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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목사들의 유사성
원래 바리새인들이란 히브리어의 파로쉬 동사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며 그들을 히브리어로는 파루쉼 혹은 페루쉼이라고 불렀다고 생각됩니다. 그파로쉬는 스스로를 성별시키다 구분하여 선언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고 믿어집니다.
이들 바리새인들이 형성된 시기가 말라키가 쓰여진 이후 아직 신약이 시작되기 이전의 신구약 중간기에 형성되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마카베의 반란이후 유다 마카베의 후계자 요나단시대에 드러났다고 요세푸스는 증언하며 요한 히르카누스의 시대에 크게 융성하였으므로 헤스모니안 왕조시대에 형성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헤스모니안이란 주전 165년경 마카베의 반란이후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서 유다의 지도자가 되었던 시기를 말하며 헤롯은 그 자손들의 딸에게로 장가들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말렉족속, 하만 등처럼 에돔족속으로 이스라엘과 반하는 족속이었지만 성전을 중건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환심을 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3개의 신앙인 그룹들로는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에세네인들이 있었으며 침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 쿰란 공동 생활체등은 에세네인이었다는 것이 메시야 유대인들의 해석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이나 정권 권력자들과 갈등을 상당히 갖고 있었으며 반면에 그들은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권력자들로서 상층부를 형성하였으며 그들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나, 제사장들의 권위에 중심을 두었고,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속죄일에 희생제사가 없더라도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진정한 회개를 하나님께 전달할 수 있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7월 1일의 나팔절을 새해의 첫날로 바꾸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가르치는데 치중하여 회당들을 곳곳에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율법을 해석으로 다르게 가르칠 권위를 갖고 있다고 믿었으며 사실상 율법을 변개할 권위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영과 천사를 믿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기본 교리에 대해서는 별로 반대하시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몇 명의 증인들 앞에서 서원하여 바리새인들이 되었지만 샤마이 파와 힐렐파라는 학파들 아래서 공부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 사도 당시에 힐렐파의 정상인 학자가 가말리엘이었으며 그 아래서 바울이 공부하였습니다. 샤마이파는 이혼에 대하여 엄격하게 간음의 귀책사유를 강조한 반면 힐렐파는 여성들의 인권을 존중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에 비추인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들로만 보이는데, 실제는 인간으로서는 할수 있는 최상의 것들을 행하였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인간적, 도덕적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기준에 어림도 없으며 그 의는 하나님 앞에 넝마 헝겊보다도 못한 것임을 지적하셨다고 믿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항상 대립관계에만 계셨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사한 적도 있고( 룩 7:37) 헤롯이 당신을 찾으니까 여기를 떠나소서 하고 권하기도 하였고( 룩 13:31) 가말리엘 일행은 제자들의 권리를 인정하기도 하였으며 (행 5:38) 바울이 재판받을 때 사두개인들에 맞서 바울에게서 악을 찾아볼 수 없다며, 바울을 적극 옹호하기도 하였습니다(행23:9) 실제 여러 문서들을 종합해보면 바리새인들은 그다지 위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들이 거룩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엄중한 책망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 사회 스스로에게 돌려야 하며 그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이 글에서는 목사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너무나 흡사한 행동이나 처신을 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에 관하여는 좀더 공부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결국 우리가 알게될 것은 바리새인들이 뿔달린, 특별히 괴물스러운 위선자들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잘 처신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인 사람들 마저도 위선자들로 판명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믿어집니다. 이제 바리새인들과 목사들을 비교해봅니다.
1. 회당의 머리에 앉아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쉐의 자리에 앉았으니 ( 마 23:1)
오늘날 목사들은 각 교회의 머리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말은 그저 이론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목사가 반대하는데 되는 일이 없고 목사가 고집하는데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목사의 시조는 으뜸되기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요삼9) 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셔야 할 자리에 앉아있는 인간은 내려와야합니다!
