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으로도 불리는 나제통문은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 사이를 가로질러 암벽을 뚫은 높이 3m, 길이 10m의 통문을 말한다. 무주군에서 동쪽으로 19km쯤 달리면 설천이란 마을에 이르는데 여기서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나제통문은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으로 두 나라가 국경 병점기지로 삼아와 한반도 남부의 동서 문화를 분단시키는 장벽이었다. 무주는 백제때 충남금산에 속했던 단천현이었고 신라때는 적천으로 개명되었다가 고려때는 주천으로 불렸다. 한편 무풍은 본래 신라 감문소국의 후신인 개령군에 속했었다가 무주현으로 바뀌었 는데 고려때는 진례군(충남금산)에 속하기도 하다가 공양왕(1389 - 1392)때 합쳐졌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풍속과 문물이 판이한 지역이었던 만큼, 그로부터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언어 풍습등 특색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장날 설천에 가보면 무주, 무풍사람의 서로 다른 사투리를 이곳에서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신라 통일전쟁때 격전지였던 무산 성지 근방에 사선암이라는 크고 평범한 바위와 울창한 송림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은 김유신장군을 비롯한 신라화랑 네사람이 바둑을 두며 놀던 곳이라 하여 사선암이라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지금도 바위에 바둑판이 그려져 있다.
나제통문에서 5.8km 지점에 있는 학소대는 누벽정(樓碧亭) 동쪽이고 도화담 하류이다. 이곳에는 수백마리의 학이 누식(樓息)하고 있는데 노송을 베어낸 후부터는 학들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첩첩한 기암이 절묘한데 학소대 바위 위에서 전망하는 계곡 일대의 경관이 장관이다. 무위구곡중 제3곡이다.
구천동에서도 3대 경승지의 하나로 손꼽히고, 일명 수성대라고도 한다. 구천동 입구에서 약 6km 지점에 서벽 정이 있고 그 서쪽에 창암이 배모양으로 솟아 있다. 구한말의 학자 연제 송승선이 이곳에 은거하여 루벽정을 짓고 스스로 호를 동방일사라 하였고 창암의 고고함을 들어 일사대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 아래로 수백명이 앉을 수 있는 평범한 암반이 있고 계곡의 물이 흐르며, 암반의 아래편은 풀이 형성되어 있고 물속에 솟아 있는 한 바위에는 "인간사를 영원히 버리고 나의 도를 창주에 붙인다."라고 한 연제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암반 위로는 양쪽 기슭을 잇는 줄다리가 놓여 있으며 이 주변의 풍경이 수려하다. 이곳이 무위구곡중 4곡이다.
나제통문에서 9.7km 지점에 있으며 그 뒤에 암석이 소금강산과 같이 절묘하다. 1592년 임진왜란때 유명한 김천장군의 부인 양씨의 친족 부친인 양도사가 이곳에서 공을 드리다 어느해 가을밤 물에 비치는 달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발견하고 도를 깨쳤다 하여 추월담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이 무위구곡중 제7곡이다.
구천동 3대 명소중 하나이다. 고요히 잠긴 소는 급류가 암석에 부딪히는가 하면 또 소가 된다. 주변이 다른 경소보다 넓기도 하고 경치가 다양하다. 길가에 거암이 고립되었고 그위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크지는 않으나 수령이 천년을 넘는다고 한다. 나무 이름이 천년송이고, 바위이름은 천송암이다. 이 소나무는 신라시대의 일지대사가 이곳을 탐승한 기념으로 소나무 가지 하나를 꽃았는데 이 가지가 흙이 없는 바위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계곡 건너편에는 파회가 있다. 무위구곡중 제9곡이다.
나제통문에서 16.4Km 지점에 있다. 삼송리 다리에서 상류쪽으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기암 절벽이 나타난다. 절벽위는 수림이 꽉 차있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맑은 물이 암벽에 부딛혀 퍼지는 장관이 아름답다. 신라시대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수경선생이 소요하던 곳이라서 수경대라 부르게 되었다.
