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대전 제154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사성 윤탁선생 신도비명 병서(大司成 尹倬先生 神道碑銘 幷序)
내가 일찍이 대사성 윤 선생의 묘표(墓表)를 서술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그 후예들이 다시 비석(碑石)에 사적을 새겨 묘도(墓道)에 세우려 한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휘(諱)는 탁(倬), 자는 언명(彦明), 본관(本貫)은 파평(坡平)으로 14세조(世祖) 관(瓘)은 큰 명성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자손 중 명공 거인(名公鉅人)이 많이 배출되었다.
고조(高祖) 곤(坤)은 익대공(翊戴功)으로 파평군(坡平君)에 수봉(受封), 소정(昭靖)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증조(曾祖) 희제(希齊)는 행 검교 참의(行檢校參議)로 찬성(贊成)에 추증되었고, 조부(祖父) 배(培)는 장령(掌令)으로 억울한 화를 당했는데 그 사적이 가승(家乘)에 보이고, 아버지 사은(師殷)은 현감(縣監)이었고 어머니 운봉 박씨(雲峯朴氏)는 부원군(府院君) 종우(從愚)의 딸이다.
선생은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임진년(1472, 성종 3)에 출생, 맨 처음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에게 배웠는데, 주계군은 종실(宗室) 출신으로 성리학을 선창하였다.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신유년(1501, 연산군 7)에 선생의 나이 30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소속되었고, 연산군 갑자년(1504)에 삭녕(朔寧)에 편배『編配: 도류안(徒流案)에 적어 넣는 것』되었다가 중종(中宗)이 즉위한 뒤에 다시 기용되어, 직강(直講)에서 사예(司藝). 사성(司成)을 거쳐 대사성(大司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이르렀는데, 다른 부서로 옮겨진 자리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었을 뿐, 이 밖에는 다 성균관에 재직하였다.
대저 이 무렵에는 정암(靜菴) 등 모든 선생이 다 조정에 모여 도학(道學)을 주창하고 요순(堯舜)의 군민(君民)으로 만들기를 기하였으며, 학궁의 제생들도 다 문장학이나 장구학(章句學)을 천루(淺陋)하게 여기고 주공(周公)ㆍ공자(孔子)와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말을 강설(講說)하였으므로, 이전의 모든 노선생(老先生)이 다 사석(師席)을 철수하고 선생에게 양보하였다.
선생도 여기에 보람을 갖고 친절히 교도(敎導)하여 아무리 퇴궐(退闕)한 겨를이라도 책을 끼고 찾아드는 이가 줄을 이었다. 예를 들면, 문충공(文忠公) 송인수(宋麟壽)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다 그 강론을 받았고, 또 상국(相國) 홍섬(洪暹)과 판서(判書) 원혼(元混)도 다 작위(爵位)를 타파한 채 제자(弟子)의 예절을 끝까지 다하였다.
그 뒤에 문순공이 선생에게서 들은 바를 매번 배우는 이에게 설명할 적에 으레 ‘윤 선생’이라 칭하였는데, 그중에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관한 설(說)은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유지(遺旨)에도 위배되지 않았다.
기묘년(1519, 중종14) 7월에 상이 승지(承旨) 한충(韓忠)을 보내 성균관에 어찬(御饌)을 내려 사생(師生)들을 접대하므로 이튿날 모든 사생이 입궐하여 전(箋)을 올려 사은(謝恩)하였고, 상이 정전(正殿)에 거둥하여 선생을 인견하므로 선생이 정암(靜菴), 그리고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과 함께 물음에 답하고 나서 제생들을 거느려 어전(御前)에서 글을 강(講)하였으며, 9월에 상이 문묘(文廟) 참배(參拜)를 마치고 명륜당(明倫堂)에 거둥하자, 제현(諸賢)들이 물음에 답하고 나서 제생들과 함께 《상서(尙書)》ㆍ《주역(周易)》 등의 글을 강론하였으므로 그 당시 성사로 전해졌다.
11월에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이 음모로 사화(士禍)를 일으켰을 때 선생이 별직(別職)으로 옥사(獄事)를 맡게 되자, 즉시 사직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여러 소인이 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선생은 퇴척(退斥)된 지 오랜 뒤에 겨우 한성 좌윤(漢城左尹)에 기용되었고 바로 송경 유수(松京留守)로 나갔다가 별세하였으니, 갑오년(1534, 중종 29) 11월 28일이었다. 이듬해 2월 25일에 장단부(長湍府) 동쪽 기곡리(基谷里) 자좌오향(子坐午向)의 묘(墓)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전취(前娶)는 현령(縣令) 한사신(韓士信)의 딸로 아들 선지(先智)를 낳아 병마사(兵馬使)에 이르고, 후취(後娶)는 대사헌(大司憲) 이맥(李陌)의 딸로 선철(先哲)을 낳아 부정(副正)에 이르고, 셋째는 선정(先正)이며, 여서(女婿)는 허주(許鑄)ㆍ허명(許明)으로 다 음직(蔭職)을 받았다.
