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괘(蹇卦)는 〈서괘전(序卦傳)〉에 “규(
)는 어긋남이니, 어긋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건괘(蹇卦)로 받았으니, 건(蹇)은 어려움이다.” 하였다. 규괴(
乖)의 때엔 반드시 건난(蹇難)[어려움]이 있으니, 건괘(蹇卦)가 이 때문에 규괘(
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건(蹇)은 험조(險阻)[험하고 막혀 있음]함의 뜻이므로 건난(蹇難)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감(坎)이 위에 있고 간(艮)이 아래에 있으니, 감(坎)은 험함이요 간(艮)은 그침이니, 험함이 앞에 있어 그쳐서 나아가지 못한다. 앞에 험함(險陷)이 있고 뒤에 높은 산이 막혀 있으므로 건(蹇)이라 한 것이다.
서남(西南)은 곤방(坤方)이요 곤(坤)은 땅이니 체(體)가 순(順)하고 평이하며, 동북(東北)은 간방(艮方)이요 간(艮)은 산(山)이니 체(體)가 그치고 험하니, 건난(蹇難)의 때에 있어 평이한 땅에 순히 처함이 이롭고, 위험한 곳에 멈춤은 이롭지 않다. 순하고 평이함에 처하면 난(難)을 풀 수 있으나 험함에 멈추어 있으면 난(難)이 더욱 심해진다. 건난(蹇難)의 때에는 반드시 성현(聖賢)이 있으면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운 것이요, 어려움을 구제하는 자는 반드시 대정(大正)의 도(道)로써 하고 그 지킴을 견고히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貞)하면 길(吉)한 것이다. 무릇 어려움에 처한 자는 반드시 정정(貞正)함을 지킴에 있으니, 가령 어려움이 풀리지 않더라도 바른 덕(德)을 잃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길(吉)한 것이다. 만일 어려움을 만나 그 지킴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사악함과 넘침으로 들어간다면 비록 구차히 어려움을 면하더라도 또한 악덕(惡德)이니, 의(義)와 명(命)을 아는 자는 하지 않는다.
건(蹇)은 어려움이니, 발이 나아가지 못하니 가기 어려운 것이다. 괘(卦)됨이 간(艮)이 아래에 있고 감(坎)이 위에 있어 험함을 보고 멈춘다. 그러므로 건(蹇)이라 한 것이다. 서남(西南)은 평이하고 동북(東北)은 험조(險阻)하며 또 간방(艮方)이니, 어려운 가운데에 있어 험한 곳으로 감이 마땅하지 않으며, 또 괘(卦)가 소과괘(小過卦)[
]로부터 와서 양(陽)이 나아가면 가서 오(五)에 거하여 중(中)을 얻고, 물러가면 간(艮)에 들어가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서남(西南)은 이롭고 동북(東北)은 이롭지 않다’ 한 것이다. 건(蹇)의 때를 당하여 반드시 대인(大人)을 만나본 뒤에야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고 또 반드시 정도(正道)를 지킨 뒤에야 길(吉)한데, 괘(卦)의 구오(九五)가 강건(剛健) 중정(中正)하여 대인(大人)의 상(象)이 있고 이효(二爻)로부터 이상(以上)의 다섯 효(爻)는 모두 바른 자리를 얻었으니, 또 정(貞)의 뜻이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또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우니, 정(貞)하면 길(吉)하다’고 한 것이다. 험함을 당한 자는 멈춤을 귀하게 여기나 또 끝내 멈추어서는 안되며, 험함에 처한 자는 나아감을 이롭게 여기나 그 바름을 잃어서는 안 된다.
‘건난야(蹇難也)’는 건(蹇)이 난(難)이 됨은 건(乾)이 건(健)이 됨과 같으니, 만일 바꾸어 난(難)이라고 하면 뜻에 부족함이 있으니, 건(蹇)은 험조(險阻)의 뜻이 있다. 둔(屯) 또한 어려움이요 곤(困) 또한 어려움이니, 똑같이 어려움이 되나 뜻은 다르다. 둔(屯)은 처음에 어려워서 통하지 못함이요, 곤(困)은 힘이 다함이요, 건(蹇)은 바로 험조(險阻) 간난(艱難)의 뜻이니, 뜻이 각기 다르다. ‘험재전야(險在前也)’는 감험(坎險)이 앞에 있어 아래가 멈추어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건(蹇)이라 한 것이다.
