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몰랐던 고향의 소중함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점점 더 커지는 것은 왜일까?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라고 소개되는 강화도가 고향이라는 자부심은 타향살이하면서 서러움을 격을 때마다 더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해 준다.
몽고군이 고려를 함락했을 때에도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해서 32년간 그 절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라는 자그마한 섬은 외부의 도움없이도 자족할 수 있는 오곡백과가 생산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선교사 달레가 쓴 천주교회사를 읽어보면 "전국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데 강화도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했다"고 쓰고 있다. 어렸을 때에는 그런 고향에서 살면서 얽히고 섥힌 가족사의 애환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고향을 도망치듯 출가도 했었지만 이제 가족이 생기고 나니, 게다가 아들 현우에게 우리 가족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되새기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가위 명절에 고향을 찾는 것이 귀소본능이겠지만 이런 뿌리에 대한 확실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신념은 변함이 없다. 비록 현우가 지금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자신의 조상이 얼마나 좋은 고장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는지 자긍심을 갖게될 날이 올 것을 믿기에.....
우리 가족은 추석차례를 지내고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서 연미정을 찾았다.
선학골 고향집에서 1KM 정도 떨어진 연미정으로 가는 길은 고성동을 지나야 한다.
연미정 안내 표지만 창원황씨 장무공파 종친회가 세워놓은 것이다. 아직 군에서는 연미정의 중요성을 모르는 걸까?
연미정의 역사적인 가치는 아마도 세월이 가면 더욱 커질 것이 틀림없다. 지금은 남북으로 갈라져서 해병대 소초가 자리잡고 있는 월곳포구는 남북분단이 있기까지 삼남지방의 배들이 서울을 갈때 반드시 들렀다가 밀물에 맞추어서 서울 마포나루에 닿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 배를 타고 서울을 다니셨다는데.....우리는 언제나 그럴수 있을까? 그래서 월곳포구에는 내가 어렸을 적에 주막이 있었고 막걸리를 파는 주모가 있었다.
장무공황형장군 택지비, 묘소는 조금더 내륙으로 들어가서 대묘동에 자리잡고 있다. 전국의 모든 황씨들이 이곳으로 차례를 지내러 몰려오고 있다.
강화도 나들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제법 잘 디자인되어 연미정 입구에 세워져 있다.
강화도 사투리로 인사하는 안내문. 강화도 사투리는 개성사투리와 비슷했다는데..... 실제로 강화도에는 개성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인삼도 더 유명하게 되었다.
자년들의 손을 잡고 강화도를 걸어보는 것은 그 자체로 박물관 기행이 될 것이다. 나도 현우를 데리고 어느날 나들길을 걸어볼 것이다.
연미정 성벽 옆으로 보이는 북한 땅 오늘은 더 슬퍼보인다.
순수한 어린이는 어른들의 그 마음과 다르다. 그래서 자연을 닮은 마음인 것이다.
이런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바위틈에 솟아난 소루장이 풀도 찍혀있다.
옷깃을 여며야 한다. 바람이 추워서.....
연미정의 위용 최근에 개보수를 해서 말끔하게 단장되었다. 6.25 전쟁 때 북한군의 폭격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국방군의 폭격인지 모르지만 파괴되어 있었던 것을 우리 어렸을 적에도 보았었다.
대목수의 내 눈에는 이런 짜맞춤 결구방법에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 판대공과 중보 동자주 그리고 대보의 결구법이 앙증맞다.
충량의 맞춤 그리고 중도리의 왕찌맞춤
우물반자도 해서 정자의 품위를 높였다.
추석 전날 서울 지방에 물폭탄이 내렸는데 그 물이 지금은 다 이 바다로 흘러와있다. 사리 때여서 물이 풍성하게 보인다. 이곳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어서 각종 물고기가 풍성하기로 유명하다.
첫댓글 ^^*~~ 다시보는..내고향 땅! 우리의 고향! ^^ 그냥 맹목적으로 보았을 때와..같은값이면...이렇게 글로 모아 펼쳐보이면.. 그 맛이.. 그 멋이..참으로 감칠맛이로구나! ^^*~~
^^* 시간! 바로 지금 이 시간은 순간의 찰나일 뿐! 그러나... 그 찰나를 요렇게 멈추게 해보는... 사진...있는 그대로의 복사 . ! 그것만이 지나간 세월을..시간을 돌려놓는 요술쟁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