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집 제11권 / 묘지명(墓誌銘)
대원(大元) 고 장사랑(將仕郞) 요양로 개주 판관(遼陽路蓋州判官) 고려국 삼중대광(三重大匡)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 시(諡) 문정(文貞) 안공(安公)의 묘지명
내가 경사(京師 연경(燕京) )에 있을 적에 근재(謹齋)가 병들어 누웠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귀국한 뒤에 문병을 하였다. 근재가 나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에 오래 살아 있지 못할 것이네.”라고 하더니, 그의 아들 종원(宗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생각한다면 내 아이를 잊지 말아 주게.”라고 하였다.
그리고 묘지(墓誌)를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내 평생에 자랑할 만한 일은 없지만, 내가 네 번 사사(士師 법관 )로 있는 동안 백성 중에 억울하게 남의 노비가 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심리(審理)해서 양민이 되게 했으니, 이것은 기록할 만한 일이 될 터일세.”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는 슬픈 생각이 들기에 우선 답변하기를 “병들었다고 해서 모두 낫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왜 느닷없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아, 근재는 명(命)을 아는 군자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공이 죽고 나서 장차 장례를 지내려고 할 적에, 나와 동년인 그의 아우 보(輔)가 공의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아, 나는 일찍이 공에게 수업을 한 인연도 있는데, 공이 또 직접 나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공의 휘는 축(軸)이요, 자는 당지(當之)이니, 복주(福州) 흥녕(興寧) 사람이다. 증조 득재(得財)와 조부 희서(希諝)는 모두 본군의 호장(戶長)을 지냈다.
부친 석(碩)은 급제하였으나 끝내 은거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관직은 모두 증직된 것이다. 모친 흥녕군태부인(興寧郡太夫人) 안씨(安氏)는 같은 고을 사람인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성기(成器)의 따님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특하였다.
그리고 글을 읽을 줄 알면서부터 배우기에 힘써 문사에 능한 결과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진사시(進士試)에 등제하였다. 그리하여 금주 사록(金州司錄)에 조용되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검열(檢閱)과 수찬(修撰)에 뽑혔으며, 다시 향시에 합격하여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었다.
계해년(1323, 충숙왕 10)에 또 제일명(第一名)으로 향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갑자년(1324)에 경사(京師)에 가서 회시를 볼 적에 정대(廷對)에서 제삼갑(第三甲) 7인의 한 사람으로 급제하여, 칙명으로 개주 판관(蓋州判官)을 제수받았다.
당시에 충숙왕이 4년째 연곡(輦轂 연경 )에 억류되어 있었다. 이에 공이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우환을 당하면 신하는 치욕스럽게 여겨야 하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 우리들이 배운 바는 이와 같다.”라고 하고는, 글을 올려 왕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고 변호하니, 왕이 매우 가상하게 여겨 성균 악정(成均樂正)에 뛰어 올려 임명하였다.
개주 태수(蓋州太守)가 사람을 보내 예의를 갖춰서 청하였으나 왕이 바야흐로 공을 중용할 뜻을 굳히고 있었으므로 국도(國都)를 떠나 임소로 갈 수가 없었다. 악정을 거쳐 전법(典法)ㆍ판도(版圖)ㆍ군부(軍簿)ㆍ전리(典理)의 총랑(摠郞)으로 전직되었다가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하였다.
영릉(永陵 충혜왕 )이 왕위에 있을 적에 강릉도(江陵道)를 존무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때의 문집으로 《관동와주(關東瓦注)》가 있다. 그 뒤에 다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와 지전법사사(知典法司事)에 임명되었다. 충숙왕이 복위하고 나서 영릉에게 총애를 받았던 자들을 모두 배척하였다.
혹자가 배척당한 자와 공이 친하다고 하는 바람에 체직(遞職)을 당하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기가 잘해서 얻었는데, 친구가 못해서 잃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기용되어 전법 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또 내시 중에 세도를 부리는 자의 미움을 받아서 파직당하였다.