괘재(卦才)로 건(蹇)에 처하는 방도를 말한 것이니, 위가 험하고 아래가 멈춤은 험함을 보고 멈춘 것이다. 험함을 범하고 나아가면 뉘우침과 허물이 있다. 그러므로 능히 멈춤이 지혜롭다고 찬미한 것이다. 건난(蹇難)의 때를 당하여 오직 멈춤이 선(善)함이 된다. 그러므로 여러 효(爻)에 오(五)와 이(二)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는 것을 실(失)이라 하고 오는 것을 득(得)이라 하였다.
【本義】以卦德으로 釋卦名義而贊其美라
괘덕(卦德)으로 괘명(卦名)의 뜻을 해석하고 그 아름다움을 칭찬한 것이다.
蹇利西南은 往得中也요 不利東北은 其道窮也요
건(蹇)이 서남(西南)이 이로움은 가서 중(中)을 얻기 때문이요, 동북(東北)은 이롭지 않음은 그 도(道)가 궁극하기 때문이요,
건(蹇)의 때엔 평이(平易)함에 처함이 이로우니, 서남(西南)은 곤방(坤方)이라 순하고 평이함이 되고, 동북(東北)은 간방(艮方)이라 험조(險阻)함이 되며 구(九)가 위로 올라가서 오(五)에 거하여 중정(中正)의 자리를 얻었으니, 이는 가서 평이(平易)한 땅을 얻은 것이므로 이로운 것이다. 오(五)가 감험(坎險)의 가운데 처하였는데 평이(平易)하다고 이른 것은 괘(卦)가 본래 곤(坤)이었는데 오(五)가 감으로 말미암아 감(坎)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다만 가서 중(中)을 얻음을 취하였고 감(坎)을 이룬 뜻은 취하지 않은 것이다. 어려운 때를 당하여 또 위험한 곳에 멈추면 어려움이 더욱 심해진다. 그러므로 동북(東北)은 이롭지 않은 것이다. ‘기도궁야(其道窮也)’는 건(蹇)이 궁극(窮極)함을 이른 것이다.
利見大人은 往有功也요 當位貞吉은 以正邦也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움은 가서 공(功)이 있는 것이요 자리에 마땅하여[지위를 맡아] 정길(貞吉)함은 나라를 바로잡는 것이니,
건난(蹇難)의 때에 성현(聖賢)이 아니면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운 것이다. 대인(大人)이 지위를 맡으면 어려움을 구제하는 공(功)을 이룰 수 있으니, 이는 가서 공(功)이 있는 것이다.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대정(大正)의 도(道)이니, 부자(夫子)가 또 괘(卦)의 재질을 취하여 말씀하였다. 건(蹇)의 여러 효(爻) 중에 초(初)를 제외하고는 나머지가 모두 정위(正位)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정정(貞正)하여 길(吉)함이 되는 것이다. 초육(初六)은 비록 음(陰)이 양위(陽位)에 거하였으나 음(陰)이 아래에 처함은 또한 음(陰)의 바름이다. 이와 같은 정도(正道)로 나라를 바로잡는다면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건(蹇)의 때에 처하여 건(蹇)을 구제(救濟)하는 도(道)가 그 쓰임이 지극히 크므로 ‘크다’고 말씀한 것이다. 천하(天下)의 난(難)을 어찌 쉽게 평(平)할 수 있겠는가. 성현(聖賢)이 아니면 불가능하니, 그 쓰임이 크다고 이를 만하다. 때에 순응하여 처하고 험함을 헤아려 가서 평이(平易)한 도(道)를 따르고 지극히 바른 이치를 행하는 것이 바로 건(蹇)의 때와 용(用)이다.
【本義】以卦變卦體로 釋卦辭하고 而贊其時用之大也라
괘변(卦變)과 괘체(卦體)로 괘사(卦辭)를 해석하고 때와 용(用)의 큼을 칭찬한 것이다.
象曰 山上有水蹇이니 君子以하여 反身修德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산(山) 위에 물이 있음이 건(蹇)이니, 군자가 보고서 자기 몸에 돌이켜 덕(德)을 닦는다.”
