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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전대에 금은동(金銀銅)을 가지지 말라”
“기억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지만, 은혜의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일 들이 많기에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을 기록을 해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씩 했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내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백했던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나의 삶을 인도해주시는 은혜의 시간들을 증거로 남겨, 우리 자녀들과 그리고 혹시 나의 이야기가 몇 사람에게라도 위로가 되고 싶다.
십 오년 전 결혼을 앞두고 했던 나의 기도제목이다.
첫째는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이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세요.”
둘째는 “제가 재능이나 능력이 없으니까 돕는 배필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셋째는 “이룰 가정이 교회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작은 가정이 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를 한동안 하던 중, 지금 남편을 내가 출석하던 교회 전도사님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남편과 내가 만나게 된지 3 개월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서로에 대해서 잘 몰랐고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안 되었기에 나는 미적미적 거리는데, 남편은 확신을 가지고 일사천리로 결혼을 추진했다. 어리둥절한 사이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 왔지만, 혼수품은 결혼식에 입을 옷이 전부였다. 왜냐하면 남편 목사님이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 해 둔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역자를 파송하실 때, 빈손 빈 몸으로 출발하게 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해 보고 싶어서 숟가락, 젓가락 하나도 준비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남편은 결혼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나눠주기를 원했었다.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얼마간의 전세금까지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기를 원했다. 믿음이 약했던 나는 그 말은 따르지 않고, 후에 방 한 칸 얻는데 보태게 되었다.
결혼식에 돈을 한 푼이라도 낭비하는 것은 허영이고, 주님 앞에 죄라고 하며, 결혼식장도 무료로 사용 할 수 있는 야외 공원을 선택했다.
초대 손님들은 가까운 가족과 진심으로 우리의 결혼을 축하 해줄 몇 사람만 전화로나 만나서 초대하기로 하고, 청첩장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편 목사님은 “별로 원하지도 않는 남의 결혼식에 청첩장을 받고나면, 영수증 없는 고지서를 받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나는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직장에 결혼휴가를 신청해야 했는데, “청첩장을 제출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첩장이 없어 난처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곤란한 일은 계속 되었다. 결혼식을 야외 공원에서 하면서 손님에게 대접할 음식을 장만 하지도 못했는데, 초청하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이 왔다. 가까운 친지와 절친한 몇 분들에게는 양해를 미리 구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는 왠지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결혼식이 끝나고 생활 할 집도 준비하지 못 한 체, 남편 목사님의 선배님에게 소형차 한대를 빌려서 남편이 직접 운전해서, 서해안 두 곳을 돌아보는 것이 신혼여행 전부였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인사차 다녀오는 동안 목사님 후배 전도사님들이 축의금으로 월세방을 계약해 놓았다.
그런데 전도사님들이 애써 계약해 놓은 집을 해약해야했다. 왜냐하면 내가 다니던 직장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직장 근처에 방을 얻게 되고, 밥공기 한 개 없이 시작했지만, 생활에 필요한 한 가지 한 가지를 하나님은 주위의 손길을 통해서 채워주셨다.
처녀 때부터 출석했던 교회 사모님이 사용했던 장롱을 물려받게 되고, 작은 부엌에는 싱크대 시설도 갖춰지지 않아 비어있었는데, 친척분이 결혼해서 축하해주러 방문했다가 싱크대를 설치해 주고 가시기도 했다. 교회 자매들이 집을 와보더니, 옛날 자취했던 생활이 생각난다고도 했다.
그렇게 자취생활처럼 새로운 결혼생활을 시작했는데,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 할 뿐이다.
아이들 세 명을 낳아서 기르는 동안 남편 목사님은 공부를 계속 하면서 전도사로 사역을 했지만 사례비로는 아이 우유 값도 되지 않아서, 생활비를 벌기위해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다.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 했지만, 학비가 없으면 학교를 휴학 하고, 다시 학비가 준비되면 또 공부를 했다.
1999년 봄날이었다. 남편은 밤에 공공근로(방범 순찰)을 하고, 낮에는 건설 현장에 막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밤에 잠을 자지 못해 너무 피곤해서 현장에서 큰 사고가 있었다. 손바닥이 깊이 찢어진 사고를 당해 붕대를 감고 들어 왔는데, 8주간의 치료를 받아야하는 상처였다. 학비마련을 위해 일을 하다가 너무 무리하게 해서였다. 마음이 너무 아파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남편 목사님은 결혼 후에 신대원을 들어가 과정을 마치고, 이후 다시 “한국어에 능통하지 않으면 설교자가 어떻게 설교를 하겠냐”며, 한국국문학으로 국문학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외국인에게 전도를 하다가 상대방이 한국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그때 목사님은 많이 당황했다고 고백했다. “한국인인 자신이 한국문화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어떻게 성도들을 대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은 다시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여 철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다시 학부의 법학과에 편입을 해서 법학사 과정을, 그리고 철학박사 과정을 마쳤다. 남편 목사님은 늘 말씀하신다. “목사님들이 손에서 책을 놓으면 성도의 영혼은 메말라진다”고...
