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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 우금산(禹金山 332m)을 가다.
글 쓴 이 牧 鉦 高 達 五
10월28일, 묘시(卯時)에 일어나니 주위는 어둑 어둑하고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도다! 어제는 진종일 가을비가 나리더니, 밤새 날씨가 말끔히 개어서 기분(氣分)도 상쾌하다.
이것 저것 챙겨서 차에 오르니 빈자리가 없다.(47명)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안부를 여쭈니, 처음오신 분들이 이외로 많으시다. 산악회의 연륜(年輪)이 더해갈수록 정회원님들은 자꾸만 줄어들고, 어째 낯선 회원님들이 더 많으신가?
무엇보다 참신하고 훌륭한 회원님들을 많이 모셔서 ‘남산 산악회’의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차는 신나게 달려 김천 휴게소에서 간단히 조반을 들고는 대전 방향으로 줄곧 내달아 다시 ‘호남고속도’로 들어섭니다.
절기(節氣)는 한로(寒露10/8), 상강(霜降10/23)을 지나 입동(立冬)을 향해 달리니... 온 누리에 산야(山野)는 황엽(黃葉)으로 물들어 아름답기 그지 없슴니다.
얼마를 달렸을까! 안영(安永)과 계룡(溪龍)을 지나 벌곡(伐谷) 휴게소에서 잠시 쉬니, 눈앞에 장군봉(將軍峰269m)이 우뚝하다.
휴게소 넓은 광장에는 차들로 넘쳐나고, 여자 화장실 앞에는 긴 행열로 이어져서 그야말로 장사진(長蛇陣)이다!
광장 한켠의 작은 동산 앞에는 조그마한 연못을 설치하여 인공폭포도 흐르고, 물가운데는 벌곡(伐谷)의 명물 ‘딸기’가 합장속에 붉음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도다! 또 그 옆으로는 물가운데 돌 솟대가 여러기 세워져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으며, 화(禍)를 멀리하고 복(福)을 불러들인다는 원화소복(遠禍召福)을 상징(象徵)하는 것이리라!
좋은 그림에 그냥갈 수 없어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다시 부안으로 달림니다.
차내는 박총무님과 금부총무님의 진행으로 노래교실로 흥겨운데... 익산(益山), 삼례(參禮)를 지나 전주 부근에 이르니, 가없는 평야는 가을걷이가 거의 끝이나서 황량(荒凉)하게 느껴집니다.
서전주 IC를 벗어나 김제(金堤)로 들어서니, “김만평야”의 광활(廣闊)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그저 입이 딱 벌어진다! 이곳 사람들은 “징게맹개 외배미들”이라 부른다는데... ‘김제만경 너른들’이라는 뜻이라 하며, 60년대 이전만 하드래도 ‘만석꾼’의 부자가 살던 곳이요, 우리나라 쌀의 40분의1이 이곳에서 생산된다드니... 과연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겠슴니다.
김제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고창(高敞) 방향으로 30여 분을 달려 출발기점인 우금산 묘련계곡(妙蓮溪谷) 입구에 도착하니, 시계는 10시 40분을 조금 지나있다.
간단한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우측 능선으로 오르니, 선두와 후미가 끝간데를 모르겠도다! 묘련계곡 초입(初入)에는 “위금산 주류성(位金山 周留城)”이라 새겨진 조그마한 석표(石標)가 세워져 있어, 이 일대가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곳임을 짐작케 합니다.
쉬엄 쉬엄 20여 분을 오르니 Y갈림길이 나오는데, 등산로를 찾기가 쉽지않다. 좌측으로 다시 20여 분을 올라 225고지의 능선에 이르니, 개념도에 ‘이영용묘’라고 돼 있으나 상석(床石)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으며, 맞은편 우금산 능선에는 웅장한 ‘우금암(禹金巖)’의 쌍봉이 우뚝 솟아 스스로 그 위용을 뽐내고 있슴니다.
모두들 잠시 쉬면서 ‘우~와 지긴다! 지겨!’ 하시면서... 먼거리의 ‘우금암’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에 분주하시다.
계절은 무상(無常)하여서 녹색의 나뭇잎들은 어느새 노~릿 노~릿 익어서 ‘오색단풍(五色丹楓)’으로 물들어 있고, 등산로는 어제 내린 비로 꼽꼽 하여서 더 없이 상쾌하도다!
올 가을 단풍은 지난해 그 단풍(丹楓)이 아니요
올해 사람도 작년의 그 사람이 아니로다
아~ 어느해 어느시절에 다시 그님을 만나리오!
