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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은 天資가 英明하고 志氣가 雄大하며, 學問과 兵法에 두루 能通하여 관직이 中顯大夫典農寺正에 이르렀으며, 西北의 오랑캐와 西南의 倭寇를 막고 民心을 鎭撫한 功勳으로 羅城君에 封爵되었다. 公의 墓는 羅州 長興洞 丁向原에 있으며, 配位 郡夫人 高興柳氏는 興威衛保勝郞 將蕃의 딸로서 墓는 公의 墓前右에 있다. 두 아들이 있는데 長男 道康監務 設은 三女를 두어 出嫁하니 孫婿 平澤 林襜은 直長이고, 錦城 羅殷制는 淸白吏에 기록된 縣監이며, 洪孟信은 判官이다. 次男 式目都監錄事 諿은 一男을 두니 務安縣監과 義州府尹를 지낸 自康이다. 曾孫에는 繼祖, 承祖, 奉祖가 있는데, 將仕郞 繼祖는 二男을 두니 己卯名賢으로 承政院 左承旨에 追贈된 逸孫과 保功將軍으로 金甲島萬戶를 지낸 吉孫이고, 寧邊敎授 承祖는 四男을 두니, 旭孫과 陰城縣監 晛孫과 司憲府監察 景孫과 水原府使 誠孫이며, 通德郞 奉祖는 進士 晉孫 一男을 두었다. 이후로도 많은 後孫들이 顯達榮昌하였으나 번거로워 省略한다. 羅城君行中顯大夫典農寺丁公墓表(후7세 公彦(공언))에서.... |
나성군 묘표에 금성 나은제는 누구인가?
족보를 살펴보니 公彦公의 3째 손녀가 금성나씨 나은제 공과 결혼을 한것이다. 나은제의 기록을 보니 나은제(羅殷制) 1419~1487 공(公)의 휘(諱)는 은제(殷制)니 나주(羅州)에서 계출(系出)하여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휘 총례(聰禮)로써 시조(始祖)를 삼고 그 후에 빛나는 관작(官爵)과 훌륭한 인물로 정승의 물망에 오른 분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부친의 휘는 계(繼)니 벼슬이 사직(司直)으로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요 모친은 함평이씨(咸平李氏)니 부위(副尉) 성혜(成蹊)의 따님이다. 공(公)이 세종(世宗) 기해(己亥 1419)년에 남산리제(南山里第)에서 태어나 천품(天稟)이 강직하고 지기(志氣)가 고결(高潔)하며 모든 외물(外物)에 흔들리거나 굴(屈)하는 바가 없고 오직 의(義)를 중하게 여기었다. 세조 정해(丁亥 1467)년에 학행(學行)으로써 추천되어 장성(長城)현감(縣監) 겸 나주(羅州)진관(鎭管)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제수하니 그 관직(官職)에 임(臨)하여 치정(治政)이 관평하여 세금을 경감(經減)하고 옥사(獄事)에 억울함이 없으니 일경(一境)노소(老少)가 흐뭇하여 이르되 원님이 오시어 우리가 소생(蘇生)한다 하였다. 만기(滿期)가 되기전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사임(辭任)하고 돌아올 제 행장(行裝)이 세 필의 말에 가득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삼마태수(三馬太守)라 칭하고 조정(朝廷)에서 그 청백리(淸白吏)를 녹(錄)하였다. 춘추(春秋) 69세인 성종(成宗) 정미(丁未 1487)년 3월 27일에 별세(別世)하니 무학산(舞鶴山) 서편 송림(松林) 묘좌의 벌에 안장(安葬) 하였다. 선생(先生)의 재주와 덕(德)으로 국가에서 문(文)을 숭상하는 날에 있어 그 포부(抱負)를 쓰일 바가 어찌 여기에 그치리오마는 친상(親喪)을 당하여 돌아온 후로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요히 수양하며 때로는 혹 운림천석(雲林泉石)의 사이에 소요(逍遙) 하면서 시서(詩書)로써 즐기다가 세상을 마치었으니 아는 이들마다 차탄(嗟歎)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임하여 청백(淸白)한 업적은 조야(朝野)가 송덕(頌德)하여 백세(百世)라도 그치지않고 자손(子孫)이 매우 번성(繁盛)하여 팔도에 가득한 수가 천억(千億)으로 헤아린즉 공(公)의 덕을 심고 인(仁)을 쌓음을 여기에서 징험(徵驗)할 만하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하였다 나세찬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 빈(彬), 어머니는 찰방 윤노겸(尹勞謙)의 딸이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를 거쳐,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6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봉교(奉敎)가 되었다. 