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 12:1-12
찬송가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교회와 학계의 주류는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전통적 우주관인 천동설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갈릴레오의 주장은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그는 재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공식적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대의 전설에 따르면, 재판이 끝난 후 갈릴레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화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뜨리지 않으면 더 넓고 깊은 진리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줍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이런 시선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의인 욥은 하나님의 자랑과 사탄의 시험으로 인해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재산과 자녀, 명예와 건강을 모두 잃었습니다. 욥은 재 가운데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온 몸에 난 종기를 긁다 생긴 상처는 그의 심령을 대변하는 듯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처참한 욥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말을 건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았던 욥이 이런 재앙을 겪는다는 것이 그들에게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인과응보 신학을 중시했는데, 이 논리에 따르면, 욥은 죄로 인해 고난받는 것입니다. 욥이 지금까지 보여준 선행과 신실함은 모두 위선입니다.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와 함께 이레를 지냈습니다.
칠 일 후, 욥은 침묵을 깼습니다.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비참한 인생을 한탄했습니다. 욥은 이 모든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보호하고 있던 울타리가 거두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욥의 탄식을 들은 욥의 친구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욥의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4:8; 5:3)과 선조들의 가르침(5:27)을 근거로,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둔다며 욥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빌닷은 전통에 호소하며, 하나님은 죄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버리지 않으신다며,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소발은 욥에게 말이 많다고 비난하며, 수다스러운 자가 의로울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인간의 유한성을 논하며, 욥이 죄가 없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며, 죄를 잊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재판을 막을 자는 없으며, 욥이 죄를 회개한다면 그의 어두운 인생에 빛이 비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을 저주하며 인생이 어둠으로 가득찼다는 말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세 친구 모두 욥에게 임한 재앙을 그의 죄 때문으로 단정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욥은 그들의 논리에 대해 각각 답했는데, 오늘 본문은 그 중 소발의 말에 대한 답변입니다.
친구들의 한계(1-3)
(1-3)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욥은 소발의 말에 답하면서, ‘너희’라는 복수형을 사용합니다. 이는 소발뿐 아니라 동시에, 엘리바스, 빌닷에게도 하고자 하는 말이라 이렇게 표현한 듯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치 자기들만이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욥은 그들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고 합니다.
욥이 말한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라는 표현은 소발이 앞에서 말한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11:12)”에 대한 대답인 듯 보입니다. 소발은 그가 지혜 없다 여기는 자, 곧 욥을 허망하고 미련한 들나귀 새끼에 비유하며 비난했습니다. 이에 욥은 “그래, 너희만 참된 사람이구나, 우리는 나귀이고”라고 반어적으로 대답한 셈입니다.
나아가, 욥은 친구들이 말한 내용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욥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일반화의 오류'라고 비판합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의 현실과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관점만 고집하며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오만함과 무례함을 지적했습니다.
욥의 한계(4-12)
(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욥은 친구들의 논리가 잘못되었음을 다양한 증거를 제시하며 반박합니다. 먼저,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을 예로 듭니다.
과거에 욥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듣고 응답해주셨습니다. 욥은 자신을 의롭고 온전한 자라고 스스로 소개했습니다. 성경도 이에 동의합니다. 욥기 1:1과 1:8은 욥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순전하고 정직한 자로 묘사합니다. 욥은 과거에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고(29:6-11, 21-25),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돕는 자였습니다(29:6-17).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 명성은 수치로 변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웃음거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불명예는 매우 큰 수치로 여겨졌기에, 욥은 이를 가혹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5-6)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욥은 두 번째 증거로 불경건한 자들의 형통을 언급했습니다. 고난 당하지 않는 평안한 자는 재앙을 가운데 있는 자를 경멸합니다. 그 재앙은 실족한 자, 이미 고통받고 있는 자에게만 준비되어 있는 듯합니다. '실족한 자' 욥이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겹겹히 찾아오는 재앙은 그의 마음을 처절하게 박살 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십니다”라는 표현은 원문으로 보면 '신(엘, אֵל)을 그의 손에 들고 오는 자'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작은 신상을 손에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조정하려고 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통제하거나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기에 세상에서 형통하게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욥은 이렇게 세상의 불의와 모순된 상황을 친구들에게 설명하면서, 단지 눈에 보이는 결과만으로 자신을 정죄하는 것을 멈추라고 촉구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회개하면 그의 천막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격려했고(5:24), 빌닷은 욥이 진정 의롭다면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8:6). 소발 역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의 안전과 안식을 강조하며 말했지만(11:15-19), 욥은 강도들의 형통을 언급하며, 세상의 평화와 안전이 반드시 의로움에 기반하지 않음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욥은 세 친구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7-8)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번에는 욥이 자연 만물의 이치를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통해 지혜를 찾을 수 있다고 하며, 친구들에게 동물과 자연 세계로부터 배울 것을 권유합니다.
