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에 더해, 전투병을 파병한 참전국의 숫자로 보면 UN군 16개국(미국 이외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필리핀, 태국,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중국의 총 17개국.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한 국가는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여긴 북한 편) 6개국이다. 그 외에 물자 지원을 포함, 대한민국을 지원한 국가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총 67개국이다.
6.25 전쟁은 한편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한 나라(대한민국)를 돕고자 지원한 것으로 기록된 전쟁이며 이에 따라 기네스북에 오른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대한민국에 병력, 물자, 전후복구를 지원한 나라는 무려 67개국으로, 당시 세계 국가들 중 무려 73%에 달한다. 이 중에는 아이티, 인도네시아처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거나 경제력이 낙후된 국가들조차 포함될 정도이다.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이전에 2차 세계대전까지 타국의 침공을 당했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은 그 때의 참상을 기억하면서 참전하였다고 한다.
이는 개전 당시 북한의 선전포고 없는 무력침공이 전세계적으로도 천하의 개쌍놈들이나 하는 짓으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관련 기사 이렇게 북한이 천하의 개쌍놈들 취급을 받은 이유는 역시 이 무렵이 2차대전이 막 끝난 무렵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2차대전의 악몽이 가시지 않은 통에 침략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세계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이외에 소련과 일본도 비밀리에 참전하여 각각 항공 지원과 소해 임무를 담당했다. 참전한 소련 조종사들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중국어 및 조선어 학습을 받았지만 치열한 교전 중에 낯선 외국어를 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간절하게 부탁해서 승낙을 받아 실제 작전 중에는 그냥 러시아어로 교신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도 긴급상황시 러시아어로 된 무선통신이 들리는 경우를 UN군이 밥 먹듯이 캐치하고 보고했으나,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에 해당 보고를 받은 상부 및 지도자층을 포함해서 다 모르는 척했다고 한다.
참전국의 숫자만 따지면 위에서도 밝혔듯이 무려 세계 73%의 국가가 대한민국을 지원했으며 북한측에도 막대한 소련의 병기와 중국의 전투병이 지원되었으므로, 6.25전쟁은 거의 세계대전에 준하는 규모의 대규모 전쟁이었던 것이다. UN군의 절대 다수(90% 정도)가 미군이었으나 67개국의 지원국 가운데에는 꼭 병력 지원만 한 나라만 있었던 게 아니라 물자와 의료진, 기술자를 지원한 나라도 역시 매우 많았기 때문에 단순히 병력만으로 지원국을 규정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일부 국가의 경우, 이들 나라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을 지원했다던가, 2차대전 직후 미국 눈치를 안 볼 국가가 없다면서 이들 국가가 유엔군으로 참전한 이유를 단순히 미국 눈치를 보고 미국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하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넌센스다. 유럽 참전 국가들은 나토 창설 멤버이기 때문에 참전했다고 치더라도 태국, 에티오피아,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터키, 남아공은 미국의 뜻과는 별개로 참전한 것이다. 또 15개국 군대가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한 게 아니라 미군에 배속되어 전투를 했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넌센스다. 미군을 포함한 모든 병력은 유엔군 소속이었고 그 수장이 더글러스 맥아더였을 뿐이다.
사실 UN군의 지휘권이 미군 장성에게 돌아간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군이 1950년 7월 초 북한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동안 유엔의 '한국 군사원조 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 해, 공군이 참전했고, 이어 영국의 해군과 호주의 해, 공군, 뉴질랜드 해군도 전선에 투입됐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유엔 회원국이 참전을 준비하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지휘 통제 문제가 대두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은 7월 3일 6.25전쟁의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미국이 유엔군을 지휘하도록 제의했다. 결국 대한민국 방위를 위한 회원국들의 군사행동에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 미국이 작성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의결함으로써 유엔군을 지휘하는 통합군사령부가 발족하게 됐다.
이 결의안의 주요 골자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신해 한국에서 침략자 북한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의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유엔 회원국들이 파견한 군대를 미국의 통일된 지휘하에 둔다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임명하고, 그에게 "미국의 작전 임무는 국제 정치상 어디까지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원하에 이루어진다"는 지침을 전달했다. 유엔 회원국 중 대부분의 국가가 지지하는 가운데 결성된 유엔군은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으며, 파견 병력 규모와 지원능력 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이외의 국가의 참전은 주로 미국의 국무부와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의 협의하에 이루어졌다. (출처: <6.25전쟁 프랑스군 참전사> - 국가보훈처 편저, 2004년)
이와 같이 UN군의 혼란스러운 지휘체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UN 안보리와 회원국들이 미군 장성에게 UN군 지휘권을 양도한 것일 뿐, UN군이 단순히 미군의 시다바리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전쟁을 보는 시각에는,
-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진영을 각각 남북이 대리자의 역할로 전쟁했다는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
- 남북의 국내전으로 보는 시각. 단 이 시각의 경우 남쪽이든 북쪽이든 각각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왔었던 데다가( 미국과 중국은 자신들의 군대를 보냈었던 만큼(서로 UN군이니 의용군이니 하는 수를 쓰긴 했지만) 이렇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 마지막으로 대리전이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자체가 맞부딪힌 세계전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참고로 소련에서는 미 공군에 대항하기 위해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했다. 공식적으로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교신은 중국어나 한국어로 하고 비행기도 북한/중국산으로 위장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실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특히 소련)은 모두 전쟁에 개입하면서도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해 은폐했으며 더불어 이 전쟁이 한반도 외부로 퍼지지 않도록 힘을 썼다. 당장 1951년 UN군이 북쪽으로 북상할 때쯤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마찰이 생겼는데, 맥아더가 중국(정확히는 만주 지역)에 핵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트루먼은 전쟁의 확대를 우려해서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시킨 바 있다. 이러한 전쟁의 성격으로 인해 한국전쟁은 냉전 시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대리전의 시초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