2. 랍비님, 목사님 하고 불리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랍비, 선생님이라 불리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에게 예수님의 명령대로 < 형제님> 하고 불러보십시오. 그러면 펄쩍 뛰는지 뒤로 나자빠지는지 살펴보십시오! 교회에서 목사에게 형제라고 예수님의 명령대로 (마 23:8) 불러보시고 그래도 그 교회안에서 생활하는데 아무 불편이 없으면 그 교회는 훌륭한 교회입니다. 반대로 예수님 명령대로 목사에게 형제라고 불렀더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목사에게 찍혀서 다니기 거북하다면,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하는가? 인간 목사나 그 졸개들의 눈치를 두려워 해야 하는가?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제모임은 그점에서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라는 직책이 형제모임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3. 가르치기를 좋아합니다. ( 선생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행실은 바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말하는 대로 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23:2) 다만 그들이 실제로는 자기들이 가르치는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는 옳게 행하라고 가르치므로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저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지키고 행하되 저희들의 행함을 따라서는 행치 말라. 4 저희는 중하고 지기 힘든 짐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위에 지우고는 자기들의 손가락으로도 그것들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 마 23:3-4)
부가가치세 한번도 내본 적이 없는 목사가 어떻게 다른 사업자들에게 부가가치세를 충실히 내십시오 하고 가르치겠습니까? 그들은 스스로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 살후 3:8-12)
그들은 가르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랍비라 불리우기를 좋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라는 직책은 목자와 교사의 역할을 합하여 행한다는 뜻으로 만들어낸 직책으로 보입니다만 성경에는 그런 직책이 없었고 다만 그런 은사들이 있다고 가르칩니다(엡 4:11) 성경 어디에도 목사 직책을 가진 사람이 보이지 않으며 다만 교회에는 두가지 직책이 있는데 그 하나는 장로이며 다른 하나는 집사였고 장로는 감독으로도 불리웠음을 알수 있습니다(행 20:17, 28)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기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불리워지지 말라. 이는 너희 선생은 단 한 분 곧 그리스도뿐이요,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기 때문이니라.>> ( 마 23:8)
4. 상석을 좋아합니다.
바리새인들도 어떤 자리에서든 상석을 좋아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잔치와 회당에서 상석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23:6)
<< 만찬에서의 으뜸자리와 회당에서 으뜸자리를 좋아하고>>
한국 교회의 목사들 또한 총회장이다 감독이다 하는 칭호들을 갖기를 열망하여 감투 싸움에 아수라장이 되는 총회가 많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교회안에서도 목사는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 합니다. 제가 대구 어느 큰 교회를 가니까, 목사는 그랜져, 원로목사는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들의 변명은 교인들이 하나 사주어서 탄다고 하겠습니다.
장로가 좋은 차를 타면 목사는 당연히 더 좋은 차를 타야 합니다. 이런 탐심의 문제가 한국교회에 많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5. 십일조를 중시합니다.
마 23장
23 너희에게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파리새 위선자들이여 ! 이는 너희가 박하와 향미료와 커민을 십일조로 드리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 것 곧 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음이라. 이것들을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며, 그것들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루카 18:12
12 저는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며 제가 소득하는 모든 것에 대해 십일조하나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인 자격 정지시킨다고 협박합니다!
예수님은 십일조 잘한다고 칭찬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십일조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폐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토지를 분배받지 않았던 제사장지파 레위인들에게 지불되던 보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희생제사를 드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더 이상의 희생제사가 필요없게 되었으며 그 십자가 희생을 믿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은 그분의 피와 죽음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면 자기 스스로에게 지불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6. 돈을 좋아합니다
루카 16장
14 저희가 이것들 모두를 듣고서 파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으므로 그분을 조롱하니
오늘날 목사들도 돈을 무척 좋아합니다. 각종 촌지, 심방촌지에다 요즘 목회하면서 연봉 1억도 못벌어? 하고 돈 자랑합니다. 충남 논산의 누가 헌금하려는데 교회 승합차가 필요할 것같아 승합차를 기증하겠다고 하니까, 현금으로 기부하라고 하여 갈등을 겪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무튼 각종 헌금을 만들어서 백일 헌금, 결혼 감사헌금, 합격 감사헌금 등 수백가지 헌금들을 만들어내어 교인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첨단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 바로 개신교회들이며 그들의 두령들이 바로 목사들이고 그 헌금의 40%가 교역자들 비용으로 쓰이며 그 교역자 비용의 대부분이 목사들의 급여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자기들에게 돈 바치라는 말입니다.
목사들이 십일조를 열심히 내라 하면서 십일조를 잘 내면 축복받는다고 강조합니다. 정작 그렇게 십일조로 들어온 헌금으로 자기가 간음한 여인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준 착한 목사님도 여전히 건재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통계도 교역자 비용이 40% 이고 한국처럼 자선 비용은 0.7%- 1% 미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헌금의 목적이 교회안의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후 8:14-)
7. 뇌물로 일을 잘 해결합니다
가롯 유다에게 은 삼십을 준것도 사실은 그를 돈으로 사들인 것입니다. 정의의 일을 하는 대가로 일당을 지불한 것이 아니며 몰래 지불한 것입니다. (마 27장)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에게도 많은 돈을 지불해주었습니다( 마 28:12)
한국의 목사들은 기도원 부지를 구입하여 농지를 건축용지로 용도 변경할 때에 군청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어서 지목을 바꾸기도 하고 교회 건물 지을 때에 구청 공무원에 뇌물을 주어 도로부지를 무단 침범하기도 합니다. 각종 인허가에 교회 목사들이 뇌물주는 일은 장로들을 통해서 하기도 합니다만 본인들은 뒤에 숨는다 하여 하나님이 그 사실을 모르시겠습니까?
