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발전 전망대 비봉산 효행길 <여수신문에서>
소라면 덕양 비봉산 효행길은 소라초등학교 교가에 나오는 오룡산을 지나 충무 얼이 가득한 역의암까지 걷는 길이다. 처음부터 가파르게 시작한다.
소라초등학교 옆 오룡산 체육공원으로 오른다. 30m 정도 오르면 여러 체육 시설이 갖추어진 널따란 체육공원이 나무숲 속에 있어 운동하기가 좋다.
비록 오래 된 나무는 아니지만 잔 목 사이로 파릇파릇한 잔디로 채워진 오솔길을 걸으면서 상큼한 기분에 빠진다. 크게 대접받지 못하는 리기다소나무라도 무성하게 자란 풀들과 함께 도시 주변 산의 숲을 만들어 공기를 맑게 해준다.
이제 조금씩 땀이 등 뒤에서 송알송알 맺혀지는 길이 나타났다. 우리가 오르는 길 말고 성재마을에서 오르는 길과 비봉산 정상을 오르는 길, 봉두재로 가는 길로 나눠진다.
이 때 부터는 조금 가파르게 계단을 오르듯 바위로 된 길을 걸으면서 뒤에 사람이 차츰 쳐지기도 한다. 이 오르막을 채면 여수산단이 환히 보이는 전망대가 된다.
한창 공사중인 해산마을 교차로는 여수의 상징이 될 것이다. 해룡에서 시작하는 여수.순천 자동차전용도로, 국도 17호선 대체 우회도로, 여수산단 진입도로, 무선도로 등이 함께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된다.
오룡산을 지나 비봉산 정상에 오르면 TV송신탑과 산불감시 카메라가 돌아간다.
자연산 복분자가 가지마다 하얀 분을 바르고 가시를 무기로 접근을 막지만 검게 익은 것을 따먹는다. 달콤한 그 맛이 역시 자연산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온통 정상 주위가 고사리 밭이다. “이미 늦었지? 또, 내년에 이곳에 온다고?” 이렇게 놀리는 듯 고사리가 뻐기고 있다.
어머니 눈을 뜨게 한 주정준의 효행
이 비봉산 정상에 옛날에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찾을 수는 없지만 이 우물과 관련된 효자 주정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유복아(遺腹兒)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란 주정준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그의 어머니가 40세 되던 해 느닷없이 눈병에 걸려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10년 만에 실명까지 이르렀다.
주정준은 어머니의 눈병은 이제 신령의 힘을 빌어 치유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매일 저녁 자정이 되면 인근 우물에서 첫 깨끗한 물, 정화수를 입에 한 모금 머금어다 어머니의 눈에 넣어주기를 1년 동안 계속했다.
그간 100여 군데가 넘는 영험하다는 우물을 찾아 정성을 다 했으나 어머니는 눈을 뜨지 못했고, 그러던 어느 날 밤 백발의 노인이 꿈에 나타나 말했다.
“어머니의 눈병을 고치려면 덕양 뒷편 비봉산 정상에 있는 금암수(錦岩水)를 넣거라.”
이에 용기를 얻은 주정준은 때가 엄동설한에 금암수가 나오는 샘 앞에 단을 짓고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백일기도를 마친 날 그는 금암수를 입에 머금어 어머니의 눈에 넣었더니 신기하게도 시력이 회복됐다.
시력을 되찾은 어머니는 손수 명주 길쌈을 해서 누비버선과 누비토시를 만들어 기념으로 아들에게 줬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 후손들에게 전수되어 보존되고 있다.
아홉등 고갯길
금암수가 있는 우물을 찾지 못했다. 길을 따라서 발길을 재촉해 쟁기재 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봉두재 쪽으로 내려간다.
산속에서 시내 로터리와 같이 여섯 갈래로 갈라지는 아홉등고개, 봉두재 쪽에 도착했다. 교회공동묘지, 상세동마을, 원봉두마을, 백수동마을, 비봉산정상, 그리고 목적지 중승골 가는 길이다.
산등이 9개일 것 같지만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다. 이곳으로 다 같이 모이는 길, 한 가운데 서있으면 모든 정기를 받는 것 같이 감동적이다. 옛적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순천에서 내려오는 길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간다.
아홉등 고개에서 맷돌산 맷돌바위로 가려면 0.6km이고, 중승골은 1.5km이다. 지금껏 숲 사이로 호젓하게 걸어다녔다면 이제는 따가운 햇빛을 벗 삼아서 다녀야 한다.
