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사상(和諍思想)과 사회적 갈등 / 김상현 교수
원효는 7세기에 살았고, 우리는 지금 21세기의 문턱에 서 있다.
7세기의 신라 사회는 갈등과 전쟁의 시대였다.
한반도는 전쟁에 휩싸여 있었고, 사람들은 신분의 굴레로 갈등을 빚었다.
다툼의 시절에 살았으면서도 원효는 분열과 갈등을 포용하는
화해의 길을 택했고, 화쟁의 방법과 사상을 제시했었다.
오늘의 우리 사회도 여전히 복잡하고 문제는 많다.
남북의 대립, 다종교 사이의 불협화음, 정치집단 및 이익단체간의 마찰,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복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
그리고 범죄, 마약, 폭력 등의 여러 사회적 현상과 문제 등이 뒤얽혀 있다.
분명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더 많고 복잡하다.
원효의 화쟁사상이나 그 방법은 불교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닐진대,
오늘 우리 사회의 대립이나 갈등의 해소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개인도 집단도 사회도 모두 인연으로 성립한다.
모두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에
어떤 사회적 집단이라도 그 구성원들 상호간에는 조화가 필요하고
화합이 요구된다. 사회의 화합이나 조화란 다양하고 상이한 것들을
획일화 하거나 동질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곧 非一非異다.
원효는 말했다.
"하나가 아니기에 모든 방편이 능히 합당하고,
다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방편이 한 맛으로 통한다"
행복의 동산으로 향한 길은 오직 하나의 외길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어찌 행복한 삶의 길이 하나뿐이겠는가.
원효는 말하기를
"문 아닌 것이 없기에 하는 일마다 모두 현묘함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길 아닌 곳이 없기에 어디에나 모두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다"라고 했다.
다양성의 인정, 그것은 본래 불교의 기본 입장인 동시에
원효 화쟁 논리의 한 전제이기도 하다.
원효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융합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화쟁이란 일치나 동질성을,
그리고 획일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 둘을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 않음))"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논리다.
하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보편성이나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다양성을 인정하되 통합이나 통일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서로 다른 두 가지를 융합하는 것이다. 곧 融二다.
원효는 같다(同)고 하는 것도 다름(異)을 녹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평등이라고 해서 학의 다리를 잘라서 오리다리에 잇는 것도,
산을 무너뜨려 골짜기를 메우는 것도 아니라는
고려시대 白雲의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집단의 화합을 잘 깨는 사람을 보면 편협한 경우가 많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거나, 한 가지 입장만을 절대화 하면 문제가 생긴다.
속 좁은 사람들에 대해 원효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자기가 조금 들은 바 좁은 견해만을 내세워
그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면 옳다고 하고,
그의 주장에 반대하면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마치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아서,
갈대 구멍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하는 자라고 한다."
갈대 구멍만큼이나 속 좁은 생각이나 편협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는 집단도 있다.
이들은 오직 자신의 견해만 주장할 뿐 다른 사람들의 異見에는 귀를 막는다.
"같다고 하는 것도 다름을 녹여서 다 같이 만든 것이 아니다"
원효의 이 말은 이견을 가진 사람을 몰아낸 뒤에 같은 견해로
획일화 하는 것이 화쟁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는 또 "같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름에서 같은 것을 분별한 것"이라고 했다.
말이 통하는 사회라야 화쟁이 가능하다.
시비나 논쟁에는 언제나 말이 문제가 된다.
우리는 말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매스컴이 발달하고
통신이 지구촌을 하나로 연결해 준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집단과 집단 사이에, 세대와 세대 사이에,
그리고 이웃 간에도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면,
이런 사회는 답답하다. 우리가 지켜본 국회의 한보청문회의 경우
하루 종일 떠들었지만,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말만 한 경우가 많았고,
증인은 진심으로 말한 것 같지 않았다.
원효는 말했다.
"나는 언어를 가지고서 언어의 길이 끊어진 진리를 보여주고자 한다.
마치 손가락으로 손가락을 떠나 있는 달을 가리키듯이"
말은 본래부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기에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달은 보지 못한 채 손가락만 멍하니 보는 격이다.
원효의 가르침에 의하면,
상대방의 말은 새겨서 듣는 것이 좋다.
혀가 짧은 훈장의 발음이 설사 "바담 風"일지라도
총명한 학생은 그것이 "바람 풍"임을 이미 안다.
말꼬리를 물고 늘어진다면 상대방의 어떤 견해도 허용하기 어렵다.
상대방의 말뜻을 새겨듣노라면 허용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기에 원효는 말했다.
"말과 같이 취하면 그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고,
뜻을 얻어하는 말이라면 용납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어차피 말이란 의사소통을 완전히 해주는 도구는 못된다.
그렇다고 편리한 이 도구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기에 말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말이 불화의 꼬투리가 될 수 도 있다.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말은 시비를 종식시키기 어렵다.
"집착에서 벗어나서 말한다면 타당하지 않음이 없다.
만약 집착하게 되면 말과 같이 취하여 파괴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또한 원효의 가르침이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집착에서 벗어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말은 쉬워도 실제로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
자신의 안경으로 보고 자기가 가진 잣대로 재며
자기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흔히 경험한다.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허심탄회해지기는 진정 어렵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할 때
백가의 논쟁을 화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자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긍정과 부정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긍정한다고 얻을 것도, 논파한다고 잃을 것도 없다"
이 또한 원효의 가르침이다.
김상현 교수 (동국대 사학과)
출처 :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