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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은 누구인가… 40년간 생일·휴일 빼고 매일 각계 인사와 조찬 모임
14살때 110원 들고 上京
2003년 경남기업 인수하고 300억원 장학재단 운영
19대 의원 됐지만 당선 무효
2015년4월9일 오후 성완종(64) 전 경남기업 회장이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 북한산 형제봉 부근에서 경찰이 시신을 수습한 뒤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사기 대출과 횡령, 분식 회계 등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돼 이날 오전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가 예정돼 있던 성 전 회장의 사망으로 경남기업과 자원개발 비리 의혹 수사가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남강호 기자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초등학교 중퇴 학력에 100만원으로 2조원대 기업을 일군 입지전적 인물이다. 여러 번 정계 입문을 시도하다 2012년 총선에서 선진통일당(옛 자유선진당) 후보로 충남 서산·태안에서 당선됐지만 작년에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었다.
성 전 회장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하고, 14세 때 단돈 110원을 들고 고향인 충남 서산을 떠나 상경했다. 신문과 약 배달로 모은 종잣돈 10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해 30대 중반에 대전·충남지역 3위 건설업체인 대아건설을 인수했다. 2003년에는 당시 국내 도급 순위 28위인 경남기업을 인수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성 전 회장은 충청권을 중심으로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고, 그 중심에는 2000년 그가 만든 충청포럼이 있었다. 이 모임에는 충청 출신 정·관계 인사와 언론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1991년 성 전 회장이 설립한 서산장학재단은 최근까지 300억원 가까운 기금을 조성해 국내외 학생들을 지원했다. 1000명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40년간 생일·휴일 빼고 매일 각계 인사와 조찬을 함께 한 것으로 유명했다.
성 전 회장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자민련 공천을 받으려다 탈락했다. 2004년 총선 때는 자민련 전국구 2번으로 공천을 받았지만 자민련 득표율이 저조해 배지를 못 달았다. 2004년 자민련에 불법 정치자금 16억원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돼 유죄를 받았다. 그는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특보단장을 지내는 등 최측근으로 통했다.
이듬해 특별사면을 받았으나 다시 행담도 개발 비리에 연루돼 기소됐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재차 특별사면을 받았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선진통일당(옛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선진통일당은 새누리당과 합당했다. 하지만 성 전 회장은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됐고 2014년 6월 벌금 500만원의 당선무효형을 선고한 원심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정계를 떠나고 경남기업 경영에 집중했지만 재무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7일 경남기업에 대해 기업회생절차 개시 결정을 내렸다. 성 전 회장은 2007년 펴낸 저서 '새벽빛'에서 "가난은 나의 재산"이라며 "고생을 해 본 사람이 고생하는 서민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고 했었다. *********************************************************
성완종은 누구인가…10원짜리 몇 장 들고 상경해 기업 일궈
자원외교 비리 의혹에 연루돼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된 성완종(64) 전 경남기업 회장이 9일 북한산 형제봉 매표소에서 3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나무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기자는 성 전 회장이 국회에 입성하기 전인 2010년 12월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걸어왔던, 결코 평탄치 않았던 인생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였던 그는 자수성가해 한 그룹 회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가난은 나의 재산”이라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었다.
그랬던 그가 230억원대의 회사 자금을 횡령하고, 460여억원의 정부 융자금을 사기 대출 받았으며, 이 대출 등을 위해 9000억원대의 분식회계를 한 혐의로 검찰에 의해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자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속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성 전 회장은 “자신은 MB맨이 아니라 MB 정부의 피해자”라고 주장했었다. 결국 그는 9일 오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결백하다면 재판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렸으면 될 것을….’ 그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기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온갖 역경을 헤치고 우뚝 일어섰던 그가 왜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안타깝고 또 궁금했다. 과거 인터뷰 기록을 찾아 성 전 회장의 삶의 궤적을 되짚어봤다.
◇10원짜리 몇 장 들고 상경
1963년 12월 눈발이 흩날리던 밤. 고향 충남 서산을 나와 무작정 기차를 타고 엄마를 찾아 서울 영등포역에 도착한 12세 소년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다. 가진 것이라곤 외삼촌이 쥐어준 10원짜리 지폐 몇 장과 아빠에게 버림받은 엄마가 식모살이를 한다는 집 주소뿐이었다.
그때 얼굴도 본 적 없는 삼륜 용달차 운전기사가 떨고 있던 소년을 데려가 기사들이 머무는 좁은 방 한구석을 내줬다. 기사는 다음날 아침 따끈한 국밥을 사줬고, 어머니가 있는 집에 데려다 줬다. 소년이 기억하는 것은 그 사내의 성이 박씨라는 것과 얼굴이 얽었다는 것뿐이었다. 매출 2조원의 건설회사인 경남기업을 일궜던 성완종 전 회장의 52년 전 모습이다.