영릉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 판서로 기용되었다. 그리고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금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인 이공수(李公遂) 등 33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제대로 뽑았다고 칭하였다. 판서를 거쳐서 감찰 대부(監察大夫)로 전직하였다. 악정 이상은 항상 관직(館職)을 겸대하여, 헌사(憲司)의 장관으로 있을 때에도 겸대하였는데, 원나라 조정에 보내는 표전(表箋)과 사명(詞命) 중에는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계미년(1343, 충혜왕 복위 4)에 검교 평리(檢校評理)로 있다가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상주는 복주(福州)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이때 태부인(太夫人)이 상재(桑梓 향리 )에 계셨으므로 왕래하여 문안을 드리면서 효도를 다하였다.
갑신년(1344, 충목왕 즉위년) 봄에 왕이 신정(新政)을 행하면서 맨 처음에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을 논하였다. 이에 공을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불렀다가 뒤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시켰다. 이듬해에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가하고, 또 찬성사(贊成事)와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가하였다.
정해년(1347) 가을에 병에 걸렸다. 이때 흥녕군(興寧君)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대개 권세를 부리는 자가 우리 유자(儒者)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 중론이 분분하게 일어나자 예전대로 복직하게 되었다.
무자년(1348) 봄에 병이 다시 발작하였다. 이에 치사를 청하니, 6월 초하루에 다시 흥녕군을 제수하고, 품계를 올려 관부(官府)를 개설하게 하였다. 그달 21일에 부음이 들리자,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예법에 맞게 조의를 표하게 하고, 시호를 내려 문정(文貞)이라고 하였으며, 백관이 모두 모인 가운데 장례를 행하게 하였으니, 애영종시(哀榮終始)의 대우를 부족함이 없이 받았다고 이를 만하다. 7월 11일에 대덕산(大德山)에 장사 지냈으니, 향년 67세였다.
공의 배필인 감천군부인(甘泉郡夫人) 문씨(文氏)는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귀(龜)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종기(宗基)는 관직이 보마배 행수별장(寶馬陪行首別將)이었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차남 종원(宗源)은 급제하여 지금 유비창 부사(有備倉副使)로 있다. 딸은 별장(別將) 정양생(鄭良生)에게 출가하였다.
공에게는 아우가 두 명 있다. 보(輔)는 급제한 뒤에 경사(京師)의 을유년 과거에 입격하여 요양성 조마(遼陽省照磨)에 제수되었는데 근성(覲省)하러 귀국했다가 지금 우대언(右代言)으로 있고, 집(輯)은 급제하여 지금 성균 좨주(成均祭酒)로 있다. 선공(先公)이 일찍 작고하였으므로 공이 두 아우를 가르치면서 자기 소생과 다름없이 대하며 성인(成人)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아우들이 공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였다고 한다.
