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21호 BC 1411-BC 13001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수8:18) | |
―――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신문 ――― |
오늘의 세계표정 아이성에서 대패한 이스라엘은 대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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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성의 참패! 대 참패 |
- 어이없는 대 참패로 수뇌부는 초상집- |
(BC1200년경)-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전날 여리고성 전투에서의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아이성 전투에 돌입했다고 한다. 여리고성 서북쪽20Km에 위치한 아이성은 별로 견고하지도 않았고, 인구도 1만2천여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성이었다. 그 성 앞에 이르러 부장 하나가 말했다. "3천의 군사만 제게 준다면 나가 싸워 반드시 공을 세우겠나이다" 하고 말을 몰아 나아갔다. 처음에는 성문을 걸어 잠그더니 싸움을 돋우던 이스라엘 병사들이 지치자 뒷문을 열고 나와 급습을 하였다. 실제적인 전투경험이 별로 없던 이스라엘 병사들은 전날의 승리만 믿고 방심하다가 죽기를 각오하고 나와 싸우는 아이성의 군사들에게 대패를 하고 말았다. 결국 36명의 전사자만을 남긴채 진채로 돌아왔다. 여리고의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이스라엘의 수뇌부는 충격에 빠졌다. 그래서 누구도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성에 빠진 것이다. 이스라엘의 패배로 전체 백성들의 분위기는 초상집처럼 되고 말았다고 소식통들이 전하고 있다. (아이성의 점령)
현재 다각도로 정보 수집 중
아이성에서의 참패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현지조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전날 여리고성의 전투에 비해볼 때 군사력이나 모든 면에서 우세였던 이스라엘이 어이없는 참패를 당한데 대한 종합적인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무엇보다 이번 참패의 원인을 이스라엘의 내부에 있다고 판단하고 진상소위가 열렸는데 놀라운 것은 시날산 외투를 훔친 아간이라는 사람의 범죄에 있었다고 결론이 낫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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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원인은 무엇인가? |
- 자성론과 강경론이 대립 - |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하자 수뇌부는 침통해져 회의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스라엘 근본주의당에 속한 원로들 중에는 이 모든 원인이 무엇인가 영적이고 도덕적인 문제 때문에 기인 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일부는 머리에 먼지를 끼얹으며 회개 기도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여리고성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긴 것인데, 아이성에서는 하나님은 도외시한 채 인간의 힘으로 싸워 이기려고 했기 때문에 무참히 깨어 졌다고 하는 자성론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원로중에 불법을 행한 자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제비뽑기를 하자고 했다. 결국 제비뽑기를 한 결과 유다 지파에 속한 아간이 여리고 성에서 얻은 전리품을 일부 숨긴 것이 발각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취한 전리품은 결코 취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이미 전투 시작 전에 내려진 군령인데도 불구하고 아간은 시날산 털 외투 한 벌과 은 이백세겔, 금덩이 오십 세겔 짜리를 그의 텐트 밑에 파뭍어 숨겨둔 것이었다. 그런데 제비뽑기에서 희한하게도 그가 적발 된 것이다. 결국 그는 가족들과 함께 돌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고 백성들이 던진 돌로 인하여 돌 무덤이 생기고 말았다고 한다. 그곳의 이름은 즉시 '아골 골짜기'라고 이름 붙여졌는데 그 뜻은 ' 참혹한 일을 당한 곳' 이란의미이다.
( 그림 : 아간을 돌로 쳐 죽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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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론을 분열하는 어떤 행위도 용서 못해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참패에 대해 즉각 성명을 발표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모두 점령하기까지
백성들이 가져야할 마음 자세애 대해 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에 따르면 이 전쟁은 성전(聖戰)이므로 어느 누구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인적 행동을 삼갈 것과 믿음과 기도에 최선을 다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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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성을 불태우는 여호수아
(여호수아 8장)
28.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29.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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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부족동맹들 비상계엄을 선포하다 |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을 뒤로하고 가나안 팔레스틴 지역으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가나안 7개 부족동맹체에 전달되었다. 이스라엘은 옛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자신들의 땅이라고 공격해 들어오자 이미 이땅을 차지하여 500여년 가까이 터잡고 살아온 가나안 부족을은 황망해 하는 표정들이다. 하지만 이미 전쟁이 시작 되었기 때문에 가나안7부족은 국가 비상계엄과 동시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싸울 태세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미 여리고와 아이가 이스라엘 손에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돌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화친을 맺고 항복하자는 주장도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이 틈을 타 기브온 부족이 이스라엘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은(殷)왕조 승승장구 |
최근 은(殷)이 승승장구 중국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전한다. 수도의 이름을 따라 상(商)이라고도 하는데. 하(夏)·은·주(周) 3대의 왕 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다보니 그 기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은왕조는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는 그 번성함이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하다고 한다.