중시에 응시할 때 대책문(對策文)에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통박한 것이 화근이 되어, 김안로의 모함으로 고성에 위리안치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봉교에 복직, 이듬해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1544년 이조참의(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을 거쳐, 한성부우윤(右尹)으로 춘추관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판결사(判決事)·대사간, 1546년(명종 1) 대사헌(大司憲), 1548년 충청도관찰사·한성부우윤을 거쳐 이듬해 전주부윤이 되었다. 전남 나주의 송재사(松齋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 《송재유고》, 저서에 《병상부(病床賦)》 등이 있다. 공언의 손녀 사위이며, 은제의 손자인 나세찬의 詩文과 해설을 (나주향토문화연구회부회장님)의 케페에서 옮겨보자.. 송재유고집에 거평동 팔경 원문 孤山一點明。白雨漾氷莖。豈待秋風至。季鷹先我行。 右落山採蓴 九皐獨棲處。誰遣翠濤來。天寒聞更遠。恐曳棟樑材。 右鶴嶺聽松 綠影落雕弓。共聞曾熟手。弛張付一爭。立飮沙邊酒。 右槐亭射帿 晩風吹釣絲。芳草立多時。得雋又何待。歸來橫柳枝。 右城川釣魚 獨抱後凋操。不愁風雨忙。靑靑伴疏竹。高處宿鸞凰。 右南岡尋柏 神物厭平地。噓雲巖上水。變化在須臾。蒼生望一起。 右龍庵望雲 太華誰移種。天然出水中。無風香自遠。欲採思何窮。 右沙池賞蓮 芳洲春水生。風便一帆輕。夜深弄明月。恰得鏡中行。 右幕浦歸帆 송재 나세찬의 거평동 팔경(居平洞八景) 해설
글/羅千洙
(3) 거평동 8경에 담겨진 송재의 모습
선비들이 말년이든 정치 활동 중에 벼슬길에서 밀려나면 대체로 낙향하여 고향마을에서 은거하면서 살았다.
송재도 1536년경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진 듯하다. 38살의 피 끓는 나이에 정치판에서 밀려나 시골에 묻혀 있지만 머리 속에는 나라와 임금을 위하는 충심이 깊게 고여 있었다.
거평동 팔경은 송재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경치를 자신의 모습으로 표출해 내는 것들이다.
선비가 낙향하여 마음을 비운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나물먹고 사는 모습이다. 선비정신에 걸 맞는 음식은 나물이다. 또한 시골 은둔생활의 소일거리가 나물 캐기이다. 손님이 찾아왔을 때에는 보리밥과 채 나물로 대접하고, 나물을 통해 자연과의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었으며, 정자를 벗 삼으며 풍류를 즐겼다.
더더욱 송재는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활 쏘는 것뿐만 아니라 활쏘기의 시문을 짓기도 하였다. 낙산(落山)에서 나물 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1경이요, 느티나무 정자에서 활을 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2경이다.
송재(松齋)는 나세찬의 호이다. 소나무 송(松)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다라는 재계할 재(齋)이다.
재(齋)와 비슷한 제(齊/제나라 제)를 잘못 혼용하는 사례가 많다. 호는 본인의 성품을 표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송재는 평생 소나무, 잣나무를 좋아했고 그러한 모습으로 살았다.
