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문도 항의 모습 서도, 동도, 고도의 삼도로 둘러쌓인 이곳 내항은 바다가 깊고, 그 어떤 큰 파도에도 안전할 만큼 항구로서 천헤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
ⓒ 김광철 |
"우와! 세 마리가 올라왔다."
"이 고기 이름이 뭐예요?"
"'전갱이'라고 해요."
"우와, 대단하네요."
ㅈ지난 23일~24일(1박 2일), 전라남도와 여수시가 후원을 하고 전남대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가 주관한 '친구야~! 섬으로 가자' 프로그램 중 오후 낚시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 김자흔 시인이 줄낚시를 하는데, 한꺼번에 세 마리의 전갱이를 낚아 올리고 내지르는 탄성이었다.
▲ 거문도에서의 낚시 체험 가두리 양식장 인근에서 낚시 체험을 하는데, 제일 많이 낚아올린 사람은 11마리까지 낚아올려 신이났다. 농어, 방어, 전갱이, 도미 등 다양하게 잡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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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낚시 체험에 참가한 나는 참가자들 중에 최초로 한 마리를 잡아올리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나머지는 신통한 기록은 없다. 고작 3마리를 낚아 올리는 것으로 이날 체험의 묘미만 느낄 뿐이었다. 김자흔 시인을 비롯하여 여수에서 참가한 여자 분 등은 2시간 정도의 낚시 체험에서 모두 11마리를 낚아올려 수량에서 최고의 기록을 세웠고, 다른 사람들 중에는 50cm 정도 되는 방어를 낚은 사람도 있고, 농어, 도미 등 어종도 다양하게 낚을 수가 있어 다들 싱글벙글이었다. 평생에 낚싯줄은 잡아 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하는 낚시 체험에서 이렇게 많이 낚을 줄은 몰랐다며 다들 즐거워했다.
이번 1박 2일 간의 거문도 탐방 일정을 기획하고 운영한 한국작가회의의 소속인 이곳 삼산면의 초도 출신의 김진수 시인과의 인연으로 작가회의 회원들 일부도 참가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 자체가 여수시 관할 지역의 365개 섬을 널리 소개하기 위하여 기획되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참여도 중요하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의 참여도 환영하는 것이다. 김진수 시인은 "이곳이 가두리 양식장 근처라서 먹이들이 풍부하여 물고기들이 많이 몰려온다. 그래서 많이 낚을 수 있었을 것이다."고 하면서 준비해간 초고추장에 낚아올린 물고기 몇 마리를 즉석에서 회를 떠서 소주 한 잔씩 곁들이니 다들 즐거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 등대바위 서도 끝 수월산 바다 자락에는 이렇게 거대한 안산암 바위들이 서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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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거문도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풀고 포구로 나가 배를 타고 수월산 등대 바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바위들이 수직으로 우뚝우뚝 서 있는 위의 숲에는 허옇게 죽어있는 나무들이 제법 많았다. 나는 그 나무들이 다 태풍 때 바닷물 때문에 죽은 줄 알았는데, 해 질 녘 자유시간 때에 수월산 가까운 곳으로 가 보았더니, 해송들이 재선충에 의하여 죽어있는 나무들이었다. 배를 타고 등대 바위 일대를 둘러보는데 한 분이 말한다.
"이곳은 중생대 백악기 때 화산활동에 의하여 만들어진 섬이라서 저 앞에 보이는 허연 바위들은 다 안산암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생각한다. 우리나라 주변의 섬들은 빙하기 때는 바다가 아니고 육지라서 중국대륙과 일본과도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지금과 같은 간빙기에는 지구 기온이 높아져 그 빙하들이 다 녹으면서 바닷물이 많아져 동, 서, 남해가 생겨났다. 지금 보이는 섬들은 당시 높은 산 정상 부분들만 물에 잠기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섬들은 어디를 가나 뾰족뾰족 솟아 있고, 평지가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번 탐사 프로그램에는 없어서 가 보지 못하는 섬의 바위 경관이 뛰어나다는 '백도'도 바로 이런 풍경이라는 것을 사진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등대바위가 있는 수월산 바위들은 배로 견학을 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다음 기회에 가족들과 함께 다시 방문하여 수월산을 넘어 등대 바위가 있는 해안에도 가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우리가 탄 배는 참치 가두리 양식장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참치' 양식에 성공했다는 가두리 양식장을 견학하러 가는 것이다.
