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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장소/물건 |
교훈 |
관련성구 |
청동거울 |
고전 13장 “ 지금은 너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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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 (장터) |
성역과 대조적으로 속세에 해당하는 장소이다. 일반인들이 생활하는 교역과 모임 장소로 상점, 공방 주택등이 있었고 대분분의 토론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행 17:16 “... 또 장터(아고라)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고린도는 이 장터 주변에 7개 이상의 신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고기와 많은 물건들이 우상에게 드려지고 판매되었다. 그러기에 고기등 음식은 먹는에게 꺼리끼는 것이었고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고전 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
행 17:6 고전 10:25-28 |
신전 |
바울은 너무 많은 신전 때문에 우상에대한 문제 우상(고전 8장, 10장)과 관계된 음란(고전 5장)과 성만찬이 우상의 전(殿)에서 먹고 마심의 자리같이 되는(고전11:21) 같은 악영향을 고린도서에서 많이 다룬다. |
고전 5, 8, 10 고전 11:21 |
바마 (심판석) |
1) 바울이 유대인의 모함에의해 심판을 받았던 장소이고(행 18:11-17) 2) 고린도 교회에 교회에 관한 송사는 세사에 맡기지 말라고 한다 (고전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
행 18:11-17 고전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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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
달리기 출발점 (위 내용 참고) |
고전 9:24-27 |
극장 |
에라스도 이름이 도로에 기록됨 |
롬 16:23 |
The Anchor Bible Dictionary I권 1134-39쪽에서 발췌함.
아덴
아덴(Athens)은 에게해의 지류 샤론만에 위치하였으며 피라에우스(Piraeus)항구에서 약 8km 떨어진 내륙도시이다. 북쪽으로는 파르네스 산, 동쪽으로는 펜텔리쿠스 산, 남동쪽으로는 히멧투 산이 둘러싸고 있는 좁은 평지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아티카의 영웅 데세우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아테네(Athene)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아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페리클레스(B.C.495-239)에 의해 이 도시는 전성기를 맞아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사원과 건축물들이 건축되었다. 아울러 문학, 철학, 과학, 수사학 등이 꽃을 피웠으며 민주주의의 기초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펠로폰네수스 전쟁(B.C.431-404)으로 인하여 아덴은 빛을 잃었다. 그렇지만 그 문학적, 역사적 명성은 그대로 남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명성만은 계속 지속되고 있던 터라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빌립보
빌립보는 그리스의 북쪽 네압볼리(Neapolice; 신도시)에서 로마로 가는 고대도로인 에그나티아(Egnatia) 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레카니스(Lekanis) 산에 위치한 옛 마게도냐의 수도이다. 원래 크레니데스(Κρηνiδες; ‘샘’)로 알려진 드라게(Thrace)사람들이 주를 이룬 마을이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마게도냐 왕 빌립 2세가 이 도시에 사람들을 이동시키면서(주전 358-57)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라고 명명하였다. 빌립 2세가 암살되고 그 뒤를 이은 알렉산더 대왕은 도시를 증축하고 많은 사람들을 이주 시켰다.
주전 167년 헬라가 로마에게 넘어간 후 빌립보는 로마의 한 도시로 편성되었다가 주전 42년, 빌립보에서 큰 전쟁이 발발한다. 율리우스 시이져를 암살한 부르터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충돌한다. 결국 빌립보 전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가이사 아구스도’가 되었다.
빌립보 시민은 로마시민권을 가졌고 많은 시민들이 로마군을 제대한 사람들이었다. 빌립보 시민들은 변방에 있는 땅을 수여받고서 그 대가로 전방 지역 성읍에서 군사 임무를 수행한 퇴역 장병들과 로마전역에 용맹한 군인으로 이름이 나있던 드라게인(Thracian), 주변지역에 살던 헬라인,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온 그리스인(예; 두아디라의 루디아)들이었다. 퇴역군인 및 정치적인 영향으로 라틴어가 많이 이용되었지만 주 언어는 헬라어였다고 추정된다. 역사가 람세이(Ramsay)는 의사 누가가 빌립보 출신이라고 하였다.
