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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thoven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61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 Adrian Boult, 지휘
1972년 2월 6일 런던 로얄 페스티벌 홀 녹화
Vaughan Wiliams : Symphony No.8 In D Minor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 Adrian Boult, 지휘
1972년 10월 18일 런던 로얄 페스티벌 홀 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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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탄 밀스타인 Nathan Milstein
(1903년 12월 31일, 러시아 ~ 1992년 12월 21일, 런던)
혁신적인 연주기법으로 무장한 밀스타인은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과 바흐를 거쳐, 고전과 낭만,
당시의 현대음악이었던 프로코피에프의 음악까지를 아울렀다.
<네이버캐스트, 2012년 5월 25일자 발행, 박제성 글>
세 사람의 척탄병으로 불리던 러시아 출신의 훌륭한 트로이카가 활동하던 시절이 있었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첼리스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 이렇게 세 사람은 당시 소련에서 트리오를 이루어 최고의 평가를 받았지만, 피아티고르스키의 뒤를 따라 1925년 호로비츠와 밀스타인이 소련에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 이 전설적인 트리오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이후 밀스타인은 호로비츠와 단 한 장의 음반, 즉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RCA)만을, 피아티고르스키와는 브람스의 [2중 협주곡]을 한 차례 같이 녹음(RCA)했을 뿐, 이들 세 명은 함께 단 한 장의 음반도 녹음하지 않아 후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겨줄 수밖에 없었다. 낭만주의 스타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있는 듯한 밀스타인의 스타일은 당시 피아노에서 라흐마니노프가 보여주었던 고전주의적 완벽주의자에 가장 가까운, 당시로서는 가히 아방-가르드의 수호자에 다름 아니었다. 이때부터 밀스타인의 외골수 전설은 시작되었다.
(밀스타인, 피아티고르스키, 호로비츠)
가볍고 밝되 공격적인 러시아 스타일
1903년 12월 31일(혹은 1904년 1월 13일) 오데사에서 태어난 밀스타인은 일찍이 표트르 스톨리아르스키의 문하에서 네 살 연하의 다비스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현을 신경 쓰지 않고도 보우의 윗부분부터 정곡을 찌르는 듯 통렬한 사운드를 내는 기법을 포함한 바이올린 예술의 많은 비밀들을 배웠다. 이후 11살이 되던 해 스톨리아르스키와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 바이올린의 대가인 레오폴드 아우어가 성 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로 그를 초대했다.
아우어는 그를 학교는 물론이려니와 자신의 집에까지 불러 1917년 아우어가 페테르부르크를 떠날 때까지 자신이 원하는 음색과 기교를 가르쳤다. 이후 밀스타인은 외젠느 이자이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벨기에로 갔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자이는 밀스타인에게 단 한 번도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다. 후일 밀스타인은 회고하기를,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것이 자신에게 더 좋았다며 그 때부터 혼자서 생각을 해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무겁고 농밀한 보잉과 비브라토를 장기로 했던 바이올린계의 차르는 자신의 스타일과는 너무도 다르고 완벽한, 가볍고 밝되 공격적인 러시아 스타일을 구사하는 10대의 밀스타인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20년 그는 오데사에서 공식적인 데뷔를 했지만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이후였다. 그의 명성은 당시 소련 전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호로비츠와 함께 소련을 대표하는 ‘혁명의 아이들’로 포장되어 같이 연주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을 한 이 세 명의 척탄병 가운데 가장 막내였던 밀스타인은 1929년 호로비츠와 피아티고르스키가 이미 성공을 거두어 자리를 잡게 된 뉴욕에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데뷔 무대를 가졌고 이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호로비츠가 레코딩을 활발하게 진행해 나갔단 반면 밀스타인은 LP가 생산되기 전까지 거의 녹음을 하지 않았다. 