8. 구원을 어렵게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원을 어렵게 하였음을 예수님은 지적하셨습니다.
마 23장
15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파리새 위선자들이여! 너희는 하나를 교인으로 삼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그가 되었을때는 그를 너희보다 배나 지옥의 아들되게 하는도다.
오늘날 목사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열심히 전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들이 흔히 전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구주로 모시며 그분의 생명을 소유하게하여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교회에, 자기 교회 예배당에 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목사숭배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변명하기를 자기네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언젠가는 말씀 듣고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교회를 10년을 다녀도 참 복음의 의미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기 보다는 1) 성수 주일 2) 십일조 잘내시오 3) 새벽기도열심 4) 목사섬기기, 목사가 잘못해도 순종해야 함 5) 세례면 족하다 6) 크리스마스 부활절 섬기기 7) 성전건축 등등 바빌론 종교, 잡신교 풍습을 열심히 지키게 합니다.
성수주일이라는 말은 성경어디에도 없습니다. 십일조는 폐해졌습니다. 새벽기도는 한국외에는 있지 않습니다. 목사라는 직책 자체도 없고 누구를 섬기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잡신 풍습이며 이스터는 바빌론 여신이름입니다. 이스터 축제를 번역하여 부활절로 모입니다만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절기입니다.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며 벽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건물은 몸된 교회가 소유하는 부동산일 뿐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은 누군가가 죄사함, 거듭남, 구속, 영원한 생명, 구원을 전하면 그를 이단이며 구원파라고 정죄합니다. 오늘날 목사들 스스로가 죄사함과 속죄, 구속과 구원을 전하지 아니하고 건물숭배, 돈신숭배, 종교행위 등을 전하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하며 구원의 멧세지를 전하는 것이 무척 불편한 사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9. 위선으로 가득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된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가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만 특히 목사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수많은 위선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 23장
13 너희에게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파리새 위선자들이여! 왜냐하면 너희는 사람들앞에서 천국문을 닫고 너희는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들어가려하는자도 들어가기를 단념하게 하는도다.
10. 일반인들과 다른 의복을 입습니다.
저희는 저희 모든 행동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나니 경문 옷깃을 크게 늘리고, 저희 겉옷의 옷깃을 크게하고( 마 23:5)
오늘날 목사들은 예복을 입는데 그 목적은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입음으로서 거룩하게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무언중에 < 나는 너희와 다르니라> 하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러한 목사들의 예복을 파는 어느 사이트인데 그들은 성의(聖衣)라고 부르며 가운들을 팔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이미 공지된 글로 설명드렸듯이 목사제도 자체가 성경에 없으며 교회의 어느 직책을 가진 사람이 특별히 다른 옷을 입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사가운을 구약시대의 제사장들 복장에 비유하여 주장하는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이 소잡고 양잡는 시대입니까? 오늘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제사장들이 아닙니까? 벧전 2:9, 계 1:6, 계 5:10절을 읽어보십시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제사장들인 < 만인 제사장제도> 가 바로 신약시대의 체제입니다!
목사들은 예배당에서 가운을 입습니다만 밖에 나갈 때는 약식으로 목에 흰 칼러를 붙인 소위 < 로만 칼라> 를 입습니다. 이 로만 칼러라는 말은 바로 그것이 로마 카톨릭에서 유래했음을 가르쳐 줍니다. 바빌론 종교는 버가모로 본부를 옮겼습니다( 계 2:13) 그 다음 그곳의 에트루스칸 족이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하여 그들이 약칭 투스카니 족속을 형성하고 그들중 똑똑한 놈 하나가 나섰는데 그가 바로 쥴리어스 시져였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바빌론 최고제사장인 폰티펙스 막시무스 칭호를 사용하였고 그뒤로 그라티안 황제때까지 계속되다가, 그가 다마수스 1세 로마 감독에게 그 직책을 넘겨준 뒤로 기독교 탄압의 중심이 로마 제국에서 로마 카톨릭으로 바뀌었으며 그리하여 지난 1630년 동안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를 탄압하는 배후 조종자들이며 본부로서 활약해왔습니다. 그들의 제사장들이 입던 복장이 바로 오늘날 목사들의 예복들이며, 그 약식 복장이 로만칼라입니다.
