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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틱스 와 레이커스의 라이벌전 (2부) - 체임벌린 대 러셀
글: Doctor J
계속되는 체임벌린과 러셀의 라이벌 관계
빌 러셀의 게임이 두뇌와 스피드에 의존했던 스타일이었다는 견해를 자주 듣습니다. 이는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빌 러셀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몸싸움에도 능했던 힘좋은 터프가이였습니다. 전성기의 샤킬 오닐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성기의 체임벌린도 일대일로는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선수를 리그에서 유일하게 일대일로 수비하며 파울아웃을 당하지 않았던 근성과 근력이 넘치던 선수가 바로 빌 러셀이었습니다.
러셀과 체임벌린은, 코트 밖에서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또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였지만, 코트 위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거친 몸싸움과 언쟁까지 벌이며 멱살까지도 잡았던 진정한 라이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서로 주먹을 휘두르거나 불미스러운 일은 한 번도 발생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빌 러셀의 첫번째 자서전인 Go Up for Glory 에서 이러한 회고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둘은 코트 위에서 매번 무서운 격전을 펼쳤지만 서로 주먹질을 한 적은 없습니다. 거의 싸움 일보직전까지 갔던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1964년 시즌 보스턴 가든에서의 홈경기였어요. 제가 시작했던 싸움이 아니고, 아워바크 감독님이 경기 도중에 코트로 뛰어 들어서 체임벌린과 논쟁을 벌이신 것이 불씨가 됐던 싸움이었습니다. 체임벌린이 감독님께 삿대질을 했고, 양 팀 선수들이 다 몰려 들면서 저도 체임벌린에게 뭐라고 쏘아 붙였었죠."
같은 책에서 러셀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사실 체임벌린이 정말로 화가 나서 있는 힘껏 주먹이라도 휘둘렀었다면 선수 하나 정도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겁니다. 체임벌린은 몸싸움을 하거나 페인트존 안에서 공격 동작을 취할 때도 상대 선수들이 다칠까봐 봐주면서 살살 한 적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 날, 체임벌린이 정말 자기의 분을 참지 못할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아워바크 감독님을 체임벌린의 팔이 닿지 않을 지점까지 밀쳐냈지요. 바로 그 때 저희 팀의 클라이드 르벨럿 선수가 체임벌린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다가갔습니다. ‘아뿔싸!’ 하며 속으로 외치던 순간, 208cm의 제 백업이었던 거구 르벨럿은 코트에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체임벌린의 오른 주먹 한 방을 맞은 것이었죠. 그것도 살짝 휘두른 펀치였을 뿐인데... 러블레트는 잠시 혼절을 해버렸습니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체임벌린과의 계속되는 골밑싸움 속에서도 자신의 수비 위치를 빼앗기지 않고 거친 몸싸움, 언쟁, 트래쉬 토크 등을 마다 않으며 사투를 벌였던 것이 빌 러셀이었습니다. 그저 대단했던 두 선수였다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겠지요?
"체임벌린 대 러셀 이야기 1부"에서, 저는 이 둘이 서로 간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상대방을 집으로 초청해서 식사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나눈 대화는 주로 다음 날 있을 경기에 관한 것들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대화 와중에도 러셀은 체임벌린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예를 들자면, 러셀이 체임벌린에게 "내일 경기에서도 네가 나를 상대로 30점, 20리바운드를 할 수 있을까? 못 할껄?" 이러며 자꾸 약을 올렸답니다. 그러면, 다음 날 경기에서 체임벌린은 여지없이 그 30-20 스탯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기 위주의 경기를 펼쳤다는 것이죠. 반면, 체임벌린을 개인 스탯을 쌓는데만 정신이 팔리도록 꼬시는데(?) 성공한 러셀은 15-15 정도만 해주며 팀의 공수를 이끌었고 유유히 승리를 챙겼다는 것입니다. 체임벌린은 러셀을 제압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만족해 했고, 러셀은 체임벌린의 팀을 이겨서 좋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러한 관계는 10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체임벌린은 왜 러셀과의 개인대결 결과를 그리 중시했을까요?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체임벌린은 은퇴를 한 후에도, 매스컴을 상대로 러셀과 자기를 비교하지 말라며 큰 소리를 쳤습니다. 득점 부분은 비교대상도 못되고, 통산 리바운드에서도 러셀을 2,000개 이상 앞선다며, 체임벌린은 자신이 최고였다는 사실에 항상 긍지를 갖고 살았습니다.
러셀은 달랐습니다. 체임벌린이 자기를 상대로 스탯 면에서 우위를 가져간 것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아 했습니다. 누구의 팀이 이겼고, 누구의 팀이 우승을 더 많이 했느냐가 관건이었던 승부사였으니까요.