빌립보 성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해발 1,956m인 팡게오(Pangeo) 산에 있는 금광을 생산한 도시로 유명하였다; 빌립 2세는 이 곳에서 년간 1,000달란트 이상의 금을 채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시대 특히 옥타비아누스 시대에는 로마가 바로 정복하였던 북쪽지역을 방어하기위한 군사도시로 또한 동방, 비쟌티움에서 로마로 가는 길목으로 이용되었다.
빌립보에는 다이아나(헬라의 아데미 신; 사냥의 신)와 관련된 드라게인의 바쿠스(Bacchus; 헬라의 디오니수스 신; 술의 신)과 말탄 영웅이 대표적인 우상이었다. 주후 1세기에는 시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수입된 값비싼 대리석으로 치장된 이집트 신들을 섬기는 장소가 세워졌다. 또한 에그나티아 길의 남쪽 400m지점에 위치한 목욕탕건물에서 나온 다섯 개의 비문에의하면 그 곳이 주후 1세기경에는 바쿠스신과 그와 관계된 리벨( Liber), 리베라(Libera), 헤라클레스(Herculus)를 섬기는 장소였음을 나타내 준다.
성경의 역사
행 16: 12-15 두아디라의 자색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나 예수믿게하다(유럽의 최초 기독교인)
행 16: 16-40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간수와 그의 가족을 예수 믿게하다.
빌 1:1 - 바울의 옥중서신
역사, 지리적 성경해석
1. 유럽의 첫걸음
주전 42년, 빌립보 전투(바쿠스와 옥타비아누스); 로마를 왕정으로 바꾸며 아구스도를 탄생시켰다.
로마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장소는 주후 49년, 복음전파 차원에서 유럽 대륙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2. 바울의 후원자들
행 16:14 . . .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게 하신지라.
빌 4:3 또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들을
돕고 . . .
빌립보의 첫 신자는 여인이었고 그 여인들은 바울의 복음전파에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마게도냐 교회 특히 빌립보 교회가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때(빌 4:16)와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바울을 물질적으로 후원(고후 11:9)하는데 아마 그 중요한 후원자는 루디아와 같은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3. 로마 시민권
행 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 .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 .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인임을 스스로 자랑했고, 로마인의 옷을 입었으며, 종종 라틴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틀림없이 이것은 바울이 신자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언급한 말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이었다. 그리고 빌립보 성이 로마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그곳에 그다지 유대인들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곳에 회당이 설립되지 않았고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구약을 인용하지 않은 사실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4. 바울과 빌립보 감옥
행 16:34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빌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한 사람들 중 간수와 그의 가족이 제일 큰 구성원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 사람들에게 자신의 매인 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함을 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들도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전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 말씀을 담대해 전하게되었다(빌 1:14)”고 하였다.
바울은 유럽에 이르러 빌립보에서 첫 번째로 옥에 갇혔고 이제는 로마, 유럽의 마지막 감옥에서 첫 번째 감옥이었던 장소에 편지를 쓴다. 옥에 갇혀있던 바울은 빌립보 감옥을 생각하며 더욱 용기를 얻었을 것이고 물질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는 그들이 대견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옥중서신과 달리 빌립보서는 옥 중에 있으면서도 빌립보서에는 큰 기쁨 담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암비볼리(Amphipolis)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要衝地)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아볼로니아(Apollonia)
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는 데르마 만의 갑(岬)에 위치한 부산한 항구도시였다. 데살로니가 성읍은 유명한 에그나티아 가도와 북쪽으로 다뉴브에 이르는 대로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으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 성읍의 인구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마게도냐의 최대 도시였다. 주전 167년 마게도냐가 로마에 패하면서 수도가 암비볼리(Amphipolis)로 되었다가 주전 146년부터 데살로니가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Thermaic Gulf)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 B.C.106-43)는 이곳을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다. 이 도시는 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Civitaslibera)의 특권이 주어졌다.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의 도시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살전2:14-16).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살전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여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다(R.N.Longenecker).
