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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목사의 목회와 독서 [1]-생애
백주현목사
1. 로이드 존즈의 목회사역들 연혁
1-1 로이드 존즈의 출생과 그 마지막 삶까지
D. M 로이는 존즈는 1899년 12월 20일 웨일즈의 카디프에서 태어 낳습니다. 그리고 1981년 3월 1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먼저 그는 내과 의사로서 수업을 받았고 왕실주치의로서 유명하였던 호오더 경의 조수로서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1년 이상의 소명에 대한 부담감으로 고민하다가 1927년 미래가 보장된 의사의 생활을 마감하고 목회자로 부름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당시에 전 유럽의 신학교에는 자유주의가 신학이 지배하고, 고등비평이 난무함으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거의 신앙의 잃게되는 뻔한 길임을 알고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설교자로 임명을 받아(우리와 약간다름) 아베라본의 센드필드에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신학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초기에 그는 자신의 설교와 사상에서 약간 쏠려 있렀고 그는 자신의 그러한 약점을 알고 많은 독서로서 교정을 하여 나갔습니다.
그리고 1938년 버킹험 게이트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담임목회자인 캠벨 몰간 목사의 동사 목회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3년에서 그 교회 담임 목사가 되어 1968년 8월 은퇴할 때까지 웨스트민스터에서 목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 다음 그는 순회 설교자로서, 저술가로서 남은 생을 주를 위해 섬겼습니다. 1981년 3월 1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1.2 샌드필즈의 특이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가 목회를 시작한 곳은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는 경제 공황기였고 샌드필즈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실직상태에 있었습니다. 샌드필즈 주민 약 90%는 당시 아무런 예배처소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던 1920년대 중반의 웨일즈 지역 목회자들 사이의 신학적인 기류는 더 이상 역사적인 칼빈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옛 낙관주의적인 자유주의였습니다. 그럼으로 신앙이 침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인 칼빈주의에다 메소디스트로 이 곳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임한 즉시 웨일즈의 그 장로교회는 끊임없는 회심을 통하여 성장해 갔습니다. 동네에 악명 높은 사람들과 주정뱅이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그의 아내도 포함됩니다. 그의 사역 맨 처음부터 성령의 예외적인 기름부음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의 영향은 이내 아베라본 동네에만 한정될 수 없었습니다. 1930년 초부터 웨일즈 지역 순회 설교는 정규적인 그의 사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당시 그의 전도 설교를 [전도 설교]라는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11년 반 동안의 그의 사역을 통해서 교회는 93명의 등록교인에서부터 530명의 등록교인으로 성장했고 평균 예배 출석은 850명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통계는 한국 상황에서는 별로 놀라운 것이 못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해마다 기독교의 세력이 눈에 띠게 감소되는 영국 상황에서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영국이라는 특성을 고려하여 본다면 대단한 사역들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사역에 대한 평가로서 로이드 존스는 1930년대 공산주의로부터 남 웨일즈를 지킨 두 사람중 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 이얀 머레이는 이 시기에 로이드 존즈는 "성령의 능력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미친다"는 평생 불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곳의 사역을 마치고 그 곳을 떠나 영국으로 떠나게 될 때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기자가 이러한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왜 로이드 존즈가 떠나기로 결심하였는지? 에 질문에 대하여 이 사람이 "나는 잘 모릅니다.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조금도 그 자신의 생애를 위해서 결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기도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다. 그의 목회에서 그의 설교가 힘이 되었던 것은 이와 같이 그의 청중들이 그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그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바로 목회에 설교와 더불어 인격이 일치되는 통전성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설교자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더불어 그의 인격과 그의 기도가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현대 설교자들이 이러한 부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3 런던의 탁월한 설교자
그의 런던의 사역은 1938년부터 1968년까지 30년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계속됩니다. 2차 대전에는 교회당이 폭탄에 맞아 많은 사람이 모이던 교회당에 150명 정도만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런던이 어려운 시기에 있을 때에 그 교회를 담임하는 새로운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 난 뒤에 약 50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샘이 됩니다. 1951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주일 예배에 약 2500명이 참석하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런던에서 사역하는 동안 줄 곧 주일에는 45분 정도의 설교 두 번과 금요일 밤에는 또 한번 같은 길이의 설교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 설교가 너무 짧다고 느꼈습니다. 여기서도 그의 설교 사역은 런던에만 한정될 수 없었습니다. 주간에는 대영제국 각 곳에 다니면서 설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런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잘 알려진 복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캠벨 몰간의 역사적인 계승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해 설교의 왕자"라는 그의 칭호를 계승한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독특한 설교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성경 한 책에 대한 연속 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베드로후서 강해 설교(지상우 ,CLC)이다. 그리고 21년 동안 계속하여 그와 같은 연속설교를 했습니다. 그 중에 유명한 것이 산상설교(문창수 , 정경사)와 5년에 걸친 에베소서 강해설교, 12년간에 걸친 로마서 강해설교 이다. 이러한 책들을 구하여 반드시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설교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책들이 있습니다.
