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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토요일
친구 전화가 와서 도봉산에 가자는데 일이 많아 거절하고 오전에 교재작업을 하고 떡국으로 점심을 먹었다. 딸은 학교에서 비빔밥 실습한다고 전화가 왔고 아들은 오후에 학원에 간다. 안산을 올랐는데 눈이 올 것처럼 잔뜩 날씨가 흐리고 산에서 내려와서는 김성우가 공사대금으로 받은 상가를 인수받으러 약수동에 갔다. 도봉산에 간 영식이가 방학동 시장에서 싱싱한 생선을 샀으니 청파동으로 와서 가져가라고 전화가 온다. 마음은 고맙지만 오후에 어머니 뵙는 일정으로 가지 못했다. 오늘 저녁에는 동네에 거주하는 아들의 친구들 일곱 가족이 경기도 광주 경안톨게이트 주변식당에서 모임을 한다. 참석인원이 약 28명이나 되는데 나는 못가고 아내와 아들과 딸은 호성이 엄마 차를 타고 먼저 출발했다. 저녁에 내가 없으면 아들이나 딸이 기가 죽을까 걱정을 하는데 역시나 빨리 꼭 오라고 아들한테 전화가 몇 번씩 온다. “아빠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못 간다. 밥이랑 잘 먹고 재미있게 놀고 오너라, 사랑한다” 라고 문자를 보냈다.
2일 어제 새벽 2시에 가족모임을 마치고 온 아내가 늦게 일어나 9시가 되어 떡국으로 식사를 했다. 수학을 배우러 가는 아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고 11시에 집을 나서 정릉에서 북한산 보국문을 올랐다. 중턱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들과 지나치다가 초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났는데 반가웠다. 한참을 걸어 칼바위 정상에 서니 1시가 되었고 깎아지른 절벽과 탁 트인 허공이 시원하고 장쾌했다. 다만 초겨울의 바람이 컵라면을 먹고 청하 1잔을 마셨어도 더 지체할 수 없을 만큼 매서워 바로 정릉으로 내려왔다. 병원으로 이동하여 어머니 뵙고 근처에 있는 사우나를 갔는데 입장객 마감이다. 주말이고 날씨까지 쌀쌀하여 손님이 많을 수 있겠지만 목욕탕이 만원이라니 별일도 다 있다. 집에 오니 볶음밥이 있어 아들의 간식용으로 남겨두고 김치찌개를 요리하여 저녁을 먹고 밤 11시에는 스프를 만들어 딸과 먹었다.
3일 월요일 새벽에 일어났는데 몸이 무겁고 아내도 배가 아프다며 곧바로 방에 들어가 눕는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아내가 나가는데 밥이나 차려 주고 갈일이지 원망을 하면서도 수업을 생각하니 어쩔 수가 없다. 오후 3시경에 아들이 학교에서 오더니 날도 춥고 시험 직전이라 힘들어서 그런지 바로 잠을 잔다. 경기학원에서는 방학시간표를 제출하라고 전화가 와서 월화수목 오후2시~5시30분까지 강의시간을 잡았다. 날이 쌀쌀하여 병원에는 못가고 집에 와서 아들과 치킨을 먹었다.
4일 영하 5도의 아침 날씨, 을지로에 가서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촬영하고 PD와 점심을 먹고 나오니 찬바람이 불어 양복 한 벌에 목도리뿐인 내가 감기가 들 정도였다. 5시에 어머니한테 가서 식사를 도와드리고 6시에 집에 와서 수학학원 가는 아들에게 9시경 집에 오는 길에 새우튀김 사서 먹으라고 1만원을 주었다.
5일 오늘 아침은 무국에 갈치튀김이다. 영하 6도로 어제보다 더 추운날 아들에 이어 딸이 학교에 등교한다. 일주일 후면 딸이 필리핀 영어연수를 가는데 이르다는 생각도 있지만 아내가 결정한 것이라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 지인들과 업무적으로 통화하고 점심쯤 안산에 오르니 날씨가 쌀쌀하여 사람도 없고 적적하다. 5시경 어머니한테 가니 우리를 위해 빨리 죽고 싶다며 절망적인 말씀을 하고 횡설수설 짜증까지 부리신다. 집으로 오면서 김밥을 사다가 먹었는데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어 오전에 산이나 오후 병원처럼 분위기가 냉냉했다.