데살로니가 교회의 배경은 행 17:1-9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한 것을 볼 때, 이 새로 설립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일부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0, 행 17:4은 이 교회의 주된 구성원들이 이방인이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베뢰아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 지점,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1998. 8. 이문범 제공
밧 모 섬(Patmos)
지리적 배경
도데까니스(Dodecanese) 지역의 최북단에 위치한 밧모섬은 북쪽으로 이카리아(Icaria)와 사모스(Samos)가, 동쪽으로는 레입소이(Leipsoi), 남쪽으로는 레로스(Leros)가 자리잡고 있다. 길게 늘어진 섬은 길이가 12.5km로 약간 굽은 리본모양을 가지고 에게해를 향해 뻗쳐있다. 이러한 모양을로 인해 바닷물이 섬깊숙히 들어오면서 셀 수 없는 만(灣)을 형성한다. 꾸불꾸불한 모양의 해안을 모두 편다면 전체 길이가 65km나된다. 폭이 가장 좁은 부분은 중간 부분으로 섬을 거의 갈라 놓을듯하다. 가장 높은 산은 남쪽에 위치한 해발 269m의 프로피티스 일리아스(Profitis Ilias)산이다.
현재의 밧모섬은 19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그린 책에 나오는 모양과는 조금 다르다. 섬 전체가 제주도와 갈릴리 바다근처와 같은 검은 회갈색의 현무암으로 되어있고 약간의 풍화된 토양을 제외하고 섬 전체가 완만한 능선을 가진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언덕과 바다 사이에 있는 약간의 녹지는 지형을 부드럽게 만든다. 아데미의 열열한 사랑을 받던 셀레네(Selene; 그리스이 달신)의 섬인 밧모는 거의 일년내내 생명의 빛을 발하는 태양을 맞으며 그 몸을 바다에 담그고 있다. 좋은 일조량으로 밧모는 겨울 동안에도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여룸에는 북풍의 영향으로 시원하고 상쾌하다. 보다 작은 섬이 점점이 흩어져있는 동쪽에는 에게해의 검붉은 물결이 흰 파도를 일으킨다. 현대의 건축물들은 코라(Chora)와 스칼라(Skala)에 집중되어있다. 성 요한 수도원은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밧모섬의 주요 특징은 고요함이다. 수도원의 종소리와 승객을 태운 뱃고동만이 이따금 섬의 정적을 깬다.
밧모섬 면적은 34km2이고 주민은 약 3,000명정도이다. 교회적으로는 세계관구(Ecumeical Patriarchate)에 속하고 성 요한 수도원의 대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이다. 밧모섬에서 아테네의 항구 삐레아까지 뱃길은 163마일이고 배는 레로스, 칼림노스, 코스, 로도스, 사모스를 연결한다.
밧모섬은 지중해성 기후 영향으로 강우량이 적은 편이다. 전체 섬이 얇은 풀과 다양한 관목, 크고작은 나무들로 덮혀있다. 소나무, 싸이프러스, 아루부투스(철쭉과), 유카리스, 위성류와 석류같은 과일나무들도 존재한다. 농가에서는 토양과 기후에 적합한 감귤류가 많이 재배되고 스칼라 항구와 섬 이곳저곳의 작은 정원에서 포도도 재배된다.
역사
신화: 신화에 따르면 라트모스(Latmos) 산근처에 있는 카리아(Caria)에 방문한 에데미는 셀레네가 바다에 비추는 빛을 보고 반하였다. 셀레네는 해저에서 섬을 올려 줄 것을 아데미에게 요구했고 아폴로와 제우스가 달(셀레네 신)을 빛을 보며 사랑에 빠진 아데미를 위해 이 섬을 해저 깊은 곳에서 올렸다. 태양(헤리오스; ηλιος)은 이 섬을 말리고 그곳에 생명력을 주어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라트모스라는 이름에서 밧모(Patmos)라는 이름이 유래하였고 한다.
