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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2022년 2월 27일 주일 설교
제목 :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도시'를 짓고,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방주'를 짓다.
본문 : 창세기 4장 17절, 창세기 6장 13~14절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 때에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4장 17절, 새번역>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 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방주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역청을 안팎에 칠하여라. <창세기 6장 13~14절, 새번역>
샬롬! 어느덧 우리 곁을 떠나간 2월을 뒤로 하고 2월의 마지막 주일 새 아침에 기쁨으로 인사를 전합니다. 모두 안녕하셨고 평안하셨습니까? 주님의 날, 모든 예배자들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2월을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에서는 창세기 4장 17절과 6장 13~14절을 본문으로 하여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도시'를 짓고,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방주'를 짓다.” 라는 제목으로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새번역으로 준비된 두 군데의 말씀부터 천천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 때에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4장 17절, 새번역>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 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방주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역청을 안팎에 칠하여라. <창세기 6장 13~14절, 새번역>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가인과 아벨을 출산하게 됩니다. 그렇게 두 아들을 통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나 싶었지만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므로 땅에서 저주를 받게 됩니다. 가인은 이제 땅 위에서 쉼을 허락받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나그네'의 삶은 천국행일 때는 아름다운 여행이지만, 세상행일 때는 절망의 여행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나님은 가인에게 '구원과 동행'의 표를 허락하심으로 누구도 가인을 해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가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가인은 그 사랑의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 주님 앞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나그네가 되기 위해서 일까요? 아니면 그냥 자기가 살고 싶을 삶을 위해서였을까요? 가인은 ‘떠돌아다닌다’라는 의미를 지닌 땅, ‘놋’에서 정착하여 살게 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을 찾기 위한 여정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창세기 4장 16절, 새번역>
그리고 그 놋 땅에서 만난 아내와 동침을 해서 아들 '에녹'을 낳게 됩니다. 가인 스스로에게는 길고 긴 나그네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후손이 생겼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한 줄기 희망이 생겼을 것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역시 그 때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는 계속해서 나그네가 되어야 했건만,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가야했지만, 가인은 정착하여 '도시'를 짓게 됩니다.
도시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과 동일한 '에녹'으로 지었습니다. 그렇게 이제 과거를 잊고 아들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는 가인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산성이 되어주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인생으로 변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인은 '도시'와 ‘아들’을 자신의 보호막으로 사용하는 어리석은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가인을 통해 만들어진 이 도시의 건설은 훗날 ‘노아의 방주’가 만들어 지게 되는 '인간의 타락'을 더욱 더 앞당기게 됩니다. 이곳에서부터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문화'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초로 일부다처제가 가인의 후손이었던 '라멕'에 의해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정착을 돕기 위한 집짐승을 치는 사람의 조상인 ‘야발’이 등장하고, 악기를 다루며 풍류를 즐기기 시작한 ‘유발’도 등장합니다. 도시는 점점 발달하여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번영하고 발달하여 무엇인가 축복받은 느낌이 드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점점 하나님의 이름이 희미해지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모든 환경을 통하여 열심히도 하나님을 떠나는 것들을 만들고 있는 가인의 후손들입니다. 그리고 이젠 살인마저 우스갯소리처럼 되어버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창세기 4장 23~24절, 새번역>
점점 시대가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되어야 했던 가인의 도시 건설을 통하여, 불순종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성경은 이제 더 이상 가인의 후손에게 시선을 두지 않습니다. 다시 희망을 회복할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새로운 아들을 '허락' 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로 우리의 시선을 인도해 가십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였다. 마침내,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말하였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나에게 허락하셨구나." 그의 아내는 아이의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4장 25절, 새번역>
아벨은 죽고, 가인은 떠나고, 아담과 하와는 다시 후손을 갖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하나님이 허락해 주셔야 생명이 탄생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담과 하와에게 아벨을 대신 할 아들을 허락해 주셨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바로 '셋'입니다. ‘셋’이란 이름의 뜻은 '허락하심'입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받고 태어난 존재가 바로 ‘셋’인 것입니다.
