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씨 8세 안기종(安起宗,1556∼1633)
안기종(安起宗, 1556∼163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응회(應會), 호는 지헌(止軒).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어 장사라는 칭찬을 들었다. 선비의 집안에 태어났으나 책을 읽는 것보다는 무술을 연마하는 데 주력하였다. 원래 총명한 기질인 데다가 한번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끈기 때문에 문무가 겸전한 재목으로 성장하였다. 고을의 천거로 사옹원봉사에 제수되고 이어서 군자감판관이 되었다. 나라에 외환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군수물자의 남용을 막고 경비를 절감하여 병기의 수선과 확보에 진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이끌고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의 휘하로 들어가서 유곡(柳谷)·영천·화왕산성(火旺山城) 등지에서 적을 무찔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 때 당쟁의 제물이 되어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으나, 원래 행상에는 뜻이 없었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죽은 뒤에 논공행상에서 공적에 비하여 포상이 미약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925년 간행된 안기종(安起宗,1556∼1633)의 문집 『지헌실기(止軒實記)』
1. 서문 다음으로 탐진안씨 세보(世譜)라는 계통을 기록한 것이 있다.
1세 안원린(安元璘) - 안도(安堵) - 안경(安經) - 안종우(安從祐) - 안순민(安舜民) - 안윤옥(安潤屋) - 안인(安仁) - 안기종(安起宗) - 안택(安宅)으로 이어지는 계통이다.
2. 윤필병(尹弼秉,1730∼1810)이 지은 안기종(安起宗)의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公諱起宗 字應會 號止軒。安氏系出耽津。耽津之貫 始於文烈公諱元璘 分封。而入我朝有諱堵 以力學名於世 登文科 至司諫院右獻納 於公爲六代祖。生諱經 官正郞。諱乾 都事。經生諱從祐 正郞。生諱舜民 忠順衛。生諱潤屋 參奉 卽公之祖考也。考諱仁 參奉 贈正郞。世世以孝 著名其所居 曰孝子里。....
윤필병(尹弼秉, 1730∼18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중(彝仲), 호는 무호암(無號庵). 공조판서 윤이제(尹以濟)의 증손이며, 윤사용(尹師容)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필법이 곧고 발라서 11세 때는 강세황(姜世晃)이 그의 글씨를 보고는 왕우군(王右軍)의 골자(骨子)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자라서 경사(經史)를 익히고 백가서(百家書)를 공부하니 학문이 더욱 넓고 깊었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여 매양 시를 지으면 원근에서 전송(傳誦)하였다. 1765년(영조 41) 사마시에 합격하고, 176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성균관직강·예조정랑·지평을 역임하고 장련현감이 되었다. 그는 여기서 백성을 지성으로 사랑하고, 이속(吏屬)들은 엄하게 다루는 한편 사민(士民)들에게 학습을 권장하니, 문풍(文風)이 떨치고 치적이 현저하였다. 그뒤 1778년(정조 2)에는 장령으로서 상소하여 면군덕(勉君德)·파붕당(破朋黨) 등 4조를 진술하였다. 1786년에는 다시 친림춘당대 중시(重試)에 병과로 급제함에 따라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첨지중추부사·병조참지·안악군수·좌승지를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다. 그는 4년간 재직하면서 병기와 성첩(城堞)을 수선하고, 군사의 조련에 힘쓰면서 읍민 자제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르치니, 뒤에 청덕비(淸德碑)와 생사(生祠)가 세워졌다. 다시 대사간·형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대신(臺臣)의 무계(誣啓)로 파직되었다. 1800년에 정조가 승하하고 조정이 일변하여 이듬해에 당국자들이 신유사옥을 일으켜 반대파를 일망타진하려 하므로, 그는 호군의 직책으로 100여명을 거느리고 척사소를 두번이나 올렸으며, 1802년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의 가족을 노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서학배척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행동으로 파직, 문외출송되어 서울을 떠나 포천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3. 조정상(趙貞相,1727~?)이 지은 안기종(安起宗)의 행장(行狀) 기록도 남아있다.
公諱起宗 字應會 號止軒。安氏系出順興。文成公諱裕曾孫 文烈公諱元璘。采耽津貫始分。生諱堵 力學登文科 行司諫院右獻納 以孝行旌閭。生正郞經 都事乾。正郞生正郞從祐。正郞生忠順衛舜民。忠順衛生參奉潤屋 卽公之祖考也。考諱仁 亦官參奉。蓋自獻納公歷六世凡七旌孝也。....
조정상(趙貞相,1727~미상)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증조는 조관(趙琯)이고, 조부는 조석제(趙錫悌)이다. 부친은 조래한(趙來漢)이고, 모친은 윤이주(尹以周)의 딸이며, 부인은 이대유(李大愈)의 딸이다. 1763년(영조 39)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 26위로 급제하였고, 같은 해 11월에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로 임명되었다. 1770년(영조 46) 11월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고, 이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1772년(영조 48) 3월에 품고 있는 생각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기현(長鬐縣)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4월에 풀려났다. 1778년(정조 2) 10월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고창현감(高敞縣監)‧곤양군수(昆陽郡守)‧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788년(정조 12) 10월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윤시동(尹蓍東)이 기강을 무너뜨린 일로 상소를 올렸으나 상소에서 꾸짖는 말을 함부로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서 체차(遞差)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