또하나의 신화와 관계하여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죽이고 푸리에스에게 쫓기던 오레스테스는 이곳에 피신하였다. 피신한 오레스테스는 현재 수도원이 있는 장소에 아데미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원주민인 카리안, 레레기안, 펠라스기안들이 주전 3,000년경에 와서 주변 섬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섬의 진정한 거주자들은 이오니안을 뒤따라 온 도리안이었다. 주전 4세기에 이오니안은 이곳에 발전된 문명을 만들고 마을과 카스텔리(Kasteli)위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어 섬을 수출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한 때 12,000-15,000의 주민이 거주하며 제우스, 아폴로, 아데미, 디오니소스 신전도 있었다.
로마시대: 로마시대 밧모는 로마에서 에베소로 오는 정규항로 근처에 있었을지라도 잘 이용되지 않았다. 주후 2세기 로마인들은 밧모섬을 귀양지로 만들었다.
(요한의 밧모 유배)
요한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주님께서 요한을 부른 뒤 그는 베드로, 야고보과 함께 제자들 중 핵심인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중요한 사건(야이로의 딸을 살림, 변화산, 겟세마네 기도)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으로부터 선별된 인물로 대접받았다. 물에 익숙하였던 요한은 예수님이 갈릴리 주변을 옮겨다니며 전도하실 때 유능한 노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교통수단인 배를 수배하고 운전하였을 것다. 그래서인지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요한이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던 점과 아버지가 배를 가지고 있는 선주였다는 것을 보면 요한이 어느정도 유력한 집안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요 18:15)
그러나 그의 성격은 매우 과격하여 형제 야고보와 함께 ‘우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하루에 5,000명이 넘는 사람을 전도할 만큼 큰 능력을 얻었으나 그는 곧 슬픈 소식을 접한다. 그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에게 순교를 당한 것이다. 이런 소식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한 조가 된 요한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확고히 하는 등 활동을 왕성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베드로와 따로 행동하던 요한은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후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곳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데려와 모시고 살면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1-3서)를 기록하였다.
주후 81-96년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기간 사도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 요한은 그의 제자 프로코로스와 함께 ‘계시의 동굴’에서 있을 때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썼다. 또한 요한의 가르침으로 많은 주민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 1:9)
96년 도미티안 박해가 끝나 새 황제 네르바에의해 풀려난 요한은 에베소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99세까지 장수하다가 104년에 하나님 곁으로 갔다. 지금도 그의 무덤이 에베소 요한교회에 남아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5월 8일에 그를 기념하고 9월 26일 그의 변화(metastasis)를 축하한다.
4세기 콘스탄틴 대제 이후 순례지가 된 밧모는 7세기 비잔틴과 사라센의 갈등 속에 약탈당하기도 했다.
주후 6-9세기까지 밧모섬은 다른 주변 섬들과 마찬가지로 해적들의 침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잔틴: 주후 11세기에 호시오스 크리스토둘로스가 여기 도착하였고 그는 주변의 고요와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요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계속되는 아랍인들의 공격과 터키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터키시대 - 현재: 16세기에 이르러 밧모는 새로운 번영의 전기를 맞았다. 스칼라는 주 항구가 되었다. 저장소가 지어졌고 코라에 더 튼튼한 성채가 세워졌다. 주민들은 증가했고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유명한 파트미안 학교가 설립되었다. 얼마후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다른 도데카네스 섬들과 같이 밧모는 1948년 3월까지 이탈리아 영에 들어갔다.
밧모의 성화
그리스 정교회 최고의 성화들이 밧모에 있다. 사도 요한과 요한 수도원 설립자, 호시오스(축복된) 크리토둘로스의 성화는 밧모의 전통유산 중 가장 가치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을 따라다니며 그의 생활과 기적을 기록하였던 프로코로스(Prochoros)에 관한 성화도 중요한 것이다. 프로코로스는 후에 니코메디아의 감독이 되었다.