6일 새벽에 교재 작업하고 오전에 촬영하고 1시에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었다. 눈이 오려는지 날이 잔뜩 흐리지만 나는 안산에 올라 오늘도 걸었다. 잎이 모두 떨어진 산은 앙상한 가지만 있을 뿐 휑하여 고민 속에 살아가는 요즘의 내 모습과 같았다. 병원에 가서 식사를 하시는 어머니를 뵈니 치매현상이 더 심해져 난감하기만 하고 밤에는 대설을 놓치지 않고 눈이 내린다. 집으로 오면서 회기역 포장마차에 들어가 국수와 닭발 그리고 소주 몇 잔을 마셨다.
7일 겨울에는 낮 시간이 짧기 때문에 하루가 더 빠른 것 같다. 오전 10시에 노량진 김정호 학원에 걱정되어 찾아갔다.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수강생이 많아 수익이 있을 법한데 비싼 임대료와 인건비 등을 제외하면 실질소득이 거의 없다며 고민을 토로한다. 처음 시작할 때 무리하게 큰 공간을 임대하면 어려움이 있으니 일단 적당한 강의실을 임대하고 수강생이 늘면 확장하라는 나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더니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대방동에서 개봉동 그리고 인천까지 지하철로 다닌 오늘은 일정이 많아 운동도 못하고 어머니 병원에도 못 갔다. 저녁에 집에서 삼겹살로 식사를 하고도 아들은 기말고사 딸은 필리핀 준비로 여념이 없다.
8일 주말이라 늦게 식사를 하고 11시에 북한산 비봉에 올라 다시 사모바위를 지나 문수봉으로 갔다. 철 난간을 잡고 정상을 넘어 대남문으로 향할 때는 어제 내린 눈이 쌓여 있어 미끄럽고 위험하기도 했다. 성곽에 기대어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는 중 바람이 불어 눈꽃가루가 날리는 장관은 색다른 겨울의 아름다움이다. 정릉으로 내려와 시내버스로 병원으로 이동하는 거리는 대통령선거 운동으로 어수선하여 산에서의 아름다움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병원에 가니 5일 후 연수를 가는 딸이 할머니한테 인사하러 먼저 와 있다. 돌아오는 3개월 후까지 어머님께서 무사하게 계시어 다시 손녀를 볼 수 있을지 바라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9일 일요일 새벽에 일어나 거실에서 바라보는 무악재 고개는 숨이 멎은 듯 조용하고 이따금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차량 몇 대뿐이다. 이른 새벽에 목욕탕에 간 아내와 딸이 8시가 되어 돌아와 떡국을 먹자는 걸 반대하여 밥을 만들어 먹고 점심을 떡국으로 해결했다. 저녁에 노량진학원 교무실에 들어가 보관했던 책과 개인물품을 정리하여 미성회관에 와서 영식이와 저녁을 먹었다.
10일 오늘부터 4일간 아들이 1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실시하는데 오늘은 첫날로 국어 한문 과학을 본다. 오전에 교재 작업을 하다가 생활 속에는 좋은 일과 어려운 일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파도를 넘듯이 매사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개인의 진정한 능력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11시에 홍제천으로 나가서 월드컵경기장 아래까지 10킬로를 달리고 돌아왔는데 언제나 달리는 동안에는 잡념이 사라지고 땀과 자신감이 생기어 좋다. 오후에는 어머니 병원을 갔다가 근처 복성식당에서 식사를 했고 저녁에는 우리 집에서 개인 수업을 한 규형이 어머니가 와서 감사 선물을 전달하고 더 늦은 시간에는 딸이 친구 집에서 보냈다며 전라도 김치를 들고 왔다.
11일 어제 가져온 김치로 밥을 맛있게 먹어서인지 잠을 푹 잤다. 이틀 째 시험인 아들은 오늘 영어와 음악을 보는데 아침에 노래까지 틀어놓고 음악공부를 열심히 한다. 어제 본 국어는 88점이라는데 아들은 국어보다는 영어나 체육을 훨씬 잘 하는 것 같다. 연세스포츠에서 운동을 하고 나오는데 과거 대일학원에서 함께 강의한 윤형기가 수학학원을 개원하였다. 성격도 좋지만 실력도 있는 선생으로 함께 차도 타고 다니고 돌을 맞이한 우리 딸에게 예쁜 옷도 사다 준 사람이다. 오후에 가산동 등기부 등본을 열람하니 다른 사람으로 소유권이 이전 되어 있다. 김성우나 임기홍의 몫이니 나와는 직접 관련은 없어도 정상대로 진행되어 그들이 어려움이 없어야 나도 채무관계가 수월하게 이어지는데 일이 어렵게 되어가는 형세다.