산(山)이 높이 막혀있는데 위에 다시 물이 있으니, 감(坎)의 물은 험함(險陷)의 상(象)이 되어 위와 아래가 험하고 막혔으므로 건(蹇)이 된 것이다. 군자가 건난(蹇難)의 상(象)을 보고서 자기 몸에 돌이켜 덕(德)을 닦으니, 군자가 어려움과 막힘을 만나면 반드시 자기 몸에 돌이켜 구하여 더욱 스스로 닦는다. 맹자(孟子)가 말씀하기를 “행(行)하고도 얻지 못함이 있으면 모두 자기 몸에 돌이켜 구하라.” 하였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만나면 반드시 스스로 자기 몸에 살펴보아 무슨 잘못이 있어 이렇게 되었는가 한다면 이는 몸에 돌이킴이요, 잘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고치고 마음에 부족(不足)함이 없으면 더욱 힘씀은 바로 덕(德)을 닦는 것이다. 군자는 덕(德)을 닦고 때를 기다릴 뿐이다.
육(六)이 건(蹇)의 초기에 거하여 가서 나아가면 더욱 어려움에 들어가니, 이는 가면 어려운 것이다. 건(蹇)의 때를 당하여 음유(陰柔)로서 응원(應援)이 없는데 나아가면 그 어려움을 알 만하다. 내(來)는 왕(往)과 상대되는 말이니, 위로 나아가면 왕(往)이 되고 나아가지 않으면 내(來)가 된다. 멈추고 나아가지 않으면 이는 기미를 보고 때를 아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니, 오면 명예가 있는 것이다.
【本義】往遇險이요 來得譽라
가면 험함을 만나고 오면 명예를 얻는 것이다.
象曰 往蹇來譽는 宜待也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가면 어렵고 오면 명예를 얻음은 마땅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건(蹇)의 초기를 당하여 나아가면 더욱 어려워지니, 때가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기미(幾微)를 보고 멈추어서 때가 행할[갈] 만하기를 기다린 뒤에 행해야 한다. 여러 효(爻)가 모두 가는 것은 어렵고 오는 것은 선(善)하니, 그렇다면 어려움을 벗어날 의(義)가 없는가? 건(蹇)에 있어서 가면 어렵고 건(蹇)이 끝나면 변하므로 상효(上爻)는 이미 너그러운 뜻이 있는 것이다.
이(二)는 중정(中正)의 덕(德)으로 간(艮)의 체(體)에 거하였으니 중정(中正)에 멈추는 자이며, 오(五)와 서로 응(應)하니 이는 중정(中正)한 사람이 중정(中正)한 군주(君主)에게 신임(信任)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신(王臣)이라 이른 것이다. 비록 상(上)·하(下)가 덕(德)을 함께 하나 오(五)가 크게 어려운 가운데 있어 건난(蹇難)한 때에 힘을 다하니, 그 어려움이 지극히 심하다. 이 때문에 어려움에 어렵게 함이 되는 것이다. 이(二)가 비록 중정(中正)이나 음유(陰柔)의 재질로 어찌 쉽게 그 임무(任務)를 감당하겠는가. 이 때문에 어려움에 어려운 것이다. 뜻이 군주(君主)를 건난(蹇難)의 가운데에서 구제함에 있으니, 그 어려움에 어려운 것은 자신을 위한 연고가 아니니, 비록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뜻과 의(義)가 가상(嘉賞)히 여길 만하다. 그러므로 그 충신(忠藎)함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재주가 어려움을 구제할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구제할 수 있다면 성인(聖人)이 마땅히 성(盛)하게 칭찬하여 권면(勸勉)하였을 것이다.
유순중정(柔順中正)으로 정응(正應)이 위에 있으나 험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어렵고 또 어려워 구제하기를 구하니, 이는 그 자신의 연고 때문이 아니다. 길흉(吉凶)을 말하지 않은 것은 점치는 자가 다만 마땅히 몸을 굽혀 힘을 다할 뿐이요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이해]에 대해서는 논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삼(九三)은 강(剛)으로서 정(正)에 거하고 하체(下體)의 위에 처하였으니, 건(蹇)의 때를 당하여 아래에 있는 자가 모두 유순(柔順)하여 반드시 삼(三)에게 의지할 것이니, 이는 아래에 있는 자의 귀부(歸附)하는 바가 되는 자이다. 삼(三)은 상(上)과 정응(正應)이나 상(上)이 음유(陰柔)로서 지위가 없어 원조(援助)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위로 가면 어려운 것이다. 내(來)는 아래로 옴이요 반(反)은 돌아옴이니, 삼(三)이 아래 두 음(陰)의 좋아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와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니, 다소 편안한 곳이다.
【本義】反就二陰이면 得其所安이라
돌아와 두 음(陰)에게 나아가면 편안한 곳을 얻는다.
象曰 往蹇來反은 內喜之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가면 어렵고 오면 제자리로 돌아옴은 안이 기뻐하기 때문이다.”
