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판서 고택]
삼판서 고택은 영주시(榮州市) 구성공원(龜城公園) 남쪽에 세워졌던 고택으로,
380여년 전 풍산인(豊山人)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가 영천군지(榮川郡誌)를 편찬 할 당시,
영천(현 영주) 지역의 유일한 고적(古蹟)이라고 기록한 건물이다.
삼판서 고택은 건축 연대가 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고려조에서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
봉화인 정운경(奉化人 廉義 鄭云敬)이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 청렴하게 살았던 집이라 한다.
그의 장남은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차남은 참판 도존(參判 道存), 삼남은 일봉 도복(逸峯 道復)이며,
사위는 평해인(平海人) 공조전서(工曹典書) 미균 황유정(米囷 黃有定)이다.
정운경(鄭云敬)은 이 집을 사위 황유정(黃有定)에게 물려주었는데,
황유정(黃有定)도 병을 이유로 낙향하여 소쇄헌(掃灑軒)이라는 현판을 걸어두고 말년을 이 고택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에게도 삼남 일녀가 있었는데, 장자는 증지평(贈持平) 전(銓), 차남은 문과급제(文科及第) 현(鉉),
삼남은 훈도(訓導) 정(錠)이고, 사위가 현감(縣監)을 지낸 김소량(金小良)이다.
김소량(金小良)도 자식이 삼남 일녀이며, 장남은 문교리(文校理) 증(潧), 차남은 문절공(文節公) 담(淡),
삼남은 통찬(通贊) 홍(洪)이고, 사위는 안동인(安東人) 부호군(副護軍) 권겸(權謙)이다.
김소량(金小良)은 이 집을 차남인 문절공(文節公) 담(淡)에게 물려주었는데,
형부상서 정공(刑部尙書 鄭公), 공조전서 황공(工曹典書 黃公), 이조판서 문절공(吏曹判書 文節公)이 살았다하여
세인(世人)들은 이 고택을 삼판서 고택(三判書 古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구택은 웅장하지는 않았으나 규모가 상당히 큰 건물이었고,
집터도 영천(榮川, 現榮州) 고을에서 소문난 명당(明堂)자리였다고 한다.
현감(縣監) 김소량(金小良)의 21대 손(孫)까지 500여년을 세거(世居)하다가 조선 말기에 주인이 바뀌었고,
1961년 대홍수가 일어나 그 후 도시 확장을 하며 헐리게 되었다.
이 구택은 판서급 5명을 비롯하여 문과 8명, 무과 1명, 소과 2명 등 많은 선비들이 태어나거나 살았던
이 지역의 유서 깊은 집이어서, 복원을 위해 지난 1999년 지역 유림(儒林)에서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복원사업을 펼친 결과, 2007년에 16억원의 예산으로 현재의 위치인 서귀대에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에
口자형 한옥으로 복원 공사를 하여, 200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지게 되었다.
<제민루와 삼판서 고택>
[군자정과 오계서원]
오계서원은 1570년(선조 3)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이
오계상류(迂溪上流)에 건립한 오계정사(迂溪精舍)로 창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燒失)되었으나,
1595년(선조 28)에 쌍계(雙溪) 언덕으로 이건(移建)하였고, 1636년(인조 14)에 홍수로 유실되었다.
1665년(현종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덕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재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1691년(숙종 17)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724년(경종 4)에 이시(李蒔)를 추가로 배향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다.
1919년에 명륜당과 입도문을 재건(再建)하고, 1978년에 서원을 복설(復設)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도존사(道尊祠)·강당·관성재(觀省齋)·험위료(驗爲寮)·내삼문·입도문(入道門)·
군자정(君子亭)·전사청·주소(廚所) 등이 있다.
[이산서원]
1558년(명종 13) 건립된 이산서원은 본래 군치에서 6~7리 되는 번고개 아래(휴천1동 구서원마을 뒤편)에 있었으나,
1614년 광해군(光海君) 6년에 서원 원장이었던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이몽룡의 실존 인물 성의성의 부친-가
이건비를 독자 부담하여 하천을 내려다보는 좋은 경관을 갖춘 임구(林丘, 현 이산면 내림리)의 지금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산서원은 처음에는 사당이 없이 강학을 위한 기구로만 설치됐는데,
선조(宣祖) 3년(1570)에 퇴계(退溪) 선생이 작고하자,
선조(宣祖) 5년(1572)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퇴계(退溪)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제사의 기능도 갖추게 되었고,
선조(宣祖) 7년 갑술(甲戌, 1574)에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학 기관이 되었다.
그 후 고종(高宗) 8년(1871)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던 것을
1936년에 경지당(敬止堂)만 복원하였고, 건물이 쇄락하여 1995년에 다시 해체 보수하였다.
이산서원은 조선시대 서원의 정립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서원으로,
퇴계는 서원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보이는 수학(修學), 거제(居齋) 규칙, 교수 실천 요강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독서법 등을 규정한 원규를 만들어 당시의 서원 운영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퇴계가 1559년 찬한 '이산서원 원규'는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이산서원 원규는 그 뒤에 설립된 많은 전국 서원의 전범이 되어 전해 나갔으며,
전국의 많은 유생들이 이산서원(伊山書院)을 찾아와 교육방법을 배워가게 되었다.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도 이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6.25때 괴헌고택에서 가져가 보관하다가
소수박물관에 기증하여 지금은 선비촌 소수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산서원 옛터>
[당간지주와 소수서원]
사적 제55호인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서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 있다.
소수서원은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소수서원 솔밭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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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그리운 人傑의 숨결... 서원 곳곳에 그림움은 또아리를 틀고.../좋은 자료, 고맙소이다.
다행이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