결국, 둘이서 맞대결을 펼치며 뛰었던 10시즌 동안에, 러셀은 우승을 9번 했으나, 체임벌린은 1번 밖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매스컴이 너무 많이 떠들어대며 비교를 하자, 60년대 중반부터는 체임벌린도 적쟎은 스트레스와 열등감으로 마음고생을 꽤 했습니다. 그래서 60년대 중반부터는 체임벌린도 러셀처럼 수비와 패싱, 리바운드에 더 주력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경기 스타일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1967년 필라델피아 식서스의 우승이라는 값진 열매가 되어 그에게 돌아왔습니다.
이 1967년의 패배와 함께 셀틱스의 우승가도는 8연패에서 멈췄습니다. 당시의 매스컴들과 농구 전문가들은 이제 보스턴 셀틱스의 시대는 끝이 났고, 바야흐로 체임벌린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떠들어 댔습니다. 빌 러셀은 이제 36세. 보스턴 셀틱스 선수들의 평균연령은 32세. 당시에는 30대 중반이 채 못되어 은퇴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당시의 셀틱스는 팀의 평균연령만 35세 쯤 되었던 팀이었습니다. 아워바크 감독까지 은퇴한 이 보스턴 셀틱스 왕조가 지는 해였음을 의심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1967~68 시즌을 앞둔 보스턴, 이미 심각한 노쇠화가 시작된 빌 러셀은 이전 시즌부터 감독 겸 주장 역할을 동시에 맡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부 컨퍼런스에서 또 다시 만난 디펜딩 챔피언 필라델피아 식서스 팀, 체임벌린의 식서스는 3승 1패로 시리즈를 앞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봐도 시리즈 승부의 향방은 식서스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를 뒤짚고 역전을 한 예가 전무할 때였습니다. 이 때, 감독이었던 러셀이 초강수를 둡니다. NBA 역사상 최초로 '더블 포스트' 작전을 들고 나온 것이었죠. 자신의 백업이며 힘이 좋았던 센터 웨인 엠브리 선수를 체임벌린에게 붙였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식서스의 파워포워드였던 루크 잭슨을 막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센터가 포워드를 막고, 두 명의 센터가 코트에 동시에 서는 변칙전략이 그야말로 사상초유의 일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창의력 넘치는 변칙전략에 당황한 체임벌린의 식서스는 3경기를 내리 내주며 또 다시 러셀의 셀틱스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1969년 파이널
러셀과 체임벌린이 함께 코트에서 뛰던 60년대.... 레이커스와 셀틱스는 NBA 파이널에서 모두 7번이나 만났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셀틱스의 7전 전승이었습니다. 1962, 1966, 1969년, 이 세 시즌의 파이널은 모두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이었지만, 승자는 항상 셀틱스였습니다.
레이커스에는 슈팅가드 포지션과 스몰포워드 포지션에서 역대 3위 안에 꼭 언급이 되는 제리 웨스트와 엘진 베일러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보스턴은 빌 러셀을 축으로 세대교체가 단행되던 시기였습니다. 50년대부터 뛰었던 밥 쿠지, 빌 샤만 등이 은퇴를 했고, 젊은 존 하블리첵이 러셀과 함께 팀을 이끌기 시작했던 시기였죠. 이런 역대 최고의 선수들이 용호상박의 대결을 펼쳤음에도 시리즈 전적이 이렇게 일방적이었다는 사실은, 레이커스의 선수들이나 팬들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질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7번의 파이널 대결 중 가장 많은 화제를 낳았던 것이 1969년 파이널이었습니다.
레이커스는 빌 러셀의 최고 라이벌인 체임벌린을 영입하는데 성공을 했고, 그야말로 심기일전해 노쇠화된 셀틱스를 부숴버릴 만반의 준비를 다 갖췄던 시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체임벌린이 평균 21점 21리바운드 5어시스트, 베일러가 25점 11리바운드 5어시스트, 웨스트가 26점 4리바운드 7어시스트 정도를 해준 레이커스는 파죽지세로 파이널에 안착했습니다. 이 빅 3 모두 30대 초반으로 기량 면에서도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시기였습니다. 반면, 평균연령이 33세였던 할아버지 농구팀 셀틱스는 정규시즌은 물론 플레이오프에서도 최하위 시드로서 삐걱거리며 간신히 파이널에 턱걸이를 한 팀이었습니다. 37세의 감독 겸 주장이었던 러셀은, 체력이 달려서 본인이 작전타임을 부르고도 가쁜 숨 때문에 작전을 설명하는 것 조차도 힘들어 했던, 그야말로 은퇴를 코 앞에 둔 노장선수였습니다.
