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에도 연속 작용이 있는 걸까.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닥치는 불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
그 고장 젊은이들이 '조선의 나폴리'라고
불렀을 정도로 물빛이 맑고 푸른 통영을 무대로
김약국 가문의 몰락을 그린 작품이며
박경리 작가 소설 특유의
토속적인 색채가 짙은 내용이라
흡사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옛날 얘기를 듣는 듯 흥미롭고 정감 있다.
한 푼 자비도 없고, 한 가닥 반전도 없이
논스톱으로 내달리는 비극은
성수의 어머니, 숙정에서부터 잉태되며
괴괴하고 비장한 전주곡을 울리기 시작한다.
손위 동서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만큼
숙정은 자태가 곱고 도도했는데
그에 반해 남편 봉룡은 눈에 광기가 돌 정도로
과격하고 욱한 성미가 있는 위인이었다.
일이 벌어지려고 그랬는지.
하필이면 왜 그날, 그 시각이었던가.
아직도 숙정을 잊지 못한 옛 연인
송욱은 병들어 쇠약한 몸을 이끌고
숙정의 얼굴이나 한 번 보고 가겠다며
집까지 찾아왔는데 공교롭게도 때마침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온 봉룡과 맞닥뜨린다.
송욱을 보고서 불같은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
봉룡은 성난 멧돼지처럼 도망간 송욱을
쫓아나가 기어이 그를 죽여버렸다.
닦달을 당한 숙정은 억울한 누명을 벗고자
그만 비상을 털어먹고 자살해 버린다.
일이 그렇게 되면서 봉룡은 먼 타지로
도망치듯 떠나버려 이후로 아무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게 된다.
'비상 먹은 자손은 지리지 않는다 카던데'
비상 먹고 죽은 사람의 자손은
번성하지 못한다는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불길한 암시를 슬며시 던져주며 복선을 깐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숙정의 아들 성수는
이러한 불운한 태생의 콤플렉스에 더해
큰 어머니의 은근한 견제와 괴롭힘 아래
성장해서 그런지 매사에 현실도피적이며
우유부단한 성향을 보였다.
그에게서 <토지>의 용이 모습이
얼핏 스쳐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큰 아버지의 약국을 물려받아
김약국으로 불리게 된 그는 그 성미 대로
아내 한실댁에게도 늘 데면데면하게 굴었고
남편에게 곰살맞은 대우를 받아본 적 없는
한실댁은 그게 늘 한스럽고 서운했지만
체념하고 살 뿐 별 도리가 없었다.
한실댁은 전형적인 조선의 어머니 모습이다.
운명의 힘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하면서 슬픔을 곰 삭이고
가족에게 마냥 헌신하는 모습 말이다.
아들을 두지 못한 죄책감에 딸들을
하늘같이 떠받들고 살면서 전전긍긍.
성황당 느티나무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딸들의 안위를 중얼거리듯 비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문제는 딸들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첫째와 셋째 딸 말이다.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
다섯 자매는 용모도 성격도 판이했다.
용빈은 인텔리 여성으로 사려 깊고 지적이며
망해가는 집안으로 인해 수심이 깊다.
넷째 용옥은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행실이 참하다.
집안의 몰락을 부채질하는 것은
첫째와 셋째 딸이었는데
일찍 과부가 된 용숙은 본시 욕심이 사납다.
의사와 간통을 저지르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기를 연못에 던지는 죄악을 저질러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마을사람들에게
용숙은
"이 원수를 어찌 갚을꼬.
다 씹어 먹어도 분이 안 풀릴끼다."
라는 식의 거품을 물더니 독기를 품고
이후로는 악착같이 돈만 긁어모으는
수전노로 변모해 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세는 자꾸만 기울어만 간다.
신약의 등장으로 약국은 어려움을 겪고
생각다 못해 김약국은 어설프게도
어업에 손을 댔지만 큰 사고를 당해
엄청난 손실을 겪게 된다.
