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어느 날, 아직은 엄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앳된 수진 씨가 행정복지센터로 찾아왔다.
“저는 아이가 있는 이혼녀예요. 아이의 양육권과 친권은 전남편에게 있지만, 제가 직접 키우고 싶어 아이와 함께 순천에서 무작정 올라왔어요.”
그녀는 막막한 사연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청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어린 엄마를 어떻게 도와야 할까?’라는 고민에 휩싸였다.
수진 씨는 야간 바(Bar)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모텔 건물을 개조해 만든 원룸에서 지내고 있었다. 보증금 없는 비싼 월세살이였다.
“친엄마는 내가 백일 때쯤 가출했대요. 그래서 엄마 얼굴이 기억에 없어요. 아버지는 그 후 재혼했는데 새어머니는 나를 학대했어요. 그로 인해 나는 학교에서 따돌림 받았고, 차츰차츰 학교를 가지 않게 되었어요. 그러다 어떤 사건에 휘말려 강제 전학을 당했어요. 친할머니에게 가서 복학했으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하게 되었죠.”
숱한 아픔과 상처를 가졌음에도 수진 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남편과는 23살 때 만났어요. 아이가 생겨 결혼했지만 순탄치 않았어요. 경제적으로 불안정했고, 남편은 외도와 술과 게임에 빠져서 나랑 아이에겐 관심 없었어요. 남편과 잘 살아보려고 했으나 마음을 돌릴 순 없더군요. 결국 이혼하고 인천으로 온 거예요….”
수진 씨가 잠시 침묵했다. 어떤 슬픔이 밀려온 것일까. 나는 수진 씨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그녀가 살포시 웃으며 다시 입을 뗐다.
“지난 9월에 아르바이트하다 계단에서 굴렀어요. 일을 할 수 없고 생계도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남편에게 보냈어요. 아이와 헤어지고 싶진 않았지만 이혼할 때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했고, 월세는 밀리고 전 남편이 내 이름으로 대출받은 돈도 갚아야 했거든요.”
“지금 가장 힘든 게 뭐예요?”
조심스레 묻자, 수진 씨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술 좀 그만 먹고 싶어요. 바에선 종종 먹어야 하니 무척 힘들어요. 그래서 낮에 하는 아르바이트를 찾아보고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취업 상담도 받았어요. 그렇지만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라 안정적인 직업을 찾긴 어렵대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월세와 부채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답이었다.
대체로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민원인들은 취업이나 자립하려는 의지 없이 무조건적인 사회복지 혜택과 도움만 바랐다. 그럴 때마다 안타깝고 ‘왜 저렇게 나약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수진 씨를 보니 보기 좋았다.
“제 꿈은 필라테스 강사예요. 예전에 학원에 등록했는데 형편상 다니지 못했어요. 이제부턴 멈추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어요. 요즘은 다시 공부하려고 검정고시학원과 중학교 졸업 과정도 알아보고 있어요. 고교 졸업 과정 검정고시까지 통과하면 안정적인 직업도 얻겠죠? 그러면 아이와 함께 살 거예요.”
수진 씨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내 일은 그녀가 더 멋진 여성, 당당한 엄마로 거듭나도록 돕는 것이었다.
“수진 씨를 사례관리 대상자로 선정해도 되죠?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고 꿈을 이룰 방법도 찾아봐요. 우선 밀린 월세 86만 원부터 해결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금액은 최대 50만 원이니 어쩌죠?”
“50만 원도 감사해요, 나머지는 제가 구할게요.”
스스로 서려고 노력하는 수진 씨, 그녀는 볼수록 믿음직스러웠다.
며칠 후, 우리는 검정고시 학원에 갔다. 11월 6일부터 중학교 졸업 과정 기초반이 개강하기 때문이었다. 학원비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금으로 해결했다. 수강증을 받아든 수진 씨의 얼굴이 함박꽃처럼 환해졌다.
“학원 잘 다닐 수 있죠? 수업에 늦거나 결석하면 안 돼요!”
“절대 빠지지 않을게요. 다시 공부하게 돼서 정말 좋아요. 이런 기회가 올 줄 몰랐거든요.”
“우리 열심히 공부해요. 내년 4월에 중학교 졸업 시험을 단번에 합격하자고요!”
이윽고 11월 6일 내 휴대폰은 온종일 수진 씨의 소식을 바쁘게 전달했다. 아침 일찍 학원에 가고 있다는 목소리, 갑작스러운 시험에 당황했다는 얼굴 표정, 그래도 답을 잘 찍었다며 내민 시험지, 수진 씨의 음성은 기쁨에 달떴고, 사진은 행복해 보였다.
수진 씨가 학원에 다닌 지 2주일이 됐다. 기어이 그녀는 낮 아르바이트도 구했다. 그녀의 꿈인 필라테스 강사가 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하지만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수진 씨는 꼭 꿈을 이룰 것이다. 아름답고 능력 있는 강사, 당당한 엄마로 살아갈 수진 씨가 벌써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