【성립과 계보】 전설에 따르면 하왕조는 중국 전토를 휩쓸었던 대홍수를 잘 다스렸고, 전국을 9개 주(州)로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완성한 우(禹)의 자손을 왕으로 섬겼다. 그로부터 17대째가 되는 걸왕(桀王)은 전제정치로 인하여 중국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은왕조의 개조(開祖)인 탕왕(湯王:天乙)은 백성의 요망에 따라 걸왕을 쳐서 멸하고 은왕조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이 탕왕으로부터 29대의 왕이 잇달아 중국을 통치하였다. 이 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에 사마 천(司馬遷)이 고대의 계보에 따라 《사기(史記)》<은보기(殷本紀)> 속에 기술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의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갑골문자를 새겨 놓은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다량 발견되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갑골문자는 은왕조의 점술사가 은나라 선조의 제사를 점쳤던 것이었으며,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는 《사기》에 전하는 은왕조의 계보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문화】 은왕조는 개조인 탕왕 이래로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으나 20대의 왕 반경(盤庚)이 은허로 옮긴 이후 31대의 주왕(紂王:帝辛)이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은허에 정주하였다. 은허시대의 은문화는 이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은왕조는 약 1,700 m의 토벽으로 둘러싸인 정저우를 중심으로 하여 대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문 밖에서는 청동기·도기(陶器)·골기(骨器)를 만드는 장인의 공장이 즐비했다. 반경이 은허로 천도한 이후, 귀갑과 우골에 새겨진 점복문(占卜文), 즉 갑골문자의 기사(記事)와 궁전·묘능의 유적과 유물에 의하여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은의 여러 왕은 타이항산맥[太行山脈]에서 동방으로 흘러가는 위안허강[洹河]의 굴곡진 지점에, 하안(河岸)의 단애(斷崖)를 북·동쪽으로 업고, 서쪽으로는 도랑을 파서 북서의 유목민에 대비하는 견고한 성을 쌓았다. 샤오툰촌 북쪽의 대지 중앙에는 토단(土壇)을 쌓아 올려, 위에 종묘(宗廟)·궁전을 건축하였다. 제왕이 죽으면 그 시체는 위안허강의 북안 허우자좡[侯家莊]의 지하 13 m에 200 m2 이상의 큰 널방[墓室]을 만들고, 생전에 애용했던 거대하고 정교한 청동기를 비롯하여, 옥기(玉器)·석기 등을 껴묻거리[副葬品]로 함께 매장하였을만큼 권력도 대단하였다. 은의 왕은 점복(占卜)으로 신의(神意)를 받아서 백성을 통치하는 종교적인 원수(元首)였다. 또한 이민족을 정복하여, 그들을 노예나 병사로 삼았던 것이다. 이민족 가운데 북서의 고방(苦方)·토방(土方)이라 불렸던 유목민이, 은허로 옮긴 당초의 무정왕시대(武丁王時代)의 강적이었다. 그리고 서경(西境)의 산시성에 있던 주(周)민족은 제후(諸侯)로서 은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 은왕조는 당분간 승승장구의 기세로 중국을 지배할 것 같다고 정세분석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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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입주 안내
에게문명<Aegean civilization>의 근원지로 알려지고 있는 크레타가 최근 뜨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중해 동부 에게해 주변 지역에서 번영한 고대문명. 크레타섬, 키클라데스제도, 그리스 본토의 남부, 소(小)아시아 서해안의 트로이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치는데, 크레타로 대표되는 남방계의 도서문화와 미케네로 대표되는 북방계의 본토문화로 나눠지는 크레타에 입주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아 지면서 최근 부롁동산 값이 폭등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특히 이 지방은 다도해(多島海)로서 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데다가 기후도 온난하여, 포도·올리브 등의 천연산물이 풍부하므로 인간의 정착 지역으로 적합하다고 부동산전문가들은 말한다. 또 선진사회(先進社會)인 오리엔트문화권과 해상교통을 통해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일찍이 개화(開化)되어 고도의 문명이 성립되는 중이어서 자녀들의 교육에도 이상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오리엔트와 그리스, 즉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몰려들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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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반도에선 고조선(古朝鮮) |