딸 문제 터지고
기다렸다는 듯 어선 침몰 사건 터지고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걱정은 산더미인데
그나마 이건 약과였다.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솟아날 구멍은 있겠지라는 식의
소망이라도 잡고 버텨볼 수 있었겠지만
초토화, 회생 불가능의 사건이 다음 차례를
준비하며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쐐기를 박아버리는
주인공은 이 집의 셋째딸, 용란이다.
인물이 반반하고 관능적인 용란은
'사랑 밖엔 난 몰라' 스타일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는데 그게
사랑의 쟁취로 결말이 났으면
위대한 사랑의 승리가 되었으려나.
암튼 그 시대의 인식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사랑을 하고 있던
용란의 파트너는 업어 키운
그 집의 머슴, 한돌이었다.
둘의 관계가 발각 나자
한돌은 내쫓겨 멀리 달아나고
용란은 부랴부랴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웬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성불구자에 아편중독자.
결혼 생활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클라이막스에
다다르게 된다.
마치 용란의 할머니였던 숙정의
악몽이 다시 리바이벌되는 듯
용란의 남편이 잠시 감옥에 들어간 사이
한돌이 고향 마을에 다시 들어오고
용란과 재회하여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그 즈음에 용란의 남편은 출옥을 하고...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어느 날 밤,
세 사람은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는데
용란과 한돌.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는 용란의 남편.
옛날 옛적, 이 집안의 비극이
꼬물거리며 잉태되던 그날처럼
똑같은 상황이 다시 펼쳐지며
끝내 되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모두를 덮쳐버린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집안마다 친숙한(?) 불행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개인이 자초한 것도 있겠지만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희생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윗대의 불행이 매듭 지어지지 않은 채
아래 세대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는
김약국의 딸들 스토리였다.
책으로 읽기 힘들면
1960년 대에 제작된 영화와
1980년 대에 방영된
<TV 문학관>으로 감상해 볼 수 있다.
*영화는 연령 제한으로
유튜브에서만
시청이 가능합니다^^
<TV문학관> 김약국의 딸들
https://youtu.be/VPU9LHiDqdw
카페 게시글
용띠들동행
김약국의 딸들
무비
추천 0
조회 225
23.12.14 21:02
댓글 19
다음검색
첫댓글 작품소개 참도 참하게 하시는군요.
무역풍이 얼마 전 출간한 장편소설도 이렇게 소개해 주심 얼마나 좋을까...
올리신 글 찾아 읽어보니 문장력이 아주 뛰어나십니다.
혹 출간한 책 있음 알려주삼요.
절 춤 추게 하실 건가요~
칭찬을 받으니 날개옷이라도
입은 듯 하네요^^
감사합니다
비 오는 밤,
편한 밤 되시길요~
@무비 옙. 좋은 꿈 꾸시길.
@무역풍 출간하신 책의 제목이 뭔가요~?
@무비 이실직고 하면 마치 글장사로 보일까봐 비밀.(시리즈 임)
출판사에서 내년 초 출간시킬 이편을 독촉해서 좀 바쁨니다.
이 나이에 내일 출근도 해야 되고..그런데 여기 카페 마음에 쏘옥 드는군요.
초대해 주신 그분 감사함다.
@무역풍 독촉 받는 그 심정을 쬐금은 알 듯 해요
하지만 창작은 즐거운 고통이죠~^^
무비님 한 솜씨 하신답니다
@박영란(근정) 그러실 것 같군요. 박영란여사도 같이.
무비님을 주연으로 단편 하나 카페 올려 볼까용? (그냥 추억거리로)
절 모르시는데...
어떤 캐릭터가 나올지 궁금하네요~
@무비 작가적 직감이라는게 있음다.
@무역풍 와우~
흥미진진합니다
@무비 일주일쯤 기다려 보삼.
우리 할마이가 글방에 빠꿈 들여다 보더니 "니 뭐 하나 생깃나?" 카네요.
푹 주무시와요. 안녕!
잘 봅니다.
감사합니다~
무비님 덕분에
오랜만에 추억속의 소설을 떠올리네요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살렸어요~ㅋ
잘봤어요..
가끔가끔 톡톡 글 쓰시네 ㅎ
토지 최참판댁 만 알았지...
어쩔 수 없이 가끔 쓰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