다시 이 셋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을 더 크게 만들었던 일이 바로 셋의 아들 에노스 시대의 기록입니다. 셋의 아들 에노스 시대 때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창세기 4장 26절, 새번역>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때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5장부터 차분하게 아담의 족보를 써 내려갑니다. 사실 기록할 만한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그저 오래 살다가 자손을 낳고, 죽은 후손에 대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에노스 이후로 하나님을 계속해서 찾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리고 야렛에게서 태어난 에녹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과 동행했던 인물이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악한 세상에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을 홀로 두실 수 없었던지 하나님은 에녹을 데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저 무의미한 삶의 연속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재밌게도 셋의 후손에게서도 '라멕'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라멕은 가인의 후손 교만쟁이 ‘라멕’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됩니다.
라멕은 백여든두 살에 아들을 낳았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짓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창세기 5장 28~29절, 새번역>
점점 악해져 가는 시대 속에서, 점점 하나님이 잊혀져 가는 시대 속에서, 그래도 하나님을 붙들고는 있었던 셋의 후손 중 ‘라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 같이 희망을 보여주며 기적처럼 등장한 라멕은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바로 시대가 흘러가는 그대로, 세상의 방법으로 똑같이 살 수 없음을,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메말라가고, 점점 악해져가는 세상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노아' 즉, '위로'라고 지은 것입니다. 이 땅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이 땅에 전할 인물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한 라멕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시대의 악함을 따르지 않기 위한 교육의 결과였는지 노아는 오백 살이 지나서야 결혼을 한 듯 보입니다. 다른 선조들과 똑같은 길을 걷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백 살이 지나서야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낳게 됩니다.
노아는 오백 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창세기 5장 32절, 새번역>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악했습니다. 노아 한 명으로는 도저히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는 일이 일어나게 되자, 하나님께서 영이 소멸될 수 있음을 선포하시고, 수명도 120년으로 단축하시는 일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자 너무도 가슴 아픈 기록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창세기 6장 5~7절, 새번역>
얼마나 후회하셨는지 이제 창세기를 시작한 후 겨우 6장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종말'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보기에 그렇게도 좋으셨던 ‘사람’이란 존재는, 세상은 이젠 그저 하나님의 탄식거리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 있는 동산에서 쫓겨 날 때도 이런 마음은 아니셨을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도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부터인가 가인의 후손도 타락하고, 셋의 후손도 타락하고,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후회라는 단어가 너무도 먹먹하게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후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 사람의 남은 자를 우리에게 소개함으로 끝끝내 희망을 이어갈 끈을 놓지 않게 합니다. 네. 맞습니다. 절망의 언덕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창세기 6장 8절, 새번역>
셋의 후손 라멕이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부터 이 땅의 '위로'가 되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노아만이 그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 은혜를 입게 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노아’입니다.
실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만약 노아가 없었다면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창세기 6장에서 끝이 났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기록할 이유도, 목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이름 그대로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 노아에 대해서 성경은 짧지만 굵게 이렇게 소개합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6장 9절, 새번역>
그런데 이 기록은 노아가 말하고 다닌 것을 받아 적은 기록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은 사람이 노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인정받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노아처럼 설명하고 있는 인물이 구약과 신약에 한 명씩 더 등장합니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 <욥기 1장 8절, 새번역>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사도행전 11장 24절, 새번역>
노아도, 욥도, 바나바도, 이 세 명은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사람에게도 인정받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타칭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기록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 대한 기록이길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이런 노아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기록으로만 보아서 잘 실감나지 않지만 이 말을 듣고 있던 노아에게는 정말 수만 가지의 생각이 들게 만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들으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 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방주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역청을 안팎에 칠하여라. 그 방주는 이렇게 만들어라. 길이는 삼백 자, 너비는 쉰 자, 높이는 서른 자로 하고, 그 방주에는 지붕을 만들되, 한 자 치켜 올려서 덮고, 방주의 옆쪽에는 출입문을 내고, 위층과 가운데층과 아래층으로 나누어서 세 층으로 만들어라. 내가 이제 땅 위에 홍수를 일으켜서,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 쉬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쓸어 없앨 터이니,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창세기 6장 13~17절, 새번역>
