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설교-2014년 8월 31일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할 때 Andrew Farley의 책, The Naked Gospel을 주로 참조했다.
이 책은 "복음에 더할 것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올바른 정체성을 갖는 과정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이고 나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졌는지,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생활은 끊임없이 신을 만족하게 하는 생활이다. 소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다. 그것은 정말 영적이고 듣기에 좋은 말 같으나 참으로 고단한 일의 연속일 때가 많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된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우리는 종교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진정 주시려는 선물이다.
요한복음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고린도전서 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갈라디아서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누가복음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갈라디아서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이 많은 구절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으면 안 된다는 경고도 있고 자유하나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종의 멍에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의 양심과 결정은 순전히 자유로운 결정에 따른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얻은 존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잃게 되는 과정은 뜻밖에도 좋은 의도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첫 번째로 나타나는 과정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행동과 마음으로 나타난다. 무언가 드리고 싶고 무언가 하고 싶고 그래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좋은 의도가 쉽게 변질되어 종교적 의무만 남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더 지치게 되고 고단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는 최소한의 의무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래서 더 편안한 곳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여기에 결코 안주할 수 없다. 그는 무엇인가 자신을 찾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더 많이 기도도 해 보고, 성경을 읽어도 보고, 집회에 참석해보기도 하고, 다른 목회자의 설교를 들어보기도 하고, 심지어 교회를 옮겨보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많은 상처만 남은 경우가 많다. 이단적 가르침에 빠지기도 하고 은사적 신비주의에 휩쓸려 자신의 판단력을 상실하고 남의 종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얻은 신앙적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다가 정작 자신은 그런 행위를 못하게 되는 바리새인 같이 된 위선적인 자신을 발견하고 낙심하기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죄에 대하여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고 더 큰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는 정말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다시 한번 낙심을 겪게 되고 아무런 소망을 찾지 못한 나머지 신앙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을 떠나는 것은 그가 평생 걸어온 길을 떠나는 것이요 진정한 자신을 버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이 모습은 나의 모습이다. 나의 신앙 여정을 간단하게 위와 같이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과 영적인 상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에 빠져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나에게 교회를 개척할 마음을 주신 주님께서는 가장 먼저 이 처음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주셨다. 교회 개척을 결심한 후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사람을 어떻게 모을 지가 아니라 복음을 어떻게 재발견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2011년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그렇게 탐구해 왔던 것이다.
처음 만난 것은 Frank Viola라는 미국의 설교가요 저술가였다. 그는 성경을 정말 많이 연구한 사람이다. 그가 쓴 책들은 아마존에서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그가 쓴 The Untold Story of the New Testament Church라는 책은 신약의 교회를 역사적으로 잘 연구한 성경 연구 자료다. 그는 이 외에도 Pagan Christianity, Reimagining Church, From Eternity to Here, Revise us Again 등을 써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십일조에 관해 더 깊은 논쟁에 들어가기도 했다. 어쩌면 나의 행위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선한 의도가 가장 먼저 훼손된 것이 십일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올바른 십일조란 어떤 것인가를 찾는 것은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찾는 과정에서 만난 첫 번째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프랭크 바이올라는 나에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장대함과 그것이 성경 전체에 어떻게 통일적으로 펼쳐져 있는지를 볼 수 있는 큰 그림을 제공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무엇이 복음인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며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그 대답에 따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며 그에 따라 우리의 생활 방식은 물론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며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갈등은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은 목사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질문이요 풀어야 할 숙제다. 그리고 그 해결 과정에서 나오는 대답이 바로 나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성경 연구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는 Paul Ellis의 책, The Gospel in Ten Words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책, The Gospel in Twenty Questions를 읽었고, 이 두 권을 모두 번역했으며 그 과정에서 약 7개월 동안 나는 그 책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설교를 했다. 그 주된 내용은 하나님의 사랑, 구원, 죄 용서, 거룩함 등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이며,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사랑 받는 존재요 기뻐하는 존재며, 또한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는 이미 거룩함을 얻었으며, 또한 죄 용서함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책은 우리의 존재에 관한 풍성한 그림을 예화를 통해 그리고 성경 연구를 통해 제시했다.
나는 상반기만 지나면 그 책을 마스터할 줄 생각했고 그렇게 마스터 하면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지어 성도들에게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듣지 말고 앞으로 6개월만 나의 설교에 주목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나에게는 이 메시지가 신선하며 그 동안 들은 또는 그 동안 내가 한 설교와는 방향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중간에 내가 전에 하던 방식으로 설교를 준비해 보았는데 역시 아직 빠지지 않은 과거의 물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나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죄에 대한 문제다. 나는 이미 거룩하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되었는데 여전히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어떻게 나는 이 문제를 넘어갈 수 있을까?
나는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성경을 연구하고 더 좋은 교제를 나누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물의를 일으킨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향해 돌 던질 자신이 없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모든 사람이 돌을 버리고 돌아간 것처럼 오늘날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문제 앞에서 잠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상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죄의 고백이다.
