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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신과 류미영, 독립운동가 집안을 할퀸 분단의 인생유전 가족사를 말한다 2000년08월23일한겨레21
출처; http://www.hani.co.kr/section-021007000/2000/0210070002000082303230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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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영이 중국옷을 입고 결혼한 사연
부모의 월북 이후 10여번이나 직장을 옮겨야 했던 아들 최인국씨는 20여년 만의 어머니와의 만남을 한사코 피하려했다. 그러나 아들은 결국 어머니를 만나 눈물을 흘렸다. 훤하게 벗겨진 이마에 둥근 얼굴, 그 아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최덕신의 모습이었고, 거기에 넉넉한 턱수염만 달면 또 독립운동의 큰 별이었던 의산(義山) 최동오(崔東旿, 1892∼1963) 선생이었다.
류미영 단장의 모습 또한 그를 키워준 아버지로 광복군과 한국군의 산파 역할을 한 춘교(春郊) 류동렬(柳東說, 1877∼1950) 장군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난 며칠간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의 상봉은 온 국민의 눈을 텔레비전에 붙들어맸다. 상봉이 이루어진 테이블마다 북에서 남쪽의 가족을 만나러 온 어느 작가의 말처럼 셰익스피어도 쓰지 못할 민족의 비극이 펼쳐졌다. 그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은 절절한 사연이 아니었을까만은 류미영 단장의 가족사는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기구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중일전쟁(1937년 7월7일 발발)이 일어나기 한달 전, 류미영과 최덕신이 결혼할 때 류동렬 장군의 부인은 딸에게 조선의 풍습대로 당홍치마, 초록저고리에 칠보단장을 해주는 대신 연분홍색 다부산자를 입혀 시집보냈다. 조선인들이 ‘망국노’라고 중국인들에게 손가락질받던 시절,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일생에 단 한번밖에 없는 결혼 첫날에 축복을 받아야 복된 가정을 꾸린다며 딸에게 중국옷을 입혔던 것이다. 열일곱 어린 딸의 결혼식을 그렇게 치러야 했던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도 그러나 분단과 대립이 할퀴고 간 역사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부모가 월북을 하자 친가, 외가 할아버지 두분 모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던 독립운동가 후예들은 정보기관의 감시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내야 했다. ‘배신자’의 아들이라는 멍에에 짓눌려 그리운 어머니와의 상봉도 주저해야 할 만큼 힘겨운 삶을 살아온 아들 앞에서 어머니는 “너만 보면 자꾸 눈물이 난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각료 출신으로는 유일한 최덕신의 갑작스러운 망명도 따지고 보면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바로 최덕신의 아버지 최동오 선생과 김일성 주석의 남다른 인연이다.
김일성의 아버지 장례에 모인 오동진 등 옛 동지들은 어린 김성주를 정의부에서 운영하던 2년제 군정학교인 화성의숙(華成義塾)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최동오는 바로 화성의숙의 숙장으로 김일성 주석의 교장선생님이었던 셈이다. 독립운동에 몸바쳐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최동오 선생 내외분은 김일성 주석보다 두살 아래인 최덕신을 베이징의 자유원(慈幼院)이라는 고아원에 맡겨놓은 상태였다. 그런 어려운 형편에서도 최동오 선생은 김성주 등 학생들을 불러 집에서 밥을 먹이곤 했다. 다들 생활이 어려워 밥이래야 시래깃국에 조밥에 불과했지만, 아버지를 잃고 집을 떠나 있던 어린 김성주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도교와 김일성의 스승 최동오
(사진/방남이산가족 상봉단정으로 서울에 온 류미영씨가 남쪽 김광욱 천도교 교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소년 김일성은 최동오 선생을 매우 존경했고, 최동오 선생 역시 김일성을 아끼고 사랑했다. 역사시간에 최동오 선생은 가끔 손수 수업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야기는 천도교의 보국안민 사상으로 흐르곤 했다. 당시 화성의숙의 교사들 중에는 천도교인들이 많았고, 어린 김일성은 이들을 통해 천도교인들의 생활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들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기도 했다. 공산주의자가 된 뒤에도 김일성이 “천도교야 하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늘을 믿지 않느냐”며 호감을 표시한 것도 다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1936년 조국광복회를 결성할 때 김일성이 손을 잡으려 한 민족주의 세력의 핵심은 바로 천도교도들이었다. 1936년 12월 김일성은 장백현 및 함경도 일대의 천도교도들 속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박인진(朴寅鎭) 영북도정(嶺北道正)을 빨치산 밀영으로 초빙했다. 젊은 공산주의자인 유격대 대장과 노(老)천도교인의 만남에서 김일성은 박인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공산주의자들의 소굴에 와 마음을 조리던 박인진에게 김일성은 ‘청수 봉전’을 하시라며 전령병을 시켜 물을 떠오게 한 것이다. ‘청수 봉전’이란 천도교인들이 날마다 지켜야 할 오관공덕의 하나였다. 비록 산속이라 놋그릇이 없다며 반합에 떠온 백두산의 맑은 물은 박인진의 마음속의 두려움을 씻어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천도교인들에게 자기들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화성의숙 시절 최동오 등 천도교도들의 생활태도를 눈여겨보아온 김일성의 경험이 통일전선 사업에서 이북말로 은을 낸 것이다.