문화
1. 파트미안 학교
마카리오스 칼로엘라스(Makarios Kaloyeras) 보제신부에 의하여 수도원 내부에 설립된 파트미안 학교는 18세기 이 곳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오늘날 이 학교는 계시의 동굴 바로 위에 위치한다. 1713년 계시의 수도원 건물에서 시작한 이 학교의 명성은 급속히 퍼져 그리스뿐아니라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이곳을 찾아 왔다. 이 학교는 그리스어와 정교회 신학을 가르치는 헬레니즘에 명성있는 학교가 되었다. 1912-1947년 이 지역이 이탈리아에게 점령되어 잠시 학업이 중단된 것외에는 많은 학생들이 이곳에 찾아와 헬라문명을 배웠다. 많은 정교회 지도자, 학자, 과학자등이 이곳에서 배출되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그리스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최고의 인물이 피리키 에태리아(Philiki Etaireia)의 세 설립자 중 한명인 한토스(Emmanuel Xanthos)이다.
2. 부활절
부활절에 갖는 정교회의식은 비잔틴 전통을 잘 이어받은 밧모의 가장 큰 있는 의식이다. 예식은 매일 저녁 9시에 시작하여 적합한 본문을 읽으며 수시간 계속된다.
부활절 주간 화요일 오전 11시에 한토스 광장에 ‘의식 대야’가 운반된다. 예수님의 고난의식을 가지려 할 때는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이에 참석하기 위하여 온다. 예루살렘에서도 행해지는 이 의식은 신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세족식이 거행되고 성경을 낭독하면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의 의식을 가진다. 수도원장이 예수님 역할을 하고 수도원의 가장 젊은 수도승이 가룟 유다 역할을 한다. 수도원장이 겟세마네 기도를 마치면 파티미안 신학교 학생들은 찬양한다.
목요일에는 복음서들을 읽다 십자가 행진부분에서 끝난다.
금요일에는 십자가 강하(降下)의식을 가지고 부활을 준비한다. 수도원장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장미꽃잎을 뿌리며 종려나무 관으로 의식장 주변을 꾸며 놓는다.
토요일은 부활절 초를 준비하고 자정에 불을 밝힌 후 ‘예수 부활 되셨네‘(χριστος ανεστη)라고 인사한다. 이때 박수갈채와 징을 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서 부활절의식들(찬송, 낭송, 크리소트톰의 문답식설교, 식탁의 교제)이 행하여지며 부활의 즐거움을 함께한다.
계시의 동굴
밧모섬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섬이다. 항구 스칼라에서 코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계시의 동굴이 있는데 현재는 계시 수도원으로 덮혀이다. 이 동굴은 또한 정교회와 천주교간의 우호적 대화가 있었던 장소이다.
동굴로 내려가다보면 내부 정원을 통과하여 몇 계단을 내려가는데 이때 만나는 오른쪽에 만나는 예배소가 성 알테미오스(18세기) 예배소이다. 계속 내려가다 교회 앞 넓은 홀(나르텍스)의 오른 쪽 돔과 성 안나 종탑을 왼쪽에 보게된다. 더 내려가면 성안나 교회 입구와 동굴에 이른다. 입구에 있는 비문은 인상적이다.
“이 장소가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전이다”
앞으로 곧장 들어가면 성 안나 교회에 이른다. 전통에 따르면 11세기에 이곳에 온 호시우스 크리스토둘로스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할 뿐아니라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 또 자기를 밧모를 가도록 도와 준 당시 황제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한 것이라한다. 교회 오른 쪽에 고대 동굴의 경사진 천장이 있는데 시작하는 천장 부근에 3가닥으로 갈라진 틈이 있다. 이것은 성 삼위일체를 상징하고 이 방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 1:10)
계시를 들을 때 요한은 동굴이 좁아지는 쪽 한 홈에 머리를 대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요한의 초상화를 보면 이마에 굳은 살이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이 기도후 일어설 때 짚었다는 홈이 머리를 두던 홈 오른 쪽에 남아있다(요한은 분명히 오른 손잡이였을 것이다!). 오른 쪽을 쳐다보면 사람이 서서 책을 둘 만한 천연 장소가 있는데 전통에 따르면 이곳에서 요한의 제자 프로코로스가 그의 선생이 지시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고한다.
생각해 볼만한 지리적 성경해석
1. 요한은 섬에서 갈리리 바다모양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수양처를 만들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이 갈릴리와 같은 현무암으로 되어있다는 것도 기억하라.
