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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갑자 정유년에 420년 된 백의종군길을 걸으며 길을 생각하다.
1597- 정유년이 7회전한 2017-정유년이 11일 남은 12월 20일,
아침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단성교를 건넜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수정한 정유 일정을 연내에 소화하기 위해 원지로 다시 내려갔으니까.
7회전 전의 정유년의 일을 420년 후의 정유년에 마감하려는 의지의 실현이다.
다음 정유년을 맞으려면 기다려야 하는 세월이 60년이다.
내 나이에 그 10분의 1인 6년도 아득하거늘 가능한 일인가.
강누리, 경호강 건너 백마산, 적벽산과 눈 맞추고 단성면사무소에 들렀다.
딱히 볼 일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걸음이 절로 그랬다.
9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단성면청 직원들의 가식없는 호의가 정녕 그리움으로 남아있었는가.
알아보는 이 비록 없어도 분위기는 옛 그대로 훈훈하게 느껴졌다.
8도를 통털어, 한반도 남반부 어딜 가나 변화 무쌍의 으뜸은 길이다.
세계를 삳대로 자웅을 결할 만큼 최상위 수준인 우리의 토건(土木 建築) 기술력은 하룻밤 새
에도 새 길을 탄생시길 정도니까.
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 만큼이나 길 따라 인심도 달라지고 있다.
세월의 속도가 나이에 비례한다고 하는데 인심의 냉각 속도는 도로의 속도에 따른다 할까.
섬 토착민들이 연육교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가설을 반대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닌가.
이곳 신안과 단성지역도 사통팔달에 서울과의 왕래가 3시간으로 단축되었지만 긍정적 효과
보다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면 대처할 방안이 있는가.
소달구지가 다닐 수 있으면 훌륭한 길이었던 시절에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신장로(新作路의
발음)가 생기면 경사였다.
훗날 최초의 국도가 되었지만 넓고 바른 새 길이 생김으로서 그 길은 지방도로 강등되었다.
이 신국도는 더 넓고 더 빠른 고속도로의 등장으로 차량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다
하급도로를 이용하던 차들이 격상을 거듭하여 하이웨이를 총알같이 달리기 때문에 하급길은
쓸쓸할 만큼 한가로워질 수 밖에.
길가의 가게들은 졸음을 쫓아내느라 심술이 났는지 뭘 물어도 퉁명스러웠다.
예전에, 좁은 길을 헤쳐나가는 차량들로 몸살날 지경이었을 때 소도시 마을들이 플래카드를
걸고 데모를 하던 때가 있었다.
차량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우회도로를 만들어 달라고.
표를 먹고 사는 선출직 관원들이 공약을 하고 민원을 해결했다.
얼마쯤 세월이 간 후 같은 장소에 다시 플래카드가 걸리고 데모가 일어났다.
이번에는 우회로를 철폐하라는 것.
상권이 죽어버린 것이다.
차량들이 쏜살같이 달아나고 북적대던 마을길이 한가로워졌으니 자승자박한 것이다.
단성길을 걸을 때 9년전과 대조되는 현상이었다.
요즘의 국도에는 자동차전용구간이라는 고속도로 형태의 무료주행구간이 있다.
보행자보다 차량 위주 도로정책의 산물이다.
보행자의 권리는 날로 더 위축되어 마침내 보행권은 소멸되고 말 것 아닌지.
문익점의 면화시배유지를 비롯해 이 지역 출신이며 이 시대의 고승으로 인정받고 있는 성철
스님 안내 표지판이 괄시받고 한가로이 걸을 수 있었던 20번국도는 자락길로 전락했다.
넓고 직선화 되고 고속도로에 버금가며 일부 구간에서는 보행자를 얼씬도 못하게 하는 새 20
번국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단성길을 걸으며 겪고 생각해 본 길(道路)에 대한 단상이다
(백마산/위)과 (단성교/아래)
단성면사무소(위)와 단성전통시장(아래)
목면시배유지도 예전 같지 않은 듯 하다.
