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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성탄말씀 제2강
사 9:1-7 (요절 9:6)
한 아기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6).”
지난주에 우리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징조임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는 그 한 아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예언합니다. 즉 그가 오실 때 어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는 어떻게 우리를 다스리는지에 대해 예언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 아기가 이루시는 회복의 역사를 배우며 그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우리를 회복시키는 한아기(1-5)
6a절을 보면 이사야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그가 예언했던 임마누엘, 즉 한 아기가 이제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예언 하면서 이렇게 완료형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그 예언이 하나님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아기가 나실 때 어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첫째, 멸시 받던 곳이 영화롭게 됩니다(1,2). 1절을 보면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습니다. 옛 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갈릴리는 이스라엘 최북단에 위치한 변방지역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적에게 점령당하고 이 때문에 고통 받은 곳 입니다. 사사시대에는 미디안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열왕들의 시대에는 아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앗수르가 아람을 정복한 후로는 앗수르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왕하15:29을 보면 앗수르 왕 디글랏 벨레셀이 침공했을 때 갈릴리를 제일 먼저 공격했고 갈릴리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이방 민족을 이주 시켰습니다. 그래서 피가 섞이고 문화가 혼합되자 갈릴리는 이방 땅 취급을 받고 멸시를 당했습니다. 갈릴리는 고통 받는 땅이요 멸시를 당하는 땅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멸시를 당하는 갈릴리가 후에는 영화롭게 될 것이라 예언합니다. 이 예언은 한 아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4:13,14을 보면 예수님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 그곳에서 복음 역사를 시작하셨고, 그곳에서 사도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셨고 사도들을 부르셨기 때문에, 갈릴리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영화로워졌고 그곳 출신의 사도들도 유명해졌습니다. 오늘 날 베드로와 요한이 얼마나 유명합니까? 우리는 자기 이름이 베드로나 요한으로 불리는 것을 영화롭게 생각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이방의 갈릴리 출신들입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지 갈릴리를 순례 합니까? 그래서 베드로가 잡았다는 갈릴리 물고기까지 유명해 졌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물, 그곳의 돌 한조각까지 기념품이 되었습니다. 갈릴리는 멸시받는 땅이었지만 예수님이 그 곳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에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또 2절을 보면 예수님은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심으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갈릴리사람들의 삶은 어두웠습니다. 그들은 사망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빛이 그들을 비추었을 때 즉시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가버나움의 세리마태가 성마태로 변화되었고, 멸시 받던 사마리아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 복음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문둥병자, 중풍병자, 한 손마른자 등 사망의 그늘에 앉아 살던 사람들이 거룩한 성경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멸시 받고 고통 받는 곳에서 복음 역사를 시작하심으로, 그곳에 말씀의 빛을 비추심으로 그 땅과 그 백성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사람이 멸시(蔑視)가 아니라 무시(無視)만 당해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마음 여린 자매님들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입술이 바르르 떨립니다. 형제들은 군대에서 멸시 당하던 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입니다.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무시당하기 때문에 삶의 의욕이 사라져 우울증에 걸리는가 하면, 멸시당한 고통으로 인해 마음이 비뚤어지고 반발심, 복수심이 가득합니다. 사람이 멸시를 당하면 결국 어둠속에 거하게 됩니다. 삶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슬픔 속에 살아갑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화로운 존재입니다. 그 영광을 빼앗기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을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 영화롭게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복음역사를 시작할 때 영화롭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롬3:23,24). 현재 나의 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를 영화롭다 인정하십니다. 인정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자라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복음 역사를 시작하시고, 예수님의 복음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영화로워집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어둠속에 살며 쾌락을 좇았습니다. 자기위해 사는 일 이상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신 후,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셨고 캠퍼스 미션과 세계선교를 위해 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얼마나 영화롭게 만드셨습니까?