2. 일곱교회에 편지를 쓸 때도 밧모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7교회 이름을 언급하였다. 사사기의 배열과 연결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3. 자주 나오는 보석들의 색깔등은 백옥같은 바다의 색깔을 연상케한다. 여러 표현들이 현장을 반영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한다.
4. . . . ?
이문범 제공
니고볼리(Nicopolice; 현재명 Smytoula)
니고볼리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는 그레코로만 시대에 헬라어를 사용했던 지역에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많은 지도자들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이 이름을 많은 도시에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 니고볼리는 ‘승리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 이름으로 불렸던 도시들은 에피루스, 소아시아, 이집트, (유대)에서 발견된다. 주후 63년에서 65년경에 사도 바울은 디도를 니고볼리(이들 도시중 하나)에서 만나기를 원한다(디도서 3:12). 사도 바울이 말한 니고볼리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 곳이 겨울을 나기에 좋은 곳이며 또한 서신서를 기록하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것이다.
본도(Pontus)의 니고볼리는 주전 66년 폼페이 장군이 미드리닷(Mithridates)을 이긴 장소로 로마 교통의 중심지이며 주후 1세기에 번창하였다(Strabo 12.555). 그러나 그것은 그레데 섬으로부터 그리고 바울의 알려진 여정과는 너무 멀다. 비시니아(Bithynia)나 실리시아(Cilicia)의 니고볼리는 겨울을 나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이다(Pliny HN 5.150; Strabo 14.676). 이집트의 델타(Delta)지역의 알렉산드리아근처, 니고볼리는 가이사 아우구스도에 의해서 세워졌고(요세푸스 고대사 5.11.15)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기후를 제공하나 바울의 알려진 여정 속에 넣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바울시대 이후에 로마 지도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니고볼리라는 도시들이 있으나 이것은 디도와 바울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장소이다.
가장 적합한 장소를 추정한다며 에피루스(Epirus)의 니고볼리이다; 이 니고볼리는 아가야의 니고볼리로도 알려져 있다. 이 다른 이름은 프톨레미가 에피루스의 니고볼리라 부른(Geog. 3.13) 반면에 타키투스(Ann. 2.53)가 그 것을 아가야 사람의 도시로 묘사한데서 유래했다. 이 두 용어- 에피루스와 아가야-는 오늘날 그리스의 큰 지방들을 가리킨다. 이 도시는 그리스 반도의 서쪽,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끝에서 바다건너 북위 39도 2분, (경도) 20도 44분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악티움(Actium) 만의 협부에 지어졌다. 주전 31년에 아우구스도는 이 만에서 안토니(Mark Anthony) 장군과의 접전하여 승리한 뒤 이 도시를 세웠다. 그러므로 이는 명백히 로마의 식민지로 되었고 주전 29년 니고볼리의 주요 걸작품은 넵튠(해신(海神), 그리스신화의 포세이돈에 해당함)과 마르스(군신(軍神), 그리스신화의 아레스에 해당함)에게 헌납되었다. 그 기념물에는 해전(海戰)에서 포획한 뱃머리에 있던 수양의 머리가 조각되었다. 이 니고볼리는 그 근방의 무역을 주관하였고 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의 개최지이기도 하였다. 아우구스도와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했던 헤롯대왕은 많은 공공 건물을 그곳에 세웠을 뿐아니라 그곳 신전에 막대한 기부를 하였다(요세푸스, 고대사 16.5.3). 주후 89년에 이 도시는 망명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의 거처가 되기도 하였다(Aulus Gellius Attic Night 15.11.5). 이 장소에는 오늘날 그리스 도시 스밀투라(Smyltoula) 자리잡고 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풀려난 뒤 니고볼리에서 디도를 만나기로 한 의도는 그가 복음전파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음 시사한다. 바울은 밀레투스(Miletus)와 고린도를 들른 후 그가 한 번 잡혔고 다시 잡힐 로마- 당시 네로는 로마에서 로마의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전가시키고 심한 핍박을 가하고 있었다-로 가기 위하여 니고볼리로 향하였다.