이러한 복장은 스바냐 1장 4절의 그마림들의 복장과 완전 일치합니다만 색상은 좀더 다양해졌을 뿐입니다. 바알 우상 제사장들은 검은 예복을 입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크마림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위선자 목사들이 예복을 입으면 그 속의 더러운 위선과 가식이 사라지겠습니까?
예수님과 12제자들이 어떤 유니폼을 입고 다녔습니까? 예수님은 다만 그 복장에 흔한 유대인들이 율법에 충실하여 그러했던 것처럼 칫칫을 달아서 성경 말씀을 그안에 넣고 다녔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러한 옷술을 일부러 크게하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무언가 일반인들과 다르게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그 점에서 오늘날의 목사들과도 같습니다.
11. 회칠한 무덤입니다! ( 마 23:27)
12. 신학교 출신들이 많습니다.
가말리엘은 힐렐파의 정점이었으며( 행 5:33, 22:3) 유대인 바리새인들중에는 샤먀이파와 힐렐파 ( 행 5:33, 22:3) 로 크게 대별되는 학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신학교가 없었습니다. 두란노 서원은 독재자 전제군주들이 세운 학교들로서 바울은 그곳에 가서 전도했을 뿐입니다.
13. 참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 마 23:30-31, 35)
자기들 교단에 안맞으면 이단이 됩니다. 목사제도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다고 말하면 그는 이단으로 몰립니다. 십일조를 안내면 교인자격 정지시킨다고 하는데 목사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14. 성경을 곡해합니다. 성경에 없는 것은 만들어내고 성경에서 명한 것은 안지킵니다.
침례를 세례로 바꿉니다. 저들은 침례도 무방하고 세례도 무방하다고 합니다. 주님의 만찬을 자주 실행하라는 말씀에서 자주라는 단어를 빼버리고(고전 11:25, 26) 일년에 두어번으로 바꿉니다. 머리수건은 안써도 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대신 크리스마스, 부활절 등은 성경에 없지만 지어내어 지킵니다.
15. 율법을 지키는 척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 요 7:19)
오늘날 한국은 율법이 폐해졌다고 가르치는 목사들로 가득합니다.
율법은 폐해지지 않았으며 그것의 일부인 성전 제사법이 예수님 십자가로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나머지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으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도덕법 형사법이 준수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시고 또 그것이 안지켜진 부분에 대해서는 주님의 심판대에서 심판하시고 형벌하시며 보상하심으로 율법이 실행될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은 성경의 대의인, 하나님의 정의, 정의의 심판, 의로운 판단과 분별, 믿음, 긍휼,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가르치는데 치중하기 보다는
십일조, 새벽기도, 목사에게 순종, 성전 건축, 주일 성수 등에 치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할례, 십일조, 건물중시, 안식일 성수, 금식기도 등에 치중하였습니다.
16.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부자, 권세가를 우대합니다.
( 약 2:6, 룩 21:2등에서 추론)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이 우대됩니다.
이 부분에 관한 구절들은 간접적입니다만 이것은 현실이라고 믿어집니다.
17. 악하고 음란한 세대
바리새인들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였습니다|(마 12:38, 23:25)
오늘날 목사들은 스스로가 간음하고도 파렴치하게 여전히 목회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간통하고 이혼하는 것쯤은 쉽게 변명합니다.
18. 그들의 누룩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 16:12
12 그제야 그분께서 빵의 누룩이 아니라 파리새들과 사두캐들의 교훈을 조심하라 이르셨음을 저희가 깨달으니라.
예수님은 신약교회에 대하여 니골라당의 교훈과 행위들을 증오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계 2:6, 15) 이 니골라당이란 교회안의 지배계급을 말하며 그들이 바로 오늘날 개신교에서는 목사들이며 천주교에서는 사제 혹은 주교등의 벼슬들을 가진 자들입니다.
니골라당은 성경을 수시로 비틀어서 해석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19. 정치 권력,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의인들을 핍박합니다.
빌라도의 힘을 빌려 예수님 처형
헤롯의 힘을 빌려 예수님 심문
로마 총독에게 제소하여 사도 바울 핍박
헤롯의 힘을 빌려 야고보 처형
오늘날의 목사들은 국가 조찬기도회, 신사참배, 선거때 십알단. 등에 참여함으로
권력에 아첨합니다.