그 뒤로 자손이 더욱 번창하여 지금 5, 6세가 내려오는 동안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그중에도 가장 두드러진 이로는, 손자 경(暻)은 첨지(僉知), 성(暒)은 승지(承旨)로 모두 청환(凊宦)을 역임하였고, 현손(玄孫) 황(煌)은 대사헌(大司憲)으로 명성과 행의(行誼)가 현저하였고, 전(烇)은 필선(弼善)으로 난(亂)을 만나 절의(節義)를 세웠으며, 이 두 분의 자손이 다 학문을 힘쓰고 행의를 닦아 일세의 모범이 되었다.
그 외손으로는, 감사(監司) 홍명구(洪命耈)가 절의를 위하여 국난(國難)에 죽었고, 판서(判書) 홍명하(洪命夏)가 일세의 명신(名臣)이 되었으니, 이는 다 선생에게서 근본된 바요, 그 나머지는 따로 기록되어 있다.
아, 우리나라가 단군(檀君)ㆍ기자(箕子)로부터 전후 수천 년 동안에 걸쳐 오직 본조(本朝)의 치도(治道)가 가장 문명(文明)으로 일컬어지는데, 그중에도 더욱 성(盛)한 세대를 든다면 기묘년(1519, 중종 14)만한 적이 없었으니, 주공(周公)이 예악(禮樂)을 제작한 이후와 송(宋)의 원풍(元豐 정호(程顥) 형제의 시대인 신종(神宗)ㆍ순희『淳煕: 주희(朱熹)』의 시대인 효종(孝宗) 연간에 비길 만하다.
이 시대에 선생이 오랫동안 사유(師儒)의 지위에 있어 사람을 진작시키는 임무를 전담하였으니, 그 바른 학술과 융성한 명망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으며, 그 문하(門下)의 제현(諸賢)도 명종(明宗)ㆍ선조(宣祖) 때에 크게 활약하였으니, 그 공로 또한 훌륭하다 하겠다.
지금 태학(太學)의 뜰에 선생이 손수 심은 은행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선생이 매번 배우는 이들에게 이르기를, “뿌리가 단단하면 그 지엽(枝葉)이 반드시 무성하다.” 하였으므로 선생에게 배운 이는 다 실제에 독실하고 과비(夸毗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것)를 부끄러이 여겨 오래도록 병폐없이 전수되었으니, 자신의 수양(修養)을 위하는 학문으로 배우는 이의 선무(先務)를 삼았음이 그 증거이다.
근세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이 학문에 가장 정밀히 선택하고 자세히 언급하였는데, 선생을 말할 적에는 으레 정암(靜菴)과 아울러 찬미하였으니, 후학자가 이를 정론으로 삼는다면 상론(尙論)하는 데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어 다음과 같이 명한다.
시경(詩經)의 역복에는 / 詩歌棫樸
사람을 진작시킨 덕 노래하였네 / 作人之德
그럼 중종 시대에는 / 在中宗世
누가 그 직책 맡았던가 / 誰任其職
우리 선생의 학문이 / 有美先生
본과 말 있었으므로 / 學有本末
임금은 그대여 / 王曰汝賢
나를 보필하여 / 宜承宜弼
나의 미진한 학문 / 姑長我學
교도해 달라 하였고 / 以敎以育
선비는 우리 임금께서 / 士曰吾王
우리 위해 스승으로 선발하시어 / 爲我擇師
유희와 / 棄爾談戲
문사를 버리고 / 捨爾文詞
사석(師席)에 드나들며 / 進退函丈
모든 의혹 해결케 했다 하네 / 爾質爾疑
선생이 태학에 있을 제 / 公在于泮
다사의 삿된 마음 변화시켰고 / 多士式訛
즐거운 태학에서 / 於樂泮宮
줄 뜯고 노래하여 / 載絃載歌
마치 옛날의 고요(皐陶)와 설(契)이 / 如古皐契
치도를 찬양하고 / 贊襄咸皆
기가 음악을 맡아 / 夔在虞庠
씩씩하고 온화한 것으로 가르치듯 하였으므로 / 栗溫是諧