그는 사역초기부터 1935년경부터 I.V.F 와 관계를 맺었고 후에는 그 총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국제 복음주의 학생 연앵의 의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탁월하게 의장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I.V.F는 그 세력이 확산되었고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적 단체로 알려진 IVF에 건전한 교리적인 뼈대를 제공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그의 탁월한 설교 사역의 결과로서 그는 [웨스트민스터 목회자 모임]을 창설하여 일단의 목회자들과 함께 신학적인, 목회적인 문제들을 토의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강력한 지도력을 통해서 일단의 젊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청교도 및 개혁주의 대회]를 통해 정규적인 토의장을 창출해서 매년12월초에 한 차례씩 모였습니다. 1967년 이후에는 이 모임은 [웨스트민스터 대회]로 이름을 바꾸어 모이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즈는 그 외에 상당한 기구들이 시작되는데 실제적이고도 영향력 있는 역할을 감당해서 [진리의 깃발]( The Banner of Truth Trust) 라는 출판사와 런던 복음주의 도서관과 런던 신학교(L.T.S)가 만들어지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로이드 존즈 목사의 목회와 독서[2] - 영향
2. 로이드 존즈의 신학과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들
그에게 있어서 18세기의 칼빈주의적 감리교도의 부흥에 관한 독서들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18세기의 호웰 헤리스의 책을 13세에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
그에게 또한 영향을 미친 것이 청교도들의 작품들입니다. 그는 1925년에 리차드 백스터의 전기를 읽고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발견하고 청교도주의 극치로 보았다."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그의 사위(프레데렉 캐서우드)에게 언제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도록 권면을 하였습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그러면 무언가 건실하고 깊고 참된 것에 돌아가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사상과 목회를 청교도주의 작품들이 영향을 미치며 통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존 번연, 토마스 굿윈, 존 오웬, 18세기의 설교자들을 사랑하여 그들의 작품들을 읽었습니다. 다니엘 로랜드, 호웰헤리스,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드, 이들의 작품을 탐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9세기의 스펄전과 워필드의 작품들을 읽어 냈고 그리고 라일의 작품들도 탐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932년 워필드의 전집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난 70년간 영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그의 신학에 심취하여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의 초기의 전도 설교를 보면 신학자로서는 볼 수가 없었고 그의 사상과 가르침에 바울적 요소가 빈약했었습니다. 그러나 워필드의 가르침의 필요성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그는 워필드를 통하여 바울이 로이드 존즈의 교사로서 모델이 되었던 것입니다. " 워필드는 개혁신앙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혁 신앙이 다른 어떤 신앙체계보다 탁월한 것임을 입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회를 시작하는 그때부터 신학에 입문하여 계속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는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가 생을 마치는 시기까지도 계속하여 그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목회를 마치었다고 하여 그의 신학연구는 끝이 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신학연구 수업이었습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체계입니다. 우리는 신학교를 마치면 마치 신학을 모두 배운 것으로 여기고 신학 책을 놓고 맙니다. 그리고 마치 다시 신학 책을 다시 잡으면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듯이 합니다. 그럼으로 더 이상 배우지 않고 가르치기에 열심히 하지만 고갈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즈는 배우는데 있어서 계속적으로 배우며 그것을 위하여 오전 시간을 연구하는데 바쳤습니다. 그는 초기에는 불명확한 부분들이 있었으나 신학을 계속적으로 연구함으로 이러한 부분들을 보충하여 간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계속적인 신학에 대한 연구와 성경에 대한 연구로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강해 설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개혁주의 책들을 많이 읽었으나 더 나아가 포시드나 칼 바르트, 에밀 브르너 본 훼퍼, 불트만, 판넨베르그, 키르크, 한스큉의 저작들 까지고 읽어 나갔습니다.