요한일서 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죄 사함에 대한 약속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하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이것은 성경에 능통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향하여 하신 말씀이다. 그들이 성경에 능통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문자를 읽었어도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그들은 주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도, 주께서 하신 일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어떤 위험에 빠질 수 있는지 예를 들어보겠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에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10:13/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우리의 의로운 행동이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이 외에도 죄를 범하면 차라리 눈을 뽑고 손을 잘라버리라고 말씀하신 곳도 있다. 마태복음 5:48에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두 가지 말씀을 모두 믿는다. 둘 다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노력을 해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아직도 구원을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으며 천국에 가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힘써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문제는 내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디모데후서 2:15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기에 힘쓰는 일은 교회의 일군들의 사명이다. 우선 목회자의 사명이요 성도의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목회자는 여기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의 후원과 기도가 필요하다. 목회자가 어떻게 가르치는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분별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주님을 따라 살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주님을 사랑한 삶이었고 주님의 복음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삶이었다. 그리고 이제 목회자가 되었다. 주의 복음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진리를 증거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리고 나와 온 교우들이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정말 자유를 누리기를 희망한다. 죄에서부터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의 기도와 신뢰를 바라는 바이다. 나도 이 일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늘 진실하고자 한다. 만약 나의 걸음이 잘못된 것이라면 나의 신앙이 잘못된 것이라면, 주께서 돌이키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으며, 청소년 시절에는 성경을 연구했고 대학에서는 성경을 연구하는 동아리에 가입했으며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살아왔고 신학교에서 성경을 연구했으며, 이제 본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수 많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교통하기 위해 천 권이 넘는 책을 구했으며, 눈이 아플 정도로 연구하고 있다. 나의 이 모든 노력은 오직 하나, 나에게 교회를 개척하게 하신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심중에 있는 큰 숙제이기도 하다.
불광동에서 천막 짓고 목회하던 조용기 목사는 그의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의 절규를 몸으로 체험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는지를 가지고 씨름을 하다가 오중복음 삼박자 축복이라는 복음, 곧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복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이중표 목사님은 별세 신학을 통해 우리가 결국 이 세상과 이별할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마르틴 루터는 당시의 교회에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일깨웠고 그의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새 시대는 새로운 복음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로운 복음이란 새로운 예수가 아니다. 이미 예수님은 전에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시대마다 늘 성경을 오해한 것이다. 이 오해가 심화되면 부패가 일어나고 삶에 족쇄가 된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기보다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교회는 이미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는가? 대형 건물을 짓다가 부도나 교회가 팔리고 목회자들의 타락과 성도들의 과격한 언사가 이 세상에서 무례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상식이 부족하고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교회에 가면 좋은 것을 배우며 교회에 가야 사람이 된다던 시대, 교회의 집사라면 인정 받던 시대는 가고 목사도 불신의 대상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 시대에 누가 잘못이라고 찾아본들 무엇 하리요? 우리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지 진지하게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진리를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나를 드리기에 힘쓰는 저를 따라 성도들도 동참해 주시를 바란다. 그것이 이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는 비결이요 그것이 우리가 함께 힘써야 할 과제다.
여기서 다시 위의 문제를 짚고자 한다. 즉, 왜 성경은 두 말씀을 하는 것처럼 보일까?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해야 사람이 혼동되지 않을 것 아닌가? 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행위를 강조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먼저 알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세례 요한이 지적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한 것처럼, 세상 죄를 짊어지고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를 없이하시려고 오셨다. 그렇게 죄 사함의 은총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와 이전은 다르다. 예수께서 태어나심이 곧 신약, 곧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열림이 아니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가 새 언약의 시대다. 즉, 예수께서 사시던 시대는, 다시 말해서 십자가 이전에는 율법 아래서 사셨다.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갈라디아서 4:4~5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일깨워주기를 원하셨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디모데전서 1: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더 빨리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올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그대로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규정을 정해서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그러뜨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본래 율법의 기능을 부각시켜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정말로 율법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느냐? 그렇다면 눈으로 율법을 어기면 눈을 뽑아버려라. 손이 범죄하게 하면 잘라버려라. 너희는 하나님처럼 온전하라. 너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바리새인들은, 맞아 나의 눈은 이미 뽑혔어도 두쪽 다 뽑혀졌어야 했어. 내 손으로 지은 죄를 생각하면 나는 이미 불구자가 되어 있어야 했어. 내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가 있지?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내가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 생각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나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겠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는 거야? 나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인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이렇게 고백한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렇다. 그 때 이런 말씀이 필요하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람을 받으라. 이런 말씀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했기 때문이며, 빌립보 간수가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철저한 죄에 대한 인식,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시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율법 아래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17절에도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비슷한 질문을 한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때 주께서는 나를 믿으라 너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내가 화목제물이 되려고 왔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반문하신다.