본국의 제도에 의하면, 세 아들이 등과(登科)할 경우에는 국가에서 그 모친을 종신토록 봉양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공이 두 아우와 함께 이미 등제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중제(仲弟)와 함께 황조(皇朝)의 과거에서 갑과(甲科)로 급제하였으니, 이는 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할 것인데, 이 역시 공이 가르쳐 길러 준 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은 평소에 마음가짐이 공정하였고 집안에서의 몸가짐이 근검하였다. 발언할 때에는 명백하게 하고 회피하는 말이 없었으며, 근무할 때에는 부지런히 하고 게으른 기색을 보이는 적이 없었다. 선을 보면 칭찬해 마지않았기 때문에 좋은 평판이 많았고, 악을 보면 피하고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하는 소리가 적었다. 자신이 거하는 곳을 근재(謹齋)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를 통해서도 그의 심지를 알 만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수를 누렸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 謂非壽耶
연세가 칠순에 가까웠으니 / 年薄七旬
귀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 謂非貴耶
지위가 제군의 으뜸이었으니 / 位冠諸君
아우도 있고 아들도 있고 / 有弟有子
덕도 남기고 말도 남기신 분 / 有德有言
나의 이 명 아첨이 아니오라 / 我銘不諛
공의 봉분 그대로 옮긴 것이라오 / 維公之墳
[註解]
[주01] 애영종시(哀榮終始) : 생영사애(生榮死哀)와 같은 말로, 생전이나 사후 모두 영예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의 “살아서도 영광이요, 죽어서도 애도를 받는다.〔其生也榮 其死也哀〕”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02] 덕도 …… 분 : 훌륭한 덕에 걸맞은 훌륭한 말을 문집을 통해서 후세에 남겼다는 말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덕을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이에 합당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꼭
덕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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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元故將仕郞,遼陽路盖州判官。高麗國三重大匡,興寧府院君,領藝文館事。謚文貞安公墓誌銘
余在京師。聞謹齋病。旣歸問疾。見余則潸然曰吾不可久於斯世矣。指其子宗源曰子如吾思。無忘吾兒。且以墓誌屬之曰。吾平生無可稱。吾四爲士師。凡民之屈抑奴人者。必理而良之。此其可記者也。余聞之悲而姑復之曰。病豈皆不愈。言何遽如此。嗚呼。可謂知命君子矣。旣卒將葬。其弟輔與余同年。以公行狀來乞銘。嗚呼。余甞受業於公。而公又親命之。敢以辭爲。公諱軸 。字當之。福州興寧人。曾祖得財。祖希諝。俱爲本郡戶長。考碩及第。遂隱不仕。以故皆贈官。妣興寧郡太夫人安氏。同郡人檢校軍器監成器之子。公生而穎悟。知讀書力學工文辭。中成均試。擢進士第。調金州司錄。選藝文春秋館檢閱修撰。再中鄕試 。拜司憲糾正。癸亥又中鄕試第一名。甲子會試京師,廷對第第三甲七人。勅授盖州判官。時忠肅王被留輦轂四年矣。公謂同志曰。主憂臣辱。主辱臣死。吾曹之學如此。乃上書訟王之無它。王甚嘉之。超拜成均樂正。蓋州守遣人禮請。王方嚮用。故不能去國之任。由樂正轉典法,版圖,軍簿,典理四揔郞。遷右司議大夫。永陵莅位。命存撫江陵道。有文集曰關東瓦注。再拜判典校知典法事。忠肅王復位。凡得幸於永陵者皆斥之。或以公爲所斥者之親。禠其職。時人語曰。得之自身。失則由親。旣而起爲典法判書。俄又忤內竪之用事者見罷。永陵復位。復起判書典法同知貢擧。取今判密直司事李公遂等三十三人。時稱得士。由判書轉監察大夫。樂正以上常兼館職。雖長憲司猶帶之。表箋詞命多出其手。癸未以檢校評理。出牧尙州。尙與福接境。而大夫人在桑梓。往來起居。以盡孝道。甲申春。王新政。首論相。召副使密直。尋陞政堂文學。明年加僉議評理。又加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丁亥秋遘疾。除興寧君。盖執事者不喜吾儒。故有是命。其冬衆論紛騰。復職如初。戊子春疾復作。乃乞致仕 。夏六月朔。復除興寧君。進階開府。至二十一日訃聞。王命有司弔贈以禮。謚曰文貞。百官會葬。哀榮終始。可謂無缺矣。以七月十一日。窆于大德山。享年六十七。妣甘泉郡夫人文氏。檢校軍器監龜之女。生二男一女。長宗基。寶馬陪行首別將。先歿 。次宗源。及第。今爲有備倉副使。女適別將鄭良生。有二弟。輔及第。中京師乙酉科。除遼陽省照磨。因覲省歸國。今爲右代言。輯及第。今爲成均祭酒。先公早世。公敎二弟。無異己生。以至成人。故其弟之事公。如事父云。本國之制。三子登科。廩其母終身。公與二弟旣登第矣。又與其仲俱中皇朝甲第。實世所稀。而亦公敎養之力也。公處心公正。持家勤儉。發言便便無遁詞。居官矻矻無倦色。見善則稱之不已。故多譽。見惡則避之不近故寡怨。自號所居曰謹齋。其志可見已。銘曰。
謂非壽耶。年薄七旬。謂非貴耶。位冠諸君。有弟有子。有德有言。我銘不諛。維公之墳。<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