(기원전 1400년경)-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로서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고조선이 현재 초기단계의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다고 한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으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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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왕조의 멸망원인에 대한 분석들이 승승장구하던 은왕조의 몰락으로 충경에 빠져 |
승승장구하던 은왕조가 최근 몰락하자 이에 대한 원인을 찾는 작업이 역사가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은왕조도 말기의 무을(武乙)·주왕의 시대에 이르자, 신의 은총을 받은 나머지 방자해져서 자신이 신과 똑같은 절대자라고 믿고 혹독한 전제군주로서 제후·백관·인민들에 대하여 잔혹한 압정을 가하였다는 것이 정설인데. 또한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하여, 화이허강 유역의 인방(人方)이라고 하는 동이민족(東夷民族)의 국가를 정복하였고. 주왕이 전쟁에 국력을 다 써버린 틈을 타서 서방의 산시성에서 실력을 길러, 이 지방 제후의 인망을 얻고 있던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동진하여 화북평원으로 내려왔던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더욱 동진하여 은나라 주왕의 대군을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무찌르고 은의 수도에 입성하여,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대신하여 주왕조를 일으켰다. 무왕은 은의 왕족인 무경(武庚)을 위(衛)에 봉하여 뒤를 잇도록 하였으나, 무왕이 죽은 뒤 반란을 일으켜 성왕에게 멸망당하였다.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인 은왕조는 주술(呪術)이 문화의 기조를 이루었으며, 그 결과로 죽은 왕에게 1,000명의 군인을 희생시키는 등 불합리한 체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은의 문화를 받으면서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주민족에게 패하였다고 최종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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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100세 까지 살면 최장수(?)
중국을 최초로 통일시킨 진시황은 제국의 영속만큼이나 불로장생(不老長生)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러나 불로초를 찾았던 진시황은 5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진나라도 수년 뒤 수명을 다했다. 고대 그리스의 평균수명이 19세, 16세기 유럽의 평균수명이 21세였다는 점에서 보면 기원전 210년에 죽은 진시황의 삶을 단명이라 할 수는 없지만, ‘욕심을 버렸더라면’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두보(杜甫)가 읊은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는 그야말로 옛 이야기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0년에는 60세이상이 14세이하보다 많아진다고 했고, 65세이상의 인구가 10대인구보다 많을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해도 평균수명은 지난해 통계로 남자는 68.8세, 여자는 76세이다. 또 올해 통계로 97년 태어난 아이의 기대수명은 남자가 70.56세, 여자가 78.12세로 나타났다. ▽인간 수명의 증가는 의료보험제도의 확대, 질병의 극복, 보다 나은 영양분의 섭취 및 유아사망률의 감소가 꼽힌다. 이와 관련해 영국의 BBC방송은 최근 오늘날 어린이들의 기대수명은 적어도 100세가 된다고 보도했다. 또한 20세기들어 영국인의 평균수명은 무려 30세가 증가해 지금은 남자 74.4세, 여자 79.6세라고 밝혔다. 사실 생명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잠재수명이 120세는 되리라는 주장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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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네 문명탐구】 |
그리스를 주름잡고 있는 미케네문명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리스 본토에는 테살리아의 문화로 대표되는 초기 그리스문화가 있었지만, 북방 산지로부터 남하해온 아카이아인은 이 선주민을 정복, BC 2000년을 전후하여 본토 남부의 각지에 소왕국을 건설하였다. 미케네·티린스·오르코메노스·필로스 등이 그 주요한 곳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선진문화를 흡수하고 군사력·경제력 등을 충실히 하여 본토에서의 지위를 확실하게 다져나갔으며, 특히 BC 1600년경부터 급속히 그 힘을 증가하여 남쪽 크레타를 대항할 만큼 되었다. 