20. 과부의 재산을 삼킵니다!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만들어서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부의 재산을 삼킵니다. 막 12:40
룩 20:47
47 그들은 과부들의 집들을 삼키며, 보이기위하여 멀리서 기도하나니, 그들은 보다 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고아나 장애인은 나오면 다른 부자들이 안나오니까 나오지 않는게 좋다고 합니다.
21. 성경에는 근거가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바리새인이라는 직책은 없습니다. 신구약 중간기, 특히 마카베 무렵에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성경에 목사라는 직책은 없습니다. 교회안에는 오직 두 종류의 직책이 있으며 장로와 집사가 그들입니다. 장로는 감독으로도 불리웠으며 사도 요한과 베드로는 스스로 장로들이라고 소개합니다(요이 1절, 요삼 1절, 벧전 5장 1절)
엡 4장 11절에 나오는 목사라는 단어는 포이멘이라는 헬라어를 통상 목자로 번역하다가 목사직책을 제조해내기 위해 그릇 번역해놓은 단어입니다.
22. 형제라 불리우기를 거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동등한 형제라 불리우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마 23:8)
목사들에게 그냥 아무개 형제라 한번 불러보십시오. 그들은 펄쩍 뜁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 히 2:11) 예수님 보다 더 높은 사람들이 목사들입니다!
마태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불리워지지 말라. 이는 너희 선생은 단 한 분 곧 그리스도뿐이요,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기 때문이니라.
23. 순교자 때에 있었으면 순교자 편에 있었으리라고 착각합니다
마 23:29-31
29 너희에게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파리새 위선자들이여! 왜냐하면 너희가 선지자들의 무덤을 짓고 의인들의 묘를 단장하며 30 가로되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시대에 있었더면, 우리가 저희들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데에 참여하는 자들되지 아니하였을텐데’ 하도다 31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라.
오늘날 목사들은 신사참배에 대하여 참다운 회개를 한적도 없습니다. 일제시대 대부분의 목사들은 신사참배하며 일본 여신 아마데우스, 천조대신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김익두, 한경직 등이었습니다.
그 신사참배에 대하여 회개하거나 인정한 적도 없으면서 마치 그들은 그 어려운 때에도 교회를 지키느라 고생했다고 변명합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해도 그들이 소수이면 걸핏하면 이단이라 비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순교자의 편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24. 세상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좋아합니다-
진리를 위해 싸움으로 말미암아 이단으로 불리우는 것을 각오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옳은 비판을하거나 성경에 충실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걸핏하면 이단으로 몰아부칩니다.
25.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착각한다 – 아브라함의 자손
마 3장
7그가 많은 파리새인들과 사두캐인들이 그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저들에게 가로되, 독사들의 새끼들아! 누가 너희에게 장차오는 진노로부터 피하도록 가르치더냐? 8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에 당연한 열매를 맺고 9 스스로 아브라함이 조상이라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은 이 돌들로부터도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일으킬 수 있느니라.
그러나 오늘날 설교하는 목사들 중에는 여전히 죄사함의 확신이 없어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그 거짓 변명들과 해명이 여전히 혀를 내두를 정도로 둘러치기에 능숙하고 교활한 목사들이 수두룩합니다! 이들이 바로 마 7장에서 말하는 바 선지자 노릇하던 거짓 신자들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거듭남의 체험이 없으므로 들어오는 신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구원상담을 하는 대신 어떻게 종교생활하며 어떻게 십일조 생활하며 어떻게 목사섬기기 할지를 가르칩니다. 이들은 예배당 다니기 시작하면 구원얻은 줄로 착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착각하게 만듭니다.
마 23장
15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파리새 위선자들이여! 너희는 하나를 교인으로 삼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그가 되었을때는 그를 너희보다 배나 지옥의 아들되게 하는도다.
이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도하기 보다 목사 종교를 전도합니다! 목사숭배, 목사에 무조건 복종을 가르치는 증거는 소위 청교도
영성수련원이라는 곳에서 아무개 목사의 설교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그런 목사는 징계받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인기있는 강사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사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라는 증거입니다.
26. 소경된 인도자들
마태 15장
이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와 가로되 “ 파리새들이 그 말씀을 듣고 실족한 줄을 아시나이까? ” 13 그분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아니한 식물마다 뽑힐 것이니 14 저희를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면서 소경들의 인도자들이라.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태 23장
24 소경된 인도자들이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여! 25 너희에게 화있으리로다, 서기관과 파리새 위선자들이여!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면서도 안으로는 탐욕과 불의로 가득하도다
요한 9장
40 파리새인들중에 그분과 함께 있던 자들이 이것들을 듣고 그분께 이르기를 “우리도 소경들인가?” 4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만일 소경들이었더면, 너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본다’하니 너희 죄가 머물러 있느니라.”