멀리 발 아래로 아스라하게 봉두 마을과 사곡 뒷산이 보인다. 편평한 길에서 두 길로 갈라선다.
오른쪽 임도를 따라 들어서면 상세동마을과 맷돌바위가 나온다. 산등성이를 따라 쭉 뻗은 길을 걸으면 백수동과 중승골로 빠지는 길이다.
맷돌바위와 상세동길
좀더 새롭게 길을 개척하면서 스릴을 맛보려면 맷돌바위로 가는 길을 택하면 된다. 때죽나무에 노란꽃 같은 것이 매달려서 가까이 가서보았더니 벌레들이 집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송전탑을 따라 내려가면 상세동골이고, 곧장 가면 맷돌산 맷돌바위가 나온다.
보기보다 상세동골은 굉장히 깊은 골이다. 따라서 아슬아슬한 벼랑을 따라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한다.
암벽 등산을 하는 산악인처럼 바위를 타고서 없는 길을 만들면서 내려오면 물이 철철 흐르는 계곡을 만난다.
그리 높지 않은 맷돌산과 비봉산이 만들어낸 가는 골, 상세동 골이지만 워낙 산세가 가팔라서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크게 들린다.
계곡 사이로 습지가 만들어지고, 그늘이 만들어지면서 습한 기운에 온몸이 젖어든다. 아마 고라니와 토끼들도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흐르는 땀을 씻었는지 모른다.
길을 헤치고 내려와 만난 상세동 마을은 위치를 분간하기 힘든 산골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포근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마을이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공장들도 보이는 활기찬 마을이다.
부담없이 걸을 수 있는 중승골길
상세동길이 부담스럽다면 다정하게 대화를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 중승골길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100여m 걸으면 누가 친절하게 ‘중승마을’이라는 팻말을 붙여놓았다.
건너 대포 마을이 보이는 샛길을 따라 걸으면 먼저 반겨주는 것이 원추리꽃이다. 평범한 시골길을 걸으면 계절마다 우리와 낯이 익은 꽃들이 때를 맞춰 반긴다.
중승골은 장세동골과 다르게 골이 깊지 않아서 시야가 넓게 펼쳐진다. 중승골이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중승암이라는 절이 있어 절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마을이 보이는 재 머리에 삼거리가 나타난다. 대포 마을로 넘어가는 길과 산 끝까지 이르는 길이다. 농장과 밭도 있지만 정겹게 도랑에 물이 졸졸 흐른다. 힘들지 않게 산을 내려와서 뭔가 허전하게 느끼지만 가벼운 산행으로는 제격이다.
특히 어린 자녀 데리고 주정준의 감동적인 효행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걸으려고 한다면 이 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중승골 마을에 들어서면 보기 드물게 연립 주택도 있고, 한옥 마을회관 겸 경로당이 새롭게 둥지를 틀었고, '더불어 사는 집' 노인 요양원이 있다.
늘 자동차로 다니는 사람들은 시외버스 정류장 안쪽으로 이렇게 큰 마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 역의암.
호국의 혼이 서린 역의암
덕양6구 마을인 중승골은 하세동의 일부로 속해 있었으나, 1997년 GS칼텍스 공장부지의 이주민과 연립 주택 건축으로 주민이 늘어나자 행정리가 되었다.
중승골에는 역의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정박했었다고 한다. 예전에 배가 정박했다고 하는 지점에는 2개의 비석이 있다.
왼쪽 높이 120㎝ 가량의 ‘행부사이후영세불망비’라 적힌 돌비석과 오른쪽 높이 100㎝ 가량 ‘수군절도사신공희택영세불망비’라 적힌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진 곳에 있는 큰 바위가 바로 역의암이다.
역의암에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무술년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신성포 왜교성과 장도, 묘도를 사이에 두고 조선과 중국 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국제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병사와 백성들에게 푸른빛과 붉은 빛의 옷을 나누어서 서로 바꾸어 입게 해 아군이 많게 보이도록 했다.
이를 본 일본군들이 놀라서 도망가서 이 바위를 옷을 바꿔 입은 바위라고 불렀다.
또 다른 여기암(女妓岩)의 전설은 기생이 이 바위까지 쫓아온 왜군에게 붙잡히게 됐다. 왜군에게 겁탈을 당하지 않으려고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어서라도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둘 다 덕양이 왜적의 침입에 맞섰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뜻 깊은 이야기가 서린 바위가 쓸쓸하게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도로에서 보면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올라가는 길도 제대로 되어 있어서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