▲ 다랑어(참치) 양식장 23일 오전 우리 섬 체험 탐사팀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이곳 다랑어 양식장이다. 마침 고등어를 먹이로 던져주면 다랑어들이 그걸 받아먹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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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발전하는 다랑어 양식장
마침 참치(다랑어) 가두리 양식장에서는 참치 먹이로 고등어들을 양식장 안으로 던져주면 참치들이 돌고래가 먹이를 받아먹듯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그 먹이를 물고 들어가서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모습도 진기한 풍경이었다. 이렇게 키워진 참치들은 1kg에 8만 원 정도에 거래가 되는데, 보통 여기에서 양식되는 참치들은 1마리에 80여만 원에 거래된다고 한다.
거문도는 여수와 제주도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어서 추자도와 함께 남해안 어업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다량의 갈치와 고등어, 멸치 등이 잡힌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연안의 어종과 어획량들도 줄고 있어서 어업도 이제는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전환해 가는 시대의 흐름을 읽게 해 준다. 특히 태평양, 대서양 등 크고 깊은 바다에서 서식하는 참치를 이렇게 연안에서 양식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우리나라 수산업이 그만큼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 거문리의 거리 풍경 도로들이 일제 때 만들어지고 건물들도 대부분 그 때 지어져서 일본풍의 거리를 연상하게 하는 거문도의 중심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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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낚시체험을 마친 우리 탐방단은 김진수 시인과 김종일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 거문도의 역사 문화 유적지들을 찾아 나섰다. 구한말 세계열강들이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세게로 뻗어 나갈 때, 거문도에 상륙하여 무단으로 2년간 점령하면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청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로 삼았다는 내용은 우리 세대들이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이미 공부하였던 내용들이다. 영국이 물러가고 나서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이곳에 상륙하여 귤은(橘隱) 김유 등과 필담을 나누었는데, 그의 높은 학덕에 감복하고, 이곳에 많은 학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 감복하여 섬의 이름은 '거문(巨文)'으로 할 것을 건의하여 지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당시 귤은 김유는 기정진 등과 함께 호남유학의 중심적인 인물로서 이곳에 낙연재를 짓고 박규석, 김양록, 정상백 등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다고 할 정도로 거문도에는 많은 학자들이 근거했었고, 구한말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대마도로 끌려갔던 임병찬 의병장은 고종의 밀지를 받들고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국권회복 투쟁을 게획하다 붙잡혀 이곳 거문도로 끌려와 단식을 하다 죽어간 사연을 적은 비도 남아 있다. 이곳 서도리 출신 김상순은 일본 메이지 법학부를 졸업하고 육군 교관과 경무관 등을 지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곳에 낙영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열고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였는데, 그 학교는 전남 지방에서는 세번째로 세워진 근대 교육기관이라 한다.
역사의 중심에서 비켜서지 않으면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던 고장
원래 거문도는 서도, 동도, 고도의 큰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고, 1895년 갑오개혁 때 수군 제도가 폐지되면서 이곳의 거문진도 폐지되고 그 다음 해 초도와 손죽도 및 거문도가 포함된 삼도는 돌산군에 속하면서 그 이후는 여수 생활권으로 편입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삼산면 사무소는 현재 고도에 있다.
▲ 거문초와 영국군 주둔지 현재 거문초등학교 자리는 영국군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하고, 이곳에서 더 올라가면 영국군 묘소 자리도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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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군 묘지 처음에 9기 묻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 주민들과 영국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어 인상적이다. 밑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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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이 이곳에 상륙하기 전까지 동도와 서도 가운데 있었던 고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군은 그 섬에 상륙하여 부대 막사를 짓고, 통신 시설을 설치하고, 죽은 군인들의 묘소를 만들기도 하였다. 지금도 영국군이 묻혀 있는 영국군 묘지가 있는데, 우리 탐방단은 그 곳을 찾아 올라가 보았다. 병영 생활을 하다가 병이 나서 죽고, 사고로 죽고,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이곳에 묻어 놓은 것이다. 당시 열강들이라고 자기 멋대로 남의 땅을 점령하고 묘지까지 썼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씁쓰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현재 거문초등학교가 있는 자리는 영국군이 막사를 지어 주둔하였던 곳이라고 하고 인근에는 그들이 만들어 놓았던 테니스장 자리도 있었다. 이렇게 거문도에는 영국군의 자취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 일본 신사터 일제 감정기 때는 이곳 거문도에도 일본인들이 신사를 세월 참배를 하곤 하였는데, 지금은 다 헐리고 그 터만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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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영국군이 물러가고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전부터 이곳 거문도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들어와 정착을 하였다고 한다. 뱃길로 부산을 가는 것보다 큐슈로 가는 것이 더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고 하고, 이곳을 흐르는 해류가 독도, 울릉도까지 연결되고 그런 해류의 영향으로 일본인들이 고기잡이를 하다가 이곳으로 밀려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 지역적 배경이 있는데,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거문도를 지배했던 것이다. 영국군이 물러간 거문도항을 둘러싸고 있는 고도의 바닷가에는 2층의 일본식 건물과 골목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다만 그 주인이 바뀌었고, 집들이 일부 수리가 되거나 개축은 되었을지라도 골목의 모습은 그대로라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곳 거문도에 신사를 지어 참배를 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세웠던 신사의 탑을 세웠던 곳도 둘러보았다.