오늘날 목사들은 진정한 복음을 깨닫고 전도에 치중하기 보다는 돈에 눈멀고 여러 사조들에 눈멀어서 에큐메니칼 운동, WCC 운동이나 다원주의에도 눈멀어 있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바는 참 복음이 아니라
일종의 목사교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서 예배당에 다니기 시작하면 이미 구원얻었다고 착각합니다.
27. 위선과 거룩 거룩
오늘날 목사들은 그들 스스로가 자기들의 삶이 그들이 가르치는 성경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얼마전 보도). 그런데 그런 차이처럼,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마태 23장
3 그러므로 너희는 저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지키고 행하되 저희들의 행함을 따라서는 행치 말라
28 그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나, 안으로는 위선과 무법으로 가득차 있도다.
28. 구원파를 이단으로 정죄,
오늘날 목사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은가 봅니다. 그리하여 구원을 전하는 사람들은 구원파 이단이라 합니다. 물론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들중에는 잘못된 것들이 상당부분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 이단이되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아야 정통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청교도 수련원 같은 곳은 여전히 이단 판정도 안받지요?
29. 지도자라 불리우기를 좋아합니다.
바리새인들도 지도자라 불리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 23장
10 지도자라고도 불리움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한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이시니라
오늘날 목사들은 총회장 감투를 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뇌물 촌지들을 돌립니다. 각종 벼슬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30. 예수께서 미워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행위들과 교훈들을 미워하셨기에 그들에 대하여 마 23장 뿐만 아니라 복음서 여러부분에서 경계하셨습니다.( 마 16:6, 12)
예수님은 또한 니골라당의 행위와 교훈을 미워하십니다( 계 2:6, 15) 바로 그 니골라당이 목사들입니다! 니골라당이란 교회안에서 지배계급으로서 평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성직자계급과 평신도 계급으로 구분하는 가르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니골라당 성직자 제도는 바빌론 종교 로마 카톨릭의 사제 제도가 둔갑하여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니골라당을 미워하셨으며 목사들이 바로 이 니골라당인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니골라당을 결코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 하나 하나를 알고 계십니다!
31. 율법에 대한 오해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오해하였습니다. 안식일에 대해서도
오해하였으므로 그것을 바로 잡아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사람을 온전케하는 일, 생명을 구하는 일들이 당연히 허용됨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살인 간음등에 대해서도 오해하였기에 예수님은 그 계명들의 참뜻은 이런 것이다, 하고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대의는 정의의 심판, 의로운 판단과 분별, 믿음, 하나님 사랑과 인간사랑, 이웃 사랑, 긍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마 22:37-40, 23:23, 룩 11:42)
그러나 오늘날 목사들에게서 그러한 율법의 대 강령에 대해서 듣기보다는 십일조에 대해서 훨씬 많이 듣습니다. 십일조는 희생제사법의 일부로서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희생을 이루신 이후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율법의 대의이며 강령인 하나님의 사법정의, 긍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믿음 등을 가르치는 도덕법, 형사법은 성령께서 쓰시는 법 ( 흔히 알려진 성령의 법) 에 수용되어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바로 그러한 율법의 더 크고 중한 바를 가르치거나 열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반면에 십일조는 죽기 살기로 강조하며 공갈 협박합니다!
성전 제사법은 예수님이 대신 성취하시고 지켜주심으로 우리 인생들은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 제사의 효력은 영원 합니다! 반면에 부모 사랑 살인금지 간음금지 도둑질 금지 우상숭배 금지 거짓증거 금지 등의 계명들은 우리가 여전히 지켜야 합니다!
32. 성경의 변개 오해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직접 변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소위 유전이라는 것이 있었고, 미쉬나 혹은 탈무드 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유전들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마 15:6-9)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성경말씀을 폐하고 짓밟는 기술이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은 성경 하나 올바른 성경으로 번역해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들이 아닌 사람들이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다만 오늘날 번역자들도 다시 목사 호칭을 사랑하게 된 현실은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들이 번역한 성경들은 그들의 종교생활에 맞도록 변개되어 있습니다.
