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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 뽀개기 삶과 믿음
송길원 목사
주말 휴일. 내겐 휴~ ‘일(요일)’이다. 헌신해봐야 헌신짝 된다. 하는 일마다 꼬인다. 슬픈 노래 가사는 다 내 이야기 같다. 이런 인생으론 자서전도 쓸 수 없다. 전화기 전원이 반나절 정도 꺼져 있었는데 부재 중 전화, 문자메시지 하나 없다. 티끌, 모아봐야 티끌이다. 이런 상태를 요샛말로 ‘멘붕(멘털 붕괴)’이라 한다. 어찌 나뿐이랴. 성경에 보면 믿음의 영웅들 역시 멘붕에 빠졌음을 본다.
이 짧은 구절에 현대 심리학의 핫 이슈들이 다 녹아 있다. 탈진(脫盡), 거식증이 있다. 낙심이 찾아들고 슬픔이 밀려온다. 쇠약도 있다. 외로움과 고독이 찾아든다. 불면증까지 덮친다. 사면초가다 젊어서의 불같은 성질이 재발된 듯해 더 절망스럽다.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귀신같이 찾아온 복부비만. 갑자기 내가 미워진다. 당뇨·고혈압·심근경색 등 온갖 병명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한다. 집중력이 떨어지며 종종 멍해진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내가 아니다. 늘어진 피부, 얼굴 곳곳에 피어난 잡티와 기미, 입 주위의 팔자 주름. 서글퍼진다. 도대체 중년이 무엇일까를 묻는다. 누군가 그랬다. 중년은 쉼표라고. 더구나 신은 종종 병을 통해 우리를 찾아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 많은 신음과 고통소리가 내 마음을 세차게 흔들며 두드리는 그분의 손길이었다니…. 앞서 인용한 성경 속 다윗은 사면초가의 삶을 어떻게 이겨냈던 것일까. 다시 성경을 뒤적인다. 내 행위를 깨끗이 하자, 내게 새 출발을 허락해 주셨다. 진정, 나는 하나님의 도에 늘 정신을 바짝 차렸고, 하나님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았다. 매일 나는 그분이 일하시는 방식을 유심히 살피며,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길을 걷는 듯,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내딛는다. 내 마음을 열어 보여 드리자, 하나님께서 내 인생 이야기를 다시 써 주셨다.”(삼하22장 21-25절)
‘다시’란 말에 쿵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거였구나! 이제는 중년기가 아닌 ‘갱년기(更年期)’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도 중의 도는 ‘내비도’라 송길원 목사
퇴근한 직원들의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대신 끄며 투덜댈 때가 있는가. 문단속이 안 된 빈 사무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며 한숨 지어 본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최고경영자(CEO)가 맞다. 종업원은 청소할 줄 모르고 불 끌 줄 모른다. 문단속은 더욱 못한다. 그러니까 종업원이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질 때 사무실로 달려오는 것도 CEO다. CEO는 근무시간을 넘겨 밤늦게 일을 해도 신바람이 난다. 주말에도 무엇엔가 골몰해 있다.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흥분할 줄 안다. 안개처럼 불안이 스멀스멀 가슴을 후벼 파고 황당한 일 앞에 한숨을 푹푹 내쉴 때가 있는가. 그렇다면 확실히 당신은 CEO다. CEO라면 스트레스로 불면의 밤을 보내야 옳다. 홀로 눈물 짓고 가슴을 쓸어 내릴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속 깊은 이야기도 감추고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나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그들보다 더 자주 투옥됐고, 매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맞았고, 죽음의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 벗들과도 다투고, 적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도시에서도 위험에 처하고, 시골에서도 위험에 처했으며,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의 위험과 폭풍이 이는 바다의 위험도 겪었고, 형제로 여겼던 사람들에게 배신도 당했습니다. 단조롭고 고된 일과 중노동을 겪고, 길고 외로운 밤을 여러 차례 지새우고, 식사도 자주 거르고, 추위에 상하고, 헐벗은 채 비바람을 맞기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 도(道) 중의 도(道)는 뭐니 뭐니 해도 ‘내비도(냅둬)’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병이 나니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나니 원망과 남 탓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단 한마디의 아포리즘이 있다. ‘왜 남의 잘못으로 나를 벌하며 살아야 하는 거지?’ 잘못은 그들이 저질렀다. 그런데 그 일로 벌을 받는 건 나와 내 가족이다. 기분 나빠한다. 자존심 상한다. 신경질이 난다. 화를 낸다. 왜 아침부터 그런 감정의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가. 참 웃기는 일이었다. 나는 배웠다. CEO에도 등급이 있다는 걸. 삼류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직원에게 쏟아 붓는다. 그래서 같이 죽는다. 이류는 온몸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이 죽어간다. 일류는 스트레스를 다를 줄 안다. 그래서 자신도 살고 종업원도 함께 산다.
‘에이씨(C), 이(E)것들이 참말로, 오(O)래 참는 데도 한계가 있지.’
나는 아직도 도를 닦고 있는 중이다. 그 도의 이름은 도 중의 도, ‘내비도’다.
글 한 줄이 무서워진 이유 송길원 목사
“송길원 목사님께. 지난번에 전화로 인사 나누었던 월간 페이퍼의 김원입니다. 어제 보내주신 자료들 잘 받아보았습니다. 제가 이틀 동안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기뻐하라∼베풀어라’의 글씨는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현재 그 네 마디의 말씀과 같은 삶을 실천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이 그와 같은 삶을 살지도 못하면서 그런 글씨를 쓰게 된다면 그 글씨에는 뻐근한 생명력이 담길 수 없다는 걸 제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가 그 말씀을 글로 옮겨 적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그런 삶을 살아보겠다는 결심과 각오로 쓰셔도 글에는 혼이 담길 터인데…하지만 존중하며 그날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네 마디’란 내가 쓴 졸시(拙詩) ‘내 영혼이 세상 일로 여위었다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감사하라.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처럼/ 기뻐하라.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베풀어라. 하늘천사인 것처럼/ 그리하여/ 기도가 호흡이 되고/ 감사가 일상의 언어가 되고/ 기쁨이 춤이 되고/ 선한 일이 네 삶의 유전자가 되게 하라.”
“토막 난 낙지다리가 접시에 속필로 쓴다/ 숨가쁜 호소(呼訴) 같다/ 장어가 진창에다 온몸으로 휘갈겨 쓴다/ 성난 구호(口號) 같다/ 뒤쫓는 전갈에게도 도마뱀 꼬리가 얼른 흘려 쓴다/ 다급한 쪽지글 같다/ 지렁이도 배밀이로 한 자 한 자씩 써나간다/ 비장한 유서(遺書) 같다/ 민달팽이도 목숨 걸고 조심조심 새겨 쓴다/ 공들이는 상소(上疏) 같다/ 쓴다는 것은/ 저토록 무모한 육필(肉筆)이란 말이지/ 몸부림쳐 혼신을 다 바치는 거란 말이지’. 글이란 게 본디 남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고난 주간의 토요일 아침, 자신의 교회 주보를 들여다보던 목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주일 설교 제목인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아래 쓰인 이름 때문이었다. ‘윌리엄 쿠퍼’. 설교 제목 밑에 새겨지던 설교자의 이름, 그런데 예수를 죽인 자가 자기 자신이라니….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아래 십자가 사건을 믿지 못한 채 목사가 된 사람이었다. 순간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통곡하기 시작한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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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