하이페츠라는 무서운 존재, 혹은 당시 신동으로 화제를 모았던 메뉴힌이나 리치와 같은 신성들에 비하면 밀스타인의 셀링 포인트는 조금 약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밀스타인은 자신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이 난무하는 30대를 겪는 동안 밀스타인의 음악세계는 변화의 변화를 거듭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이나 해석에 있어서 일말의 모호함 혹은 변덕스러움을 뿌리 채 뽑아 말살시켜버렸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무균실에 넣고 외부에 묻어있는 균을 박멸시키는 작업에 비견할 만한 노력을 기울인 그는 보잉을 완벽하게 가다듬고 현을 보다 바짝 조여 더욱 밝고 화려한 강성의 사운드를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정련된 스타일은 완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역대는 구석구석까지 충만함으로 가득 찼고 고역대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수성으로 다듬어진 귀족적인 느낌을 갖게 되었다. 당시 예후디 메뉴힌과 같은 몇몇 바이올리니스트들에 의해 다시금 강조된 비브라토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도로 절제하여 그 위에 긴장감과 스케일을 실어냈다. 그리고 스타카토는 단순히 테크닉의 요소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건반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음표와 동일한 의미를 부여 받으며 적극적인 음악어법으로 다채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이페츠와 더불어 바이올린계를 양분하다
이렇듯 혁신적인 연주기법으로 무장한 밀스타인은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과 바흐를 거쳐 고전과 낭만, 당시의 현대음악이었던 프로코피에프의 음악까지를 아울렀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만큼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는 오이스트라흐나 레오니드 코간의 전유물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945년 브루노 발터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앨범을 콜럼비아에서 녹음하여 1948년 생산된 인류 최초 LP의 주인공(ML4001)이 되었다. 이렇게 그는 ‘Capital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향수 수십 년 동안 그가 원하는 것 모두를 녹음하며 이 비옥한 음악의 시대를 경작해 나아갔다. 당시 미국의 음악 팬들에게 있어서 이 시대는 가히 정신분열증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하이페츠와 밀스타인의 음반들은 연일 쏟아져 나와 정신적인 흥분상태가 지속되었고 그들의 연주회에서는 그들의 우아한 연주 매너와 치열한 카리스마에 감정적인 고양상태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하이페츠와 밀스타인 그 어느 쪽의 편만을 들 수도 없었다.
이 두 연주자의 연주는 어떤 면에 있어서 ‘러시아 스쿨’이라는 미명 하에 비슷한 계열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실제로 그들의 러시아 레퍼토리 또한 상당 부분 겹치기도 했다. 특히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전곡과 협주곡을 녹음하지 않았다는 공통점 또한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정적으로 다른 영역을 갖고 있었는데, 밀스타인은 이탈리아 바로크를 비롯해 독일 고전과 낭만주의 작곡가들만을 고집한 반면, 하이페츠는 왕성한 식욕의 공룡처럼 모든 시대의 협주곡을 독식한 동시에 코른골트와 월튼, 카스테누보-테데스코의 현대 작곡가들의 협주곡과 거쉰과 같은 대중적인 앙코르 레퍼토리를 선호했다. 그리고 하이페츠는 은퇴 후 몇몇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지만 밀스타인은 일체의 ‘악파’을 배제한 채 혼자의 길만을 묵묵히 걸었다는 점도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연주자뿐만 아니라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뒤를 이어 편곡-작곡가로서의 면모 또한 보여주었다. 그는 많은 협주곡들을 위한 자신의 카덴차를 작곡하기도 했고 소품들을 편곡하기도 했으며 특히 파가니니의 작품들 주제로 변주곡을 만든 ‘파가니니아나’라는 고난이도의 솔로 작품 또한 작곡했다. 이 ‘파가니니아나’는 밀스타인 자신이 수차례 녹음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많은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도전하고 있는 중요한 바이올린 레퍼토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연주회와 레코딩에서 쉼 없는 활동을 했던 그는 1968년에는 프랑스에서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음반상과 그래미상을 받았고 미국 정부로부터 케네디 센터 훈장을 받으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명예롭게 만들어나갔다.