직경 5m 크기의 원형에 가까운 낙석이다. 지금부터 350년전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산신을 모시고 덕유산을 지키며 지리산을 왕래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산신의 명으로 특약을 구하러 가던 중 이 바위에 이르자 안개 가 자욱하여 앞을 가누지 못하고 이리 저리 뛰다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소(沼)에 빠져 100일간 꼼짝 못하고 울부짖기만 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이 바위를 호탄암이고 한다.
덕유산을 배경으로 그 중턱에 자리잡은 백련사는 구천동 골짜기에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구천동 계곡에는 예 전에 십여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사라지고 오직 백련사만 남아 있다. 백련사는 신라 신문왕때 백련선사 가 숨어 살던 곳인데 이곳에서 백련이 솟아 피어났다 하여 절을 세웠다고 한다. 백련사는 처음엔 작은암자에 불 과했고 그나마 6·25 전란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1962년 재건을 시작하여 유지되어 오다가 구천동의 관광지로 각 광을 받으면서 중수되었다. 이 절에는 지방 기념물 42호인 백련사계단(戒壇)을 비롯해서 지방 유형문화재 43호 인 매월당부도가 있고 이 밖에 고려시대에 제작된 삼존석불이 유명하다.
일명 향적봉(香積峰)으로 부르고 있는 덕유산정은 백담사에서 2.4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옛날 이태조가 이곳에서 산 제를 올리다 목이 말라 물을 찾자 정상의 바위틈에서 물줄기가 터져 나와 이태조의 목마름을 풀어주었다 하여 왕 생수라 불리우는 이 우물은 지금도 이곳을 찾는 많은 등산객들의 벗이 되고 있다고 한다. 구천계곡의 원시림을 헤집고 정상에 오르면 천년이나 된듯한 주목을 비롯한 고산식물들, 고사목등이 운치있는 경관을 자아낸다. 덕유산을 정점으로 남으로는 지리산, 북으로는 속리산, 동으로는 가야산, 서쪽으로는 설장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통일문으로도 불리는 나제통문은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 사이를 가로질러 암벽을 뚫은 높이 3m, 길이 10m의 통문을 말한다. 무주군에서 동쪽으로 19km쯤 달리면 설천이란 마을에 이르는데 여기서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나제통문은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으로 두 나라가 국경 병점기지로 삼아와 한반도 남부의 동서 문화를 분단시키는 장벽이었다. 무주는 백제때 충남금산에 속했던 단천현이었고 신라때는 적천으로 개명되었다가 고려때는 주천으로 불렸다. 한편 무풍은 본래 신라 감문소국의 후신인 개령군에 속했었다가 무주현으로 바뀌었 는데 고려때는 진례군(충남금산)에 속하기도 하다가 공양왕(1389 - 1392)때 합쳐졌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풍속과 문물이 판이한 지역이었던 만큼, 그로부터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언어 풍습등 특색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장날 설천에 가보면 무주, 무풍사람의 서로 다른 사투리를 이곳에서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신라 통일전쟁때 격전지였던 무산 성지 근방에 사선암이라는 크고 평범한 바위와 울창한 송림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은 김유신장군을 비롯한 신라화랑 네사람이 바둑을 두며 놀던 곳이라 하여 사선암이라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지금도 바위에 바둑판이 그려져 있다.
나제통문에서 5.8km 지점에 있는 학소대는 누벽정(樓碧亭) 동쪽이고 도화담 하류이다. 이곳에는 수백마리의 학이 누식(樓息)하고 있는데 노송을 베어낸 후부터는 학들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첩첩한 기암이 절묘한데 학소대 바위 위에서 전망하는 계곡 일대의 경관이 장관이다. 무위구곡중 제3곡이다.