아끼던 김일성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화성의숙에서 중퇴하려 하자 최동오는 몹시 노여워하였지만, 결국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라며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교정에서 선생님은 떠나는 제자를 붙들고 생활에 교훈이 될 좋은 말씀을 퍽이나 오랜 시간 많이 들려주었다. 팔순이 넘은 뒤 그 어린 제자는 그날 선생님의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드리지 못하고 뒤돌아선 것이 두고두고 가슴이 아팠다고 회고했다. 1926년 12월의 일이었다.
이렇게 헤어진 스승과 제자는 20여년이 흐른 1948년, 최동오가 남북협상에 참여해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다시 만났다. 이때 김일성은 최동오 선생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온 최동오는 당시 남쪽의 육군사관학교 교장이었던 아들 최덕신을 앉혀 놓고 화성의숙 시절의 김성주 학생이 바로 김일성 장군이라고 감격적으로 말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곧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과 이북의 정치일꾼들은 이른바 ‘모시기 공작’을 통해 김규식 등 남북협상에 참여한 인사들과 출옥인사들을 북으로 데려가는 작업을 서둘렀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요, 남북협상에도 참여한데다가 김일성과의 개인적인 인연도 남달랐던 최동오 선생은 당연히 모시기 공작의 핵심적인 목표였다.
대부분의 임시정부 요인들과는 달리 미군정에 참여해 통위부장으로 한국군 창설의 산파역을 했던 류동렬 장군도 당연히 모시기 공작의 대상이었다. 류동렬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구한국군 기병대장을 거쳐 애국계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했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그 배후로 지목되어 검거되기도 했다. 그는 신민회의 부회장으로 이른바 105인 사건이 터지자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과 함께 최고형인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류동렬은 그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초대 참모총장, 군무총장 등을 지내다가 공산주의운동에 가담하여 한때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그는 1932년 임시정부에 복귀하여 군무부장을 지내며 광복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같은 천도교인으로 오랜 독립운동 기간 정치적 행보를 같이해 온 류동렬과 최동오는 15년 정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결의형제를 맺었고, 이런 친밀한 관계는 최덕신과 류미영의 결혼으로 사돈 관계로 발전했다.
최동오와 류동렬에 대한 모시기 공작
(사진/남북한의 요직을 두루 거친 최덕신씨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류동렬이 북행 길에 오른 때는 이미 중병으로 앓아 누운 상태였다. 이북 당국은 자동차를 지원하였지만, 이미 병약해진 전날의 독립군 맹장에게는 이 피난길이 무리였다. 1950년 10월18일 고향인 평안북도 박천이 멀지 않은 희천에서 그는 최동오의 무릎에 기댄 채 숨을 거두었다. 이른바 모시기 공작으로 북행길에 오른 인사들 중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김붕준(金朋濬, 임시정부 국무위원), 방응모(方應謨, 조선일보 사장)에 이은 비극이었다.
한편 최동오는 납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회 간부로 이북에서 장관급 대우를 받다가 1963년 9월16일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아들 최덕신이 외무장관을 사임하고 서독주재 대사로 부임한 직후의 일이었다.