관광 취향이 변했나 관광버스는 여전히 달리는데 사람이 뜸하다.
어엿하던 20번국도가 지저분한 골목길로 전락했어도(위) 겨우살이 준비는 철저히?(아래)
커브 비탈길에 결빙 방지 포장중이란다. 서울에서도 보기는 커녕 들어보지도 못한 포장공사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
솔고개를 넘었다.
높지는 않지만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고개다.
2009년 3월 어느날, 나는 진주와 산청을 잇는 대관교로 남강을 건넌 후 잠시 고심했었다.
"소남리~새들교~솔고개~20번국도" 길과 "관정리~남사리(예담촌)~20번국도 따라 솔고개를
넘는" 길중 택일하는 문제로.
결국 전자를 택해서 단성현 일대를 살핀 후 다음날 성심원~웅석봉~청계제~단속사지~다물
학교~입석리~남사예담촌을 거침으로서 이학근과의 만남도 이뤄진 것이다.
솔이 울창해서 솔고개(松峴)라 했다는 고개를 넘어 작은 마을 도평을 지났다.
직선화 된 새 20번국도로 인해 난쟁이가 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정녕 내로라하며 목에 힘이 들어가 있는 사람이 살지 않나 보다.
자투리가 된 옛길가에 허리에 금줄을 두르고 있으며 나이를 꽤 자셨을 법한 당산나무가 아무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있으니.
힘 있는 사람, 소위 유지에게는 전설 하나 꾸며서 보호수 만드는 것이 일도 아닐텐데.
남사천(남사교)을 건너 남사삼거리에서 아침겸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 '남사별곡'으로 갔다.
전에, 대관교(옛 소남나루) 건너 산청땅에 들어서자마자 고심했던 관정리 ~ 남사예담촌길의
이쪽 끝이 되는 위치다.
새벽 5시반에 서울 집을 나와 하는 첫 식사다.
메뉴나 맛을 가릴 여지가 없는 식사.
시장이 반찬이라잖은가.
한갓진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려 하는데 상거가 있는 저쪽에서 식사를 막 시작한 듯한 남(男)
이 나를 주시한다는 느낌이 왔다.
괴이쩍기는 해도 무시하려 하는데 나를 향해 달려오려는 듯 일어서는 그.
이럴 수가.
달아랑마을(안봉리) 이학근이다.
알리지 않은 것은 그의 시간을 뺏는 일이 될까 저어되었기 때문이다.
전번 둘째 날, 그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하고 들어간 모텔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신은 편했지만 전날의 황토방에서 맛본 포근함이 그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살며시 다녀간 후 알리려는 생각이었는데 들키고 말았으니....
독실한 보살 수선혜의 당위론은 "만나야 할 사람은 결국,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해 겨울, 울진 거주의 그녀와의 해후가 한라산 종주중에 이뤄진 후 한 말인데.
과연 그런가.
저번에 차 운전 때문에 나와 함께 걷지 못했던 그 산길을 걸은 후 식사하러 들어왔다는 그와
전번에 빠뜨릴 수 밖에 없었던 남은 길을 걷기 위해 식사하러 들어온 나의 만남이.
건성으로나마 예담촌을 일별한 후 나는 옥종 길에 들어서야 했다.
금만마을로 가야 하는(차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와 방향은 같으나 선호하는 길이 달라서
헤어져야 하는데 동행하기 위해 그가 양보했다.
우리는 고개를 거듭 넘고 돌고 도는 국도20번을 따라 칠정, 창촌리 입구로 갔다.
백의종군은 오로지 칠천량전투의 참패로 인해 침통과 좌절의 늪에 빠져있는 민초들을 위무
하고 왜구를 물리칠 방안을 찾기 위한 현지 답사다.
그러므로 산간보다는 취락지역을 거치며 많은 거민을 만나보는 것이 당연한데 기록이 없기
때문에 목적에 더 근사하다고 판단되는 시도를 해보려는 것이다.
내가 한번 걸은 산길을 버리고 도로를 택한 이유다.