그 과정 과정마다 들어간 마음고생, 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부모님들에게 나 친지에게 손 벌릴 처지가 못 되었다.
“부모님도 연로하시고, 시골에서 지금껏 고생 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든 형편이 낳아져야 도와 드릴텐데...” 그래서 남편 목사님과 나는 늘 그 말만 나오면 한 숨을 쉬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납부해야 했던 등록금들을 지급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직 장기학자금 융자로 갚아 나가야하는 금액이 상당하지만, 주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며, 또한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준비하시는 길이라는 확신을 한다.
지금 돌이키면 은혜지만, 남편 목사님에게 원망스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비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대학원 합격을 했다” 는 남편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학비도 없는데 어떻게 합격했다고 얘기 할 수가 있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생활도 겨우 하루하루 이어가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원망스런 마음이 들 때 마다 주님께 무릎을 꿇었다. 어느 때 부터인가, ‘모든 것을 맡기고 염려하지 말라’는 확신이 들면서 편안해졌다. 그 이후로 학비가 아무리 많아도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목사님과 만나서 사는 동안 목사님의 신앙관을 듣고 보고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차츰 알아 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속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애통해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생에 자랑과 물질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요:일 2:16) 이겨가게 되었다. 주의 자녀들의 특혜인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어가는 구별된 삶을 목사님을 통해 많이 깨닫게 되었다.
둘이서 예배상을 펴놓고 예배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목사님이 아시는 선배님 소유의 집이 인천에 있었는데, 그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어느 날 형제자매 두 부부가 놀러왔다. 한가정은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교회에서 먼 곳으로 이사하게 되어, 출석교회를 아직 정하지 못했던 시기였고, 한가정은 남편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자매는 1년에 한두 번 출석 하는 중이었었다.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공부해야 잘 할 수 있을까를 대화 하던 중, 주일 예배를 같이 하면서 영어 공부를 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 자연스럽게 세 부부가 예배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인천 작전동 집은 반 지하였기 때문에 여름이면, 장마 비가 폭우로 쏟아져서 살고 있던 집에 물이 역류해서 방 안에 들어 왔다.
하수구가 있는 이곳저곳에서 물이 역류해오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 순간은 하나님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수구 구멍이 있는 곳(부엌, 화장실,보일러실, 세탁실)을 막기 위해 왔다 갔다 하고, 또 올라오는 물도 퍼내야 했었다.
한 밤 중이어서 아이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고, 그나마 아이들이 자고 있었던 안방은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 부부는 노심초사해야 했다.
만약, 아이들이 깨어 있었던 시간이었더라면 얼마나 더 당황했을까?
그런데 또 겨울에는 보일러가 터져 물과의 싸움을 해야 했다. 그 집에서 이사한 후에도 비가 많이 오면, 나도 모르게 긴장되곤 했었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우리는 가까스로 그곳을 떠나 서울 강서구의 개화동에 있는 단독 주택으로 이사했다. 안채는 주인이 살고, 우리는 뒷문 옆으로 방이 있었는데, 1층에 작은방이 두 개 있고 건물 모퉁이를 샷시로 막아 화장실이 만들어져 있었고, 계단을 내려가 지하에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교회 형제님들이랑 같이 페인트칠과 도배를 해서 깨끗이 단장을 하자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나중에 듣게 되었는데, 전에 사시던 분도 지하실은 늘 기도했던 방이었다고 해서 더 감사했다.
지하실에서 교회 설립 예배를 했다. 노회에서 나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신 목사님 말씀 중, 이렇게 성도가 많아서 넘치는 교회는 처음이라 하셨다. 공간이 작아 몇 사람만 앉으면 꽉 찼기 때문이다.
세가정이 예배를 하던 중 목사님이 알고 지냈던 청년이 분당에서 강서구 개화동까지 와서 같이 예배를 하게 되었고, 하나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어떤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할 지 고민하게 되었다.