▲ 거문수산위판장 올해 갈치가 풍년이라 그러는데, 전국으로 실려갈 갈치들과 고등어들이 널려 있다. 일행 중에는 택배 주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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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면학의 전통을 잇고자 하는 사람들
이튿날 우리 탐방단은 수산물위판장을 둘러보고 나서 거문도 여객터미널 3층에 있는 '은빛 바다도서관'을 방문하였다.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 도서관이었다. 장서라야 2000여 권 남짓한 작은 도서관인데, 김진수 시인은 말한다.
"세계적으로 이런 도서관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 앉아서 보면 삼면이 바다가 다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저 바다가 다 도서관의 공간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시간은 많이 없지만, 이 도서관에서 단 석 줄을 읽고 가도 그게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가?"
▲ 은빛바다도서관 가운데 있는 사람이 이곳 발전협의회 위원장인 박정국 도서관장이고 그 오른 쪽에 있는 사람이 이번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한 김진수 시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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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거문도 출신으로 유명한 작가인 한창훈씨가 기증한 도서들이 도서관 서가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 외가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이곳 바다 이야기들이 그의 문학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탐방팀이 전날 '거문도횟집'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잠시 그를 만날 수도 있었다. 그는 지금 이곳 거문도에 머물면서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한 작가는 한국작가회의소속 작가이기 때문에 우리 일행들에게는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서가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저서에 내 손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책장을 술술 넘기면서 관심있는 대목들을 몇 장 찾아 읽었다.
이번 탐방에 참여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들은 이 도서관이 워낙 작은 열악한 도서관이라서 작가회의 소속 시인들의 시집을 찾아 보았지만 거의 보이질 않아서 실망을 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면 시집 등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책 몇 권씩이라도 보내드리자는 말을 남기면서 이곳 도서관장인 삼산면 지역발전협의회 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박정국 관장과 도서관 운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건물은 해수부 건물인데, 지역 주민들이 임대를 해서 운영을 하고 있고, 따로 임대료를 주진 않는다. 언제나 열려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여행객들도 거문도 여행 중에 잠깐의 짬을 내어 이런 호젓한 도서관에서 책 한 줄 읽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널리 알려달라. 이곳 거문초등학교 등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 등 집에서 잠자고 있는 좋은 책들이 있으면 보내주시면 많은 도움이 되겠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나는 도서관을 나오면서 어제부터 거문초등학교 소식이 궁금해졌다. 서울로 올라가면 거문초등학교를 인터넷 검색을 하여 현황이 어떤 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인터넷에서 '거문초등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았더니 거문초 본교가 있고, 그 외에 동도, 서도, 덕촌, 손죽 분교 등 4개의 분교가 있었다. 본교와 분교의 학생들을 다 모아도 전체 학생수가 35명 밖에 되질 않았다. 해방되던 해에 개교를 했으니 해방둥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 개교 72주년을 맞게 되는 것이다.
몇 가지 궁금하여 교무실과 교장실로 전화를 하였더니 다 수업에 들어갔는지 전화를 받질 않아서 행정실로 전화를 하여 몇 가지 물어보았다. 손죽 분교만 빼고, 2019년 9월에 서도분교가 있는 곳으로 4개의 본교와 분교들을 통합을 하여 '거문초등학교'로 거듭날 것이라고 한다. 이미 공사 중이라고 한다.
이곳 선생님들은 대부분 여수가 집인데, 관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고, 이곳에 근무를 하면 벽지점수를 받는다고 하였다. 학생수는 계속 줄고 있느냐고 하였더니 몇 년째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고 하여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이 궁금하여 학교 도서관은 어린이들이 많이 이용하냐고 물었더니 그렇지도 않는다고 하여 더욱 '은빛바다도서관'이 이 이런이들이 많이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들었다.
▲ 영국군 묘지 올라가는 길 이대, 동백, 까마귀쪽나무, 천선과, 참식나무, 사스레피나무, 남오미자, 예덕나무, 팽나무, 광나무 등 남해 해안가에서 볼 수 있는 상록수가 우거져 있다. | |
ⓒ 김광철 |
짧은 시간이라 섬의 곳곳을 다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 일정에 쫓겨 우리는 다시 여수항으로 향하는 11시 '조국호'를 탈 수 밖에 없었다. 탐방을 마치는 배안에서 이틀 동안의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한 편의 시로 써서 이번 탐방에 나선던 분들의 카톡에 올려 함께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