능선길은 경사가 완만하여 걷기도 한결 수월하며, 또 당국(當局)에서 간벌(間伐)도 적당히 하여서 사방을 조망(眺望)하기에도 좋다.
236고지 부근을 지나서는 시계(視界)도 훨씬 넓어져서 북동 방향의 광활한 ‘김만평야’와 오색(五色)으로 물든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산들이 함께 어우러지니... 선계(仙界)인지, 불계(佛界)인지... 가늠키가 어렵슴니다 그려!
선두는 어디메쯤 가셨는지 짐작키 어렵고, 중간 후미는 기념촬영을 해 가면서 서~서히 여유를 부림니다. 오늘 따라 금부총무님의 친구분들이 단체로 오셔서 분위기도 한층 활력이 넘쳐 남니다.
등산로 중간 중간에는 옛 성터의 흔적들이 많이도 남아있어, 유서(由緖)깊은 고적지(古蹟地)임을 짐작케 하며, 305고지 부근에 이르러서는 옛 축성(築城)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도다!
날씨도 화창하고 단풍도, 대자연의 풍광도 좋아서... 331고지 부근에서는 중간 후미가 아예 합류하여 가져온 음식이며 과일들을 나누어 드시니, 산(山) 인심과 분위기가 어찌나 좋은지... 게다가 정상조님 부부와 이태만님, 고장석님, 이은종님 등은 쌀막걸리를 드시면서 필자에게도 권하신다. 제 술 실력이야 다 아시는 일인데... 감사를 드리면서 정중히 사양합니다.
천지는 오색으로 찬란한데
주거니 받거니 인정이 따사롭다
녹색의 풀잎도 대취했나 보다
붉으락 푸르락 형형색색 이로구나!
얼마를 쉬다 다시 20여분을 걸어서 ‘울금바위’에 도착하니, 선착하신 벽송(碧松)님과 또 다른 회원님이 경사진길을 내려오시면서 더는 진행이 어렵다 하신다. 10여명의 회원님들은 서둘러 내려 가시고 필자와 김해진님, 황회장님 셋이서 외밧줄을 타고 작은 봉우리에 올라 개암사(開岩寺)일대의 풍광을 조망합니다.
간단한 기념촬영을 마치고 바로 내려와서, 오를 수 없다던 큰 봉우리 우금암(禹金岩 332m)에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 천하를 조망(眺望) 합니다. 개암사 부근은 옹기종기 절집의 전각들이 정겨웁게 진좌(鎭坐)하고, 산기슭의 풍광(風光)은 아직도 녹색의 비중이 더 많도다!
멀리서 바라볼땐 웅장한 바위봉도 정상에는 그저 평범하고 여러종류의 잡목으로 어우러져서, 특별한 신비감을 느끼지는 못하겠슴니다. 그렇다! ‘지극한 도리는 평범함에 있다.’드니... 사실이 그렇슴니다.
멀리 서북쪽으로는 변산면 일대의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싸여서 변산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서해바다는 시야가 흐려서 더는 볼 수 없슴이 아쉬울 뿐입니다. 사방을 바라보는 풍광이 아름답고, 어렵고 힘든곳에 오른 기쁨으로 동서남북으로 예배(禮拜)를 올림니다. 뒤이어서 김해진님도 올라오셔서 정상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특별한 기념촬영을 해 드렸슴니다.
우금산(禹金山332m)은 백두대간의 영취봉 부근에서 서남으로 장안산, 마이산, 모악산을 거쳐 내장산 부근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삼성산, 배풍산을 지나 이곳 우금산에 이르고, 다시 서남방향으로 옥녀봉,신선봉을 지나 봉화봉에서 서해바다에 그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변산지맥이라 한다.
또 ‘우금암(禹金岩)’에 전해오는 얘기는 기원전 282년경에 변한(弁韓)의 문왕(文王)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의 난(亂)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으면서 우(禹)와 진(陳) 두장수를 보내 감독하게 하고 왕궁과 전각들을 짓게 하였는데, 이때 동쪽 것은 묘암(妙菴)이라 하고, 서쪽것은 개암(開菴)이라 불렀다. 이후 우와 진이 죽고는 내란이 일어나 문왕의 뒤를 이어 30여 년간을 다스리던 마연이 살해되었다. 이에 변한의 유민들은 우와 진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바위봉을 우진암(禹陳巖)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아울러 이 산을 변산(卞山, 邊山)이라 했다한다.