창촌리 분기점에서 양 다리에 한꺼번에 쥐가 나는 불상사가 있었다.
여러날의 휴면상태를 벗어나는 과정이므로 조심하라는 경고?
동행한 이학근의 도움이 있었기 망정이지 혼자였다면 몹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금만마을(단성면 창촌리)~진배미(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간은 '제2코스 좌절의 길'이란다.
제1코스를 고난의 길이라고 정의했으면 다음코스는 희망적이어야 하지 않나.
진배미는 군졸들의 훈련장이었으니까 더욱.
도원수가 보낸 자들이 말도 활과 화살도 없는 맨몸들이라고 개탄하면서도(出于川邊點軍馳馬
則元帥所送 皆無馬又無弓箭無用矣 可歎可歎)훈련에 돌입했다면 희망적인데.
금만마을 입구를 지났는데도 이학근은 함께 걷기를 계속했다.
아들의 등.하교 교통을 책임지고 있는데 아직 여유가 있다는 것.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농어촌버스가 산골, 궁촌 벽지까지 다니고 학령기 아동 감소로 학교가
통,폐합한 지역에는 스쿨(노랑)버스가 투입되고 있지만 사각지대는 여전히 남아있단다.
솔고개(위)와 도평마을 당산나무(아래)
산청의 이학근과 서울의 내가 장소 불문, 우연히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쯤 될까.
특정 장소로 제한하면 가능성이 얼마나 멀어질까.
오랜 세월 뜸들이다가 9년 세월이 지난, 2017년 11월 22일에 재회하였지만 그것은 약속이라는
인위적 절차를 밟아서 가능했다.
하지만, 굳이 개연성을 들면 이순신의 백의종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막연한 공통점 외에 계기가
될 만한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절로 만난다면 기적에 다름아닌 우연으로 규정할 수 밖에 없잖은가.
어느 분은 필연론을 펴고 있지만.
이순신의 결벽증인가?
공인된 백의종군로는 손경례의 집이 있는 원계리(진주시 수곡면)에서 문암교(덕천강)를 건너
하동의 옥종으로 가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나는 당산리(단성면)에서 두양교를 건넜다.
단성면과 수곡면의 즐비한 딸기하우스들과 달리 옥종쪽은 다목적 캠팽장이 다리 주변에 분포
되어 있어서 조금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내가 택한 길이 거리는 약간 길지만 정유일기대로 따르면 옥종~수곡 간의 왕복중 한 편도를
달리 함으로서 각기 다른 체험을 하는 것이므로 손해보는 것이 아니다.
두양교 다리 앞에서 홀로가 된 나는 한가로운 1005번 지방도를 마음껏 활용했다.
덕천강 양안이 번뜩이는 은빛 또는 칠흑 딸기하우스 일색이다.
차량도 대부분이 근거리 왕래용 소형 트럭이다.
차증에서 자유로워 이런저런 생각을 편히 하면서 걸을 수 있었으니까.
창촌리 입구에서 1차 경고(쥐)를 받았지만 퇴근시간 전에 면청에 당도하느라 많이 무리했다.
곤양과 곤명을 당일로 완주하려면 새벽같이 옥종을 떠나야 한다.
그러려면 옥종에서 볼일을 오늘 다 완료해야 하기 때문이었는데 다행히도 뒷탈이 없다.
내 바람이란 이순신이 백의종군 왕복길에 묵은 집을 방문하는 것인데 이를 간파한 면사무소
직원은 복수로 가담하여 찾아가기 쉽도록 위성사진을 뽑아 설명하는 등 성의를 다했다
지도 보다 입체적인 위성사진의 효과가 월등한 것은 까미노에서 무수히 확증된 사실이다.
이순신에 대한 면청직원들의 관심도는 대별하면 2부류로, 세분하면 3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
예외가 있겠지만 면장을 위시해서 나이든 몇 간부는 대개 알고 젊은이는 모른다.