하늘 아래 살아 숨 쉬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쓸어 없애실 것이란 계획을 듣고 나서 밀려오는 두려움에 떨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시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더 놀라고 당황하게 하고, 황당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방주에 대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시대에도 꽤 큰 크기로 무려 길이 135m, 폭 22.5m, 높이 13.5m가 되는 3층짜리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력이 충분했던 것도 아닙니다. 노아에게는 이제 겨우 어른이 되었을법한 아들 세 명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방주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속으로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노아는 조선소에서 일하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기술도 하나 없습니다. 그렇게 두려움과 황당함의 마음이 동시에 찾아 들었을 찰나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너하고는, 내가 직접 언약을 세우겠다.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모두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 살과 피를 지닌 모든 짐승도 수컷과 암컷으로 한 쌍씩 방주로 데리고 들어가서, 너와 함께 살아 남게 하여라. 새도 그 종류대로, 집짐승도 그 종류대로, 땅에 기어다니는 온갖 길짐승도 그 종류대로, 모두 두 마리씩 너에게로 올 터이니, 살아 남게 하여라. 그리고 너는 먹을 수 있는 모든 먹거리를 가져다가 쌓아 두어라. 이것은, 너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짐승들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창세기 6장 18~21절, 새번역>
하나님은 노아에게 정말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런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야 노아는 마음의 결심이 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직접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가족 모두를 구원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젠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못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버지 라멕으로부터 왜 자신의 이름이 ‘노아’라고 지어졌는지 수도 없이 들어왔던 설명이 바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야 뚜렷해 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아를 응원하고 격려하듯 그리고 박수를 쳐주는 듯이 성경에서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오직 여기에서만 기록되어 있는, 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 꼭 그대로 하였다. <창세기 6장 22절, 새번역>
그냥 순종이었다면 '명하신대로 다 하였다'라고 기록하면 되는데, 성경은 굳이 한 구절을 더 기록하고 있습니다. '꼭 그대로 하였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도 허투로 듣지 않고! 정말 말씀해주신 그대로! 행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은 절대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 마음이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놀라운 역사의 순간입니다. 믿음의 회복은, 희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금 소름 돋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록으로도 부족했는지 한 번 더 노아의 이 행동을 성경이 보증합니다.
노아는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 <창세기 7장 5절, 새번역>
처음만 반짝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였습니다. 그저 명하신대로, 자신의 생각이나 방법을 섞지 않고, 완전히 순종했습니다. 아니 이건 순종을 넘어선 '복종'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보이셨던 그 '순종'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 새번역>
그렇게 노아는 말씀하신 대로, 꼭 그대로, 명하신 대로, 불가능해 보이는 방주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노아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드디어 방주를 완성하게 됩니다. 엄청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 길고 긴 시간동안 좌, 우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여 방주를 완성한 노아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오늘 두 본문을 통해 살펴보신 것처럼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도시'를 지었지만,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자신만의 '도시'를 건설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구원의 방주'를 짓고 있습니까?
사실 오늘 이 가인이 세운 도시 이야기로부터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전까지의 이야기들은 창세기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보여 교회에서도 잘 들어보지 못하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거의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음을 보지 않았던 '에녹' 정도나 성경퀴즈 시간 단골 문제로 등장하거나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으로 '므두셀라' 정도만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창세기는, 함께 나누었던 이 창세기 부분은 너무도 중요한 신앙의 흐름을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묵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가인에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상황을 통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들과 비교하여 오늘 ‘나’라고 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희망이 되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가인과 노아 그리고 두 라멕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도시'를 지었지만,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방주'를 지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 드립니다. 지금 여러분은 가인입니까? 노아입니까? 남은 주일 진지하게 고민하며 생각해 보시길 소망해 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떠나 ‘자신만의 도시’를 짓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방주’를 짓고 계십니까?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이 땅에 희망이요, 위로가 되어 주시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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