구천동에서도 3대 경승지의 하나로 손꼽히고, 일명 수성대라고도 한다. 구천동 입구에서 약 6km 지점에 서벽 정이 있고 그 서쪽에 창암이 배모양으로 솟아 있다. 구한말의 학자 연제 송승선이 이곳에 은거하여 루벽정을 짓고 스스로 호를 동방일사라 하였고 창암의 고고함을 들어 일사대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 아래로 수백명이 앉을 수 있는 평범한 암반이 있고 계곡의 물이 흐르며, 암반의 아래편은 풀이 형성되어 있고 물속에 솟아 있는 한 바위에는 "인간사를 영원히 버리고 나의 도를 창주에 붙인다."라고 한 연제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암반 위로는 양쪽 기슭을 잇는 줄다리가 놓여 있으며 이 주변의 풍경이 수려하다. 이곳이 무위구곡중 4곡이다.
나제통문에서 9.7km 지점에 있으며 그 뒤에 암석이 소금강산과 같이 절묘하다. 1592년 임진왜란때 유명한 김천장군의 부인 양씨의 친족 부친인 양도사가 이곳에서 공을 드리다 어느해 가을밤 물에 비치는 달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발견하고 도를 깨쳤다 하여 추월담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이 무위구곡중 제7곡이다.
구천동 3대 명소중 하나이다. 고요히 잠긴 소는 급류가 암석에 부딪히는가 하면 또 소가 된다. 주변이 다른 경소보다 넓기도 하고 경치가 다양하다. 길가에 거암이 고립되었고 그위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크지는 않으나 수령이 천년을 넘는다고 한다. 나무 이름이 천년송이고, 바위이름은 천송암이다. 이 소나무는 신라시대의 일지대사가 이곳을 탐승한 기념으로 소나무 가지 하나를 꽃았는데 이 가지가 흙이 없는 바위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계곡 건너편에는 파회가 있다. 무위구곡중 제9곡이다.
나제통문에서 16.4Km 지점에 있다. 삼송리 다리에서 상류쪽으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기암 절벽이 나타난다. 절벽위는 수림이 꽉 차있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맑은 물이 암벽에 부딛혀 퍼지는 장관이 아름답다. 신라시대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수경선생이 소요하던 곳이라서 수경대라 부르게 되었다.
직경 5m 크기의 원형에 가까운 낙석이다. 지금부터 350년전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산신을 모시고 덕유산을 지키며 지리산을 왕래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산신의 명으로 특약을 구하러 가던 중 이 바위에 이르자 안개 가 자욱하여 앞을 가누지 못하고 이리 저리 뛰다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소(沼)에 빠져 100일간 꼼짝 못하고 울부짖기만 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이 바위를 호탄암이고 한다.
덕유산을 배경으로 그 중턱에 자리잡은 백련사는 구천동 골짜기에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구천동 계곡에는 예 전에 십여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사라지고 오직 백련사만 남아 있다. 백련사는 신라 신문왕때 백련선사 가 숨어 살던 곳인데 이곳에서 백련이 솟아 피어났다 하여 절을 세웠다고 한다. 백련사는 처음엔 작은암자에 불 과했고 그나마 6·25 전란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1962년 재건을 시작하여 유지되어 오다가 구천동의 관광지로 각 광을 받으면서 중수되었다. 이 절에는 지방 기념물 42호인 백련사계단(戒壇)을 비롯해서 지방 유형문화재 43호 인 매월당부도가 있고 이 밖에 고려시대에 제작된 삼존석불이 유명하다.
일명 향적봉(香積峰)으로 부르고 있는 덕유산정은 백담사에서 2.4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옛날 이태조가 이곳에서 산 제를 올리다 목이 말라 물을 찾자 정상의 바위틈에서 물줄기가 터져 나와 이태조의 목마름을 풀어주었다 하여 왕 생수라 불리우는 이 우물은 지금도 이곳을 찾는 많은 등산객들의 벗이 되고 있다고 한다. 구천계곡의 원시림을 헤집고 정상에 오르면 천년이나 된듯한 주목을 비롯한 고산식물들, 고사목등이 운치있는 경관을 자아낸다. 덕유산을 정점으로 남으로는 지리산, 북으로는 속리산, 동으로는 가야산, 서쪽으로는 설장산이 시야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