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 내리는 저 비 그치면
출처: 가톨릭 일꾼
글쓴이: 신대원 신부/2024.09.22
몹시도 부산스러웠던 한가위 명절, 긴 휴가도 끝이 난 모양이다. 산속에 묻혀 지내다 보니 “가을 저녁”이라는 “추석(秋夕)”도 언론의 보도로만 접했다.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신작로엔 온종일 자동차 소리로 야단스럽게 부산을 떨 듯 법석이다. 모두들 고향이나 부모님이 계신 곳이나 일가친척을 찾아 나서는 중일 것 혹은 이미 만나고 다들 떠나는 중일지도 모를 일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그리움이 어찌 가슴 깊이로 박혀 있지 않겠냐마는, 막상 길 떠나 딱히 찾아가야만 할 곳을 정할 길이 없으니, 그저 “이 또한 지나 가리라.”라고 나직이 읊조릴 수밖에. 밖엔 여름 장마인지 가을장마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하염없이 비는 내리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옛 속담이 무색해질 정도로 올 가윗날은 가을답지 않았다. 무척 후텁지근해서 마치 여름의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비단 나만이 가지고 있는 계절 감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언론의 보도는 이상기후를 얘기하면서도 인간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고, 대통령이나 영부인이 키우던 개와 사진을 찍으면서 추석 인사를 했느니 혹은 또 어디 어디를 방문했느니 하는 따위의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깃거리를 “뉴스(News)”라고 전해주고, 이야기꾼들은 그것을 가지고 하루종일 타령을 해대니, 참 서글픈 명절의 “절후(節候)”가 아니었던가?
홀연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들어 있는 “器滿則溢 人滿則喪(기만즉일 인만즉상)”이란 말마디가 생각난다. 이 구절을 풀이하자면 “그릇이 가득 차면 넘쳐나고, 사람이 가득 차게 되면 목숨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라는 뜻이겠다. 이 말인즉슨,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그릇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 그릇에 자기가 스스로 노력하여 그릇을 채울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의 그릇을 빼앗아 자기 그릇을 채우려 하는 못된 버릇을 꾸짖는 말일 것이다. 이 그릇은 물이 절반까지 차면 그대로 있겠지만, 그 이상을 부으면 기울어져 쏟아져 버린다. 딱히 인위적으로 만든 이런 그릇이 아니더라도 그릇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고 물을 부으면 넘쳐흐르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이런 이치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법이다. 사람이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지위와 부를 얻으면 교만에 빠지게 되고, 교만에 빠지는 순간 패망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지나친 탐욕이 화를 부르는 이치와 딱 들어맞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릇을 채우기에 급급하지 말고 먼저 자기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데 힘을 써야만 할 것이다. 흙으로 빚어낸 그릇은 더 이상 키울 수 없겠지만, 사람의 그릇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커져나 갈 수 있지 않겠는가? “폭넓은 공부와 경험을 통해 식견과 도량을 넓혀나가면 그 덕스러움도 커져 나간다.”라는 옛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커져 나가는 덕스러움을 “사람의 그릇(人器)”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덕이 있는 사람은 채워질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굳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드러내지 않아도 저절로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인즉.
오늘날에는 자기 그릇이 큰지 적은 지 어느 정도나 되는지, 그에 대해서는 따져보거나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밥그릇 채우기에 바쁜 지도자나 지식인이 너무나 많이도 우글거린다. “이번 한가위 저녁에는 구름 사이로 슈퍼-문(역대급 달)을 볼 것이다.”라고 언론들이 하나같이 주절거려보지만, “일월영측(日月盈仄 :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는 그 옛날에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공부에 입문할 때 접하게 되는 천자문의 네 글자도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 아니더냐? 이제 글피면 추분(秋分)인데, 하마 사람들은 “우리가 맞이할 것은 추분이 아니라, 어쩌면 하분(夏分)일지도 모르겠다.”라는 볼멘소리를 해댄다.
사실 작금의 시류를 감안해보자면, 결국 우리네 인간들이 제대로 자기 그릇을 채우는데, 스스로 채우려 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아 채우려 하는 못된 탐욕이 빚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말했다지. “아무리 여름이 설쳐대도 가을은 오고야 말 것.”이라고 말이다. 시방 내리는 저 비 그치면 우리는 가을 속으로 퐁당 담겨져 버리고 말 것인 저.
신대원 신부
천주교 안동교구 태화동성당 주임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