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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7:1-7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북이스라엘의 패권을 잡은 오므리가 죽고 그의 아들 아합이 왕이 되자 북이스라엘에는 더욱 악한 죄악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합은 여로보암의 죄를 가볍게 여길 정도로 더욱 악한 죄를 저질러 바알 숭배로 물들었던 시돈 곧 페니키아 출신의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을 섬겨 예배하며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하고 제단을 쌓고 아세라 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데 외부에서 바람을 핀게 아니라 불륜상대를 집에까지 데리고 와서 바람을 피우고 있는 현장을 목도한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합의 모습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함은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그 뒤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징계하시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엘리야의 출현(17:1절)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성경에서 한 사람을 소개할 때 그 사람의 부모 또는 가문, 고향을 소개하곤 합니다. 특히 유력한 가문이거나 사람들이 잘 알만한 부모라면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힘을 추정할 수 있는 지표가 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의 소개는 어떠했습니까? 먼저 그는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라고 소개됩니다. 길르앗은 넓게는 요단강 동쪽 넓은 지역을 의미하며 좁게는 얍복강과 야르묵강 사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거하는 자’라는 뜻은 ‘토샤브’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자신의 소유가 없이 거류하며 노동력을 통해 먹고 사는 체류자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은 자기 소유의 땅이 없을 뿐 아니라 자녀들이 노예로 팔리는 것을 면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곧 그 당시 엘리야는 사회적 시스템의 최하층에 가까운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유력한 부모도, 재산도, 사회적 입지도, 땅도 없이 노동력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체류자로서의 엘리야는 사회적 약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누구 앞에 세우셨습니까? 바로 ‘아합’입니다. 아합은 아버지 오므리의 대를 이어 왕이 된 강력한 왕권을 가진 북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 아합 앞에 서기에 엘리야의 배경은 너무나도 초라해 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엘리야의 배경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를 부르신 것입니까? 바로 그의 뒤에 하나님이 배경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빼고 모든 것을 가진 왕과 하나님 빼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엘리야와의 싸움을 통해 누가 진짜 승리자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의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엘리야가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증명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빠져 있는 북이스라엘에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첫 말씀은 바로 기근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엘리야는 그 선포의 시작을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엘리야 선지자가 단순히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아합왕을 규탄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지자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기근을 선포하는 것은 당시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경고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아합과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긴 이유는 바알이 ‘비와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여러 가지 징계 중에 콕 찍어서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심으로 마치 애굽에 신들을 상징하는 10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 신이 헛됨을 보여주심같이 비와 풍요는 바알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복임을 알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또한 이는 신명기 11장 16-17절에 모세를 통해 이미 경고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이 말씀이 엘리야의 선포를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처음 엘리야의 경고를 들었을 아합은 상당히 기분이 나빴을 것이지만 아마도 대수롭지 않게 혹은 미친 사람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성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혹은 나날이 부동산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위기’ 혹은 ‘부동산 폭락’이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한다면 누가 귀담아 듣기나 하겠습니까?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말로 기근이 시작되고 지속되면 아합은 그 말을 전한 엘리야를 찾아 고문하거나 괴롭힐 수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선포한 엘리야를 숨겨 두십니다.