청년층 중에서도 비록 소수지만 관심을 가진 일부는 나이든 무관심자 못지 않게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이든 이와 젊은 이로 대별하고, 두부류 사이에 나이든 무관심자와 관심있는 젊은
이를 한 부류로 하면 3부류가 된다.
7월 19일에 단성현청에서 1박한 이순신은 다음날 옥종에 도착하여 "굴동의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晉牧來見宿于屈洞李希萬家)
원본에는 "진주목사가 찾아와서 보고 잤다"고 완료하였는데 다음날 일기를 기록한 후 어느때
였는지는 모르지만 좁은 행간에 '굴동 이희만의 집'(屈洞李希萬家)을 추기했다.
누구의 집인가를 밝힌 까닭은?
그보다, 이순신의 민폐에 대한 경계심은 가히 결벽증이라고 할 정도였다.
고을 사람에게서 밥을 얻어먹었다는 종들을 매로 다스리고 밥쌀을 도로 주었다.
빈 관사에 머물 때도 고을 심부름꾼이 밥해 먹으라고 했으나 그러지 말라고 종들을 타일렀고
모르는 민가에서 잠자지 않았는데 생면부지의 이희만, 이홍훈 집에서는 5박이나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좁은 행간에 깨알같이 추기했다.
민폐의 기준이 무엇이며 어디에?
아무튼, 이날 이순신은 문암교 옆에 자리한 강정(午到晉州鼎盖山城下江亭)을 거쳐서 옥종의
이희만 집에 당도했으므로 그가 걸은 길과 다른 길을 내가 걸은 것만은 분명하다.
소위 고난의 길과 좌절의 길은 이미 걸었으니까 수곡에서 옥종으로 오는 길에 한해서.
면청 젊은 직원들의 도움 덕에 상촌마을(청룡리)의 이희만가(家)를 어둡기 전에 찾아갔다.
마을 거민들이 이희만의 집은 모른다.
'초가집'으로 통할 뿐.
초가 몇채가 잘 관리되고 있다.
방문객을 위한 화장실까지 초가로 증축했다.
한데 이 집들은 이순신이 7월 20일(시찰길)과 23일(귀로)에 묵었던 이희만의집(李希萬家)이
아니고 7월 24일~26일, 3박한 이홍훈(李弘勛)의 집이라고 안내판은 말하고 있다.
이희만의 집 위치는 애매하단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된 전말을 부언하면,
임진해전에서 연전연패한 후 정유재침을 기획한 일본군은 이순신이 버티고 있는 한 승산이
없다고 보고 이순신 제거 작업을 폈다.
허위 정보를 보내는 사간계(死間計/손자병법)라 할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인 가케하시 시치다유(梯七太夫/要時羅/要矢羅)로 알려진
이중첩자가 경상우병사(金應瑞)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
가토 기요마사(
1597 - 정유년 6월 1일, 이순신은 훗날 박호원의 재실(齋室)이며 경남도문화재자료 제328호가 된
박호원농노가에서 일박했다.(朴好元農奴家/위,아래)
그러나 잠자는 방이 좋지 못하여 겨우겨우 밤을 지냈다(而宿處不佳 艱難過夜/丁酉日記6월1일)
이순신의 품성이 읽혀지는 대목인데 이 일기로 인하여 대사헌과 호조판서를 지낸 정이품 고관이
농노(박호원이라는 농사짓는 종)로 추락했다.
이순신연구 권위자라는 분의 번역 실수지만 빌미의 제공자는 이순신이니까.
그의 일기를 찬찬히 보면 호불호가 분명하며 벼슬이 있는 사람은 고하간에 직함을 적었는데 자기
시대(1527~1584)의 고관이었던 사람인데도 왜 거두절미하고 그랬는지(朴好元農奴家라고).
선조때, 54세에 호조판서, 이듬해에 좌참찬을 지낸 너그러운 인품이었다는데 왜 무시했을까.
이사재-유숙지 글에는 "이지역의 유력한 집안인 박호원의 내력을 알고 이곳에서 유숙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는데 추측이라 해서 아무렇게 짐작해도 되는가.
