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미스터리. 성곽은 왜
없어졌나
"日왕세자 고개를…" 숭례문 성곽
헐렸다

화재가 나기 전의 숭례문
조선시대 한양은 총
길이 18.6㎞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숭례문(남대문)은 외교사절 등이 왕을 만나기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갈 때 통과해야 했던 한양도성(서울성곽)의 정문이었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남산, 서쪽으로는 소의문(서소문)으로
이어졌던 숭례문 양측의 성곽은 대한제국 말기인 1907년 헐려나간다. 이로 인해 우리 기억 속의
숭례문은 성곽을 떼어낸 깔끔한 사다리꼴의 석축(石築) 위에 2층짜리 문루가 올라선 모습으로 남아 있다.
2월 중 가설덧집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는 숭례문의 가장 큰
변화는 양측 날개와도 같은 성곽의 부활이다.
문화재청은 주변 교통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동측으로
53m, 서측으로 16m의 성곽을 되살렸다. 숭례문 성곽의 소멸과 부활에는 여러 이야기가 숨어있다. 1396년(태조 5년) 숭례문과 함께
완공됐던 성곽은 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올까.

숭례문의 달라지는 것들
◆일본 왕세자 맞으려 서쪽 헐어
숭례문 성곽이 사라진 것은 1907년 10월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嘉仁)의 조선 방문을 얼마 앞두고서였다.
당시 왕세자의 방문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측이
"대일본 천황의 세자가 약소국 도성의 성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치욕스런 일"이라 주장했고, 이에 따라 서측 성벽을 헐어내 큰 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본 왕세자가 고개를 숙이고 홍예문으로
들어설 수 없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숭례문의 입구인 홍예문의 높이는 약
4.5m. 마차나 가마를 타고 들어갈 경우 천장에 닿지는 않지만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높이다.
이 설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사료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당시 한양을 둘러싼 성곽 중 숭례문 주변이 가장 먼저
헐렸고, 그 시기가 왕세자의 방문과 맞물렸다는 점에서 일본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숭례문 복구자문단으로 활동 중인 문화재전문가 윤홍로씨는
"정확한 기록은 찾기 힘들지만 당시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일본으로서는 이 기회에 조선왕조의 통치를
상징하는 성곽을 없애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차 사고도 많아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3월 기록에는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
등이 고종 황제에게 숭례문 좌우 성곽을 8칸씩 헐자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온다.
"숭례문 주변에 사람들이 붐비고 수레와 말 등이 복잡하게
드나들며, 전차가 그 복판을 가로질러 다니기 때문에 접촉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 이유다. 이어 같은 해 6월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등이 흥인지문(동대문)과
숭례문 주변의 나머지 성곽마저 모두 헐어버릴 것을 왕에게 청해 허락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앞서 1899년 5월에는 돈의문(서대문)에서 흥인지문을 거쳐 청량리로 향하는 전차가, 12월에는 종로에서 숭례문을 거쳐
용산으로 향하는 전차가 개통됐다. 홍예문을 지나는 전차와 마차, 사람들로 숭례문 주변은 혼잡했다. 이에 따라 1907에서 1908년 사이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양쪽 성곽이 헐렸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성곽 철거가 본격화돼 1913년 남산과 장충동 사이 성곽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의 성곽들이 차츰 사라지게 된다.

호주 사진가 조지 로스가 1904년에 촬영한 숭례문
주변의 모습.
남산으로 이어진 숭례문 동측 성곽의 모습과 주변 환경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다.
성곽과 주택가 사이에는 도성 안팎의 치안을 담당한 순라군(巡邏軍)이
밤마다 순찰을 위해 오가던 샛길이 나 있다
◆서울의 원형 살려야
숭례문 성곽 복구공사는 2008년 화재 이전부터 계획돼
있다가 복원공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공사에 쓰인 1362m³(석축 복구공사분 포함)의 돌은 대부분 경기도 포천에서 캐 온
화강석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1900년대 초반 숭례문 사진 등을
참고해 높이는 4~6m로 쌓았고, 위쪽으로 갈수록 돌의 크기가 작아지는 축조 형식도 그대로 살렸다.
공사를 책임진 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이의상 석장은 "남아있는 서울성곽의 돌과
포천에서 캔 돌의 성분은 95% 이상 일치한다. 성곽 복원은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서울의 원형을 살리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성곽 복원
외에도 1963년 숭례문 해체·복원공사에서 짧아졌던 용마루(건물의 지붕 중앙에 있는 마루)의 길이를 0.9m 늘려
원형대로 바로잡았다. 1층 문루 지붕 위의 잡상(雜像·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놓는 흙인형)도 '잡상은 홀수로
놓는다'는 조선시대 원칙에 따라 8개에서 7개로 줄였다. 화재 방지를 위해 숭례문 내 외부에 불꽃감지기(16개)와 열감지기(총 길이 200m),
스프링쿨러(헤드 140여개)와 CCTV 12대 등도 설치된다.
***************************************<중앙일보/이영희
기자>
서울성곽(한양성곽)

조선왕조가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둘레가 약 17㎞이다.
조선왕조는 1394년 11월 한양으로
천도하여 궁궐·종묘·사직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다음해인 1395년 9월까지 대체적인 건설을 끝내고 수도를 방어·수호하기 위해 성곽을 쌓기로 했다.
공사는 1396년(태조 5) 1월부터
시작하여 49일간 지속되었다. 이때 각 도로부터 동원된 인부는 11만 8,000여 명으로 세밀한 계획을 세워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의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이중 삼중의 책임자와 감독자를 두어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방법으로 성벽 바깥쪽 돌에 감독자의 출신지와 성명 등을 새기게
했다.
성곽은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기초석이 장대하고 성벽이 수직형이며 돌과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메꾸는 등 그 축성방법이 조잡했다. 성의 기초부분이 높고 험한 곳은
석성으로 하여 높이 15척, 총연장 1만 9,200척이었고, 낮고 평탄한 곳은 토성으로 축조했는데 아랫단의 너비가 24척이며 윗단의 너비가
18척이고 높이가 25척으로 총연장 4만 300척이었다.
요컨대 이 공사는 짧은 기간에 17㎞ 이상의
장성을 축조했기 때문에 견고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1396년 8월부터 경상도·전라도·강원도의 백성 7만 9,400명을 징발하여 2차 공사를
시작했다. 2차 공사는 동대문 부근 등 봄철공사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곳의 완축과 여름철 장마로 무너진 곳의 개축, 그리고 낮은 성의 보수,
성문의 누각을 짓는 일 등에 주력했다. 아울러 도성의 8개 성문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는 1차 공사에 대한 보수·완성을 위한 공사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공사는 그해 9월 24일 종료되었지만 그후에도 군인·승도 등에 의한 부분적인 보수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울성곽이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422년(세종 4)에 와서야 가능했다.
서울성곽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성을 모두 돌로 완벽하게
쌓았다.
둘째, 성가퀴(女墻)를 높게 하여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셋째, 수문(水門)을 증설했다.
넷째, 성문을 개수하거나 옮겨서
설치하여 도성 출입문으로서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다섯째, 성 주위 안팎에 큰 길을
내었는데, 이는 순찰과 유사시의 대비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였다.
여섯째, 성 주위를 확장했다.
한편 도성문으로는
숭례문(남대문)·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숙청문·창의문·혜화문·광희문·소덕문의 이른바 8대문이 있었다.
도성을 보수하는 책임관청으로는
성문도감(城門都監)을 설치했다. 그리고 도성의 수호와 경비를 위한 기구로 병조 예하에 도성위(都城衛)·도성경수소(都城警守所)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