내(內)는 아래에 있는 음(陰)이다. 건(蹇)의 때를 당하여 음유(陰柔)가 자립(自立)할 수 없으므로 모두 구삼(九三)의 양(陽)에게 붙어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구(九)가 삼(三)에 처함은 건(蹇)에 있어 제자리를 얻음이 되니, 건(蹇)에 처하여 아래의 마음을 얻으면 편안함을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는 것을 ‘반(反)’이라 하였으니, 《춘추(春秋)》에 ‘귀(歸)’라고 말한 것과 같다.
가면 더욱 감험(坎險)의 깊음에 들어가니, 가면 어려운 것이다. 건난(蹇難)의 때에 거하여 함께 어려움과 곤액에 처한 자는 그 뜻이 상의(相議)하지 않아도 같고, 또 사(四)가 상위(上位)에 거하여 아래에 있는 자와 똑같이 자리의 바름을 얻었으며, 또 삼(三)과 서로 가까우니 서로 친한 자이고 이(二)와 초(初)는 동류(同類)이니 서로 더부는 자이니, 이는 아래와 뜻을 함께 하여 무리가 따르고 붙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면 연합(連合)한다고 말한 것이다. 오면 아래에 있는 무리와 서로 연합(連合)하니, 무리와 연합(連合)함은 건(蹇)에 처하는 도리를 얻은 것이다.
【本義】連於九三하여 合力以濟라
구삼(九三)과 연합(連合)하여 힘을 합해 구제한다.
象曰 往蹇來連은 當位實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가면 어렵고 오면 연합(連合)함은 당한 자리가 성실하기 때문이다.”
사(四)가 건(蹇)의 때를 당해서 상위(上位)에 처하였으나 가지 않고 와서 아래와 뜻을 함께 하니 진실로 무리를 얻을 수 있고, 또 음(陰)이 음위(陰位)에 거하여 그 성실함을 얻음이 되니, 성실함으로 아래와 더불기 때문에 연합(連合)하며, 아래의 이효(二爻)와 삼효(三爻) 또한 각각 그 실(實)[제자리]을 얻었고 초(初)가 음(陰)으로서 아래에 거하니, 또한 그 실(實)이다. 환난(患難)을 함께 하는 때를 당하여 서로 사귀기를 성실함으로써 하면 합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면 연합(連合)함은 당한 자리가 성실하기 때문인 것이다. 건난(蹇難)에 처함에 성실함이 아니면 어떻게 구제하겠는가. 당위(當位)를 정(正)이라고 말하지 않고 실(實)이라고 말한 것은 상(上)·하(下)의 사귐은 성실함을 위주로 하니, 쓰임이 각각 마땅한 자리가 있는 것이다.
오(五)가 군위(君位)에 거하여 건난(蹇難)의 가운데에 있으니 이는 천하(天下)가 크게 어려운 것이요, 건(蹇)을 당하고 또 험한 가운데 있으니 또한 큰 어려움이 된다. 크게 어려운 때에 이(二)가 아래에 있어 중정(中正)으로 서로 응(應)하니, 이는 그 벗의 도움이 오는 것이다. 천하(天下)가 어려운 때를 당하여 중정(中正)의 신하(臣下)의 보필(輔弼)을 얻는다면 그 도움이 어찌 작겠는가. 벗이 오는데도 길(吉)함이 없음은 어째서인가? 어려움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양중정(剛陽中正)의 군주(君主)로서 크게 어려운 가운데 있으니, 강양중정(剛陽中正)의 신하(臣下)가 서로 보필(輔弼)함이 아니면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없다. 이(二)의 중정(中正)은 진실로 도움이 있으나 음유(陰柔)의 도움으로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하고자 하면 능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함에는 현성(賢聖)의 신하(臣下)가 군주(君主)를 위하여 도와줌으로 말미암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을 얻음이 이것이요, 중상(中常)[보통]의 군주(君主)가 강명(剛明)한 신하(臣下)를 얻어 큰 어려움을 구제한 경우가 있으니, 유선(劉禪)의 공명(孔明)과 당(唐)나라 숙종(肅宗)의 곽자의(郭子儀)와 덕종(德宗)의 이성(李晟)이 이 경우이다. 비록 현명(賢明)한 군주(君主)라도 만일 그 신하(臣下)가 없으면 어려움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릇 육(六)이 오(五)에 거하고 구(九)가 이(二)에 거한 것은 아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공(功)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 몽괘(蒙卦)와 태괘(泰卦)의 유(類)가 이것이요, 구(九)가 오(五)에 거하고 육(六)이 이(二)에 거한 것은 그 공(功)이 부족한 경우가 많으니 둔괘(屯卦)와 비괘(否卦)의 유(類)가 이것이다. 신하(臣下)가 군주(君主)보다 어질면 군주(君主)를 보필(輔弼)할 적에 군주(君主)의 능하지 못한 것을 할 것이요, 신하(臣下)가 군주(君主)에게 미치지 못하면 찬조(贊助)할 뿐이다. 그러므로 대공(大功)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붕(朋)은 그 붕류(朋類)이다. 오(五)가 중정(中正)의 덕(德)이 있는데 이(二) 또한 중정(中正)이니, 비록 크게 어려운 때이나 그 지킴을 잃지 않고, 어려움에 어려워 서로 응(應)하고 도와주니, 이는 그 중정(中正)한 절도(節度)로써 하는 것이다. 상(上)·하(下)가 중정(中正)하고도 구제하지 못하는 경우는 신하(臣下)의 재주가 부족하기 때문이니, 예로부터 절개를 지키고 의(義)를 잡으나 재주가 구제할 수 없었던 자가 어찌 적었겠는가. 한(漢)나라의 이고(李固)·왕윤(王允)과 진(晉)나라의 주의(周
)·왕도(王導)의 무리가 이 경우이다.