이 밖에도 백제 의자왕20년(660)에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군사 5만과 당나라 소정방의 군사 10만명의 연합군에게 싸워 백제가 사비성과 웅진성마져 잃고 패망하였는데, 이후 소정방과 김유신이 만난곳이라 하여 ‘우금암(遇金岩)’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이상 개암사지 참조)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김해진님과 함께 스파이더맨(spiderㅡman) 흉내를 내면서 살~살 기어서 내려와 작은 봉우리의 서북쪽에 있는 자연동굴(自然洞窟)을 살펴보니, 굴(窟) 내부에 “옥천샘”이 있다고 하나 음용(飮用)으로 사용 하기에는 부적합하다.
다시 큰봉우리의 “원효방(부사의방不思議房)”이라 불리워지는 거대한 자연동굴 앞에 도착하니, 남산님들은 모두 식사를 마치고 한가하게 여담을 나누고 계신다.
필자와 김해진님, 서부장님(서경철) 셋이서 점심을 드시면서 ‘우금암’ 정상에 오른 얘기를 자랑하시니... 부러워 하시면서 식후에 가보고 싶다 하신다.
점심을 마치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동굴내부가 엄청 넓어서 야외(野外) 법회(法會)를 보기에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며, 그 옛날 신라의 원효스님이 수도 하셨던 곳이라 하며, 또 신라 경덕왕(景德王742~765)때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전해온다.
진표율사는 어릴적부터 활을 잘 쏘고 사냥을 잘 했는데. 어느해 사냥을 갔다가 쉬면서 집에가서 구워먹을 생각으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놓고는 깜박 잊고 집에 돌아갔다.
이듬해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다가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는 개구리들을 보고는 풀어주며 크게 자책(自責)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이때 그는 12살의 나이로 금산사 순제법사에게 머리를 깎고 불문(佛門)에 귀의해서 27세 되던 해에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수도에 전념했다.
그는 3년동안 미륵상을 모시고 법을 구했으나 깨달음이 없자 절망한 나머지 바위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때 어디선가 푸른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도로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다시 결심하여 삼칠일을 기약하고는 온 몸을 바위에 내던지는 참회행으로 간절히 법을 구했는데, 사흘째에 손과 발이 부러지고 떨어져 나가니 지장보살님이 나타나 그의 손과 발을 도로 붙여주고 가사와 발우를 주었다.
드디어 천안(天眼)을 얻어 지장보살님과 미륵보살님에게 계본과 두 개의 목간자(木簡子)를 받아 진리의 법을 펴는데... 금산사를 중창하고 속리산을 거쳐 강릉으로, 다시 금강산으로 옮기면서 전생의 업을 알아 참회정진(懺悔精進) 하는 ‘점찰법회’를 열어 중생을 교화 하였다.
거대한 자연동굴(부사의방, 원효굴)의 천장에는 이름모를 나무와 풀들이 여러군데 거꾸로 매달려 자라고 있다. 1300여 년의 세월속에 주저리 주저리 열린 전설을 상기 하면서, 다시 서부장님과 우금암의 정상을 오름니다.
76세의 노장님을 조심 조심 받쳐 올리며 힘겹게 정상을 오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서부장님은 그 특유의 함성으로 “우~화~화~ 하~ !” 하시면서 통쾌하게 웃으신다! 외변산의 경치와 내변산쪽의 풍광들을 배경삼아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사방으로 다시 8배를 올림니다. 이 좋은 경치와 감개무량(感慨無量)함을 남산님들이 다 함께 누리지 못해서 못내 아쉬울 뿐입니다.
특별한 추억을 뒤로하고 하산길로 접어드니 등산로는 잘 정돈돼 있어 걷기에 한결 수월하다. 20여 분을 걸어서 개암사(開岩寺)에 도착하니 등산객과 답사객, 수련생들이 한 가득하다.
대웅전(大雄殿)에 들어 간단히 참배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천하의 요새(要塞)로다! 주산(主山)은 우금암이 쌍봉으로 우뚝하고, 좌청룡(左靑龍)보다 우백호(右白虎)가 더 우람하고 힘차게 감싸주고 있으며, 안산(案山)은 적당한 거리에서 겹겹이 에워싸고 있어 천하의 길지(吉地)로다!
개암사는 백제 무왕35년(634)에 묘련왕사(妙蓮王師)가 변한(弁韓)의 궁전을 고쳐서 개암사와 묘암사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 후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중창했으며, 이어 고려 충숙왕 원년(1313)에 원감국사가 중창, 이후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이곳은 백제 의자왕20년(660)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나라가 멸(滅)한 이후,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였다 하며, 특히 임존성(오늘날 충남 예산)과 주류성(출발기점에 석표 참조)이 양대 근거지였다고 한다.