경기대는 대학들 중에 그리 영화로운 편은 아닙니다. 이 학교 출신 고시 합격생들 중에, 자신을 고졸로 알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합니다. 취업하려고 대기업에 원서 내밀면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적당히 자족하려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큰 일 도모하는 사람들은 학교에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편입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곳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캠퍼스를 영화롭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둘째, 힘없던 나라가 창성하게 됩니다(3-5). 3절을 봅시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 하오니….” 한 아기 예수님이 오실 때 나라가 창성케 됩니다. 창성케 된다는 말은 인구가 늘고 영토가 넓어진다는 뜻입니다. 인구가 늘고 영토가 넓어지면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 등 영향력이 커집니다. 영향력이 커지면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영향력이 더욱 커지면 모든 나라들이 그 앞에 굴복합니다. 오늘 말씀 4절에 나오는 멍에나, 채찍, 막대기는 노예를 다룰 때 쓰는 도구들입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멍에를 매야 하고 채찍이나 막대기로 두들겨 맞습니다. 그러나 힘이 있으면 멍에와 채찍, 막대기를 꺽어 버리고 자유를 얻습니다. 또 5절을 보면 나라가 창성케 되어 주변 나라들을 다 정복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평화의 시기가 도래합니다. 그런데 다시 4절을 보면 그 날은 ‘미디안의 날’과 같을 것입니다.
미디안의 날이란 사사기6,7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북쪽에 사는 미디안은 매번 추수 때만 되면 이스라엘에 쳐들어왔고 농작물뿐 아니라 양과 소와 나귀를 약탈했습니다. 그 땅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빼앗기는 일에 피눈물이 났지만 힘이 없어 싸우지 못했고 궁핍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7년을 보내다 여호와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기드온을 세우시고 많은 군대를 모아 미디안과 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모인 사람이 33,000명이었는데 하나님은 숫자가 너무 많다면서 두려워하는 자를 돌려보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10,000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0,000명도 많다면서 물가로 데리고 가서 머리를 쳐박고 물 먹는 사람은 다 돌려 보내고 개처럼 혀로 물을 핥는 사람 300명만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300명을 통해서 미디안 군대를 쳐부수었습니다. 그 전쟁의 승리로 미디안에 빼앗겼던 탈취물들을 빼앗아 올 수 있었고 다시 추수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300명의 군대로 그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영토만으로는 강원도 크기와 비슷하다 합니다. 인구는 650만정도 되는데 세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1450만명이라 합니다. 영토나 인구로만 따지자면 남한만도 못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치력이나 경제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우리는 잘 압니다. 일설에 의하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합니다. 땅이 크고 숫자가 많다고 창성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믿음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12,000명도 아니고 1,200명도 아니고 12명을 키웠습니다. 소수제자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그 12명을 통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사도바울 한 사람을 통해서 소아시아와 유럽을 넘어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소수제자양성에 집중하심으로 그의 나라를 창성케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대형교회가 많고 개신교 인구가 전체의 약18%, 천주교가 10%입니다. 개신교인구만으로도 전체의 5분의 1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어떤지 혹 악영향이 더 큰 것은 아닌지 의문입니다. UBF가 2041년까지 10만의 선교사를 그리고 2010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루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경기센타도 2041년까지 100명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2010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창성케 되기에 앞서 나 한사람이 먼저 예수님의 분명한 제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이번주 가졌던 스텝목자 수양회에서 도전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LA에 있는 한 센타에 선교사 한 가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매주 1:1 100팀을 이루고 2008년 퍼듀국제수양회에 31명의 양들을 참석시켰다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제가 먼저 예수님의 좋은 제자요 유능한 일대일 성경선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우리를 다스리시는 한 아기(6-7)
6절을 봅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스라엘이 영화롭게 되고 창성케 되는 이유는 한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습니다. 즉 그는 우리의 통치자로 이 땅에 왔습니다. 그의 통치로 인해 이스라엘이 영화롭게 되고 창성케 됩니다. 그리고 그의 통치의 성격은 그 이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통치는 기묘합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는 놀라운 지혜로 다스립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다스리지 않고 상담자처럼 대화하고 설명하고 가르쳐주십니다. 또 그는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후원하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갑자기 돌아가셔서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훌륭한 분이어도 평화가 없다면 우리 마음에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대제국을 이루었던 많은 군주들이 자신들이 영화를 누리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괴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평화로 우리를 다스립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한 아기가 이런 분이기에 우리는 그의 다스림 속에 영화롭게 되고 창성케 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하고 어느 것 하나 빼 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기묘자와 모사를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기묘자와 모사를 따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NIV 영어 성경에서는 놀라운 상담자(Wonderful counselor)라고 묶어서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도 경영에서 놀라운 분 (The wonder of counsellor)으로 쓰여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따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고 함께 묶어서 설명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단어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기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데에만 쓰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사자가 대답했습니다. “어찌 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삿13:18)”이사야 28:29을 보면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 하니라’고 했습니다. 