인재가 많고 문질(文質)이 조화되어 / 濟濟彬彬
거의 태평을 이루게 되었다가 / 庶躋以寧
참소하는 무리 그지없어 / 讒人罔極
중도에 그만 파괴되고 말았네 / 卒壞于成
이는 아무리 파괴되었으나 / 雖則壞之
선생의 명성 끊임없어 / 令聞不已
뛰어난 유사가 / 宏儒髦士
그 유지 계승하고 / 聿追遺指
또 어진 후손 나서 / 亦有聞孫
그 덕 닮았으니 / 其德克似
그 덕이란 무엇인가 / 其德維何
충신과 문행일세 / 忠信文行
아 선생의 후손이여 / 惟爾有孫
저 은행나무 공경하소 / 敬彼壇杏
<끝>
이재수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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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司成尹先生神道碑銘 幷序
余嘗爲大司成尹先生述其墓表矣。其諸裔又將伐大石。備載事蹟。以揭于阡道。謹按先生諱倬。字彥明。坡平人。上十四世祖瓘。有大名。今名公鉅人。多其子孫。高祖坤。以翊戴功開封號。諡昭靖。曾祖希齊。行檢校參議。贈贊成。祖培。掌令。橫罹淫禍。事見家乘。考師殷。官縣監。妣雲峯朴氏。府院君從愚女。先生以成化壬辰生。始從朱溪君深源學。朱溪以宗室子。實倡性理之學。弘治辛酉。先生年三十。擢第隷成均。燕山甲子。編配朔寧。中廟卽位。起廢由直講。歷司藝,司成。以至大司成,同知成均館事。其他遷之可考者。惟弘文校理,禮曹正郞而已。其餘皆在成均。蓋是時。靜菴諸先生皆萃於朝。倡明道學。期以堯舜君民。而庠序諸生。亦皆薄藻繪陋章句。講說周,孔,程,朱。故諸老先生。皆撤皐比。以推先生。先生亦自喜。諄諄不倦 。雖退食之暇。挾冊詣門者連武焉。如宋文忠公麟壽,李文純公滉。皆承講授。又如洪相國暹,元判書混。皆屛爵位。終執席間之禮甚謹焉。其後文純公每以所聞於先生者。擧似學者。必稱尹先生。而其所誦大學格致之說者。似不失乎晦翁之遺指矣。己卯七月。上遣承旨韓忠。分御廚往成均。餉其師生。翌日。皆詣闕箋謝。上御正殿引見。先生同靜菴及金大成湜登對。又引諸生講書於前。九月。上謁文廟訖。御明倫堂。諸賢被對。與諸生講論尙書,周易等書。一時傳爲盛事。其十一月。衮,貞等以陰謀起士禍。先生別職當議讞。卽謝不出。群小益不悅先生。坐廢退斥。久之。僅敍漢城左尹。已而出爲松京留守而卒。實甲午十一月廿八日也。明年二月廿五日。葬長湍府東基谷里午向之原。先生前娶縣令韓士信女。生先智。兵馬使。再娶大司憲李陌女。生先哲。副正。其季先正。女壻許鑄,許明。皆蔭仕。其後雲耳益蕃以昌。至今五六世。殆數百人。其顯者。孫暻僉知。暒承旨。俱歷淸選。玄孫煌大司諫。名行著稱。烇弼善。臨亂效節。二房子姓。皆力學修行。模範一世。其外出。如監司洪命耇。奮義死難 。判書洪命夏。爲世名臣。皆本於先生。其餘別見下方。嗚呼。我東肇自檀箕上下數千年間。惟本朝之治。最號文明。而論其尤盛。則又莫如己卯之世。擬之則周公制禮之後宋之元淳之間乎。當此時。久處師儒之職。以專作新之任。則其學術之正。譽望之隆。不待言而可知也。其門下諸賢。又蔚然以賁明宣之際。則其功亦可謂盛矣。今大學庭中。有先生手植文杏數株。先生每以語學者曰。根深者末必茂。故其學於先生者。皆敦本實恥夸毗。久而無弊。能有其傳。蓋爲已下學之功。爲學者之先務。此其徵也歟。近世李文成公珥。最於此學。擇而精語而詳。而亟稱於先生。必以靜菴竝美。後之學者。以是爲正。則其於尙論也。庶乎其得之矣。銘曰。
詩歌棫樸。作人之德。在中宗世。誰任其職。有美先生。學有本末。王曰汝賢。宜承宜弼。姑長我學。以敎以育。士曰吾王。
爲我擇師。棄爾談戲。捨爾文詞。進退函丈。爾質爾疑。公在于泮。多士式訛。於樂泮宮。載絃載歌。如古皐契。贊襄咸皆。
夔在虞庠。栗溫是諧。濟濟彬彬。庶躋以寧。讒人罔極。卒壞于成。雖則壞之。令聞不已。宏儒髦士。聿追遺指。亦有聞孫。
其德克似。其德維何。忠信文行。惟爾有孫。敬彼壇杏。<끝>
宋子大全卷一百五十四 / 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