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관(이하 신) 이번호에는 김창호 대장님과 함께 <터칭 더 보이드>Touching The Void (감독 케빈 맥도널드, 2003)를 다루고자 합니다. 20대 젊은 영국 산악인 조 심슨Joe Simpson과 사이먼 예이츠Simon Yates가 1985년에 겪었던 실제 사건을 다큐 형식으로 꾸민 영화입니다.
김창호(이하 김) 둘이서 남미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 있는 ‘시울라 그란데Siula Grande’ 서쪽 사면을 처음으로 정복하고 내려오는 도중에 사고를 당하지요. 크레바스에 빠져 실종됐다가 결국 극적으로 생환한 이야기입니다.
신 조 심슨이 1988년에 발간한 같은 제목의 원작이 있습니다. 영화도 이 책에 근거해서 만들었고, 실제 인물들이 등장해 당시의 상황과 심정 등을 전하는 형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배우들은 거의 대사 없이 이들이 겪은 일들을 화면에 담고 있습니다.
김 제가 처음 히말라야로 가기 전에 읽었던 책입니다. 한국외국어대 산악부 출신인 정광식씨가 <친구여, 자일을 끊어라>(1991년)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지요.
신 ‘이 스토리는 산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실화이다’라는 자막으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김 원작은 산악 논픽션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지요. 조 심슨이 살아 돌아온 후 수술을 6차례나 했습니다. 등반 파트너였던 사이먼 예이츠의 진술도 상세히 듣고서 책을 썼어야 했지만, 둘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원만하거나 무난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조 심슨의 입장이 강조된 측면이 다분할 수 있는 거지요.
신 이들은 그전에 알프스도 여러 번 등반했습니다. 시울라 그란데의 존재를 친구가 가르쳐줬다면서 “생애에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곳인데, 완전히 미지의 곳이었다”고 말합니다.
김 해발 6,400m인 시울라 그란데의 서쪽 사면을 아무도 오르지 않았다는 점이 이 사람들을 강하게 끌었을 겁니다. 강력한 ‘미끼’인 셈이지요. 같은 등반가로서도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는 곳입니다. 벽 자체가 히든 페이스처럼 숨겨져 있고요.
신 초등이나 신新 루트 개척이 그렇게 매력적이군요. 김창호 대장님이 지난해 11월에 받은 ‘황금피켈상 심사위원 특별상’도 새로운 루트 개척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덕분이었지요?
김 2016년 10월 네팔 안나푸르나 지역 강가푸르나(해발 7,455m) 남벽에 새로운 루트인 ‘코리안웨이’를 개척했었습니다. 지난해엔 인도 다람수라(6,446m) 북서벽을 신 루트로 처음 등정했습니다.
신 <터칭 더 보이드>의 주인공 둘은 산 아래에서 리처드 호킹이라는 인물을 우연히 만납니다. 이 사람은 등반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베이스캠프에서 물건들을 지키기로 합니다. 두 등반가는 1970년대 이후에 널리 퍼진 알파인 스타일을 취합니다. 단숨에 올랐다가 내려오기로 한 거지요. “하산장비가 갖춰져 있지 않기에 매우 위험한 방법일 수 있다. 헬기나 구조대가 없어 중간에 다치면 죽을 수 있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김 전통적 히말라야 스타일은 군 작전과 비슷합니다. 기본적으로 캠프 단위입니다. 캠프를 설치하고 짐을 옮긴 뒤 전진하고, 다시 캠프를 설치하지요. 반면 알파인 스타일은 산소통이나 짐꾼 없이 장비와 식량을 직접 짊어진 채 루트를 개척하며 최대한 빠른 속도로 등반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무거운 짐을 안 올려도 되고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지만,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장비와 식량이 풍족할 수 없지요. 아주 필수적인 것만 챙깁니다. 알파인 스타일은 히말라야 스타일에 비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이 급격히 떨어지지요.
신 알파인 스타일은 통상 2명이 한 조를 이뤄서 하는가요?
김 저는 전에는 주로 혼자 했었습니다. 통상 2~4명이 함께하지요. 4명일 경우는 2명씩 A팀, B팀으로 나눠 구성하기도 합니다.
