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2-1) 하나님의 세 위격과 사람의 세 부분/ 삼위일체 하나님
고후4장1-12절은 “1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아 이 사역을 맡았은즉 낙심하지 아니하며 2 오히려 감추어 둔 정직하지 못한 일들을 버리고 간교하게 걷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려졌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가려졌느니라. 4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생각을 가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오직 주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또 예수님으로 인하여 너희의 종 된 우리 자신을 선포하노니
6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7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9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이처럼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담는 용기(容器)>
4절의 “마음”은 원문에 따르면 “생각”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구절들은 이 세상의 신인 사탄이 믿지 않는 자들의 생각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4절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은 6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과 일치한다.
보배란 질그릇인 우리 자신을 비추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세 위격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 각 부분에 분배해 넣으신다.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분 자신을 사람 속에 분배해 넣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 유일한 목적은 사람이 그분의 용기(容器, 담는 그릇)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로마서 9장 21절,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분명히 나타난다.
우리는 단지 빈 용기이며, 하나님은 이 용기의 유일한 내용이 되기를 원하신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음료수 병을 본다거나, 전기를 담는 전구를 본다면 이 특별한 용기들이 특별한 용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아주 독특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또한 특별한 그릇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도 또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단 전구로 제조되었으면 전기를 담아야 하며, 병이 만일 음료를 담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무의미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담도록 만들어졌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담지 않고 우리의 내용이신 하나님을 모른다면 우리는 아무 의미 없는 모순덩어리일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든지,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든지, 얼마나 많은 부(富)를 소유하고 있든지 우리는 여전히 무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내용으로 담도록 지어진 용기이기 때문이다. 용기인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안에 받아 들여야 한다. 그것은 온 성경의 핵심적인 사상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담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을 내용으로 넣으시려면 그분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셔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 위격의 비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고전8:4,6; 딤전2:5).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는 단수인 “나”가 아니라 복수인 “우리”가 사용되었다. 창세기 1장 26-27절은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는 데에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셨다.
곧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분 이상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복수 대명사가 사용되어야 하는가?
창세기 1장에 있는 “하나님”은 복수로 사용되었다.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말은 “엘로힘”인데, 이 단어는 복수이다. 그러나 히브리말로 “창조하다”의 단어는 단수 술어 동사이다. 이것은 매우 기이하다.
곧 이 구절의 문법적인 구성은 주어는 복수로 되어 있으나 동사는 단수로 되어 있다. 아무도 이 문제를 논박할 사람은 없다. 그것은 히브리어에 의해 증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묻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가, 세 분이신가?
이사야 9장 6절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 그 이름은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이 구절은 전능한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어린아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린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의 예언에 동의한다.
여기에서 언급한 아기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를 말하는데, 그 아기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는 아들이 아들이신가? 하나님이신가?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불리는 아들이 아들이신가, 아버지이신가?
고후3장17절은 “지금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의 “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동시에 주님을 영이라고 말한다. 그 “영”은 분명히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라 불리우고, 주님이신 그 아들은 또한 영이시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하나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분의 세 위격을 통하여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세 위격이신 아버지의 위격과 아들의 위격과 성령의 위격이 없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넣으실 수 없다(분배).
마태28장19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한 위격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름들”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슈퍼에서 수박을 산다면 그 목적은 이 수박을 먹고 소화시키는 것이다. 곧 수박을 구매한 의도는 이 수박이 우리 안으로 분배되어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수박을 먹기 위해서는 구매한 수박을 여러 쪽으로 자른다. 그 다음 이 수박 조각들이 위(胃)로 들어가기 전에 즙이 될 때까지 씹는다.
수박이 조각들이 되고, 이 조각들이 즙이 된다. 자 그러면 내가 묻겠다. 그러면 이것들은 다른 세 가지인가, 아니면 한 가지인가? 여기서 아버지를 온전한 수박으로, 아들은 수박 조각으로, 성령은 수박즙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아버지는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또한 아들이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이실 뿐 아니라 또한 영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좋은 조각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즙이기도 하다. 일단 그 수박을 먹으면 수박은 없어진다. 본래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온 가족이 그 수박을 먹은 후에는 그 수박이 온 가족들 “안에” 있다.
요한복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계시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말한다(요한1:1-14). 하나님 자신인 이 말씀이 어느 날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곧 우리 “안”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분은 33년 반 동안 이 땅 위에서 사셨고, 마침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부활하신 후 그분은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에게 찾아 오셨다. 모든 문이 닫혀 있었는데, 그분은 몸을 입고 들어오셔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이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주님은 너무나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결국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호흡이 바로 수박의 즙과 같은 성령이다(요한20:22). 그렇다면 요한복음 이후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요한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끝 부분에서 이 놀라운 분은 어디에 계시는가? 주님은 마치 우리 안에 있는 수박처럼, 호흡인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 안에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 위격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해 넣으시는 것이다. 신격의 세 위격은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세 위격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결코 분배되어 들어오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수박의 예와 같다.
수박이 조각조각 잘려서 즙이 되지 않는다면, 수박은 결코 우리 안으로 분배되어 들어올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서로 다른 세 위격을 통해서만 우리 안으로 분배되어 들어오실 수 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