류동렬과 최동오는 그뒤 이북에서 평양시 서남쪽 신미리에 애국열사릉이 건설될 때 이곳에 모셔져 애국열사로 추앙받고 있다. 반면 남쪽에서는 이들의 북행과정이 혹시 납북이 아니라 자발적인 월북이었을 수도 있다는 의혹에, 북행 이후의 행적에 대한 의혹이 겹쳐 이들의 혁혁한 업적은 오랜 기간 응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에서 류동렬은 1983년에, 그리고 최동오는 1990년에야 뒤늦게 그 업적을 인정받은 것이다.
최덕신은 서독대사 시절 이북으로부터 손길이 뻗쳐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북은 최동오의 유언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편지를 최덕신이 척 보면 알 만한 유품들과 함께 최덕신에게 전달하려 하였다고 한다. 이북의 대남공작에 깊이 개입했던 전직 북한간부의 증언을 인용한 한 글은 평양에서 급파된 공작원이 최덕신을 본에서 비밀리에 만났다고 주장했다.(유영구,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 366쪽) 그러나 최덕신이 주요인물이기 때문에 섣불리 공작을 진행시키는 것보다 현 상태로 공작을 동결하기로 하여 유언을 전달하는 선에서 더이상 상황이 진전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최덕신이 본격적으로 남쪽 정부에 불만을 갖게 된 계기는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명백히 서독의 주권을 침해한 중앙정보부의 월권공작으로서 현지 대사인 최덕신으로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덕신은 이 공작에 비협조적이었고, 꼭 그 때문은 아니었더라도 일단 사건이 터져 서독이 국교단절을 불사한다는 강경한 태도로 나오자 더이상 대사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불명예스럽게 대사를 물러난 뒤 최덕신은 천도교 교령으로 취임했다. 최덕신은 신심이 깊은 인물이었지만, 또한 오랜 군생활과 외교관 생활이 몸에 밴 탓인지 교령으로서의 그의 활동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그가 종단의 공금을 횡령한 비리 때문에 물러났다고 하고 있으나, 교단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1975년 말에 발생하여 1년여를 끈 종단 분규 기간에 공금횡령이나 개인적인 착복이 문제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단지 최덕신이 교령을 부업처럼 여기면서 다른 사회활동에 치중하고, 교단운영에서 독선과 독재를 했으며, 어려운 교단 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예산을 방만하게 운영했다는 것이 일반 신도들과 교단 간부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덕신은 박정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박정희의 반응은 냉담했다. 신도들이 싫다는데 자긴들 어쩌겠냐며 잠시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 권유한 것이다. 최덕신은 곧 미국으로 건너갔고, 해외의 반정부적인 인사들로 배달민족회를 조직하고 배달신보사를 설립하여 반유신 활동을 벌이게 된다.
최덕신이 북한으로 가게 된 데는 전 말레이시아대사 최홍희 부부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최홍희는 태권도의 창시와 보급으로도 유명한 인물인데, 그 역시 해방 이전 김일성과 만난 적은 없지만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홍희는 해방 직전인 1945년에 발생한 평양학병탈출사건의 주모자였다. 이 사건은 학병으로 징집된 청년들 중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합심하여 탈출을 기도한 사건인데, 이들이 탈출에 성공한 뒤 가려고 한 목적지는 바로 1937년 김일성의 이름을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한 보천보 습격사건의 보천보였다. 이미 평양을 방문했던 최홍희는 북쪽이 최동오와 류동렬의 묘소를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1963년도에 1차 시도되었던 최덕신에 대한 접근이 15년여 만에 재개된 것이다.
최덕신은 어떻게 평양을 가게 되었나
(사진/중국 충칭 연화지 임시정부 청사를 떠나기 앞서 찍은 임정요인들과 지원들의 기념사진(맨 왼쪽). 독립운동의 큰 별로 화성의숙숙장으로 김일성 주석을 만난 최동오 선생(위). 광복군과 한국군의 산파 구실을 한 류동렬 장군(아래).)
1978년 11월 최덕신은 혼자서 평양을 방문했고, 11월18일에는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최동오 선생에 대한 회고로 말문을 연 김일성 주석은 과거에 구애받지 말고 통일을 위해 손잡자고 최덕신에 당부했다. 당시 서울에 생존해 계시던 최덕신의 노모는 아들이 북한을 방문한 이른바 반한인사가 되어 귀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1979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이후 최덕신은 여러 차례 평양을 드나들게 되었고, 1986년 8월16일 다섯 번째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으로부터 영주귀국을 권유받게 된다. 김일성은 고령의 최덕신 내외가 해외에서 단둘이 외롭게 살고 있는데 건강까지 좋지 않다면서 친형제처럼 지내자는 파격적인 말로 그들 내외를 평양에 눌러 앉힌 것이다.
