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
이방인은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버려진 자들입니다. 신학에서 선택과 유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실한 마음으로 그대로 내 버려두는 것 유기가 바로 현재적 심판입니다(롬1:28)
그 마음의 허망함이란 텅 빈 곧 공허한 마음을 말합니다. 되는 대로 육신의
욕심의 감각을 따라 닥치는 대로 먹고 놀고 자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18절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총명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원인을 알 수 없이 갑갑해지고 삶이
무의미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도 깨어있지 않으면 밋밋해지고
무료해지는 경우를 당합니다. 이러면 말초의 즐거움을 좇게 되는 건 당연합니다.
요즘 유투브 등에 정신줄을 맡기고 혼을 빼앗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순간적으로 힐링이 되는 것 같지만 말씀에 대한 총명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마귀는 음악이나 문화적인 컨텐츠를 통해 우리의 총명을 서서히 마멸시킵니다.
마음이 굳어짐은 무지와 고집이 세지고 영적인 감각이 둔해지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습니다. 무지하면 고집이라도 없어야
하는데 무지한 사람은 고집까지 아주 셉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이 됩니다. 깨달음은 매우 귀중한 복입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진 상태가 계속되면 재생할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롬1장)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 의가 나타나지 않고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서 활동이 없어 마음의 땅이 변하지 않으면 밋밋해 집니다.
나병환자의 무서움은 그 병으로 인해 몸이 망가지기도 하지만 통증이
없어지는 점입니다. 고통을 모르니 아무것이나 잡다가 몸이 더 망가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어둠 그리고 세상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패배하면 가슴 아파하고 탄식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19절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감각 없는 자 곧 무감각은 원래의 의미는 슬퍼하지 않는다 애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감각이 없으니 자신을 방탕에 넘겨주고 맙니다. 스스로
넘겨줍니다. 그래서 방임은 유기라는 뜻으로 본능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신앙의 로드맵이 없으므로 세상이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힐링
운운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따라 점점 더 빠져 들고 말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로 거룩하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추의 즐거움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앙망하므로 세상과 육체를 이깁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적인 감각이 없으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넘겨주고 맙니다.
그래서 모든 더러운 것을 그 욕심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죄와 사망이 따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국민소득이 5,000불 이상이면 여행, 8,000불 이상이면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고, 10,000불 이상이 되면 마약의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생활비의 여유가 타락의 원인이 됩니다. 마약과 동성애는 쾌락의 극치입니다.
지금 마약이 성행하고 성소수자가 정치적인 틈을 비집고 합법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말세의 현상이며 경제적인 여유를 따라 오는 무서운 어둠의 세력입니다.
한 번만 맛을 보면 다시 찾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를 악물고 참다가 극도의
어려움이 오면 다시 찾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도 이 짓을 하는데
나름대로 프라이드가 있답니다. 왜 자기 욕심대로 하는 극치의 희열이 있으니까요.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는 이런 그리스도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말씀의 만족감이 없으면 사람들은
세상으로 가고 맙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 다윗에게서
바벨론까지 14대, 바벨론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14대로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꼭 광야 40년 세월과 같이 말씀이 다윗에게서 성취되었다가 다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돌아와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의 상태가 되듯이
소위 나름 은혜를 받았다고 기뻐 뛰고 설치다가 세상에 푹 빠지는 실패와
좌절을 겪은 다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용하고 자신을 부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깨어 자신의 가족들에게 항상 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집안에 깔아두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세대 차이가 난다고
말하지만 세상의 정보와 지식은 세대차이가 있지만 성경 안에는 없습니다.
책상, 식탁, 방의 벽, 화장실 등에 말씀을 도배질 해 두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붙잡으시듯이 우리도 우리들의 가족을 가슴 안에서 놓치지
말아야죠. 내가 영적으로 병이 들면 다른 쪽도 병이 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1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그에게서 듣고의 원어로는 ‘그를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진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도 그 안에서 들어야만 성령의 인침을 받게 됩니다(엡1:13)
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곧 파괴되어 가는 걸 말합니다.
진리가 있으면 거룩 그 다음엔 영광 그 영광으로 하나가 되어 사랑으로
성화가 되어 갑니다. 그래서 사랑은 진화의 종국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일 창조적인 진화론을 말하고 싶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가 된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따라 신의 성품인 사랑으로 진화하는 걸 말해야죠.
우리 스스로 습관대로 살던 옛 사람을 십자가 건너편으로 매일 던져버려야죠.
십자가의 도를 익히지 못한 옛 동료들의 썩어가는 얼굴들을 한 번 보세요.
거기다가 온갖 병을 몸에 지니고 종합병원이 되어 있으면서 입만 살아 있습니다.
23절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심령, 마음과 영, 영적 깨달음, 지각 곧 로마서12:2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적인 개혁(혁신: innovation)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의 특징 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거듭난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동선을 따라 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고정관념을 십자가에서 버려야 합니다. 될 때까지 반복해야죠.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사건은 애굽의 신앙에다가 여호와를 접목시킨 것입니다.
지금 축제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본질을 벗어나서 세상적인
사고를 지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노래하며 춤추고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롬1: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위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의롭다 하십니다. 칭의라고 함은 의는 항상 위로부터
그 믿음 위에 내려오기 때문입니다(시85:11) 우리가 성경과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진리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시85:13) 하나님은 항상 의를 앞세우고 행하십니다.
그리고 그 의에 대한 믿음은 우리 안에서 점점 자랍니다(롬4장의 아브라함)
결국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의(믿음)에서 의(행함)로 이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 속에 나타나는 것은 성령의 내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운동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자신이 발견이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이 내주 역사하지 않으면 영적인 기능의 스위치가 꺼지는 걸 잘 압니다.
그러므로 성령 운동이라는 말은 젖을 먹는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진리에 대한 의무를 우리가 준수를 할 때에 외적으로 거룩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그의 몸짓과 언어와 얼굴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성도가 율법을 준수할 의무는 없지만 진리는 율법 성취를 하는 말씀이므로
그 진리를 순종할 의무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로 심판하십니다(롬2:2)
그 진리의 의무는 그 진리 안에 거룩함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거룩하심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그로 인해 아버지께 나아가므로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온전함을 이루어 사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요17장)
그래서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지으신
새 사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옛 사람은 죽었고 다시 산 새 사람입니다.
성령의 내주 역사로 변화되어지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안에서 진리를 배우면 영의 생각을 하므로
가치관이나 인격의 차원이 변화되어 갑니다. 따라서 가치관이 변하므로
세계를 보는 눈이 바뀌고 결국 운명이 바뀌는 겁니다. 따라서 보화를 보는
눈이 우리의 남은 육체의 때를 결정하게 되므로 항상 새 사람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침례)를 받았으므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새 사람입니다(갈3:27)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어 입은 두루마기를
빨아 입고 생명나무에 나아가고 문들을 통해 성에 들어가는 복을 얻습니다(계22:14)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기름부으심이 충만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