한 아기 예수님은 세상을 다스리시되 그 경영이 기묘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사람은 물위로 배를 타고 가거나 헤엄쳐 갈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널 일은 생각할 수 없고 계획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에서 바로가 쫓아오고 앞은 홍해가 막혔으므로 죽었다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홍해 길을 열어 그들을 구원할 기묘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의 하시는 일을 전혀 알지 못하게하고 무조건 믿으라고만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묘하지만 또한 모사입니다. 모사란 말의 원어상 의미는 ‘계획하다, 조언하다’입니다. 하나님이 기묘하다고 해서 아무런 계획도 없이 감정적으로 일하는게 아니며 일방적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획적으로 일하시고 또 그 계획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지난번 다니엘서 후반부를 공부하면서 중간사 400년의 역사가 이미 다니엘 시대에 계획되어 있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특히 다니엘 11장에는 애굽과 시리아 사이의 150년간의 역사가 마치 시나리오처럼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안에는 135가지의 예언이 있었고 그 예언들은 한치의 어김도 없이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묘하신 분이지만 계획하시는 분이시고 그 계획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자기 생각 속에 가두려 하거나 자기 생각을 주장하지 않고 배우려 한다면 능히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자기 고집대로 되기만을 기도하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묻고 배우려 한다면 하나님은 그 계획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묘하신 분이시면서 또 우리의 친절한 상담자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지을 때 무조건 아름답게 지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하실 때 무조건 튼튼하게 지으라며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도록 하실 때에는 그 설계도를 정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인류구원역사를 위해서 구약에서 약속하셨고 그 일들을 신약에서 성취하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생애가 어떻게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셨는지를 나타내기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다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속에서 수많은 모순들에 부딪힙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하다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가 부상하였는데, 그 사상의 본산지인 미국이 몰락했으니 진단하고 처방할 방법을 잃어 버렸습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이런 저런 진단을 내놓고, 내노라하는 경제전문가들이 등용되지만 속수무책입니다. 사람들은 혁명적인 사고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산적한 문제들을 쥴리어스 시저라는 한 인물이 등장함으로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어 그 나라를 영화롭고 창성케 한 것처럼, 칭기즈칸이란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여 콩가루처럼 나누어진 몽골부족을 통합하였고, 누구도 생각지 못한 큰 꿈을 품어 세계 최강의 제국을 이룬 것처럼 위대한 통치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나라를 다스리거나 침체된 세계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만 고민이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작은 일 하나 해결하는데도 지혜가 부족하고 모사가 필요합니다. 김태헌 목자 가정은 센타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오려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데도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아마 두 분이 이 문제로 많이 의논하며 그때 그때 문제를 해결해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아직 분유를 먹지 않는 수민이가 어떻게 하면 분유를 먹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풀기도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백인수 목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조금 안정을 찾아가고 있지만 새로운 고민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 성경을 배우도록 소원을 심고, 또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도록 하는 일에는 또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습니까? 우리는 수많은 고민들 속에서 살고 그 고민들과 씨름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묘자 모사이신 한 아기의 다스림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참된 남편을 만나 행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5명을 만나고 6번째 남편과 살 때까지 남편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 방황했습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의 모든 멸시를 받았고 슬픔 속에 우물가로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기묘자 모사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와 대화하시며 고민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녀의 문제가 예배 문제이며 그리스도를 만날 때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문제를 해결자 그리스도로서 그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때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토록 그녀를 멸시하던 마을 사람들에게 나아가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런 그녀의 고백을 들은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고 구원을 얻었습니다(요한4:29,30). 예수님이 멸시받던 한 여인의 상담자가 되어주셨을 때, 그녀는 사마리아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큰 꿈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았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모순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속에서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요셉은 그런 하나님의 방법을 알만큼 성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함부로 하나님을 욕하거나 마음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려 했고 그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 모든 일을 통해 큰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았고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두 아들의 이름처럼 모든 수고를 잊게 하셨고(므낫세), 그를 창성케 하셨습니다(에브라임). 애굽의 바로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창41:40).
연말이 되면 생각이 많아지고 고민도 깊어집니다. 우리가 함부로 낙심하고 절망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기묘자요 모사되신 한 아기 앞으로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그가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그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섭리를 깨닫고 그의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