그는 서울 영등포의 교회에 머물며 신문팔이와 약국 심부름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밤에는 교회 야학에 다니며 초등학교 중퇴의 한을 달랬다. 성 전 회장은 "언젠가 나도 낯선 이들에게서 받은 도움을 갚겠다고 다짐하며 돈을 벌었다"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도 "네가 어려운 시절 받았던 도움을 잊지 말고 꼭 다른 사람을 도와라"고 자주 당부했다고 한다.
◇장학재단 설립
성 전 회장은 7년 뒤인 1970년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당시 돈 1000원으로 화물운송업을 시작했다. 조금씩 돈이 모였고, 20대 중반이던 1970년대엔 서산토건 지분을 인수해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회사가 성장하고 안정되자 그는 1991년 12월 15일 사재(私財) 31억원을 출연해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서산장학재단은 수백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장학과 학술·교육사업, 문화 및 사회복지사업을 벌여왔다. 그는 국내 장학사업을 넘어 해외 장학사업까지 나눔의 영역을 넓혔다. 2007년부터 6·25전쟁 참전국인 에티오피아 대학생 120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했고, 러시아 사할린 교포신문인 '새고려신문사'에도 매년 1만달러(약 1150만원)를 지원했다.
성 전 회장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2000년 12월 31일 충남 안면도에서 굴 따러 나간 어선이 전복돼 어민 9명이 숨지자, 그날 밤 눈길을 뚫고 달려가 희생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위로했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로 고아가 된 엄수미양 3남매 소식을 들었을 땐 대구로 가 3남매에게 대학까지의 학자금을 약속했다. 2007년 12월 태안 기름 유출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장학재단 회원들과 달려가 1주일간 기름 제거작업을 했고, 조선일보사를 통해 10억원의 성금을 보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식들에게는 국민주택 규모 아파트 한 채씩만 주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겁니다. 저보다 어려운 사람이 많았을 텐데도 전 늘 도움을 받았습니다. 늘 선택받았고,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이젠 제가 받았던 도움을 사회에 돌려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국회 입성과 몰락
성 전 회장은 2012년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19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선거 초반 열세 전망을 뒤집고 42.6%를 득표해 2위인 새누리당 유상곤 후보를 1만2000여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그 뒤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새누리당 소속이 됐다.
그는 정치적 보폭을 넓히려던 중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며 정치 인생을 마감했다. 총선 전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주민을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됐고, 결국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벌금 500만원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 2015.04.10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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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 성완종이 문어발 인맥 구축한 방법은
‘성완종 리스트’ 파문을 보는 충청인의 마음은 복잡하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같은 충남 출신인 이완구 총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 양상으로 상황이 전개되면서 당초 그에게 온정적이었던 여론이 비판적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이다.
성완종 전 회장이 4월 9일 자살하며 메모를 남겼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두 가지 감정이 혼재했다. ‘어머니 옆에 묻어달라’는 유서가 알려지면서 충청권의 중장년층 이상은 “성완종이 그렇게 효자였다면서”라며 안타까워했다. 젊은 세대는 그의 자살에 비판적이었다. 대체로 “잘못한 거 없으면 살아서 끝까지 싸워야지 죽긴 왜 죽어”였다.
성완종이라는 이름은 충청권에서는 알려졌지만 타지역에서는 덜 알려졌었다. 충청권의 그에게 온정적 시선은 그가 입지전적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의 과거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자. 그는 충남 서산시 해미면 홍천리 출생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상경했다. 그가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게 된 배경에는 피눈물 나는 가족사가 숨어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는 1951년 충남 서산에서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산에서 유통업을 했다. 서산에서 쌀, 보리 등 곡물을 수집해 배에 싣고 인천으로 가 팔았다. 평탄했던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깨졌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인천에서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얼마 후인 1964년 12월 겨울날 4형제와 어머니는 집에서 쫓겨났다. 어머니와 4형제는 이웃집 사랑방에서 며칠을 기거했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4형제를 깨워 손에 인절미를 쥐여줬다. 어머니는 그날 밤 서울로 식모살이를 하러 갔다. 이후 완종은 동생들을 데리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1년여가 흘렀다. 어린 완종은 엄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완종은 외삼촌 집에서 서울에 기거하는 어머니 주소를 알아내 무작정 상경했다. 영등포역에서 내린 완종은 이삿짐센터를 찾아 어머니가 살고 있는 주소를 들이밀었다. 어렵게 어머니를 만났지만 식모살이를 하는 어머니는 아들을 거둘 형편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완종의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완종은 어머니가 사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잠자리를 얻었다. 새벽에는 신문 배달을 했고, 낮에는 광생약국에서 ‘약 배달 소년’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밤에는 교회 부설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완종은 신문 배달과 약 배달로 버는 돈을 꼬박꼬박 고향의 외삼촌에게 보냈다. 외삼촌은 이 돈으로 장리쌀을 놓아 알뜰살뜰 늘려 7년 만에 해미에 집 한 칸과 전답 1만㎡(3000평)를 마련했다. 잠잘 곳과 농사지을 땅이 생기자 어머니와 4형제는 눈물의 재상봉을 했다.