"그는 개혁주의 속한 사람들은 마음과 지성, 믿음과 양심, 경험과 지식, 신비와 이성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야지 절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참된 이성은 거룩한 신비와 분리 될 수 없다." 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신학이나 영성은 병들고 올바른 신앙이 아님을 말함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지도자들이나 신학생들이 제대로 갖추어진 영성과 신학을 마련하여 될 것입니다.
로이드 존즈 목사의 목회와 독서[3] - 설교
3. 로이드 존즈 목회사역에서 설교
이 부분은 이미 여러 강사님들이 언급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잘아는 방법은 그의 목사와 설교를 읽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설교의 위치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영적 침체에 빠지고 메말라 버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설교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설교는 교회의 고유의 임무입니다. "인간의 실질적인 필요를 생각하는 순간, 그리고 성경에서 공개되고 선포되는 구원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에 교회의 기본적인 임무가 이것을 설교하고 인간의 진정한 필요를 보여주며, 그 유일한 해결책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설교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임무임을 그는 말합니다. 개인 상담이나 모든 다른 활동들은 설교를 보충하도록 의도된 것이지 대체되도록 의도된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심방이나 다른 어떤 활동도 설교의 부족을 보상해 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강해이며 말씀의 신실한 강해는 하나님 자신이 설교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하며 강해적이어야 하며 설교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과 통제아래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의 설교를 읽어보면 마치 신학책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즉 이것은 그의 설교마다 신학의 총체적인 진리와 조화를 이루어가는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조직신학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학을 총체적으로 공부하고 음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해적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부분이 하나의 설교가 되고 다음주에 이어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다시 하나의 완전한 체계의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는 항상 성령의 능력과 그의 통제아래서 행해져야만 합니다. 이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자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준비를 마치고 강단을 올라갈 때에 간단한 메모만 한 것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강론을 하는 데 그는 자신이 제대로 설교 한 적이 한번, 두 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에 완전히 지배되어 설교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란 무엇입니까? 불붙는 논리입니다. 웅변적인 이론입니다. 설교는 불타는 신학입니다. 불을 댕기지 못하는 신학은 결함이 있는 신학이요 최소한 그 사람의 이해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라는 것은 속에서 불이 붙은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신학입니다. 진리의 참된 이해와 경험은 여기로 인도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사람이 이러한 진리들을 열정 없이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강단에 올라설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강단에 올라서도록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의 주변에는 메모지가 준비되어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이 주시는 조명에 민감하여 그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언제나 기록하고 그것을 설교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언제나 설교가 메말라 있지 않고 풍성한 설교자이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읽는 일에 대하여 그는 경멸히 여기고 있고 다음주에 설교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설교를 준비하는 것을 설교꾼으로 경멸히 여깁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에 민감하여 성경을 읽는 자세가 필요하고 설교는 언제나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설교는 해서는 안되는 행위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목회와 독서[4]- 중요 관심사
4 그가 확신하고 믿고 있던 중요한 것들
4-1> 죄에 처한 인간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의 설교들을 보면 그가 사람들의 상황을 진단하는 데 결코 피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근거한 인간론을 바르게 인식하고 여러 가지 상황으로 나타나는 결과들을 인하여 혼란을 겪지 않고 오직 흔들리지 않는 원리를 알고 그것을 굳게 믿고 그것으로 인간의 상황은 1세기와 지금 20세기가 다름이 없다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의 문제는 죄의 특정한 발현이 아니라 죄 그 자체입니다. 죄의 본질은 자아의 주장이요 자아의 영광이다. 하나님대신에 자신을 보좌에 앉힌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참된 인간론이 없이는 참된 구원론을 설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진단이 없이는 참된 치료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4-2> 십자가에 못 받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오진 하나님의 해결책이 있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한 채로 남아 있는 한 모든 비참함이 늘어 날 것이고 어떤 인간의 해결책도 비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든 인간은 알아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 설교의 필요성을 그가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설교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전 2:2에서 내가 너희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4-3> 부흥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는 부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의 책 부흥과 성령의 세례를 읽게 되면 그가 얼마나 이러한 부흥을 갈망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필요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성령의 필요성이다. 인간은 중생에서부터 의에 대한 기갈을 느끼게 합니다. 성령의 능력만이 인간이 진리를 이해하고 더 많이 성화에 이르게 인도하고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흥을 정의하기를 "성령의 부어주심이요 우리에게 내려오는 어떤 것이요, 일어나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가 매개자가 아니라 우리는 다만 일어나는 일을 의식할 뿐이요" 말한다. 그래서 부흥을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확정되고 많은 무리들이 생명을 얻고 신앙을 얻으며 생활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게 되고 그리하여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간절히 기대하며 목회를 하였다. 그가 이룬 사역들을 그는 이러한 부흥에 맞대어 보면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겼다.