목사님이 늘 소망했던 비젼중 한 가지가 교회 공간이 주어지면, 그 공간을 열린 공간으로 사용하고 무료 공부방을 계획 하고 있었었다. 몇 년간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를 하며, 공부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나눌 수 있겠다고 결심했다. 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도 경제력이 부족해서 학원을 갈 수 없는 아동들이나 청소년들 대상으로 무료 공부방을 열기로 결심했다. 공부방 이름을 “이 곳에서 공부한 아이들이 꿈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꿈 자람터”로 짓고 무료공부방을 시작 했다. 학습 과목은 논술, 국어, 영어, 수학으로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했는데, 아이들이 많아지면 안방까지 열어야 했다. 수강생은 초등6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공부를 하고 싶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면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었다. 교회에 다니던 안다니던 상관없었다. “혹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정이라면 더욱 좋다”고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그가 이곳에서 사랑을 받아 나중에 기독교에 호의적이 되고, 나아가 한국 사회에 보탬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공부방 교사는 목사님, 청년 형제님 하고 둘이서 시작 했는데, 다른 집사님이 영어를 맡게 되면서 세 사람이 3~6명의 아이들을 과외처럼 가르쳤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보람을 알게 되었고 훗날 하늘의 상급을 받을 것이기에 더욱 감사해 하였다. 장마 비가 또 쏟아지던 날 이른 아침에 기도하러 지하방 예배실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바닥에 물이 차 있었다. 깔아놓은 카펫이 둥둥 떠있고, 몇 권의 책도 물속에 있었다. 순간 “주님! 또 물이네요”하며 목사님께 말씀드리고 물을 퍼냈다.
이 후 주인집에서 공사를 해주어 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다만 완전 지하방이어서 여름에는 습기가 많아 몇 시간 앉아 있으면, 옷이 눅눅해지거나 매일 마른 걸레로 바닥을 닦아도 다 젖을 만큼 습기가 많았다. 우리는 다시 새로운 예배당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일 예배 후 점심 식사 준비를 처음에는 내가 준비하다가 어느 때부터 4명이 돌아가면서 준비한 요리를 먹으면서, 교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해 나갔다. 간혹 외부 손님이 함께 예배하고 식사하면 한없이 부러워하기도 했다.
우리가 식사 준비하는 것만큼 말씀을 사모하며 맛있게 먹었으면 하는 은근한 욕심이 들기도 했었다. 셋째 아이가 다섯 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치매 할머니들이 계신 시설에 들어가 주방일과 청소를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 했다.
개화동에 약 6년 동안 살면서 하나님은 목사님과 나를 훈련시키셨는데(물론 지금도 계속 훈련을 받고 있지만 )몇 번이나 ‘목회의 길은 아닌 것 같다’라고 절망했고,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오직 은혜의 주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고 새 힘을 주시어, 다시 또 다시 “우리는 이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고 나아간다.
여러 해 함께 예배를 하며 이제는 집사님이라고 불리는 한 부부는 안산으로 이사하여 가까운 교회로 출석하게 되었고, 우리가 함께했던 꿈 자람터 사역을 그곳 에서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장하게 실천하고 있다. 또 한 형제는 신대원을 들어가서 그 학교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목회 실습을 하기위해 우리 곁을 떠났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순종하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새로운 예배당을 위해 기도한지 약 4년 만에, 나라에서 지원하는 전세임대 지원을 받게 되어 작년 8월말쯤 이사를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새 예배당을 주셨다.
. 우리가 계획은 세우지만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다.
새 예배당은 건물 2층이고, 약 20평이다. 월세가 부담이지만 지금까지 인도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지 않을 것 이라고 믿는다.
교회 조그마한 간판은 내가 나가는 직장 신우회 선생님들이 달아주셨다. 특별히 따로 지원을 받는 곳이 없어, 모든 것을 우리가 어떻게든 해야 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학교 신우 회에서 필요할 때 도움을 주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또 신우회에서 늘 중보기도도 해주신다.
얼마 전 전에 개화동에서 알게 된 분이 같이 예배를 하게 되었고, 그 분과 친분이 있는 분도 오셨는데, 어디에서 중고 냉장고, 신발장, 원탁 등 정말 필요한 것들을 갖고 오셨다.
이전에는 주택이어서 항상 조심스러웠는데, 이제는 기도를 소리 내어 할 수 있고 찬양도 더 크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나는 날마다 소망하며 기도한다. 우리 “주님 따르는 교회”가 이 지역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기도 하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혜와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결혼 전 에부터 기도했던 돕는 배필로서의 사명을 지혜롭게 감당하기를 기도한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행,전1:9)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온전히 의로운 도구가 되기를 기도한다.
첫댓글 사모님께서 이런 간증의 글을 올리셨는줄 몰랐었네요~ 저희 가정이 안산에서 예배할때 였었네요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몰랐던 일도 많았어요~ 몇번이나 울컥하고 감사하고 은혜 넘치는 간증이었는지~~ 이후의 간증은 더 감사의 제목이 넘치며 하나님 나라가 더 확장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