송재는 올곧은 선비이다. 그가 책문을 통해 붕당을 조성하는 조정대신들에게 쓰디쓴 소리를 했다 하여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것이다.
산에 있는 상수리나무, 오수나무들이 송죽을 어지럽게 하고, 그러한 나무들 속에 소나무 시달리며 살아도 겨울이 되면 푸른 빛 잃지 않고 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좋아했다. 송재집에 실린 애병백부(哀病柏賦)는 “잣나무의 병들음을 슬퍼하다” 라는 뜻이니, 정치판에 밀려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잣나무에 빗대어 지은 글이다.
1519년 기묘사화 , 1521년 신사무옥으로 이어지는 사화로 선비들은 실의에 빠지었다. 기를 펴야 할 사림들이 위축되었고 훈구파들의 무모함과 행패가 만연하였다.
송재는 이런 세태를 탄식하고 좌절한 사림들을 병든 잣나무에 비유하여 쓴 시다. 잣나무가 지천으로 깔린 잡나무들의 시달림을 받아서 병들었지만 그 병이 곧 나아서 다시 푸르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학령(鶴嶺)의 소나무가 곧 송재 자신이요 송재의 소리 듣는 것이 3경이다. 남강(南岡) 즉 남산의 잣나무도 곧 자신이다. 그는 남산촌에서 태어난 것이다. 남산에 은둔하고 있는 자신을 찾는 것이 4경이다. 사지(沙池) 연못에 핀 연꽃도 자신을 의미한다.
자신은 바로 사시사철 변치 않은 소나무요, 잣나무이며, 흙탕물 진흙 속에서도 고개를 내밀어 꽃을 피우는 자라는 뜻이다. 상수리 같은 활엽수들이 온산을 덮고, 소나무를 괴롭혀도 겨울에는 소나무 홀로 우뚝 서 있다는 지조를 표출한 것이며, 붕당의 더러운 흙탕물 속에 빠져 있는 듯하지만 자신은 그 흙탕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상서로운 꽃을 피워낸다는 뜻이니 이는 곧 충의 표출이다. 남강은 거평에 있는 남산(南山)을 의미하며 바로 송재가 태어난 곳 남산촌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깊은 곳, 내면에 사철 푸른 잣나무가 숨겨져 있으니 찾아보라는 말이다.
용암망운(龍庵望雲)의 용은 곧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깊은 산골 속 거평마을의 칩거하는 작은 집은 암자와 같다. 용이 구름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든지 승천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이것은 출사(出仕)를 준비하는 송재의 속심을 표출한 것이다. 용과 구름으로 자신의 호연지기를 마음껏 발산한 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6경인 것이다.
성천조어(城川釣魚)는 주나라 때의 강태공을 비유한 것이다. 위수(渭水)에서 낚시질 하고 있던 강태공을 문왕(文王)이 큰 재목감으로 불려 들였던 옛 고사를 인용하여 송재 자신도 성천에서 낚시질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임금이 불러주기를 고대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물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바로 7경이다.
마지막으로 막포귀범(幕浦歸帆)이다. 거평부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방향으로 고막천이 있다. 천이 있으니 포구가 있을 것이니 그곳이 바로 고막포(古幕浦)이다. 오늘날에 고막천의 석교(石橋/고막천 똑다리)가 보물 제1372호로 지정되어 있다. 4자 운을 맞추기 위해 고(古)를 생략하고 막포로 표현 한 것이다. 고막포로 돌아오는 배는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것은 자신을 불러주는 배가 서울로부터 오는 풍광을 그리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제8경이다.
송재는 거평동 팔경을 가탁하여 자신의 모습을 시문으로 엮어낸 것이다. 거평동 팔경이 소상팔경처럼 거대한 경관(great scenic view)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자신의 모습을 8경으로 탄생 시킨 것이다. 거평동 8경은 곧 자신이요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고려 원종(1273) 때 무안 범천사 고막대사가 놓았다는 전설이 .. 전남 함평군 학교면 고막천길 625~40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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