레이커스가 1, 2차전을 홈에서 완승으로 가져 가자, 어떠한 농구팬도 레이커스의 우승을 의심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레이커스의 체임벌린은 골밑에서 러셀을 압도했으며, 늙은 셀틱스 스윙맨들이 막기에는 웨스트와 베일러의 화력이 너무나도 막강했습니다. 반면, 셀틱스는 하블리첵 만이 공수 양면에서 고군분투했지요. 3차전을 홈에서 이긴 셀틱스는, 4차전에서도 다 졌던 경기를 막판에 샘 존스의 버저비터에 힘입어 가까스로 잡으며 기사회생합니다.
그리고 운명의 7차전. 셀틱스는 정규시즌과 파이널 내내 이 레이커스 포름 경기장에서 완패만을 기록했습니다. 레이커스의 구단주였던 잭 쿠크 씨는 포름 경기장의 관중석 의자 하나하나마다 축포가 준비되도록 지시했고, 천장에도 수백개의 풍선이 마련되게끔 준비를 시켰습니다. 샴페인은 물론, 홈관중들에게 수여될 선물, 무료 햄버거와 음료수까지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계를 맡은 캐스터 칙 헌 씨에게는 베일러, 웨스트, 체임벌린 순으로 인터뷰를 해달라고 신신당부까지 해놓았습니다.
그러나... 경기 직전에 있었던 CBS TV 인터뷰에서 빌 러셀은 이러한 각오를 밝혔습니다. "레이커스는 우리를 절대로 못 이깁니다. 우리는 오늘 이 코트 위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왔거든요. 반드시 우리가 이깁니다. 저 천장에 올라가 있는 수많은 풍선들이 그냥 소리없이 내려올 생각을 하니 꽤 재미있군요."
그리고.............. 러셀이 이끈 셀틱스는 108 대 106으로 레이커스를 꺾었습니다.
경기 직후 셀틱스 락커룸에서 있었던 인터뷰에서 빌 러셀은 북받쳐 오르는 감격 때문에 울먹이며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루키 시즌에 우승을 하고, 첫 우승 당시의 멤버들 중 자신을 제외한 전원이 교체가 된 상태에서 (더우기 아워바크 감독까지 은퇴하고) 해낸 은퇴시즌의 마지막 우승. 역사를 살펴봐도, 우승을 함께 했었던 팀원들 전원이 모두 물갈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프랜차이저로서 또 다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선수는 빌 러셀(1958년, 1969년)과 팀 덩컨(1999년, 2007년), 단 둘 뿐입니다.
7차전에서, 빌 러셀은 6점에 19리바운드를 잡아냈고, 체임벌린은 18점과 22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역시나 스탯은 체임벌린의 승이었고, 경기는 러셀이 가져갔습니다.
파이널 역사상 이례적으로 패배한 팀의 제리 웨스트에게 수여된 파이널 MVP 상이 그나마 레이커스에 약간의 위안이 되었을까요? 웨스트는 7차전 42득점을 포함, 시리즈 내내 발군의 활약을 보이며 팀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레이커스는 또 졌고, 그는 락커룸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1969년 파이널 7차전을 승리로 이끈 러셀
이처럼, 60년대 NBA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러셀과 체임벌린, 그리고 셀틱스와 레이커스의 대결은 러셀과 셀틱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했다면 훨씬 더 재미가 있었을 라이벌 관계였지만, 운명의 여신은 레이커스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레이커스의 입장에서는 악몽 그 자체였던 1969년 파이널 이후, 무려 15년간 이 두 팀은 파이널에서 다시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70년대 중후반 들어서, 셀틱스의 데이브 코웬스와 레이커스의 압둘자바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라이벌전이 생겨날 것으로 기대를 한껏 모으게 했던 두 팀이었지만, 결국 이 둘이 파이널에서 맞붙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동서 냉전시대로 들어간 것이지요.
이 냉전시대는 80년대 들어 또 다시 전면전의 양상을 띄며 부활합니다.
래리 버드와 매직 존슨이라는 불세출 스타들의 NBA 리그 입성과 함께.....
1969년 셀틱스 대 레이커스의 맞대결 다큐멘터리 (8분 30초 경에 러셀의 파이널 7차전 승리 직후의 인터뷰 장면이 잠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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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회수 2에 보는 이 상콤함.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와... 마지막 문장이 또 다른 라이벌의 등장을 암시하는건가요. 아-주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ㅎㅎ
기다렸던 글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빌 러셀... 정말 대단한 센터였군요;; 채임벌린도 몸싸움을 봐주면서 한거라니 -_-;;; 대단한 전설들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센터 2명이 동시대에 뛰었고 라이벌리를 형성했단 점에서 참 ...
