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식이면서 주식 같은 음식. 라면의 매력은 대단하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세계 최고다. 국민 1인당 5일에 한 번, 1년에 80번 출출한 배를 채워준다. ‘신라면’의 경우 1986년 출시된 이후 2009년 11월까지 누적 판매 183억 개를 기록했다. 이 라면 봉지를 일렬로 놓으면 에베레스트 산 1만 8000개 높이와 맞먹는다. 세계라면협회(IRMA)에 따르면 국내 라면시장은 2010년 말 현재 1조 9500억 원 수준에 이른다.
ⓒ김은섭(http://blog.naver.com/2bfreeman)
간편식의 대명사인 라면. 값싸고 조리하기 쉬워 ‘제2의 식량’으로도 불린다. 다양한 요리와 잘 어울려 라면 조리법도 무궁무진하다. 라면 한 가닥의 길이는 약 65cm. 한 봉지에 보통 75가닥의 면발이 들어가 총 길이는 약 50m이다. 라면은 꼬불꼬불한 면발이 뭉쳐져 사각형이나 원형으로 돼 있다. 면발은 왜 꼬불꼬불한 걸까. 작은 봉지에 넣으려면 긴 면발보다 최대한 꼬불꼬불 뭉쳐 있는 면이 나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꼬불꼬불하면 면이 잘 부서지지 않는다. 조리 시간이 단축되고 면이 더 쫄깃쫄깃해 맛도 더 좋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기름을 흡수해 잘 튀겨진다.
밤에 라면을 먹으면 다음 날 얼굴이 붓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는 라면을 먹어서라기보다는 물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신체 활동을 통해 수분을 배출하는데, 잠을 자는 동안에는 수분이 배출되지 않는다. 라면을 먹으면 몸이 붓는 것은 라면을 야식으로 애용하기 때문이다. 라면에는 방부제가 첨가돼 좋지 않다는 것도 오해다. 라면의 경우 면의 수분 함량이 10% 이하(대부분은 4~8% 정도)로 유지되기 때문에 미생물이 번식하기 어렵다.
라면은 중국의 납면(拉麵, 중국 발음 라미엔)이 일본으로 전해져 라멘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라면이 됐다. 납면은 ‘끌어당겨 만든 면’이라는 뜻이다. 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길게 뽑아낸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타자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라미엔이 일본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청일전쟁 후 중국인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전해졌다. 중국식 라미엔에 일본 맛이 더해져 일본식 라멘이 됐다.
라면은 1958년 8월 25일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1910~2007)가 개발했다. 당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심각한 식량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안도가 설립한 닛신식품(日淸食品)이 국수 면발에 간단한 양념 국물을 섞은 아지스케면(味附麵)을 ‘끓는 물에 2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시판한 것이 라면의 시초다. 제품명은 치킨라멘. 뒤이어 1959년 에스코크, 1960년 묘조식품(明星食品)이 가세했다. 당시 라면은 아지스케면으로 면 자체에 양념을 가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 쉽게 변질되는 단점이 있었다. 묘조식품은 이 점을 보완해 1961년 현재와 같은 분말스프를 첨가한 라면을 첫 생산했다. 이것이 오늘날 라면의 모태가 됐다.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 산업은 급성장했다. 1971년에는 컵라면까지 등장하면서 조리와 휴대의 간편함을 극대화했다.
우리나라 라면시장의 절대강자는 농심(農心)이다. 1985년 라면시장 1위에 오른 후, 그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농심라면의 원조는 롯데라면이다. 롯데라면은 1965년 처음 선보였다. 당시 신춘호(申春浩) 회장이 이끄는 롯데공업(농심의 전신)이 롯데라면을 내놓았다. 이 제품은 삼양라면과 함께 인기를 끌다 1974년 농심라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따지고 보면 대표 상품인 신라면의 원조가 롯데라면인 셈이다.
1963년도 최초의 삼양라면ⓒ삼양식품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농심이 아니다. 1호 라면은 삼양(三養)라면이다. 삼양라면은 1963년 9월 15일 처음 나왔다. 삼양라면의 탄생은 전중윤(全仲潤) 삼양식품 회장의 착안에서 비롯됐다. 그는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그는 무엇보다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을 돌며 시장 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특히 일본이 패전 후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았다. 일본에서 라면을 시식한 경험이 있던 그는 라면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5만 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제조 기술 및 기계를 도입했다.
1963년, 드디어 우리나라 토종 1호 라면이 탄생했다. 당시 라면 가격은 중량 100g에 10원. 당시 커피 한 잔에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하다. 그러나 초기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밥과 국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라면이 한 끼 식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밀가루로 만든 인스턴트 식품도 생소했다. 라면의 ‘면’을 무슨 섬유나 실의 명칭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삼양라면 초기 광고ⓒ삼양식품
1965년 때맞춰 나온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은 ‘가뭄 속 단비’였다. 라면은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6년 연 240만 개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 개로 늘어났고, 몇 년 만에 매출액이 무려 300배에 이르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보였다. 베트남전 당시 우리나라의 총 수출액이 3000만 달러였는데, 이 중 9%에 해당하는 270만 달러가 삼양라면을 판 것이었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1989년 11월에 ‘우지(牛脂)라면’ 파동이 일어나면서 삼양은 직격탄을 맞았다. 우지, 즉 공업용 쇠고기 기름으로 라면을 튀겼다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라면 판매와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1000여 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삼양라면은 법정 투쟁에 나서 1997년 8월, 무려 7년 9개월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상처는 씻을 수 없을 만큼 컸다. 결국 절대강자의 위상을 잃어버린 후 한동안 고객들의 외면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