신 올라갈 때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기분이 좋았다. 힘과 리듬의 조화를 느낄 수 있었다. 내게 산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는 코멘트가 나옵니다.
김 그곳이 특히 아름답습니다. 페루는 자연경관이 좋은 곳입니다. 낙타처럼 생긴 라마도 살고요. 시울라 그란데의 계곡은 신비롭다는 느낌이 저절로 드는 곳입니다.
신 오르는 도중 고비를 맞게 되자 “둘이 완전히 묶여 있기에 ‘사이먼, 제발 떨어지지 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김 둘이 연결된 채 50m, 100m씩 가다 보면 확보 포인트가 매우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떨어지지 말고 와”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이는 선등자의 확보지점이 불안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안전해야 하고 속도도 빨라야 하니, 훈련량이 많아야 하지요. 서로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믿음이 받쳐줘야 합니다.
신 고도가 높아 탈수증세가 심해집니다. 물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눈을 녹이는 것인데, 2컵 만드는 데 1시간이나 걸렸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충분히 못 마시지요.
김 하루에 4~5리터 정도를 마셔야 합니다. 고소증세를 완화시킬 수 있는 게 수분이므로 물은 등반의 관건이지요. 3~4일 동안 필요한 물을 가져갈 수 없으니까 눈이나 얼음을 녹여서 먹는 수밖에 없지요. 눈을 한 컵 녹이면 컵의 5분의 1가량 물을 얻습니다. 얼음은 한 컵 녹이면 80%정도 물로 변하므로, 대부분 얼음을 녹입니다. 물을 만드는 작업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연료소모량도 많고요. 텐트 자리를 잘 찾고, 물 공급과 취사를 잘하는 게 기술이자 노하우이지요.
신 오르는 과정에서 마지막 몇 백 피트는 앵커 박을 곳도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고 나옵니다. 60m 가는 데 5~6시간 걸렸고요. 알프스에서는 40도 경사에 눈이 그냥 흘러내리는데 시울라 그란데에서는 경사가 급한데도 눈이 덮여 있습니다.
김 산에서 견고함으로는 첫째가 바위이고, 그 다음이 얼음입니다. 눈은 상당히 취약하지요. 안데스 산맥은 눈이 많은 곳입니다. 나무에 상고대가 생기듯 안데스에서는 봉우리에 버섯 모양의 설탑雪塔들이 있습니다. 눈이 벽에 달라붙어 있기에 설면에 따라 장비들이 달라져야 하고 앵커도 좀 더 긴 것으로 써야 합니다.
신 정상을 정복한 뒤 이런 말을 합니다.
“정상을 특별히 좋아하진 않는다. 등반 사고의 80%가 정상에 오른 뒤 하산 중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김 그건 산마다 다릅니다. 일반화하기 어려운 문제죠. 하지만 하산 중에 사고가 많이 일어나긴 합니다. 죽을힘을 다해 올라가니 오르는 중에 체력을 대부분 소진하기 때문이죠. 비유로 말하자면 어린 시절에 감 따먹으러 나무 탔다가 못 내려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 이들은 올라갔던 길로 내려오지 않고 다른 길로 내려오기로 결정합니다. 길이 매우 위험해서 “조금이라도 헛디디면 끝장”이었고, 정상에서 하산한 지 1시간 만에 길을 잃어 다시 오르기 시작하지요.
김 올랐던 길로 내려오지 않는 것은 다른 길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지요. 올라갔던 길이 너무 힘들었거나, 등반했던 곳으로 내려오기에는 장비가 부족하다면 다른 최선의 루트를 찾게 됩니다.
신 어떤 의미에선 하산이 더 힘들 수 있겠습니다.
김 <터칭 더 보이드>에서는 산에서 걸어서 하산하는 것이 아니라, 로프를 걸고 매달려서 내려오는 방식으로 하산하고 있습니다. 신루트를 연구할 때 정상에 섰다는 것을 가정하고 어디로 내려올 것인가를 확실하게 계산합니다. 하산 루트가 확정되지 않으면 올라가는 길부터 다시 연구하지요.