- 원래 원문에 없는 목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목자로 번역되어야 할 포이멘을 목사로 번역하였으며(엡 4:11)
- 매주일 한번 혹은 그 이상 자주 시행되었던 주님의 만찬을 일년에 2-3회만 실행하고 그 대신 인간의 교훈을 전하는 인간 설교로 대체하기 위하여 자주 라는 단어를 고전 11:25-26 절에서 빼버렸습니다. 이것의 부정적 효과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습니다.
- 침례를 세례로 바꾸기 위해 침례자 요한을 세례 요한으로 바꾸었으며 믿는자의 완전 침수에 의한 침례가 분명한 행 8장 37절을 빼고 그 대목 36-40절의 번역을 두리뭉실 넘어갔습니다.
- 기도와 예배 시간에 여자들이 머리 수건을 써야 하는 교훈을 없애기 위해 긴머리로 쓰는 것을 대신할 수 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고전 11:15) 그것은 쓰지 않거든 빡빡 밀라는 6절에 모순되는 번역입니다.
- 십일조를 옹호하기 위하여 마태 23장 23절에서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믿음과 긍휼을 실행하고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마치 그것들도 실행하고 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변개하여 거짓 증거하고 있습니다.
- 이 외에도 마치 율법이 폐해진 것처럼 가르치기 위하여 에베소서 2장 15절, 골 2장 14절 딤전 1장 9절 등을 변개하였으며 많은 구절들을 오해하게 하고 있습니다.
- 율법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관계, 이방인과 유대인의 원수관계가 못박힌 것입니다.
- 예수님은 분명히 율법을 폐하러 온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자신의 오심의 목적이 그렇지 않음을 천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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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성전이나 건물을 중시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지으리라 하신 말씀을 들어 처형하고자 하였습니다.( 마 26:61)
목사들은 예배당 건물이 성전이라고 가르치며 성전건축과 성전 건축헌금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고 가르칩니다.( 고전 3:16, 6:19)
누가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입니다!
34. 날짜지키기를 중시합니다.
안식일 중시, 주일성수, 크리스마스, 부활절, 맥추절 이런 날들을 중시합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런 외형적인 날짜들은 잘 지켰다고 믿어집니다.
35. 행사 중시
구약시대의 여러 절기들 (7절기)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절기들의 의미와 그것의 진정한 교훈을 알아서 행사하기 보다는
그저 명절 행사의 종교 의식에 치중하였습니다. 그들은 수전절도 지켰습니다.( 요 10:22)
유월절에는 말자 하고 예수님 살해를 미루고자 했던 것도 이런 종교심의 일환이었습니다.
크리스 마스, 이스터, 부활절, 맥추절 이런 절기들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부활절은 성경에 없으며 맥추절은 성전이 존재하던 시절, 희생제사를 드리던 시절의 행사였습니다. 이런 절기 행사들이 중시되는 이유는 그 명절을 빌미로 헌금을 많이 거둘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각종 절기를 중시하며, 수전절을 중시했던 것과 흡사합니다.
36. 목사들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실제로 그렇습니다. 제가 위에 열거한 많은 폐해들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훌륭한 목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당연히 일제시대에 순교한 목사들, 공산당이 남침하였을 때 순교한 목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며 그보다 앞서 조선시대 말에 목숨을 걸고 전도하였던 많은 목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목사들은 매우 신실하며 존경스럽습니다. 그들의 실제 생활이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비성경적인 목사제도가 성경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전혀 이단으로 출발하였지만 그들 중에 괜찮은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안식교 집단의 경우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서 초대를 받아 식사하시기도 하였으며 그들중에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보호하려 한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중에서 사도 바울이 나왔습니다. 그들중에도 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목사제도는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오직 장로와 집사의 두 가지 직책을 보여주고 있으며 장로는 감독으로 불리웠음을 알게해줍니다( 행 20:17, 28, 디도서 1:5-9) 목사제도의 비성경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목사들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본래부터 성령으로 거듭났고 올바른 믿음을 끊임없이 추구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들이 목사제도를 통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목사제도라는 것을 통해서 전업으로 성경과 복음 전도 일을 행하다 보니 영적으로 성장했다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지만 오늘날 목사제도가 모두 없어져 버린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당연히 교회를 통해서 성장하고 교회를 통해서 전도 기회를 가질수 있다고 믿고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목사직책 없이 전도하며 설교하는 기회들이 보편화 되었을 것입니다.
스펄젼은 주일학교 교사로서 전도하기 시작하여 그의 영성과 은사를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형제모임의 많은 장로형제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바 없이도 훌륭한 사역자들로서 일하였습니다.