이곳 주류성에서는 백제 장군이었던 도침과 중(僧) 복신의 지휘아래 백제의 유민들이 결집하여 일본에 원군을 요청하고, 당시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넷째아들 풍(豊)을 불러들여 ‘풍장왕’으로 세우고 신라에 저항했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풍장왕이 복신을 죽이는 내부의 분쟁으로 약화되자, 663년 7월 나당연합군의 2차 공격을 받아 풍장왕은 고구려로 도망가고 유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이 났다.
대웅전(보물 제292호)은 효종9년(1658)에 밀영선사와 혜징선사가 중창할 때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개 팔작지붕 양식이다. 내부에는 화려한 닫집을 달았으며, 안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뒤얽혀 물을 토해 내는 형식이다. 또 대(臺) 위에는 석가모니를 주불로 하여 좌우 협시보살로 문수, 보현보살님을 모셔 놓았다.
도량(道場)을 한바퀴 휘~ 돌아 ‘기와불사’를 한 장 해 드리고는 여러계단을 나려오니, 아람드리 고목(古木)들이 즐비(櫛比)하다. 1300여 성상(星霜)을 사바세계의 전법도량(傳法道場)으로 그 역할을 다해 왔슴이 늙은 고목에서 증명됨니다 그려!
불이교(不二橋) 옆으로는 푸른 녹차밭이 좌우로 넓게 심어져 있어, 울~긋 불~긋 단풍나무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는 아쉬운 마음으로 터벅 터벅 일주문을 나섬니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준비해 오신 하산주를 모든회원님들이 맛있게 드시고 곧바로 귀가길에 오름니다. 금일 하산주를 준비해 오신 금부총무님과 박총무님, 그 외 찬조를 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올림니다.
귀가길에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의 문화행사장에 잠시 들려 봅니다. 김제시 부량면에 이르면, 포교리(갯다리마을)에서부터 월승리까지 남북 일직선으로 약 3Km를 가로 지르는 뚝이 보이는데, 지금은 없어진 익산의 황등제, 고부의 눌제와 함께 호남의 3대 저수지로서 그 남쪽을 호남(湖南), 서쪽을 호서(湖西)라 부르게 했던 ‘벽골제’ 이다.
벽골제는 충북 제천의 의림지, 경남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의 저수지로 알려져 있으며, ‘벽골(碧骨)’이란 백제때 ‘볏골’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자료에 둑의 높이는 북단이 4.3m, 남단이 3.3m이며 다섯 개의 수문 수여거(水餘渠), 장생거(長生渠), 중심거(中心渠), 경장거(經藏渠), 유통거(流通渠)를 통해 ‘김만평야’ 일대에 물을 대었다 한다.
넓디 넓은 평야를 가로 질러 “벽골지문(碧骨之門)”에 도착하니, 수만평의 대지 위에 “벽골제”를 기리는 ‘문화행사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특히 옛 농경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디딜방아, 모내기하는 장면, 풍악놀이, 허수아비, 낚시놀이, 냇가에 천렵, 그네타기, 외줄타기, 탈곡하는 장면 등 끝이 없으며, 인공 연못을 지나 거대한 두 마리의 용(龍)이 서로 어울려 하늘로 승천(昇天)하려는 모습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대작(大作)이다.
승천하는 두 마리의 용(龍)을 배경으로 많은 님들을 기념촬영 해 드리고, 벽골탑(碧骨塔)과 풍년기원제단(豊年祈願祭壇)을 돌아 출구로 나오니 10월의 짧은 하루 해가 저녁 노을에 찬란합니다.
단기 4345년(서기2012년) 10월 28일
전북 부안군 우금산(禹金山 332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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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산님들! 그간 안녕하신지요? 차일피일 바쁘다는 핑계로 등산후기가 많이 늦었슴니다. 널리 이해를 바라오며, 특히 사진자료를 제공해 주신 황회장님께 감사를 드림니다. 님들!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람니다.
항상 산행 후기를 올려 주어서 많은 것을 알수가 있어서 좋았고 벽골제를 보면서 김제평야를 직접인하고
쌍용의 모습이 승천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느끼고 왔지요.
감사 함니다.
황회장님 사진자료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그동안 수고 많으셨슴니다. 남은 두달 잘보내시고 좋은 후임자를 모셔서 남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고고문님 역사의 지리적 배경하며 산행후기 많은 공부가되고 도움이되는글
감사합니다. 이번산행기를 통해서 백제의 역사의 현장을 체험할수있어 좋았고
좋은 추억이 될것 같습니다.
벽송님이 다녀가셨군요! 따님의 결혼을 다시한번 추카드림니다! 여러가지로 부족한 장문의 글을 읽으시느라 애 쓰셨슴니다. 벽송님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