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느니라. 너는 계명을 아느냐? 그러자 그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을 줄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절). 예수님을 믿으려면 우리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 청년은 재물이 많기 때문에 그 재물이 있는 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그 생각을 버리지 않고서 오직 예수님을 붙잡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처럼 성경을 읽을 때는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하신 말씀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과 이후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말씀을 하지 않는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말씀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으며 죄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만을 붙들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고, 재물을 붙드는 바람에 예수님을 붙들 손이 없는 청년에게 먼저 손을 비우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백한다. “나에게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이모님도 그렇게 고백하시다가 비문에까지 그렇게 새겨달라고 유언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말씀에 부딪쳐 깨어지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른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 밖에는 나의 소망이 없나이다. 그 뿐 아니라, 부자 청년처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인생의 자랑으로 여기고 그것을 얻기 위해 달음질 하는 이들은 그 모든 것을 허비한 후에 비로소 궁핍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것이 탕자의 이야기가 아닌가? 질병으로 또는 인생의 고난으로 그리고 자신의 노력으로 죄 없는 삶을 살아보려다가 탕자처럼 두 손들고 주님 앞에 나올 때 주님의 은혜가 참 은혜가 된다. 그리고 한없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의 말씀과 구원의 은총을 감격하며 그 사랑으로 고난도 이기고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 보면, 내가 무언가 해야 구원을 받으며 죄 용서를 받는다고 오해를 할 경우도 있다. 이미 나의 힘으로 나의 의로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을 알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며 은혜 아래에 있다. 이미 십자가를 붙들고 있으며 주님의 은혜만이 나의 자랑이며 구원의 이유가 됨을 믿는다. 나는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구원이 나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을 받지 않으려 한다. 그들에게 주께서 하신 말씀 곧 너희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 또는 죄를 범하게 하는 눈을 뽑아 버리고 손을 잘라버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오해하면 자유를 얻은 성도가 자유를 잃고 다시 율법 아래에 있던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보다는 율법의 행위, 나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것처럼 부질없는 수고를 하려다가 인생과 신앙이 다시 기쁨 없는 절망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늘 신앙생활은 반복적인 초보에 머무르게 된다. 이에 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지적한다:
히브리서 5: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히 6:1~2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신앙의 초보를 버리고 단단한 음식을 먹으며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일군이 된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줄 수 있을 것 아닌가?
이제 처음에 제기한 죄 사함의 확신이라는 구절, 요한일서 1:9을 다루기로 하자.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죄 사함을 받는가? 우리의 죄는 어떻게 용서되는가? 성경을 알아보자.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흘림이 죄를 사한다. 그러므로 단 번에 자신의 몸을 드리신 예수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여기에 더할 것은 없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러면 요한일서 1:9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왜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죄를 사함 받는다고 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계속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를 구해야 죄 사함을 받는가? 이 말씀도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요한이 사역하던 시절에는 이단이 활동하던 시기다. 그 이단은 영지주의라는 것인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육체는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한이서 7절에는 이런 경고가 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그들은 스스로를 죄 없다고 여기고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들은 미혹된 것이다. 그들을 달래어 회개에 이르게 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요한은 이 서신을 기록한 것이다. 교회 안에도 그런 영지주의자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1장 9절은 스스로 죄 없다고 여기는 자들아, 나는 범죄하지 아니하였노라고 스스로 오해하는 자들아,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분이냐?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다는 성경말씀의 진리를 너희가 부정하려 드느냐? 그러나 너희가 돌이켜 만일 너희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면 주님께서는 너희 죄를 그의 피로 사하실 것이다. 그래서 너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요한은 2절에서 자녀들에게 또한 편지를 쓴다. 이것은 그들에게 구별된 권면을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구별해야 하듯이, 이렇게 이단 사상을 가진 이들을 권면하는 말을 또한 구별하여 스스로 올무에 빠지는 오해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성도의 회개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성도는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 요한일서 2장 1절~2절을 보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신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을 바라보고 죄 용서 받았음을 확신하고 감사하라. 그의 피가 나의 죄를 없애는 것이지 내가 죄를 지었음을 기억하고 자백해야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죄는 예수의 피가 모두 씻었을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도 다 씻으셨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도 않는가? 그렇지 않다. 죄를 지으면 우리는 괴롭고 또한 죄의 결과를 겪게 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의 죄를 시인하고 돌이켜야 한다. 회개라는 말은 본래 돌이킨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평생에 돌이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죄를 고백하는 행위가 나의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만이 나의 죄를 씻는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나의 죄 된 행위와 생각에서 돌이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권면한다:
야고보서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죄를 고백하는 것은 신뢰할만한 사람에게 하는 일이다. 이것은 고해성사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죄 사함은 오직 예수 보혈로 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죄를 서로 고백하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서로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으며 돌이키는 법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정의다.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가 회개를 가리키는 말인데 바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돌이켜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난다. 나도 청년의 때 죄의 문제로 고민이 될 때 제 은사 목사님을 찾아가 죄를 고했다. 자문을 구한 것이다. 그 때 은사 목사님께서는 내게 아주 소중한 말씀을 해 주셨고 저는 돌이킬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조언을 구한 이후로 저를 위해 계속 기도하셨으리라 확신한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우리는 좀 더 진리를 알게 되며 더 많은 자유를 얻게 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바르게 깨닫게 된다. 성경을 읽어도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우리 모두 이런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는 것을 목표로 하자.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