남쪽 출신 인사로서 월북한 최고위급 거물이었던 최덕신에 대한 이북의 대접은 융숭했다. 그는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이외에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최고인민회의대의원 등 여러 직함을 지내다가 1989년 11월16일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최덕신이 이북에서 지닌 직함 중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조선골프협회 회장이라는 직함이다. 골프를 좋아하는 최덕신이 태성호에 갔다가 이곳에 골프장이 건설될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이런 데 와서 골프장 부지배인이나 하며 노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이를 김일성 주석이 보고받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일생을 보내 온 류미영 단장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본격적인 사회활동에 나서 1990년 천도교 중앙지도위 고문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천도교 중앙지도위 위원장 등의 고위직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류미영은 흔히 보도된 바와 같이 서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1921년 만주 하얼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 때문에 간고한 형편 속에서 자란 류미영은 어려서는 매리라는 아명으로 불렸는데, 17살의 어린 나이에 최덕신과 결혼하였다. 최덕신은 당시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중앙군에 복무중이었다. 류미영은 임시정부가 중경에 자리잡은 뒤에는 남편의 임지에 따라가지 않고 중경에 머물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을 들었다.
해방이 된 해 10월 젊은 류미영은 두 아이를 안고 군함에 몸을 실어 10여일간의 고생 끝에 부산 앞바다에 이르렀다. 독립운동가 가족, 광복군의 아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꽃을 든 환영인파가 아니라 무장한 미군들이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DDT 분말소독약을 뒤집어쓴 류미영 일행은 수용소에 억류되어 마치 패전국 포로와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분단과 미군정 실시의 냉엄한 현실 아래 독립운동가들이 앞으로 겪을 수난의 예고편이었다.
최덕신이라고 사정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선전과정을 잠시 지낸 이외에 주로 중국중앙군에 근무한 최덕신은 멀리 인도, 미얀마 전선에까지 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중국 신일군(新一軍) 참모로 광둥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무장해제를 했으며, 1945년 12월에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한국인 사병들을 접수하여 중국화남지구 한국적사병 집중훈련총대를 조직하여 총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이들을 이끌고 1946년 5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이듬해 3월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3기특별생으로 입학하여 소위로 임관되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담당했던 연합군의 대령이 그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군, 만주군 등 패전군 출신들이 득세한 사관학교에서 그들에 의해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된 것이다. 최덕신은 1년 이내에 대령 계급을 회복하긴 했지만, 해방 조국의 뒤틀린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류미영 단장이 남편의 사망 이후 벌인 주요활동은 남쪽의 천도교와의 교류였다. 사실 천도교는 최덕신의 월북 이후 1997년에 오익제 전 교령이 또다시 월북함으로써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정보기관의 발표에 의하면 류미영과 서독에 체류중이던 최덕신의 큰아들 최건국씨 등이 오익제의 월북에 관련되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류미영씨가 이산가족 방문단 단장이 되어 서울을 방문한 것은 껄끄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천도교쪽은 교당 정문에 류미영 위원장의 서울방문을 환영하는 플래카드를 내거는 성숙한 화해의 자세를 보였다.
부모의 선택 때문에 당한 고난
(사진/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라 남한 각료 출신으로 유일하게 북한에 장착한 최덕신씨가 부인 류미영씨와 함께 평양에서 고적관광을 하고 있다)
정전회담 한국군 대표의 아내에서 북쪽 이산가족 방문단의 단장으로 서울을 찾은 류미영 위원장의 인생유전에는 우리의 기막힌 분단의 역사와 예사롭지 않은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독립운동자들의 후예들 중 상당수는 부모의 선택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배우지도 못하고 고난을 당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아들딸이며 그 자신이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최덕신, 류미영 부부의 자제들은 부모의 선택으로 또다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다. 최덕신, 류미영의 수기는 평양행의 동기를 양가 아버지 묘소에 성묘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최덕신은 노모를 다시 보지 못했고, 서울의 자제들과 또다른 이산가족이 되었다. 80을 바라보는 어머니 류미영은 다시 한번 아들딸을 만나라는 권유를 아직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이 너무 많다며 한사코 물리쳤다. 그래도 그들은 한번이나마 그리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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