무조건적으로 주신 달란트로 알게 된 것이라면,그것을 어디에 어떤 방법으로 써야 되는지...
이제 얼마 안 된 신입단원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에덴 가족 중 가장 큰 행운을 얻은 사람은 바로 저일 겁니다. 제 스스로야 겸손한 척 하고 부족함을 늘 입버릇처럼 말해도, 이미 공인이 되어있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책임 또한 소명처럼 되어있는 제가, 언제 어디에서 음악의 구루(스승)를 만날 수 있겠으며, 누가 저의 그릇된 노래 습관을 바로잡아 줄 수 있겠는지요. 저 또한 대학 시절 대규모 합창단의 지휘를 맡아 보았고 성가대의 지휘도 해 보았지만, 에덴에서의 경험은 실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씩 제가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이라는 그림을 바라보듯이, 지휘자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실제로도 외모를 비롯하여 닮은 점이 많구요.
선생님의 ‘아는 것의 참 나눔' 에 힘 입어,
비로소 참된 음과 거짓음, 진짜 음과 가짜 음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분은 그것을 알게되니 다른 노래나 음악을 듣기가 괴롭다고 하시는데, 저는 아직 그런 경지는 아니어선지 전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음들을 구별하여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신비를 넘어서 기적으로까지 느껴지거든요. 저는 가끔 선배 단원들에게 자신있게 말합니다. 끝까지 ‘신입단원'으로 남아 있더라도 선생님과 음악 공부만 할 수 있다면 기쁨이고, 에덴에서의 제 목표는 파트장이나 단무장이 아니라 바로 ‘지휘자' 라구요. 이 말은 지휘자가 될 만큼 실력을 갖추겠다는 뜻이 아니라, 제가 만약 에덴을 떠난다면 지휘자 선생님보다 먼저가 아니라 다음이 될 거라는 것이지요.
다시 한 번 제 음악여정을 되돌아 봅니다.
가장 늦게 '에덴합창단'의 단원으로 시몽 샘을 만났지만, 제 삶의 음악여정 곳곳에 그분은 함께 있었읍니다.
어린 날 저와 함께 했던 자연과 몇 개의 악기들 속에,
밖으로 잠겨져 혼자 남겨졌었던 음악실 안에,
저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음악을 꺼내게 도와준 스토커 선배 안에,
PARIS 에서 제게 참음악을 들려준 여러 음악인들 안에,
자신의 음악만을 고집하지 않고 절대를 일깨워 주시던 참된 음악인 메흘 레교수 안에,
내 심장을 파고들 듯 예리했던 메시앙의 눈빛 안에,
‘아무것도 모르면 모든 것을 아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지요.
저는 음악에 대해서라면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았지만, 자연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처럼, 지름길로가 아니라 좁고 험한 길일지라도 올바른 길로만 가도록 나를 이끌었다면, 마침내는 ‘참된 스승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시몽 선생님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소리를 확실하게 내지 않으면 한 번도 안 틀리겠지만, 한 번도 안 맞는 거 지요.'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바른 소리를 얻습니다'
무조로 음악을 썼다하여 투옥되기 까지 했다는 구 소련의 가톨릭 음악가 쇼스타코비치가 평생을 감옥에서조차 빼지 않고 드렸던 기도 내용은 이러했읍니다.
“주님. 바뀔 수 없는 것은 제가 받아들이게 해 주시고,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은 바뀌게 해 주소서.
다만 이 두 가지를 잘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제게 주소서"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중)
깊은 감동을 주는 내용입니다.
오늘 날 현대를 살아가는 음악가들이 조성음악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무조음악을 쓰고 있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아름다운 기도와 이름 없는 슬픔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시몽 선생님 곁에서 그분의 아름다운 기도와 이름없는 슬픔을 함께 기억하고 싶습니다.
(2005. 3. 11 )
김정식 곡 La larme(눈물) 눈물2.4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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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로제 오빠의 음악 일생이 녹아 있네요. 세느강변의 라디오 프랑스, 몽빠르나스... 빠리 정경이 스쳐갑니다. 하느님께서 참 귀하신 싱어송라이터, 오빠를 보내주심에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