12일 신경을 쓰니 잠도 안 오고 잤다가 눈을 뜨니 새벽 2시다. 사람들이 갑자기 쓰러지거나 죽거나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아들이 영어를 잘 한다고 의기양양하더니 3개를 틀려 국어처럼 88점을 받았고 딸은 오늘 마지막으로 학교에 갔다가 내일 필리핀 연수를 떠난다. 광화문에 가서 변호사를 만나 가산동 아파트에 대하여 상담하고 을지로까지 걸어가는데 도시가 완전 잿빛이다. 오후에 동영상 촬영을 마치고 병원에 가니 변이 잘 나오지 않아 관장을 하셨다는 어머님께서 어제까지의 일은 기억을 못하고 나보고 자주 오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서운해 하신다. 집에 돌아와 내일 마지막으로 한자를 보는 아들을 지도하고 저녁을 먹었다.
13일 맑은 날씨의 목요일 딸이 필리핀 따가이로 영어연수 떠나는 날이다. 어젯밤은 안방에서 가족이 함께 잠을 잤다. 오전에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오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빕스에서 연수가는 딸에게 환송으로 점심을 사 주었고 4시 30분이 되어 시험 마친 아들까지 태우고 가족이 공항으로 향했다. 5시가 지나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었고 서해안 바다 포구에서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공항에 도착하니 옆집 창민이 가족과 이린이네 가족들이 먼저 도착해 있고 2시간을 기다리다 7시30분 수속을 위해 모두 대합실을 나섰다. 딸의 손을 잡고 건강하게 열심히 하라고 당부를 했지만 보내는 부모나 떠나는 자녀나 누구라도 서운한 것은 마찬가지다.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한 대가 머리 위를 날아오르고 집에 와서는 차를 두고 용산 전쟁기념관에 고등학교 송년회에 참석하여 늦게 돌아왔다.
14일 7시40분에 일어났는데 아내와 아들이 계속 자고 있어 서둘러 깨웠고 아들이 지각이라 밥도 거르고 차에 태워 학교에 내려주었다. 나가면서 창민이 아빠를 만났는데 필리핀에서 전화가 왔다면서 모두 잘 도착했다고 전한다. 집으로 돌아와 미역국으로 아침을 먹고 오전 내내 교재 작업을 하고 오후에 을지로에 나가 촬영을 했다. 병원으로 갈까하다가 날도 춥고 어제 늦게 들어와 피곤도 하여 집으로 들어왔다. 어제와 오늘 어머님을 뵙지 못해 염려하고 있는데 아들은 토요일인 내일 스키장에 가자고 조른다.
15일 밤사이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이른 아침까지 계속 내리고 있다. 어제 저녁에 딸한테 전화도 와서 잘 도착했다니 걱정은 덜었는데 자율 토요일이라 가방도 없이 학교에 가는 아들이 염려스럽다. 신내동으로 김장하러 가는 아내를 태우고 내부순환도로를 달려 아파트에 내려주고 병원에 들어가 어머니를 뵈니 올 시간도 아닌데 왔다면서 의아해 하신다. 오늘 집을 나설 때부터 산행 차림으로 나오긴 했는데 날이 춥고 점심쯤 김장김치를 싣고 돌아가야 해서 하는 수 없이 근처 찜질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12시에 김장을 마치고 집으로 가니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컴퓨터에 정신이 팔려 여러 번 식사를 요구해도 꿈쩍도 안하기에 야단을 하니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저녁에 아내는 망년회 한다고 나가고 아들은 외출하여 혼자 저녁을 준비하여 먹었다.
16일 평소에 일찍 일어나고 그런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나인데 일요일 오늘은 9시가 되어도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 배도 고프고 하루의 일정도 바뀌어 버렸다. 아들은 엊그제부터 재촉하는 스키장을 못 간다고 하니 화가 났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다. 또한 목소리를 높이는 나 때문에 짜증난 아내도 요란스럽게 그릇을 닦는다. 집을 나와 모래네 설렁탕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북한산에 올라 보국문과 대성문을 거쳐 영취사 아래로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조금 자고 대일학원 송년회에 참석했는데 60대 이상 선배들만 25명 모여 있어 젊은 선생들도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이원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저녁에 들어오니 안방에 누워 있는 아들이 아프다고 뒹굴거리는데 불만이 병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17일 교재 작업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촬영하기 때문에 잠시도 쉴 틈이 없다. 12월까지 40강을 마치고 보충 작업을 하면 2월 중에는 교재가 시판도 될 수 있겠다. 상가 건으로 관련자들과 전화를 하니 여러 가지 이유로 변명하고 미루고 발뺌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라도 나는 잘 극복할 것이고 정확하게 일처리를 해 나갈 것이다. 아들이 어제부터 설사한다고 식사를 안하더니 아침도 안 먹고 학교에 다녀왔고 오늘도 오자마자 다시 드러눕는다. 오후에 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뵈니 입원할 때와 외형상으로는 달라진 부분이 없고 시골에 계실 때와 달리 오히려 많은 대화를 나눈 지난 3개월이었다. 저녁에 창민이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더니 창민이가 필리핀 적응을 잘 못한다고 걱정을 하고 돌아간다.