이추측자는 이순신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임의적 추측에 능한 사람인가.
정유일기를 읽었다면 이같은 추측이 나올 리가 없으니까.
여러 대에 걸쳐서 요직에 있었고, 40세에 당상관에 올라 승정원과 의정부의 중직을 두루 거치며
좌참찬까지 지낸 사람의 집이 고작 산청지역의 유력한 집안인가.
어느 집에서 효자가 나면 가문은 물론 온고을의 경사가 되어 정문(旌門)을 세우거나 조정에 품신하여
임금의 정려(旌閭)를 받기도 한다.
여기 정려도 '孝子通德郞李胤玄之閭'와 '孝子 永慕堂 李公 旌閭'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통덕랑은 이조시대의 정오품 문관 벼슬(品階)인데, 궁금하여 이씨의 관직 조회를 했다.
이조18대 현종 11년(1670)에 이곳(단성)에서 통덕랑 이령국(성주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숙종20년
(1694)에 사망했으니 관직에 오를 수 없었겠다.
십대 소년의 몸으로 부친을 보호하기 위해 산적들과 대적하다 입은 상처로 8년만인 25세에 사망했다.
사후 사림의 건의를 받아들인 임금이 그의 효행을 칭찬, 정려를 내렸단다.
도로를 높이느라 담이 거의 묻혀버렸는데 얼마나 더 관리될지.
금전을 비롯해 사소한 일로 형제는 물론 부모까지 해치는 일이 날로 더 흔해가는 세태.
삼강오륜(三綱五倫)이 三江과 五輪으로 풍자되는 세상을 너무 오래 살고 있다는 느낌이니 어쩐다?
웅석봉에서 단속사지를 거쳐 내려와 건넜던 호암교(위) 앞에서 이학근이 내게 양보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전길과 백의종군 중에 넘은 일명 고난의 길인 산길을 다시 넘어 자기 차가
있는 곳으로 가려던 그가 나와 함께 아미랑고개를 넘었으니.
20번국도에서 1005번지방도가 분기하는 칠정삼거리(창촌삼거리)에서 고가의 백의종군로 표석이(위)
길 안내를 하고 있다.
3.9km라면 일명 '고난의 길'의 시종점인 금만마을 입구를 말하는 것이라라.
햇볕을 받아 하얀 덕천강물과 하얀 딸기하우스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아래)
이순신의 백의종군로 중 일명 1코스인 고난의 길(아래)과 2코스 좌절의 길(위)이 나뉘는 지점이다.
좌절의 길은 '군사훈련유적지 진배미'까지.
손경례의 집이 있는 원계리에서 문암교를 건너 옥종(하동)으로 가는 정석(?) 백의종군로를
버리고 1005번도를 따라(위) 두양교(아래)로 덕천강을 건넜다.
이 일대는 왕복해야 하는 길이므로 1차는 비슷한 길도 무방할 듯 해서.
신비스럽게 만난 이학근과도 작별하고.
청룡리(옥종면) 상촌마을(위)의 노인네들까지도 이희만 또는 이흥훈의 집은 모른다.
'초가집'이라고 해야 말길이 열린다.
예전에는 마을 전체가 초가지붕이었을 텐데, 이 집들만 초가로 보존하기 망정이지
함께 개량되었다면 그나마도 모르리라.
이순신의 영정이 담긴 길 안내판이 노상에서 오가는 발길에 밟혀도 모두 무심하다.
현장이며 현실이다.(아래 그림)
불마저 꺼진 시골 공설시장(위)과 사람은 썰물처럼 빠져나갔어도 불이 밝은 면청(아래)이 대조되는 초저녁.
첫댓글 종군길을 다시 익힙니다.
오늘 제주에 폭설이 와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해서 수곡으로 종군길 따라 서포해안으로 걸을까 합니다.
건강하십시요. 이학근드림
애석한 일입니다.
확률 몇%입니까?
저는 36회 중 5회 정도의 게임이었니까 7분의 1, 15%미만이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