한편 그의 친구인 호로비츠는 밀스타인과의 유일한 듀오 녹음과 카네기 홀 개관 기념 연주회에서의 라이브 레코딩 외에는 실내악을 연주, 녹음하지 않은 반면, 밀스타인은 비교적 실내악에 많은 호감을 보였다. 물론 하이페츠만큼 적극적으로 트리오 이상을 위한 음악은 녹음하지 않았지만 에리카 모리니와 같은 극소수의 바이올리니스트들과의 앙상블과 바이올린 소나타와 같은 실내악들을 녹음, 연주했다. ‘Capital' 시절 모리니와 녹음한 비발디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비롯하여 루돌프 피르쿠츠니와 녹음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과 프로코피에프 바이올린 소나타 2번, 아르투르 발삼과 녹음한 ‘크로이처’ 등등이 유명하고, 이 외에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과 비탈리의 ‘샤콘느’와 같은 이탈리아 바로크 소품집 등등이 유명하다. 또한 50~60년대에 녹음한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작, 프로코피에프, 글라주노프, 차이코프스키, 비발디,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등등 또한 밀스타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더 이상 연마할 바이올린 테크닉이 없다’
밀스타인의 또 다른 위대함을 언급하는데 빠지지 않는 것은, 그가 1987년 팔에 부상을 입어 83세의 나이로 은퇴를 하기 직전까지 테크닉과 음악성 모두가 꾸준히 발전했다는 점이다. 이르비 기틀리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항상 바이올린을 옆에 끼고 연주하며 새로운 테크닉을 발견하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곤 했다고 한다. 실제로 밀스타인은 메뉴힌이나 하이페츠가 연주력이 쇠락할 시점인 70년대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깊어진 음악성과 발전된 연주력으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70년대 초 도이체 그라모폰과 계약을 맺은 밀스타인은 오이겐 요훔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함께 멘델스존과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하여 이전보다 더욱 날카롭게 정련된 연주와 보다 거시적인 통찰력을 들려주었고, ‘파가니니아나’가 수록된 소품집으로 당시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로서는 두 번째 녹음인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 앨범이야말로 고전주의자이자 심오한 해석가로서 ‘완벽’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역사적인 앨범으로 손꼽힌다. 57년 첫 번째 녹음이 비르투오소적이라면, 이 두 번째 녹음은 진정한 거장으로서 모든 것을 초월한 조화로움의 의미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음악과 바이올린에 대한 너무나 깊은 애정 때문인지 그는 종종 완고한 사람으로 비추어지곤 했다. 그에게 테크닉이나 연주비결 같은 것을 묻는 사람에게는 퉁명스럽게 무시해버리곤 했고, 음악 그 자체의 위대함에 대해 논하는 사람에게는 눈을 반짝이며 대화를 이어나가곤 했다. 그에게 테크닉은 연습을 통해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지 음악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고 음악 외의 다른 생각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그가 1980년대 초 로베르트 C. 바하만과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저는 일생 동안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할지라도 제 나이 또래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상당히 잘 연주하는 경우는 바이올린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이죠. 바이올린 테크닉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그것을 완성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음악 그 자체죠. 왜냐하면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년이 아니라 평생을 바쳐야 하니까요.”
1979년 11월 5일 카네기 홀에서 가진 연주회에는 당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 줄리어드와 커티스의 젊은 학생들까지 참석하여 밀스타인의 완벽한 연주에 넋을 잃은 역사적인 리사이틀로 기억되고 있고, 1986년에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녹음한 ‘라스트 리사이틀’이란 타이틀로 마지막 앨범(Teldec)을 발표하여 더욱 완벽하고 더욱 날카로우며 더욱 긴장감 높은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특히 이 마지막 앨범에서는 활과 악기에 대한 노 거장의 새로운 이해를 담고 있어 더욱 놀랍다. 음 자체의 밀도는 떨어뜨리되 듣는 이로 하여금 그 톤에 빨려들어 갈 듯한 치열한 흡인력을 발산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기술적인 면에서 향상시킬 여지가 없다”라는 밀스타인의 말을 생각해 보면, 이 마지막 앨범은 테크닉의 차원이 아닌 보다 고양된 정신세계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이페츠와 더불어 전세계 바이올린계를 양분했던 밀스타인은 1992년 12월 21일 89세 생일을 며칠 남겨놓지 않고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까지 다가올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음악만을 생각했던 그는, 아마도 팔에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마지막 날 침대 위에서도 계속해서 바이올린을 들고 천국에서 가질 리사이틀을 연습했을 것이다.
박제성
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 역자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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