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영글어가는 조선족서예가의 꿈
한국소리문화예술의 전당에 전시된 작품앞에서 (좌 림학, 우 전북민예총 임명진회장)
룡정시 조양천진(현재 연길시 조양천진)의 한 로동자가정에서 2남중 막내로 태여난 림학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그림그리기와 글씨쓰기를 좋아했다. 남들처럼 머리를 싸매고 공부 한적은 없었으나 서예작품에는 흠뻑흠뻑 잘도 빠져들던 그는 그때까지만도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서예가의 꿈을 남모르게 키우게 되였고 그로부터 오늘까지 줄곧 미술서예의 인생을 고집해왔다.
둘째아들의 이런 꿈과 포부를 리해하지도 믿지도 않았던 림봉춘씨는 서울에서 림학을 만나고 돌아온 필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학이가 그렇게 잘하고 있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네, 그애가 2005년 3월에 한국에 간후로 학비는 일전도 보내준적이 없는데… 석사과정을 거의 마친다니 애비로선 할말이 없네.》 눈시울을 약간 붉히면서 림봉춘씨는 그사이 한달에 한두번씩 전화는 걸려왔으나 그냥 안부전화여서 한국 어디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무슨 공부를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고 한다.
2000년 7월 연변대학미술학부를 졸업하고 룡정시조양천제1중(지금의 연길시조양천제1중)에서 미술교원으로 있을 당시 림학은 그때 벌써 연변서예계에서 이름이 쟁쟁한 청년서예가였다. 남들로부터 서예계의 귀재라고 평가받았지만 교단에 서면 늘 자기의 학문이 너무 옅어서 학생들이 수요하는 지식을 다 줄수 없었다는 안타까움으로 림학은 한국에 가서 더 많은것을 배우리라 다짐한다. 가정의 경제상황때문에 한국류학을 결단하지 못하다가 2005년 3월 국립제주도대학 미술학부의 입학통지서를 받게 되자 만사불구하고 류학의 길에 오른다.
《돈이 얼마 드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한국류학을 선택했습니다. 부모들이 모아준 돈으로 한국수속을 다 마치고 제주대학에 도착하여 학비를 납부하고나니 수중엔 30만원밖에 남지 않더군요.》
한국에서 30만원이면 한달도 살기 바쁘다는것을 누구나 다 알것이다. 가장 값싼 고시원이라해도 한달에 10여만원이 드는데 밥을 먹고 차를 타고 다니려면 어림도 없기때문이다. 지인 한명도 없는 제주도에서 그가 선택한 곳은 학교근처에 위치한 하루저녁 3천원씩하는 사우나, 사우나에서 빵을 뜯으며 공부를 시작한 림학은 생계때문에 낮에는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주유소, 음식점, 골프장 등 곳에 가서 닥치는대로 일을 했는데 한시도 꿈을 접은적이 없다고 한다. 동년배의 류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맛이 들고 그래서 학업을 접는것을 여러번 목격하였지만 그때마다 그는 《내가 한국에 돈벌기 위해 온것이라면 몰라도 배우기 위해 온바에야 어찌 중도이폐할수 있느냐》며 자신을 편달하군 하였단다. 한학기에 300만원씩 하는 학비를 장만하고 또 먹고 살기 위해 그는 붓을 잡았던 손으로 고된 일을 했는데 중국에 계시는 부모님들에겐 손 한번 내민적이 없단다. 《내가 소비돈이라도 보태주지 못하는것이 미안한데 어찌 부모님들에게 돈달라고 손을 내밀겠는가?》하는것이 그의 대답이다.
젊은 나이에 홀로 이국타향에 와서 고독이나 고생때문에 눈물을 흘린적이 없냐는 필자의 물음에 림학은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날때도 있지만, 사실 그때는 눈물을 흘릴 시간도 장소도 없었습니다. 사우나에 돌아와 씻고 나면 그냥 골아 떨어졌고 또 사람들이 많은 공중장소였으니까요.》
2007년 8월 우수한 성적으로 제주대학을 졸업한 림학은 국립 서울산업대학 조형예술과에서 대학원공부를 시작한다. 그때 그의 공부뒤바라지로 한국에 온 어머니가 서울에 와서 식당일을 하면서 그의 학습생활환경은 많은 면에서 나아진다. 그사이 그는 여러 서예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서예계에서의 지명도가 올라갔고 또 서예전에 출품했던 작품이 팔리기도 하면서 작품활동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지난 11월 28일에는 대학원에서의 우수한 학업성적과 학교내외에서의 출중한 표현으로 서울산업대학 재단법인 평통장학회로부터 100만원의 장학금을 획득하였단다.
2005년 제9회배달민족서예대전 지상전에 초대작가로 출품, 그것을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동양미술대전에 초대작가로 출품하여 한국서예계에 신선한 연변물결을 일으켰고 한중 및 한중일서법미술교류전에 수십차 출품하면서 20대의 젊은 나이로 국제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확고히 굳혀나갔다. 현재 석사과정 논문학기코스만 남겨놓고 있는 림학은 동방연묵회 운영위원, 중외서화예술교류협회 비서장, 연변문자예술협회 부회장 겸 민족장학위원장, 중국길림성룡정시서화가협회 상무부회장 등 직을 력임하고 있는 28세의 전도유망한 조선족 젊은이다.
국제서법예술공명전에 출품한 《불휘기픈나무》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림학은 이렇게 말한다. 《어릴때의 꿈은 서예가 혹은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좀 바뀌였습니다. 학위를 취득하면 한국에서도 좋은 일자리를 얻을수 있지만 귀국하여 더 높은 차원의 민족인재양성에 정열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준비과정에 있지만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추진하고 싶구요.》
필자와 갈라질때 림학은 기실 한국에 와서 류학하는 조선족가운데는 자기보다 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더 우수한 성적을 따낸 학생들이 많고도 많다면서 기회가 되면 박사학위를 취득한 몇분을 소개해주겠다고 하였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국에서 자기의 꿈을 키워가는 사람이 어찌 림학 한사람뿐이랴~ 부동한 년령대의 수천여명 학구열에 불타는 조선족아들딸들이 한국의 여러 대학교들에서 자기를 갈고 닦고 있다. 또 그들을 위한 부모들이 음식점에서, 건설현장에서, 제조업체에서, 중소형기업들에서 자기의 힘과 정열을 쏟고 있다. 그리고 그들처럼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서 어린 자식을 중국의 대, 중, 소학교들에 두고 온 수십만명의 조선족방취자 대오가 한국땅 가는곳마다에서 튼실한 산업역군이 되여 열심히 일하고 있다.
기실 림학은 맑고 명랑한 재한조선족젊은이중의 한사람일뿐이다.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열심히 하여 훌륭한 서예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어찌 만날수도 있겠지요. 저도 또한 사업을 하면서 학창시절의 꿈을 갖고 늦게나마 서예를 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