18일 딸이 집에 없으니 휑하고 아들만 일찍 학교에 간다. 산에 가려다가 날이 흐리고 컨디션도 좋지 않아 연세스포츠 체육관으로 갔다. 체육관은 건물이 세워질 때부터 다니는 곳인데 널찍하고 시원하고 편안한 곳으로 오늘도 운동을 마치니 몸이 가볍고 마음도 상쾌하다. 점심을 먹고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에 경기학원 시간표 교정을 하러 갔는데 사장이 인사를 하고 반가워한다. 20년 전 청산학원 강의할 때 나의 전단지나 교재를 전문으로 맡아 처리하던 사람으로 작은 복사집을 지속적으로 도와주었는데 결국 이렇게 큰 인쇄소 사장이 되었다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동안 시련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완전 밑바탕에서 다시 시작하여 오늘을 만들었다며 눈물까지 보이며 한참을 이야기한다. 을지로에서 광화문으로 김성우 임기홍과 이동하여 후배인 변호사와 가산동 건에 대하여 상담하니 소유권이 이전 되어 쉽지 않은 싸움이라고 걱정을 한다
19일 대한민국 17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여야가 저마다 국민을 위해 희생한다며 양보도 없이 대격전을 치렀다. 이른 새벽에 아내와 함께 안산초교로 가서 투표를 하고 식사 후 아내는 논술교실에 아들은 학원으로 간다. 나는 산에 가려다가 선거과정을 보면서 오전을 보냈고 오후가 되어 병원에 가려고 내부순환도로를 바라보니 차량 정체가 극심하여 이것도 포기하고 6시에 개표방송을 시청했다. 여론조사부터 줄곧 격차가 있더니 출구조사 예측에서도 이변이 없이 이명박 후보가 정동영 후보를 20% 앞서 당선 확실로 나온다. 지난 15대 16대 대선에서의 극적이던 상황과 비교하면 맥이 빠지는 결과이고 밤 8시가 되니 당선자가 확정되어 나온다.
20일 밤새도록 대통령 당선자 뉴스가 자막을 차지하고 있다. 유효 투표에서 48% 이상을 차지한 이명박에 대한 찬사와 영웅담이다. 아침에 아들이 학교에 가고 나도 을지로에 나가 촬영하고 돌아왔다. 오후에 개봉동에서 상가 시행사 대표를 만났는데 어음금액 지불을 2008년 2,3월로 미루자고 한다. 3분의 1의 책임이 있는 조사장이 33%를 갚는다는 각서를 작성하는데 다른 사장은 못하겠다고 버티고 결국 조사장이 자신이 각서를 받아오겠다며 이야기를 마쳤다.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는데 신설동 1층에서는 이틀 후 토요일에 이사 나가겠다고 통보를 해 온다. 당장 월세를 못 받는 불리함도 있고 기존 보증금도 내 주어야 하고 새로운 임차인을 들이는데 다시 신경을 써야 하는 설상가상의 상황이다. 무엇을 먼저 해야 되는지 연속으로 밀려오는 어려움에 혼란스러움이 컸다.
21일 잠을 자지 못하고 아침을 맞으니 정신이 몽롱하다. 오전에 촬영을 하는데 목소리가 잠기어 NG도 여러 번 나고 마치자마자 피곤하여 바로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임기홍과 구파발에서 만나 북한산 입구 식당으로 들어가 금전문제를 이야기를 하고 나오니 6시가 되었고 밖은 벌써 어두워 졌다. 병원으로 갈려고 홍제동 내부순환 도로에 접근했지만 차가 막히어 그대로 집으로 왔다. 7시가 지났는데 아들은 TV를 시청하고 논술학원에서 피곤한 기색으로 돌아온 아내는 수강생이 줄어든다고 걱정을 한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일은 없는 것이고 무엇이든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법인데 그래도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아내도 대단하다.