4-4>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아직도 활동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실제로 믿습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도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적인 이유나 다른 어떤 이유로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아직도 활동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까? 개인의 삶에서나 개인들의 모임이나 교회나 지역이나 혹은 전 국가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께서 아직도 활동하실 수 있고 활동하시려고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이전에 활동하셨던 것처럼 아직도 활동하시리라는 것을 믿습니까? 구야 시대나 신약시대, 사도행전 시대, 종교개혁시대, 청교도 시대, 여러 부흥운동 시대에 활동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활동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그가 여전히 동일한 활동을 하리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위대하신 여호와 시라면 - 영원 자존 자이며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으며 변하지 않을 영원한 하나님- 그는 아직도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목회와 독서 [5]- 독서 생활
5. 로이드 존즈의 독서생활
그는 웨일즈의 아베라본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할 때에 서재에는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가족은 독서가 그의 삶의 일부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목회자에게 있어서 책은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웨슬레가 말했듯이 책을 읽기 싫다면 목회자가 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는 책을 애독하였으며 정규적으로 읽었고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휴가기간을 통하여 중요한 책들을 읽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표지가 얇은 대중판을 싫어하였습니다. 이유는 그에게 책은 일생동안 사귀는 친구들이었으므로 책표지가 쉽게 떨어져 가는 것을 상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든지 손에 고스란히 쥐어 주는 것들을 싫어하였다. 그는 몇 가지 사실들만 간추린 전기들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는 전기인 경우 해당 인물이 출생하기 적어도 200전에서 시작하는 것을 원하였습니다. 즉 속이 꽉 찬 책들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럼으로 피상적인 지식을 전하는 다이제스트식의 책과 나열식의 백과 사전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장에 너무 치중하여 내용이 없는 것과 틀린 것이 있는 것은 싫어하였습니다. 즉 그는 내용에 신경을 집중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소설을 읽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소설을 읽어도 월터 스코트(퀜 틴 더워드, 아이반호)가 지은 책과 같이 배경이 자세하게 설명하는 책들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독서에서 주의 점을 상기 주었습니다. 독서가 마약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교훈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독자는 다른 일에서처럼 자신의 독서를 지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 얼마나 독서를 열심히 하는 지 뽐내기 위하여 독서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독서의 가치와 역할을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그 동기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나타내기 위하여 한다면 잘못된 동기로 그릇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앵무새가 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을 경고합니다 그것을 베껴서 말하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즉 책을 읽고 그것을 소화하여 자신의 말로 말을 하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서는 우리들의 생각을 자극하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철저히 소화를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을 소화하지 못하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책을 잘 씹고 소화해야 나의 일부가 된다 그러면 나는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 나오는 것은 내가 읽은 독서의 진액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사고의 결정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독서의 속도는 매우 느리다고 한다.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마치 책을 소화시키며 읽듯 하므로 속도가 느린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읽은 내용을 다 기억하였다고 그의 딸은 증언합니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도 외우는 암송을 위하여 읽는 경우는 별로 없고 정독으로 읽어감으로 그는 관련된 부분들은 연결시켜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의 독서는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고 합니다. 일반 부분에 대하여 광범위한 정보를 위하여 읽어 나갔고 그리고 의학서적을 계속하여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의학 책을 긴장을 완화시키는 목적을 위하여 읽었다고 합니다. 즉 긴장의 완화를 위하여 다른 종류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우리도 편중된 책들만 읽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책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균형 잡힌 책들을 읽도록 말한다. " 너 자신을 위해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알아야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책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쉐이퍼 박사가 알려지기 전에 이미 문학이나 예술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질문하는 내용에 대하여 짐작하여 말하기 보다 그에 대하여 읽고 대답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여서 사실을 얻기 위하여 책을 읽은 것이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고 일부분이었다. 그는 넓게 읽고 많이 읽어냈다. 그는 전기를 읽되 상세하게 기술된 책들을 탐독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유명한 사상가들의 글들을 읽어냈습니다.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하는 이유로 " 정신을 위해서 좋은 일이지, 독서를 넓게 하면 정신에 원기가 돌지 그래서 나는 일반 주제들과 출판물들을 다룬 잡지들을 꾸준히 받아 보면서 잘 쓰여진 글들이나 양서 서평들을 즐기고 있단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서평들을 꼭 읽어서 자신의 복음주의 도서관에 책을 위한 서평들을 비치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것에나 열심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즉 자신의 관심분야 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관심을 같이 할 수 있다면 최선의 노력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변증서들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웨일즈 복음주의 적인 잡지들의 서평들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 사상의 흐름을 늘 눈여겨 보았다고 한다. 그는 한스 큉을 사람들이 모를 때에 이미 그는 그를 알고 그의 문제점들을 통찰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철학적 신학적 발전 상황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철학 서적과 같은 일반 독서를 할 때에 상대방의 생각을 본인들보다 더 잘 알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적당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책들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가 좋아하였던 분야의 책들로서는 신학서 즉 성경신학과 헌신용 서적들 즉 청교도의 책들 그리고 교화사와 전기들이 읽었다고 한다.