그 중에서도 미케네는 가장 강대하여 본토 여러 세력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으며, 특히 크레타의 붕괴 후 지중해 각 지역과의 교류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왕궁은 미케네문화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 낮은 산등성이 위에 바위산을 등지고 구축되었으며, 크레타궁전의 개방성과는 대조적으로 성새(城塞)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주문(主門)으로서 유명한 ‘사자문(獅子門)’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장려한 궁륭묘(穹墓)와 원형의 묘군(墓群)도 성벽 내에 만들어졌으며, 또한 몇 개의 주실(主室)에는 중앙에 노(爐)를 가진 메가론형식이 확인되기도 한다. 궁전의 벽화 등, 개개의 미술활동에는 크레타문명의 영향이 분명히 엿보이지만, 전반적인 미케네미술에는 양식화의 경향이 뚜렷하며, 또한 권위표상성(權威表象性)을 중시한 점에서 크레타문화와는 매우 다르다. 도기(陶器)의 무늬에 인물을 주제로 한 것이 나타나는 것도 이 시대에 들어서이다. BC 1200년경부더 그리스 본토에 도리아인이 남하해오자 이를 막지 못함으로써 BC 1100년경에 미케네를 비롯하여 여러 도시가 붕괴되었고, 에게문명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리스는 암흑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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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발상지 탐구 에게해
기원전 2000년 전, 또 다른 문명의 발상지인 에게해를 탐구하기로 하였다. 기자들은 배로 에게해를 돌아보면서 문명의 전파가 어떻게 이루어져 갔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에게해<Aegean Sea>그리스 본토,소아시아 반도의 서해안 및 크레타섬에 둘러싸인 동지중해의 해역이다. 그리스어로는 아이가이온 펠라고스(Aigaion Pelagos)라고 한다. 남북길이 640 km. 동서길이 320 km. 대소 400개의 섬이 산재해 있으며 다도해라고도 불린다. 군도(群島)를 뜻하는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라는 명칭도 처음에는 에게해에 대해서만 사용되었다. 에게라는 명칭은 전설상의 아테네왕 아이게우스, 또는 해신(海神) 포세이돈의 성지(聖地) 아이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가 에게해의 섬들을 범람한 나일강 수면에 점점이 떠 있는 취락에 비유했듯이 도서(島嶼)의 대부분은 파쇄(破碎)되어 침수한 구육괴(舊陸塊)의 정상부에 해당하며, 동서방향의 신기 조산대 몇 줄기가 이를 꿰뚫고 있다. 따라서 해저의 지형도 복잡하며, 수심이 2,300 m 정도로 깊은 곳도 있고, 수십 m에 불과한 얕은 곳도 있다. 그러나 섬을 따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으며 해역 전체가 아시아와 유럽의 접촉점에 위치하고 고대문명이 꽃핀 이집트에도 가까웠기 때문에, BC 1500년경부터 이 해역을 중심으로 한 에게문명이 생겨났으며, 고대 후기에는 그리스문화의 중심부가 되었다. 플라톤이 연못 둘레에 있는 개구리에 비유했던 것처럼 그리스인은 이 바다의 연안을 생활무대로 삼았다. 그러나 북동부로는 다르다넬스해협을 통하여 마르마라해·흑해와도 이어지는 해역 교통상의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주변 민족들의 격전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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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http://www.culture.gr/2/21/211/21104a/e211da01.html▶http://www.culture.gr/▶http://www.furrrfu.com/ ▶http://mathcs/땹.edu/classic/ ▶http://www.cs.auc.dk/~strategy/Caesar/index.html | |
*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신문은 본문 마우스 복사가 가능합니다.
* <구약> 1권 부터 40권의 자료를 연재 합니다.
*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드신 분은 <오창 나눔교회>의 김재헌 목사님이십니다.
* 다음 까페 연재 사용을 허락 해주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성경세계사신문 <== 소개링크 | |
첫댓글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신문 40페이지 자료가 있는데 그동안 올리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다시금 이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한페이지 완성하는데 보통 2시간 소요되었습니다.
때론 3~4시간 흘러가지만 (기존 자료 업데이트 하고 사진자료 그리고 글내용 정리 ) 그러한 시간을 보낼때가 좋았다는
옛 생각이 드네요....
가나안정복(기원전 1406년 ) 22호 자료 입니다. 계속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스캔해 봐서 아는데 정말 고된 작업 입니다.
집사님감사합니다. 성경으로 여는 세계신문 언제쯤 연재할려는지요! 참으로 귀한자료 같아서 기대됩니다.
그때의 열성과즐거움이 많이 퇴색된 늙은 신앙인으로 변질되어 있기에 다시 이어가기 쉽지 않을듯 합니다. 한다한다 마무리 하겠노라 마우스 잡다가도 그냥 놓고 제 맡은 사업ㅡ장사에 몰뚜하며 지냅니다. 많이 삐둘어져 있습니다ㅠ.신부까페에 로그인조차 안하죠. 그때 만큼 소박하고 순전한 모임이라는것이 느껴진다면 참여 하고 싶지만 ㅠ 정치적 중립과 균형에서 강력한 제어력으로 묶어놓는 힘을 발휘하지 신부까페로 컨트롤공지가 보이지 않는 이상ㅠ 상처받기에 아예 얼신도 안합니다. 옳고 휼륭한 신앙인들의 모임이라고 말해 줄수도 있어나 예전같지 않네요 ㅠ 발을 빼길 원하는것 같아 일찍이 뛰쳐나온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