22일 뒤숭숭하게 잠을 자고 일어나니 새벽 5시가 되었다. 컴컴한 거실에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잠을 잤는데 영식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꿈을 꾸었다. 아침식사로 깨워서 일어났는데 밝을 때까지 이렇게 혼곤하게 잠을 잔 것은 거의 없었던 일이다. 눈을 뜨자마자 영식이에게 건강하게 주말 잘 보내라고 문자를 보냈다. 아침에 아들은 컴퓨터에 열심이고 나는 정릉으로 가서 보국문을 거쳐 칼바위 정상에 12시에 올랐다.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내려와 바삐 신설동 건물에 가니 1층은 벌써 이사를 가고 없다.
미리 가져간 새로운 임차인 광고 현수막을 옥상부터 내려서 걸고 경기학원으로 가서 시간표를 보고 병원으로 가니 육사에 불합격한 조카 진우가 와 있어 용돈을 주고 위로했다. 병원에서 청량리까지 버스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다가 깜박 잠이 들어 노량진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몽롱한 정신으로 집에 들어오니 아내와 아들은 심야에 영화를 보고 새벽에 온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가족이지만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나 심정과는 정반대로 여유가 있고 한가한 모자지간이다.
23일 어제 노량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들어온 정신없는 나의 일상이었다. 오늘도 새벽 6시에 영화를 마친다는 아내와 아들을 태우러 차를 몰고 정동극장 앞으로 가서 기다렸다. 사업과 어머니 때문에 어려운 마음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40대 후반의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하여 체육관에 나가고 연일 산에도 오르는 나인데 오늘 이 새벽에 극장 앞에서 졸고 있는 내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아들이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하고 영화를 보면서라도 가급적 긴 시간을 공유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진동으로 가서 해장국을 사가지고 집에 와서 아침을 함께 먹었다. 오후에 아내와 아들은 명성학원 외고반으로 테스트를 가고 나는 안산에 올라 정상을 넘어 내려와 3시경 병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교보문고에 나와 있는 아내와 아들을 태우고 들어왔다.
24일 월요일인데 날이 포근하니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없다. 정식이는 지난달 빌려간 50만원을 말일까지 연장해 달라고 하고 나는 약속을 지키고 다시 빌려 가라는 생각이다. 김성우가 착하고 더 없이 좋은 사람인데 돈이 없으니 고통이 크고 추해지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하고 생살지권(生殺之權)이라는 돈의 위력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아네와 아들과 아파트 아래 호프집에 가서 닭강정을 두고 맥주를 마셨지만 어렵고 힘든 내 마음을 알 사람은 없다
25일 청주에 있는 동렬이 셋째 딸 백일이다. 크리스마스라고 하지만 분위기가 없고 19층 우리집에서 보이는 교회의 트리가 예전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차가 막힐까 봐서 일찍 나섰는데 의외로 한가하여 이천휴게소까지 단숨에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하고 동렬이 집으로 곧장 들어갔는데 모두 성탄절 예배로 교회에 갔고 장모님만 집을 지키신다. 12시 30분이 되어 용구 아빠가 와서 1시에 길성이 백숙집으로 갔다. 장인어른도 안오시고 재규네 식구도 성당일로 불참하고 나중에는 주인공의 엄마(동렬이 부인)까지 연주회 때문에 일찍 자리를 떠서 휴일날 서울에서 내려간 나는 결국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처가에 가서 장인어른을 뵙고 서울로 오는 중에 용인 자연농원을 가자는 용구아빠의 요청을 물리치고 그대로 집으로 왔다. 낮에 닭죽이 많이 남아 서울까지 가져왔는데 마음이 불쾌해서 그런지 길성이네 닭죽도 맛이 없다.
26일 아들이 학교에 가기에 2,3일 후면 방학이고 1학년을 마치니 힘내라고 격려했다. 소고기 무국으로 맛있게 아침 식사를 하고 교재 작업을 하고 촬영을 위해 을지로에 갔다가 집으로 왔다. 어려움은 한 번에 몰려 온다더니 요즘 온통 신경쓰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 그 중 신설동 1층 임대료도 월 150만원이니 소홀히 할 수가 없어 오후에는 거기로 나가 시간을 보낸다. 12월 하순이라 오후 4시가 되니 땅거미가 밀려오고 을씨년스럽기만하다. 오늘이 아버님 기일이라고 아내가 신내동에 간다기에 신설동으로 오라고 해서 함께 출발했는데 평소와 다르게 아들이 오늘은 군소리도 없이 따라 다닌다. 제사를 준비하는 동안 아들과 병원에 가서 어머니 뵙고 신내동으로 들어가니 안색이 좋지 않은 여동생이 혼자 와 있다. 매제와 조카들은 집도 가까운데 참석하지 않아 아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 판단하게 될 것이다.