따라서 목사라는 직책이 은사의 계발이나 교회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목사제도가 그토록 훌륭한 제도였다면 왜 하나님은 그런 제도와 방식을 성경에서 가르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목사제도는 성경에서 찾아볼수 없는 제도이며 예수님 십자가 이후 1500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그 이후 로마 카톨릭의 사제제도가 둔갑하여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성직자 제도일 뿐입니다.
그 비성경적 직책이 육적 인간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사안은 아닐 것입니다.
형제모임은 지난 180년 동안 목사 없이 수많은 모임들을 많이 성공적으로 일으켜 세워왔습니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이제 목사직책없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추구할 때입니다.
2013. 8. 21 하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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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님은 거듭나기 전 "인간"을 죄인이라 하십니다. 그가 선행을 할지라도 죄 중에 행한 것이므로 깨끗지 않다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교회"에 목사나 목사제도를 두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눈 앞에는 '교회'라는 간판을 단 모든 건물 안에서 그 '목사들'이 무소불능입니다. 성도 각 사람이 받는 성령의 은사는 목사들에 의해 무시됩니다. 옛날 특정한 개인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말씀하시기로 바꾸신 뜻을 알고 믿는다면, 건물과 목사를 둔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선포해야 하지 않을까요?...
구약시대에도 푸른 나무 밑에서 아세라와 바알에게 제사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 때에도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있었고, 중세에는 카톨릭,정교회 사제들이 있었고, 개혁시대 이후에는 목사들이 있어왔으며, 오늘날에는 또다시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군림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박교주가 그 대표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교주나 목사추종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신자들 본인들은 바쁘고 돈이나 내고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목사들이 그대로 존속하도록 하나님이 두시는 이유는 헌천지나 전도관같은 곳들이 나오고 그에 대항하여 싸울 만큼의 힘을 가진 복음 세력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워낙 문제들이 많아서 그냥 목사제도를 용인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시는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목사들의 문제는 결국에는 인생들 전체의 문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바로 그렇기에 드린 말씀입니다. '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 안에서 목사들이 십일조를 강요하고 직분자를 세우고 무한봉사를 요구하며 순종을 강요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입만 열면 설교를 합니다. 그 설교를 듣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대들은 교회가 아니다'라고 선포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하나님 편에 속한 '교회'인지를 생각조차 해 볼 겨를조차 없는 그들이 무슨 수로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이 이미 당대에 이단들을 지적하며 "그들에게서 떠나라" 고 명백하게 권면하였듯이 적어도 성경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 곧 기독교라는 종교를 명백히 드러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질문이 있습니다. 한국의 모임들의 대부분은 특정 장로 한명을 전심사역자로 세우고 월급 비슷하게 사례비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듣기론 북미의 모임에서는 이와 같은 형태를 거절한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북미의 모임들은 장로제도가 어떻게 실행 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에즈라님은 이 목사제도와 형제모임의 현실적 상황을 많이 아시는 분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도 이미 몇분이 그와 비슷한 질문을 해오셨습니다.
한국에는 그것이 사실이고 보성사건 또한 그런 문제를 드러내 주었습니다.
여기는 장로가 현재는 6명인데 과거에 분가해 나가기 전까지는 8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들 모두는 직업을 갖고 있거나 연금으로 충분한 소득을 갖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회사 중역이었다가 은퇴했고 하나는 시청 공무원이고 하난 교사 하나는 컴 엔지니어 하나는 공무원이었다가 은퇴
한분 또한 중역이었다 은퇴.
퇴직자들의 최저 연금은 부부당 2100 달러 수준이지만 회사 연금과 RRSP까지 합하면 대개
월 4-5천
달러가 됩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월 4500 달러가 소요되는 양로원에 거주하는경우가 많고 월 8천 달러 드는 양로원이 연금조건에 포함된 경우도 상당수 만났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월급이 나가는 사역자는 한분도 없습니다.
교회신축도 매우 수월합니다. Trustee 가 결성되면 8개 이상교회들이 참여하고 대개 몇 %는 이미 저축되어 있고 은행은 25년 장기 저리로 융자합니다. 교회는 월급 지출이 없으므로 항상 흑자 재정이 유지됩니다.
아 그렇군요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물론 저는 어느 지역에 있는 모임들이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식의 생각은 절대 거부하지만, 북미나 영국 모임들이 실행하고 있는 좋은 성서적 교회진리가 한국에서는 왜곡되어 실행되거나 아니면 실행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 카페를 통하여 그러한 부분을 좀 알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안에서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교회 모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제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글을 접할수 있어서 다행이구요
여러분들의 귀한 글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