신 하산 도중 절벽을 만나 조 심슨이 먼저 내려가다가 추락해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집니다. 정강이뼈가 무릎을 뚫고 나오는 중상이었지요. 이때 위에서 이를 지켜본 사이먼 예이츠는 “(조 심슨이) 차라리 산 아래로 떨어졌다면 죄의식을 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상황을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까”라고 말합니다. 굉장히 솔직한 진술이어서 놀랐습니다.
김 정말 솔직하게 얘기하더군요. 사이먼은 시종일관 있었던 그대로, 느꼈던 그대로 이야기하려 노력하더군요. 같은 등반가로서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신 부상당한 조 심슨이 먼저 미끄러져 내려가고 사이먼 예이츠가 뒤따르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다시 조 심슨이 미끄러져 허공에 매달리게 됩니다. 발아래로는 24m 크레바스가 보이고요. 자일을 잡은 채로 1시간 반을 버티던 사이먼이 결국 나이프로 자일을 자르고 조 심슨은 크레바스에 빠집니다.
김 사이먼의 입장에선 아래쪽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였지요. 조 심슨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고, 한밤중인데다가 탈수 증세가 심하고 눈에 미끄러지기 시작했으니 자일을 자를 만했다고 봅니다.
신 크레바스에 추락한 조 심슨은 50m를 미끄러지다 간신히 살아납니다. 로프 줄을 끊은 것을 확인하고는 “사이먼이 살아 있는 걸 확인하고 기뻤다”고 말합니다.
김 그걸 확인하기 전에는 앵커지점이 빠졌거나, 사이먼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다가 어디 부딪쳐서 죽었을 거라고 여겼던 겁니다.
신 조 심슨은 크레바스 안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떨면서도 “산악인은 어떤 경우에도 통제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며 자신을 다잡습니다.
김 사실 크레바스에 빠진 뒤에 살아나오는 것은 확률적으로 희박합니다. 빛이 들어오는 지점을 찾아내고 그곳으로 기어서 나가야 하지요. 이 경우 저체온증이 무서운데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환상방황環狀彷徨, 즉 방향감각을 잃고 같은 지역을 맴돌게 됩니다.
신 조 심슨으로선 그대로 죽음을 기다리거나, 더 깊은 크레바스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25m를 더 내려와 바닥에 닿을 수 있었고, 인근에서 15m 위쪽에 햇빛이 들어오는 구멍을 발견합니다. 결국 크레바스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그때부터 다시 기어가기 시작합니다. “나는 저 지점까지 20분 걸려서 갈거야. 18분에 가면 더 좋겠지만 22~23분이 걸려도 좋을 거야”라면서 말 그대로 사투를 벌입니다.
김 공감이 가는 장면입니다. 조난 상황에선 짧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걸 달성함으로써 희망을 갖고, 다시 목표를 설정하는 식으로 해야 합니다. 베이스캠프까지 갈 생각을 하면 너무 아득해서 절망밖에 들지 않게 되지요.
신 조 심슨은 먼저 산에서 내려온 사이먼과 리처드가 있는 베이스캠프 인근까지 이틀에 걸친 천신만고 끝에 기어옵니다. 한밤중 돌밭에서 야외화장실 냄새를 맡고는 “사이먼~”을 외쳐 결국 구조됩니다. 텐트로 들려와 처음 한 말이 “산 위에서 나를 도와줘서 고마워. 나라도 로프를 잘랐을 거야”입니다.
김 살아난 것에 대한 기쁨, 모든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신 사이먼은 영국 귀국 후 로프를 자른 것에 대해 비난당했지요. 그럼에도 조 심슨은 항상 사이먼을 변호했다고 합니다.
김 “내 파트너가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는 거지요. 만약 조 심슨이 살아오지 못했다면 사이먼은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었을 겁니다.
신 <터칭 더 보이드>에 대한 총평을 하신다면.
김 팩트 자체가 주는 무게감이 큰 작품입니다. 저로서는 안데스 산맥 고산등반을 다룬 적나라한 묘사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히말라야 가는 데에 장애를 받기도 했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이 선택이고 권리라면, 하산은 필수이고 의무”라는 점을 절감하게 만들어 주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