엘리야를 숨기시는 하나님(17:2-7절)
(2-3)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하여 동쪽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하십니다. 그릿은 ‘잘라내다’라는 단어 ‘카라트’에서 유래한 말로 ‘단절’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 왕의 손아귀에서 엘리야를 보호하시기 위한 최적의 장소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엘리야를 세상과 단절되도록 숨겨 놓으신 것입니다. 마치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으로 인해 보름스 회의에서 파면을 당하고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프리드리히 3세를 통해 위장 납치된 것으로 꾸며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서 신약 성경을 번역하도록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피난처’를 예비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그곳은 어떤 해할 손길도 미치지 못하는 안전한 곳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울과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주심을 기뻐하며 시편 18편 2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나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아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좀 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그 속에서 강한 믿음과 담대함을 가지고 성장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론 우리를 완벽히 보호하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시고 또한 위기 가운데 처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전한 바위 가운데 있던지 적군 한 가운데 있던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물을 마시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명령하여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왜 하필 까마귀입니까? 비둘기도 있고 다른 정한 동물들, 양이나 소가 찾아와서 스스로 식량이 되게 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왜 하필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새, 그리고 노아의 방주에서 돌아오지 않았던 까마귀를 사용하셔서 음식을 공급하신 것입니까?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대에 많은 사람들 중에 유력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을 쓰지 않으시고 아무 내세울 것이 없던 아웃사이더 ‘엘리야’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반대로 그 당시 유력한 자들은 이미 국교가 된 바알 신앙에 귀속되어 아합 앞에 엎드려 바알의 선지자들이 되었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아합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가 850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시의 북이스라엘의 바알숭배 종교시스템, 강자가 약자의 것을 탈취하는 경제시스템에 속할 수 없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아웃사이더 엘리야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까마귀는 그런 엘리야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부정한 것 같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을 것 같은 존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혹시 나의 삶이 엘리야와 같이 사회속에서 아웃사이더와 같은 내몰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셨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보니 내가 속한 조직에서 왕따가 되셨습니까? 하나님께 충성하고 투기하지 않고 탈세하지 않고 살다보니 가난한 처지에 놓이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까마귀와 같은 존재처럼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주류에 끼고자 신앙과 양심을 파는 거짓 선지자들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사회적 아웃사이더였던 엘리야, 부정하게 보였던 까마귀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선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5-6)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엘리야는 질문할 법도 했습니다. ‘하나님 왜 까마귀입니까? 정말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져오겠습니까? 이러다 굶어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 서기를 결단한 순간 이미 정상적인 나라의 시스템 안에서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일 것을 각오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릿 시냇가로 나아간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아침, 저녁 떡과 고기를 공급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배불리 먹이셨던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그릿 시냇가’에 머무는 엘리야에게 동일하게 ‘떡과 고기’를 먹이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머무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 아닌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며 자꾸 환경과 상황탓만 합니다. 하나님 이래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래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온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신 분이시며, 기근속에서도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내게는 일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그것으로 인해 곤란에 처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반대로 때론 십자가 위에 우리를 올려 놓으신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썩어지는 밀알 삼아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거룩한 희생의 제물로 사용하시기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영혼에 만족함속에 인내하며 참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내가 머무는 환경, 배경, 물질적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결국 엘리야가 선포한 말씀대로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릿 시냇가에도 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창세기 2장 10절을 보시면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물이 흘러 동산을 적시며 풍부한 생명의 근원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셨음에도 우리는 범죄함으로 스스로 왕이 되려 했고, 그 결과 생명의 강을 떠나 기근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하나님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맛볼 수 있는 땅에서 우상숭배를 통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켜 기근에 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국들이 섬기는 바알신이 자신에게 비와 풍요로움을 줄 것이라 착각하며 탐심을 따라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때론 내 직업이, 내 자산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내가 가진 소유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기술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달한 세상에서 인류의 노력과 진보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살기보다 나에게 더 많은 풍요로움을 선물로 줄 것이라 생각하는 세상의 시스템속에 갇혀 이 땅에서 주류가 되기 위해 세상의 권력과 물질 앞에 신앙을 파는 우상숭배를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의 왕은 누구냐?, 너의 하나님은 누구냐?’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삼고 묵묵히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갈 때 때로는 세상에서 엘리야처럼 비주류 아웃사이더가 되고, 까마귀처럼 부정하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그런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가 머무는 골고다 해골, 고통의 자리는 생명의 통로로 변화될 것이며, 물질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던 엘리야였지만 그에겐 단 한 분 하나님이 함께하셨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반대로 아합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없음으로 비참한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생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아합이 걸어간 탐욕과 범죄의 사마리아 바알 신전이 아닌, 거짓 선지자들이 먹고 마시던 아합과 이세벨의 식탁이 아닌, 엘리야가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간 그릿 시냇가에 머물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때로는 세상에서 조롱과 핍박을 받고, 주류의 삶을 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는 대로 먹고, 입혀 주시는 대로 입으며, 하나님의 손안에서 영원한 삶을 노래하며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복된 예배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무 배경이 없던 엘리야를 선지자로 부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던 배경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돌보시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채 바알을 섬기며 탐욕스러운 욕망을 따라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까마귀가 먹일 것을 신뢰하며 그릿 시냇가로 나아간 엘리야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으로 나아가길 명하시는 순종의 영역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4.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기근 속에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공급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묵상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