잠언 6:6–8에서도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치며, 자연 세계의 관찰이 지혜를 가져다준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땅의 모든 피조물, 들짐승, 하늘의 새, 땅의 기는 동물,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사람에게 지혜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의 창조를 통해 자신의 지혜와 섭리를 드러내십니다.
욥은 여기부터 앞의 구절들과는 다르게 청자를 3인칭 단수로 씁니다. 이는 소발이 주장했던 말에 대한 답변을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발은 “허망한 사람은 들나귀 새끼와 같다(욥 11:12)”고 욥을 비하했습니다. 욥은 이를 받아치며 그의 지혜를 조롱합니다. “짐승도 아는 것을 너는 알지 못한다”
(9-10)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욥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모든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이며,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짐을 모두가 안다고 합니다(사 41:20).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짐승과 새, 식물, 물고기를 포함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욥기 38-41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며, 세상을 운영함을 나타내 보이시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11-12)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욥은 하나님의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에게 이성과 경험을 주셨음을 지적합니다. 입이 음식을 맛보고 그것이 맛있는지 아닌지 구별하는 것처럼, 귀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이성을 통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리분별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욥은 "사실 노인에게는 지혜가 있어야 되고, 장수한 자에게는 명철이 있어야 된다"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경험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친구들에 대한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욥의 친구 중 욥버디 연장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이해와 통찰을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욥은 이러한 상황도 모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욥과 친구들이 고난의 이유를 이해하려고 했지만, 욥과 그의 친구들은 그 뜻을 다 알 수 없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현세적 인과응보의 원리로만 이해했하고,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다고 단정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친구들보다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은 통찰력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욥 또한 의인에게 찾아온 재앙에 대한 의미를 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순되거나 오묘하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섭리로 옷을 찢었습니다. 그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아놓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의 탄식과 몸부림은 하나님을 만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탄식의 끝에 욥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고, 새로운 인식과 자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 ‘탄식’은 단순한 고통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지식이 있어도,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허락하신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 한계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크기를 자신의 이해 안에 담으려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보려는 시도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품을 수 없습니다. 아니 사실 그 허락하신 은혜만으로도 우리에겐 충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비가 신비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에 젖어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다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은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그 신비를 인정하고, 다 알 수 없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기준의 ‘옳고 그름’이나 비교를 넘어, 하나님의 본질과 크기 자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존 틀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이 세상은 실족할 일로 가득합니다. 악인은 평안한데 의인은 고난을 겪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도 때때로 원망스럽고 억울한 일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마음이 무너지고,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도 여전히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변함없이 마음을 지키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가 함께 하려는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아픔과 고통이 있어도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도, 그곳으로 가려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비슷합니다. 다 이해되어서가 아닙니다. 납득되고 받아들여져서도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거기에 있으시지?" 의문이 들지만,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기에 갑니다. 원망 스럽지만, 외롭게 둔 하나님이 너무 밉고 싫지만, 그곳은 불구덩이지만 주가 있는 그곳에 마음을 둡니다. 하나님이 있는 그곳에 아픔과 슬픔을 둡니다. 밑바닥까지 빡빡 긁어, 인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못했던 검은 그림자까지 내어놓는 겁니다. 무질서 속 질서에 자신을 두는 것 그것이 탄식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이 있지만, 주님께 창문을 열고 나아갑니다. 저희 마음을 만지시고, 선한 길로 이끌어 주옵소서. 탄식하는 심령에 성령님,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삶을 따르는 신수성가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라는 틀로만 세상만사를 판단하려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편협하게 판단하고 보는 면은 없는지 적어 봅시다.
2. 욥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해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해준 만큼만 알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는 무엇인지와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경험을 적어 봅시다.
3. 욥은 의인이었으나 고난 받았습니다. 조롱거리가 되었고 상실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는 상심 가운데 하나님께 탄식했습니다. 우리가 힘든 상황과 심정을 어떻게 해결하는지와 어떤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일지 적어봅시다.
4. 욥은 하나님의 자연만물을 통해 배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여 봅시다.
(작성: 김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