신학 서적 중에 성경신학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설교자는 죽을 때가지 신학서를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신학이어야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미건조한 신학서적이나 교리 하나를 서로 돌려가며 토론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신학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는 최대의 신학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나오는 책들을 이미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하여 주었다고 한다.
헌신용 서적으로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고 즐기도록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청교도들에 대하여 말하였다. 대체로 청교도들은 이점에서 아주 도움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나오는 책들은 많이 읽지만 청교도들의 책들을 읽지 않는데 그는 청교도들의 책들이 이러한 점에서 아주 도움들이 된다고 합니다.17-18세기의 책들을 찾아서 읽도록 하여 보시오. 라고 그는 우리에게 권면한다. 리차드 십스, 존 오웬 리차드 박스터 등 여러 사람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들 지금 나오는 책들도 읽어야 하겠지만 청교도의 책들을 먼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교회사와 전기를 즐겨 읽었는데 간략한 책들보다 무게 있는 책들을 읽었다고 한다. 여러분이 신학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하여 교회사의 책들을 즐겨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기책들을 즐겨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전기가 독서의 균형을 바로 잡아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만하려는 성향을 제지하는 최선의 방지책은 그것이 설교를 잘해서 오는 것이든 혹은 그 어떤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든 주일날 저녁에 위대한 성도들의 전기를 읽는 것입니다. 그는 설교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이 들 때에 위대한 성도들의 전기나 그들의 설교들을 읽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만이 싹 달아 날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애독한 책으로는 성경이었다. 그는 " 성경을 읽어라 , 성경은 생명의 떡이며 너희 영혼의 건안과 양식을 위해 마련된 만나이다." 그는 로버트 머리 맥체인의 매일 성경 읽기표를 따라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 자긱가 좋아 하는 부분만을 읽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분을 다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평생 적어도 신약은 110회 구약은 50회 이상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성경을 애용하고 사랑한 사람이다.
그의 책들:
마틴 로이드 존즈의 초기 40년: 청교도 신앙사.
로마서 강해: C.L.C.
산상설교집: 정경사.
에베소서강해: C.L.C.
요한복음 17장: 여수룬
시대의 표적: C.L.C.
영적침체: 새순출판사
청교도 신안 그 기원과 계승자들: 생명의 말씀사
십자가: 두라노
요한일서 강해: 생명의 말씀사
부흥: 생명의 말씀사
골로새서 강새: C.L.C.
복음의 핵심: 양무리 서원.
빌립보서강해: 생명의 말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출판 풍만
내가 자랑하는 복음: 새순출판사.
구약의 사용한 복음 설교: 생명의 말씀사.
잔리로 하나: 목회자료사
목사와 설교: C.L.C.