완종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완종은 돈을 벌기 위해 공사판을 돌아다니면서 화물운송 중개업에 눈을 떴다. 1974년 그는 성신화물 해미영업소 직원으로 들어가 화물차를 운전했다. 들소처럼 일하며 악착같이 저축했다.
1977년 그는 자신을 친아들처럼 아껴주던 사람에게서 건설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서산토건 대주주가 농협조합장에 당선되면서 200만원의 소유 지분을 완종에게 넘겼다. 이게 건설업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는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서산토건을 탄탄한 기업으로 키워 나갔다. 서산토건은 이어 대아건설을 인수했다. 대아건설 오너로 기업가의 길을 걸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박수를 치는 대목이다. 그는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기업인으로 성공한 그는 1991년 34억원을 출연해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누구보다 가정형편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설움을 잘 아는 그였다. 서산장학재단 이사장으로 그는 초중고 학생들에게 매년 20억원이 넘는 장학금을 수여했다. 지난해까지 장학금 혜택을 받은 이들은 2만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산장학재단 역시 베풂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으로 칭송받았다. 김평산 서산장학재단 부이사장은 지난 4월 12일 장례식장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장학금을 준 2만5000여명의 꿈나무들에게 바른길을 가도록 희망의 길을 열어주고자 했던 고인의 숭고한 삶의 가치를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내고 죽음으로 몰고간 책임을 누군가는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0년 충청포럼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충청포럼은 알려진 대로 충청도 출신 정치인·관료·언론인으로 구성되었다. ‘성완종 메모’를 계기로 그의 인맥이 역대 정권과 여야를 넘나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마디로 그는 역대정권 모두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변변한 학연이 없는 그가 어떻게 이같은 인맥을 구축했을까. 충청포럼이 문어발 인맥의 저수지 역할을 했다는 게 정설이다.
충청포럼은 주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강연자 중에는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 거물급 인사도 있었다. 그는 충청포럼 강연모임의 모든 경비를 15년간 혼자 댔다. 그는 충청포럼 소속 언론인에게 각별한 공을 들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많은 언론인들과 골프를 했다.
충청포럼은 세를 넓혀 전국에 10개 지부와 100여개 지회를 갖추고 있는 거대조직으로 성장해나갔다. 회원 수만 35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포럼의 주요 멤버를 보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 심대평 지방자치발전위원장, 박병석·홍문표·이명수 의원, 권선택 대전시장, 정진석·고흥길 전 의원, 오연천 전 서울대 총장이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충청포럼 창립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가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충청포럼 관련행사에는 빠지지 않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 반기문 총장과의 특별한 인연을 보여주는 대목은 반 총장의 친동생인 반기상씨가 경남기업 상임고문으로 7년 이상 재직한 사실이다.
2003년 대아건설은 경남기업을 인수하면서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이로써 대아그룹은 매출 1조2000억원대 그룹으로 급부상했다. 경남기업은 대아그룹의 주력 기업이 됐다.
충청포럼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충청포럼이 세를 확장해 나가면서 일각에서는 성완종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한 사조직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충청포럼을 함께 해온 한 인사는 “그는 학력 콤플렉스가 극심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 야심을 키웠다”고 말했다.
충청포럼이 생기고 얼마 후 그는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에 입당한다. 경남기업 회장으로 있으면서 총재특보 명함을 가졌다. 결국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자민련에 불법정치자금 16억원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2005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는 행담도 개발비리 사건에도 연루되어 유죄를 받았지만 역시 2007년 다시 사면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자민련 총재특보를 정치입문으로 보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그는 30대 시절부터 정치권을 기웃거렸다. 1980년 초반 민정당 재정위원으로 참여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는 2012년 선진통일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에서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보다 앞선 2004년에 거의 당선될 뻔하다 낙선한 경험이 있다. 2004년 총선에서 김종필 총재에 이어 전국구 2번을 받았다. 모두가 당선은 문제없다고 했지만 자민련 득표율이 예상보다 모자라 분루를 삼켰다.
성완종은 2012년 그토록 고대하던 금배지를 달았지만 2년 반 만에 국회에서 퇴출되었다. 2012년 총선 당시 자신이 이사장인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단체에 1000만원을 기부한 게 선거법 위반이었다. 4월 13일 그는 서산시 음암면 도담리 어머니 곁에 묻혔다. 2015.05.01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