27일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교재 작업을 하고 7시에 삼겹살을 잘게 썰어 넣은 구수하고 맛이 나는 청국장으로 아들과 식사를 했다. 날씨가 흐린 오전에 을지로에서 동영상 강의를 마치고 신설동에서 점심을 사 먹었다. 오후에는 건물 1층에서 계속 보내다가 약수동 김성우 사무실로 이동하여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28일 독해 원고를 만들고 아들과 식사하며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니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고 학교에 보냈다. 오전에 을지로에서 촬영하고 어제처럼 신설동으로 가서 점심을 사 먹고 나왔는데 차가운 날씨에 움추린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기온이 높다는 오후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 건물안에 있다가 3시경 근처 PC방으로 들어갔다. 금전과 원고 마무리 정리까지 2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사무실을 얻겠다는 젊은이, 식당하겠다는 사람 등 임대건으로 들락날락 했다. 7시경 집으로 오니 아들과 아내가 연말특집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아내의 질문에 멍청이라고 무심결에 말했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아들 앞에서 심한 소리를 한 내가 미안했다. 요즘 신경이 예민하고 정서가 삭막해져 나를 잊어가는 듯하다.
29일 북한산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정릉에 차를 두고 김이 나는 어묵을 먹고 보국문 대성문을 거쳐 일선사 입구에 도착하니 1시간 20분이 지났고 다시 형제봉 쪽으로 내려오다 바위에 앉아 컵라면과 김밥을 먹고나니 찬 겨울에 속이 따뜻하다. 산에서 내려와 병원으로 가니 어머님은 평소처럼 계시는데 누구라도 긴 시간 누워만 있으면 근육과 세포가 파괴되고 오래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찬 바람을 쐬다가 따뜻한 실내에 들어와서 그런지 잠이 쏟아지고 졸다가 눈을 뜨니 어머니께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병원을 나와 신설동 1층에 들어가 된장찌개를 시켜서 먹고 임대문의 때문에 몇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오면서 경기학원 들어가 1월초 개강상황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저녁에 처 외삼촌한테 아들 종찬이가 취업을 했다면서 청계천 근처에 방을 얻었다고 흡족한 기분의 전화가 왔다. 실력도 있을 것이지만 착하고 인상이 좋은 조카 그에게 행복한 미래가 열려야 할 것이다
30일 기온이 내려가 춥고 거실도 썰렁한 아침에 필리핀에 있는 딸한테 잘 있다고 전화가 왔다. 벌써 20여일이 지났는데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에 건강하게 보내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했다. 점심에 아들과 라면을 먹고 노량진에서 친했던 곽윤근 수학선생을 만났다. 인정도 많고 금전적인 여유도 있는 50대 중반의 선생인데 문제는 말할 때마다 사소한 거짓말을 잘하여 이따금 분위기를 서먹하게 만드는 안타까움이 있다. 저녁에 식사를 같이 하려고 상가 논술학원에 갔는데 아내가 수업중이다. 할 수 없이 아들을 불러 탕수육을 사 주고 나는 소주를 마시는데 수업을 마친 아내가 다짜고짜 아들을 데리고 나가 버린다. 황당한 심정으로 남은 술을 마시고 찜질방으로 가서 잠을 잔 울적한 밤이었다.
31일 2007년이 저물어 간다. 사우나에서 자고 들어와 오늘 마지막 원고를 준비하여 을지로에 나갔다. 45일을 달려온 시간으로 보람은 있었지만 당장 손에 들어 오는 돈이 없으니 촬영 마무리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후에 김성우 김정식 임기홍 김성만 김영식 등 여러 사람과 전화도 하고 또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며 보내는데 또 난데없이 신설동 2층에 물이 나오지 않아 영업을 못한다고 임차인의 전화가 온다. 1층 임대 때문에 신경을 쓰는 마당에 이제는 2층까지 문제가 생겼다. 화장실에 있는 수도의 물을 받아 일단 영업을 하고 내일 보기로 했지만 연휴에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집에 오니 TV화면 속에서는 제야의 종이 울리고 2008년을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