참고도서
목사와 설교: 로이드 존즈( 서울: C.L.C, 1977)
마틴 로이드존즈 초기 40년 이얀 머레이(서울: 청교도신앙사,1990)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존즈, 토니 서전트(서울: I.V.F,1996)
로이드 존스의 설교론, 정근두( 서울: 여수룬,1993)
마틴 로이드 존즈와 그의 독서생활(서울: 양무리 서원,1993)
로이드존스가 좋아한 책
(엘리자베스 캐서우드/마틴 로이드존스의 딸의 글에서)
1. 신학서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의 부친은 신학서를 애독하였습니다. "설교자는 죽을 때까지 신학서를 읽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신학이어야 한다." 그는 무미건조한 신학서 읽기와 교리 하나를 가지고 서로 돌려가며 토론하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신학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최대의 신학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신학서를 읽을 때에 그 저자가 논급하지 않은 것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부친이 병원에서 1시간 동안 매우 힘든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치료가 끝난 후 우리들에게 당시 미국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던 한 복음주의 신학자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의 글을 조심해야 해, 그의 신학은 옳지 않아. 부친의 신학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신학은 그의 일부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학자들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거의 느낌으로 가려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2. 헌신용 서적입니다 저는 이 '헌신'이라는 말을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합니다. 부친이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헌신용 주석이라는 말을 혐오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 헌신을 대신 해주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감상적인 헌신주의를 싫어하였습니다.
그가 의미하는 헌신용 독서는 성경을 이해하고 즐기도록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청교도들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대체로 청교도들은 이 점에서 아주 도움이 된단다."그는 자신이 한때 침체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리차드 십스(Sibbes)박사가 쓴 '상한 갈대와 영혼의 갈등'이란 책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고 실토했었습니다.
그는 십스 목사를 '천상적인 십스 박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18세기 사람이다"라고 자주 말했었습니다. 특히 부친께서는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특별한 애독자였습니다.
그는 저와 남편에게는 늘 조나단 에드워드를 추천했었습니다. "자네는 조나단 에드워드를 읽어야 해. 자네의 정치 활동 속에서, 그리고 세계를 여행하고 다닐 때에 조나단 에드워드를 읽게, 그는 자네의 발을 바위 위에 단단히 세워줄 수 있는 자니까. 에드워드를 읽고 그에게서 배우도록 하게나."
부친의 장례식 이후에 있었던 감사 예배에서는 가이우스 데이비스(Gaius Davies)박사와 옴리(Omri Jenkins)목사님 사이에 저의 부친에 대한 일종의 토론이 벌어졌었습니다. 그 내용은, 저의 부친이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의사였느냐 아니면 설교자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부친의 개성이나 성격으로 본다면 양편 주장이 다 맞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부가시킬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친이 웨일스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친이 웨일스에 묻힌 것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어떤 곳에도 묻힐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웨일스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나라들도 사랑했지만, 어디까지나 웨일스인이었습니다. 그가 임종 때까지 항상 읽었던 두 개의 책 중에서 하나는 그의 웨일스 찬송가였습니다.
저는 이 천성적인 시인들이 작시한 찬송가를 웨일스어로 여러분께 읽어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웨일스어를 모를실 테니까)> 웨일스 찬송가들은 뛰어난 상상력을 가졌고, 교리를 깊이 파악했으며, 하나님은 지극히 사랑하면서 복음 메시지를 영혼들에게 부드럽게 적용시켰습니다. 저의 부친은 그것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부친이 별세했을 때 그의 곁에 놓였던 책의 하나가 이 웨일스 찬송가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웨일스인이었습니다.
3. 교회사와 전기였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기에 제가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집회 때를 비롯해서 우리들에게 늘 권유하던 말슴이 교회사와 전기를 읽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는 정말 이 분야의 책들을 사랑했는데 얄팍한 내용의 책이 아닌 세밀하고 무게 있는 책들을 선호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휫필드(Whitefield)에 대해서는 아놀드 달리모어(Arnold Dalimore)의 책을 즐겼습니다. 그는 전기가 독서의 균형을 잡아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만하려는 성향을 제지하는 최선은 방책은, 그것이 설교를 잘해서 오는 것이든 혹은 그 어떤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든 간에 주일날 저녁에 위대한 성도들의전기를 읽는 것이다." 다음 두 개의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 이 점을 예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주일 밤 책 읽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부친은 1964년 초부터 D.E. 젠킨(Jenkins)이 쓴 세 권으로 된 토마스 찰스(Thomas Charles)의 전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아마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책들 역시 두꺼운 것들입니다! 부친은 1월과 2월의 주일날 저녁마다 우리들 앞에서 이 전기를 조금씩 큰소리로 읽어주셨습니다.
