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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모음 스크랩 申自敬 墓의 墓碑銘과 합장여인
양효성 추천 0 조회 60 13.10.23 20: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申自敬 墓墓碑銘

 

  천안위례향토모임 회원들이 1020일 신자경 묘소를 찾았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69호인 신자경선생묘 (申自敬先生墓)는 천안역이나 터미널에서 하루 네 번 운행하는 381번 버스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오곡리 산58번지- 인터넷에 신자경묘라고 치면 자동으로 나타나는 화면의 여러 글들은 대개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朝鮮 初期)의 전형적(典型的)인 무덤으로 사방 60보 넓이의 묘지(墓地)를 만들었다. 봉분(封墳)의 높이 4.5m이고 가로 14m, 세로 11m의 방형(方形)고분이다. 둘레에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문인상(文人像)과 장명등(長明燈), 묘비(墓碑)등 석물(石物)을 갖추고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피라미드처럼 네모난 基壇이다. 가로와 세로가 가각 14m11m이니 대단한 규모다.

 

  후대(後代)에 보수(補修)가 있었던 듯 하나 비교적 원형(原形)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묘의 주인에 대해 안내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묘의 주인인 申自敬은 태종 3(1413)에 출생(出生)하여 성종(成宗) 1(1470)에 졸()했다. 세조대(世祖代)의 공신(功臣)으로

             군자감 오위대호군(軍資監 五衛大護軍),

             상호군 (上護軍),

             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의 주요 관직(官職)을 거친 후 세조 7(1461) 목천현 오동(木川縣 梧桐)부락에 낙향(落鄕)하였다. 그후 조정에서 좌의정(左議政)을 제수(際授)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향촌(鄕村)에 묻혀 살았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죽음을 당하여 장례품(葬禮品)을 하사(下賜)하고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이 묘지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묘 앞의 작은 비석이다. 얼핏 보아도 세월을 느끼게 하는 이 비석은 주변의 근래 세워진 비석에 비해 눈길을 끈다.

 

             전면에 석 줄로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있다.

            景泰五年甲戌二月二十三日合墓

            永嘉府恭人權氏之墓

            折衝將軍行大護軍申自敬之墓

 

景泰五年[경태5]은 서기1454년 단명했던 端宗2년으로 陰曆223일에 합묘했다는 것인데, 중앙에 永嘉府[영가부]安東의 옛 이름으로 그곳 역사도 永嘉誌[영가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그 다음 공인 (恭人)은 조선 때, ()오품 및 종()오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품계다. 그렇다면 5품의 직위를 갖춘 안동 권씨의 묘라는 뜻이고,

마지막 줄은 折衝將軍[3], 은 직위보다 아래 보직에 임명되었다는 뜻으로 3大護軍인 신자경의 라는 것이다.

 

문제는 정삼품의 신자경과 오품의 권씨의 관계와 신자경의 卒年이 성종(成宗) 1(1470)으로 첫째 줄의 1454년과 약 16년의 차이가 나고 이 1454년은 신자경이 낙향했다는 1461년보다 7년이나 앞선다는 일이다. 알려진 그대로라면 신자경은 오동촌에 낙향이후 약 9년 이곳에서 생활한 것이 된다. 낙향이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사용되었다면 오동촌에 그의 삶의 터가 있어야할 것인데 어떤 분은 167-1번지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첫째 줄에 合墓라고 한 것이 1470년 신자경 死後1454년에 별세한 안동 권씨와 합묘했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신자경의 생몰연대와 권씨와의 관계 등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묘지는 조선조의 장묘제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데 같은 시대의 밀양에 있는 2기의 묘는 示唆하는 바가 많다.

 

신자경 묘비의 경태5년과 같은 해인 1454(경태 5, 단종 2) 밀양시 활성동의 추화산 산록에 있는 한성판윤 고신인의 묘비는 매우 흡사하다.

 

마멸이 심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블로그 밀양사람에서 인용>.

 

" 嘉善大夫 檢校 漢城判尹 신인

호조전서 0 0 고공지묘

000 통선랑 전병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손조서 경태 5() “

 

다만 오랫동안 강에 버려져 있던 것을 후손들이 찾아 원래의 위치로 복원했다니 문화유산의 보존에 대한 현실을 억측하게 한다.

 

시도기념물 제237(경남)인 선략장군 손유호묘(宣略將軍 孫攸好墓) 도 밀양에 있다.

 

손유호는 고려 1372년 출생하였으며 1410년에 종4품 선략장군으로 두모포(豆毛浦)의 관군을 배수받았고, 1419년에는 대마도 정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후 부친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낙향하였으며, 일흔 일곱인 1448년에 사망하였다.

 

전체 묘역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는 묘와 상석, 중단의 동·서에는 문인석, 그리고 하단의 동쪽에는 묘비[1450년 세움]가 배치되어 있다. 묘는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네모난 묘로, 묘의 앞쪽에는 상석이 놓여져 있는데 고석(鼓石)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조각되어 있으며, 고석의 앞쪽 좌우에 귀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답사반은 신자경 묘지의 풍수와 산신제단 그리고 제사의 의미 등에 대해 담론을 하면서 한눈에 들어오는 오동골짜기에 70여 지명이 있다는 것을 한 번 더 실감하고 은석사 뒤의 박문수 어사 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

 

 

신자경 묘의 비명-고졸한 필체로 중앙에 영가부 공인 귄씨의 묘라고 적혀있고

왼쪽에 경태5년에 합장했다고 적고 있다.

 

전면의 비는 1995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묘는 조선초기 묘제의 전형으로 삼단으로 되어있다.

 

석등 뒤에 문제의 옛비가 보인다

 

문인석 좌

 

문인석 우

 

묘에서 바라본 오동골-주맥은 봉황산-왼쪽에 봉암산이 있고 묘지 앞으로 시냇물이 감돌아 마을입구로 흘러간다.

병천천을 지나 미호천으로 이 물은 합류해서 세종시의  금강으로 흘러든다.

 

피라미드를 닮은 네모난 기단

 

시계로는 대략 고도 110미터인데...

 

묘지입구에는 비각과 함께 안내문이 있다.

 

이번 답사에는 어린이 회원이 특별참여했고...

 

같은 연대의 무덤이 경남 밀양에 있다. <블로그 '밀양사람'에서 재인용>

 

묘의 형태와 비석의 위치가 매우 비슷하다.                              <블로그 '밀양사람'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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