알렉산드리누스 사본(Codex Alexandrinus)은 디도서가 니고볼리에서 보내졌다고 언급을 하나 이 언급은 다른 고대 사본들과 부합하지 않는다. 디도서 3장 12절은 바울이 니고볼리가 아닌 니고볼리 근처에 있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디도서는 고린도에서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다.
로버트( Robert W. Smith)
The Anchor Bible Dictionary IV권 1108쪽에서 발췌함.
그레데
지리
그레데는 그리스 남쪽 지중해 상의 가장 큰 섬중 하나로 길이가 256km 넓이가 64km정도 된다. 그레데는 에게해와 리비아해를 경계지으며 유럽과 아프리카를 구분하는 점이된다. 많은 섬들과 깊은 계곡이 있고 계곡사이에는 기름진 기름진 토양이 형성되었다. 이 계곡 중사마리아 협곡은 유럽에서 가장 길고 깊은 계곡으로 대자연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지역마다 변화무쌍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곳이 황량하다 싶으면 다른 곳은 숲이 우거져 온화함을 더해준다.
마을들은 과일나무와 채소로 가득채워져있다. 올리브나무, 오렌지, 포도원, 각종 채소들이 자란다.
오래된 돌로 지어진 농가, 수도원 산능선의 마을들, 성채, 경사지에 남은 교회들의 잔재같은 것이 그레데의 시골 풍경이다. 해안은 때때로 험하여 사람들이 접근 못한 바위들로 되있기도 하지만 끝없는 모래와 자갈로 된 해안이 많이 존재한다. 그레데는 여러 야생식물로 유명하다. 밤나무, 상수리, 싸이프러스, 야자나무, 상수리나무 숲이 이곳저곳 위치한다.
바위가 많은 지역에는 각종 약초와 그레데 염소라 불리는 ‘크리크리’가 자란다.
역사
위에서 언급한 환경을 기초로 그레데가 최고로 번성한 시기는 미노아 문명(그레데 문명) 때이다. 주전 2800-1150년 동안 그레데는 지중헤에서 가장 번성한 문명을 이루었다. 미노아인들은 궁전들을 지었는데 유명한 크노소스, 파이스노스, 말리아, 자크로스가 그 당시(주전 1700-1450) 지어졌다. 그들의 벽화와 도자기는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문명은 주전 1450년 산토리니에서 발생한 화산폭팔로 끝을 맺게된다. 그러나 이 것이 끝은 아니었다. 배를 이용한 상업은 계속이루어졌다. 페니키아, 시리아, 이집트인은 그들의 주요 무역대상이었다. 아가야인(미케네 문명)과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신도시인 라토와 압테라가 세워졌다. 라토(Lato)는 주전 7세기에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로마가 다스리 시기(주후 69-330)에는 골틴(Gortyn)이 특출난 도시역할을 하였다. 기독교는 일찍이 이 곳에 전파되었다.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던 이 곳(행 2:11)에 누가 복음을 전했는지 모르지만 바울이 디도를 보낸 것을 보아 바울이 전한 장소가 아닌가한다.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 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Kali Limenes)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 편은 동북을,한 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44행 27: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행 27:7 -14)
바울은 로마로 호송될 때 그레데를 거쳐서갔다. 그래서 아직도 미항근처의 산능선에는 바울을 기념한 교회가 위치해 있다. 오래된 교회는 세련되지 않고 지붕도 없는 상태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곳에 바울이 잠시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레데인의 특성은 바울이 디도서에 편지을 보내며 에피네니데스(주전 6세기)의 말을 인용하여 부정적으로 얼마를 썼지만 그레데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잔자키스등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디도의 사역으로 어느정도 변화된 사람들이 있어나 보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딛 1:12-13)
잊지 말하야할 역사적 사실 중 하나는 그레데인의 최초의 조상(미노아 문명)은 헬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곳에 이주한 것은 함족이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창 10:6)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창 10:13-14)
이 함족은 고고학 증거에의해서도 밝혀졌던 서부 셈족언어를 사용하였다. 미노아 문명이 쇠퇴하고 해양민족이 이동할 때 그레데(그렛사람, 갑돌사람)인들은 이동하여 가나안까지 들어왔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것을 증명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 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암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