이 기간에 읽은 부분에서, 토마스 찰스는 그가 나중에 신부로 맞이한 어떤 여인으로 인해 너무도 힘들어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토마스 찰스와의 결혼을 주저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녀는 곧 결혼에 응할 듯이 하다가도 갑자기 결혼 공포증에 빠지곤 했었습니다. 그러면 토마스 찰스는 우울증에 빠졌고 매주 커다란 고통을 안고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부친은 전기 속의 서신들을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그런 굴곡을 여러 번 겪은 후 어느 영광스런 주일 밤 그녀는 드디어 토마스 찰스의 구혼 요청에 "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이 대목에서 좋은 소식이라고 기뻐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남편인 스페데릭과 제가 결혼하기 전 주일에도 부친은 토마스 찰스의 전기를 읽어주었습니다. 그때 솔직히 저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이 속상해, 다음 주일 밤에 나는 여기 있지 못할텐데!" 부친의 열심은 어찌나 컸던지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실례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우리들의 성찬석(石)인 언약파(Covenanters)들의 거대한 기념비를 보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 기념비는 스코틀랜드 남서쪽의 야산 지대에 세워져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언약파들은 당국에 잡힐까 봐 야산에 올라가서 성찬식을 가졌었습니다. 기념비까지 가는 길은 무척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황소들의 초장과 웅덩이와 철조망을 통과하여 겨우 목적지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서정적 아름다움을 지닌 장소로서 일종의 야외 원형 집회소와 같았습니다. 여기에 세워진 높은 기념비의 맨 꼭대기에는 성찬식의 잔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위대한 언약파들을 기리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제가 그날 기억하는 가장 뚜렷한 사건은 우리가 도착했을 때의 부친의 행동입니가. 그는 기념비를 올려다보더니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언약파들을 사랑했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 열심이었으며, 그들을 복음 안에서의 형제들로 존경하였습니다. 그가 보였던 모자를 벗은 동작은 언약파들에 대한 그의 깊은 경의의 표출이었습니다.
4. 성경. "성경을 읽어라. 성경은 생명의 떡이며 너희 영혼의 건안과 양식을 위해 마련된 만나이다." 부친은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의 매일 성경 읽기표를 따라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좋아하는 부분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분을 다 읽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필요한 본문들을 별도로 공부했지만 정규적으로 성경을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저의 부모님들은 적어도 53,4년 동안 로버트 맥체인의 성경 읽기표를 따라 꾸준히 성경을 통독하였습니다. 이 계획표를 근거로 해서 보면 저의 부친은 자신의 설교 준비를 위한 성경 읽기 이외에, 신약을 적어도 110회 통독한 셈입니다.
부친은 3월 1일에 돌아가셨는데 공교롭게도 2월 28일의 매일 성경 읽기 본문의 마지막 장이 고린도전서 15장이었습니다. 마치 주께서 저의 부친에게 앞으로 있게 될 몸의 부활을 지적해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부친은 성경을 정규적으로 읽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알았고 성경을 사랑하였습니다. 임종이 가까왔을 때 그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 구절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그는 앤에게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자족하라는 말씀을 짚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우리들의 지상의 장막이 걷혀지면 훨씬 더 나은 상급이 우리를(그를)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을 손으로 짚어 보이거나 혹은 종이에 써서 보여주려고 애썼습니다. 그가 임종 무렵에 읽었던 것은 웨일스 찬송가와 성경 뿐이었습니다. 아버라본에서의 그의 초기 설교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당시 그는 28세였습니다.)
"여러분이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든 죄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돌아가셨다는 것을 또한 확신하며, 내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친은 이 사실을 그대로 증명하였습니다. 그는 훌륭하고 적극적이며 광범위한 독서가였지만, 이 세상에서 그에게 진정 중요했던 유일한 것은 그가 가장 애독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지적하는 '진리'였습니다.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에 대한 옛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저의 부친에 대한 회고담을 마치기 위해 '진리의 힘'이라는 소책자에서 몇마디 인용하려고 합니다. 다음의 인용문은 부친의 임종을 목도한 우리 모두의 인상을 잘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토마스 스코트(Thomas Scott)에 관해서 책을 쓴 존 스코트 목사의 증언입니다.
"그의 인생이 끝나는 말년에 그는 천국을 갈 준비가 다 된 듯 하였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그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겸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렸으며, 복음 전파에 대한 거룩한 열정을 가졌고, 자기 가족과 자기 둘레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복종했으며, 그의 구주의 공로와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나이가 차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