육(六)은 음유(陰柔)로서 건(蹇)의 극(極)에 처하였으니 지극히 험함을 무릅쓰고 가면 어렵고, 가지 않고 와서 오(五)를 따르고 삼(三)을 구하면 강양(剛陽)의 도움을 얻으리니 이 때문에 여유로운 것이다. 건(蹇)의 도(道)는 곤(困)하고 막히고 궁(窮)하고 위축되니, 석(碩)은 큼이니 관유(寬裕)를 일컫는다. 오면 관대(寬大)하여 그 어려움이 풀릴 것이다. 건(蹇)의 극(極)은 건(蹇)을 벗어날 길이 있으나 상육(上六)이 음유(陰柔)이기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며, 강양(剛陽)의 도움을 얻으면 어려움을 늦출 수 있을 뿐이니, 어려움이 지극한 때에 있어 늦춤을 얻으면 길(吉)하다. 강양중정(剛陽中正)이 아니면 어찌 어려움에서 벗어나겠는가. 대인(大人)을 봄이 이로운 것은 어려움이 지극한 때에 대덕(大德)의 사람을 만나면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대인(大人)은 오(五)를 이르니 서로 가까이 있기 때문에 이 뜻을 말한 것이다. 오(五)는 양강중정(陽剛中正)으로 군위(君位)에 거하였으니, 대인(大人)이다.
오(五)에서는 어려움을 구제하는 공(功)을 말하지 않았는데, 상육(上六)에 만나봄이 이로움은 어째서인가? 오(五)에 말하지 않은 것은 감험(坎險)의 가운데 처하여 강양(剛陽)의 도움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구제(救濟)하는 뜻이 없고, 상육(上六)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지극하여 대덕(大德)의 사람을 만나면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이로운 것이니, 각효(各爻)에서 뜻을 취함이 똑같지 않다. 예를 들면 둔괘(屯卦)는 초구(初九)의 뜻이 바르나 육이(六二)에 있어서는 지목하여 적(敵)이라 한 것과 같다. 여러 효(爻)에 다 길(吉)함을 말하지 않았는데 상효(上爻)만이 홀로 길(吉)함을 말한 것은 여러 효(爻)가 모두 정(正)을 얻어 각각 선(善)한 바가 있으나 모두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길(吉)함이 될 수 없고, 오직 상효(上爻)는 건(蹇)의 극(極)에 처하여 관유(寬裕)함을 얻었으니, 이는 바로 길(吉)함이 되는 것이다.
상육(上六)이 삼(三)과 응(應)이고 오(五)를 따르니, 이는 뜻이 안에 있는 것이다. 건(蹇)이 이미 지극한데 도와주는 이가 있기 때문에 여유가 있어 길(吉)한 것이다. 육(六)이 음유(陰柔)로서 건(蹇)의 극(極)을 당하여 강양중정(剛陽中正)의 군주(君主)를 매우 가까이 하니, 자연 그 뜻이 따르고 붙어 스스로 구제(救濟)하기를 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우니, 구오(九五)의 귀(貴)함을 따름을 이른다. 귀(貴)함을 따른다고 말한 까닭은 사람들이 대인(大人)이 오(五)를 가리킨 것임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