이런말도 있죠 60년대~70년대 기자들은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누구를 뽑는냐면 항상 그 대답에는 러셀이였습니다 참 닥터제이님 덕분에 견문 넒히고 갑니다
1981년에 NBA의 감독들과 엄선된 NBA 평론가들만을 중심으로 역대 최고의 선수들 10인을 공식적으로 뽑은 적이 있습니다. 조지 마이칸 - 윌트 체임벌린 - 빌 러셀 - 커림 압둘자바 - 밥 페팃 - 존 하블리첵 - 줄리어스 어빙 - 제리 웨스트 - 밥 쿠지 - 엘진 베일러. 이렇게 10선수가 선정됐고, 같은 날, 빌 러셀이 NBA 첫 35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사실도 만장일치로 결정됐었습니다. 체임벌린조차도 그 투표결과는 아무 이의없이 받아 들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카페에서 읽은 모든 글들을 통틀어 제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시리즈가 나올수록 더더욱 재미있어 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기대가 되네요. 많이 느끼고 배우고 갑니다.
1편보다 더 재미있군요 ! 추천 기능이 없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대신 히트를 했습니다.
히트가 뭡니까?
조회수요 ^^;;
정말 잘읽었습니다.
러셀젊은 시절영상을 보니 그렉오든과 많이 흡사하네요 ^^
체임벌린의 젊은 시절 모습은 현재의 드와잇 하워드와 많이 흡사했습니다. 다만, 하워드에게는 없는 외곽슛과 핑거롤을 이미 장착하고 있었고 자유자재로 사용했었죠.
박사님, 책 내시라니까요.....--;; 수익구조가 걱정되신다면 제가 혼자서 10권 이상은 사겠습니다. ㅎㅎㅎ
저도 꼭;
허허허... 참....^^;;)
아.... 정말 재밌네요.. 더구나 감동이.... 저도 카페에서 읽은 글 중 제일 재밌게 읽은 것 같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조던뿐 아니라, 샼, 던컨, 코비 등 현재 최고의 스타들도 이런 선배 농구선수들이 없었다면 존재치 않았겠죠. 러셀과 윌트의 대결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는건 MVP는 러셀이 챔벌린보다 한번더 많이 차지했지만.. 올 엔비에이 퍼스트팀 센터는 챔벌린이 빌 러셀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차지했다는것.. 잘봤습니다 ..^^
당시에 디펜시브 팀도 뽑았었다면, 아마도 러셀이 13년 커리어 중 최소 11번 이상을 차지했을 겁니다.^^
궁금한 것은, 러셀이 그런 불세출의 수비로 우승을 11번이나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도 nba 당국은 왜 올해의 수비수상을 만들 생각을 안 했는지 하는 것입니다. 제리 웨스트의 파이널 활약을 보고 파이널mvp라는 수상을 급조했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한 개인의 독출난 활약으로 수상이 생겨나는 것 같은데 말이죠.
모르긴 몰라도 러셀이 흑인인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러셀은 NBA 역사상 최초의 흑인 수퍼스타였습니다. 그러나 리그에서도, 홈팀인 보스턴에서도, 이 사실을 달가와 하지 않았습니다. 60년대는 대놓고 인종차별적인 언행이 일삼아지던 시절입니다. 오죽하면 러셀이 자신의 영구결번식에도 안 오고, 은퇴를 하자마자 보스턴 시를 떠났을까요? 보스턴의 농구팬들과 화해를 하기 시작한 것도 최근 들어서의 일입니다. 리그도 이런 흑인선수가 상을 휩쓰는 모습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의 마지막 시즌인 68~69년에, 그 체력이 달리는 몸으로, 처음으로 제정된 올디펜시브 팀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은퇴했지요.
러셀은 뭐 왕조를 만드는 사나이네요..
윌트체임벌린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이 글 보고 생각이 바뀌네요..
센터로서의 개인역량으로만 본다면 체임벌린이 최고가 맞습니다. 그러나 팀에 미치는 영향력과 리더쉽에서 러셀이 우세했습니다. 농구가 팀 스포츠이기에 러셀이 이와 같은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와..정말. 1부 2부 미친듯이 정신잃고 봤습니다. 정말 유익한 글이네요.감사합니다^^
진짜 책 한번 내세요!!!
잘봤습니다. 이런 좋은 글이 이 카페의 수준을 대변하죠~
사진 좀 빌려쓰겠습니다.^^
사진상으로 체임벌린의 하드웨어 이건 뭐... 압도적이네요..
아주 단순무식한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닥터제이님은 체임벌린과 러셀 중에 누가 더 뛰어나다고 보시는지요?
저는 제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을 모두 존경합니다. 두 분이 저를 교육시킨 방법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지만 말이죠.^^
2년 전에 제가 질문한 내용이었네요. 님의 답변에 100%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