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한국수필》 등단
•수필집 『청매원의 봄』, 『욕망의 사과』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논픽션 부문),
대구문인협회 올해의 작품상(2015) 수상
•한국수필가협회, 대구수필가협회, 대구문인협회 회원
\만학을 시작한 덕분에 가톨릭대학교 S교수의 ‘문화와 평화’라는 강좌를 들었다. S교수는 다문화 가정과 함께 북한 이탈 주민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연구 사례를 소개하는 강의에서 피해자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당하는 힘든 사연을 들으니 측은지심 같은 연민이 생긴다.
문화와 평화라는 말이 오늘날처럼 절실하게 들릴 때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현실은 전쟁으로 인한 살상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이처럼 어지럽고 암울한 세태를 반영하듯 문화와 평화라는 언어가 지구촌의 화두가 된 지도 한참 되었다.
S교수는 평범한 사람이 가지는 연민의 본질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긍정적 효과를 설명한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1·2차 세계대전, 그리고 우리의 6·25전쟁을 사례로 들어 원인과 그로 인해 빚어진 참상을 상기시킨다. 전쟁은 문화의 산물이라 한다. “전쟁이 인간의 머릿속에서 시작되었듯이 평화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시작된다. 전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으면 평화를 이룰 수도 있다.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다.” 이 말은 1986년 11월 16일 제25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폭력에 관한 세비야 선언’으로 채택된 말이다. 이어서 1989년 코트디부아르의 유네스코 국제회의에서 ‘평화문화Culture of Peace’라는 말이 처음으로 제안되었다고 한다.
매일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70여 년 전에 우리가 겪은 6·25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전쟁은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는 물론이고 살아남은 사람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고통과 굶주림을 안겼다. 그 후유증으로 분단의 상처는 아물기보다는 커지고 있고, 좌우 이념 대립에 의한 정쟁은 극에 달한 게 현실이다.
처절했던 6·25의 상흔을 안고 있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와 피란길에 나선 가족의 고통을 생각하면 연민의 정을 떠올리게 된다. 전쟁은 타의에 의해 헤어지고 단절되는 비극을 낳는다. 유대인의 비극이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현재 진행형인 팔레스타인 사태와 지구촌의 수많은 전쟁 난민에게 연민을 가지게 되는 건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S교수는 비폭력과 연민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세계 석학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마셜 B. 로젠버그 박사가 비폭력 대화 여정을 시작하게 된 두 질문이다.
“나는 연민으로 주고받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우리 본성 이라고 믿기 때문에 다음 두 질문을 늘 마음에 품어 왔다. 첫째 우리는 무엇 때문에 본성인 연민에서 멀어져 서로를 공격하고 폭력을 행사할까? 둘째 이와 달리 어떤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고통 가운데서도 어떻게 연민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미국의 심리학자 스티븐 헤이즈Steven C. Hayes 교수는 자기개발서 『ACT(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에서 “심리적 고통은 불쾌한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거나 피하려는 투쟁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이러한 감정에서 맞서 싸우기보다는 받아들여야 한다. 감정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평화의 언어를 배우고 가장 고통받는 분야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강의 후반에 영상으로 보여주는 이탈북 주민인 ‘은결’의 사연과 「언젠가 다시 만나지리라」라는 노래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어서 들려주는 「Maggie의 추억」 노래가 평화로운 삶에 대한 추억과 단절에 대한 감정의 심연을 건너게 하면서 반전을 가져다준다. 강의는 끝났지만,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아쉬움의 여운을 남긴 채, 헤어짐과 그리움을 간직한 노래 제목이 몇 해 전 대구미술관에서 작품 전시회가 있었던 수화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도 학예사로부터 수화의 생애와 창작 일화를 듣고 오늘 같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 작가의 연민이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하다 뉴욕으로 건너왔으나 말년에 가난 때문에 이빨을 빼고도 치료 받지 못해서 음식을 씹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내 김향안이 1973년 여름에 쓴 일기에 적혀 있다. 천재 화가는 이듬해인 1974년 61세로 짧은 인생을 마감한 채 이국땅 뉴욕 웨
스트 체스터 카운티에 있는 공원 묘역에 묻혔다. 가난하고 외로운 노년을 보내면서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하던 중, 친구인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를 떠올리며 하늘의 별을 하나하나 점으로 그렸다. 그 작품의 제목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다. 그 그림 속에는 슬픔과 그리움, 친구의 죽음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어 노작가의 진지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인간 본성이 지닌 연민이 평화의 씨앗이 되고 때로는 위대한 창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배운 하루다. 창조주신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