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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기드온 백일장 참가 작품>
길에서 만난 애완견의 눈망울
금 동 춘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여느 때처럼 집을 나와 작은 여행을 즐기던 중 골목어귀에서 움츠린 개 한 마리와 눈을 마주쳤다. 깊고 맑은 선한 눈망울은 내 눈을 붙잡고 놓질 않는다. 무언가 하소연하는 애처로운 눈빛에 걷는 동안 내내 그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더러운 행색으로 보아 누군가가 애완견으로 기르다가 경제사정이 나빠지자 키우기가 힘겨워 길에 버린 것으로 보인다. 비록 때가 묻어 더럽기는 해도 양털 같이 하얀 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쁘지 않은 種인 것 같다. 지금은 길거리 개가 되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지만 지난 세월에는 마음씨 고운 예쁜이가 매일 샤워해 주고 향수 발라 몸단장 해주어 귀여움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젖무덤에 코를 박고 포근히 안겨 행복한 시절을 보냈으리라.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 개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왠지 가엾고 착잡한 생각이 들어, 지금은 초라한 모습의 버려진 개가 되어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대는 그 개의 애달픈 사연을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농경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의 헐벗은 경제하에서는 국민 다수가 가을 추수로 겨울을 채 나지 못했다. 이른 봄 나무껍질을 벗겨 우려먹고, 주린 배를 이기지 못해 풀죽을 끓여 먹다가 지독한 풀독으로 몸이 퉁퉁 부어오르기도 했던 항상 허기져 뱃가죽이 등에 붙어있던 그 시절, 배가 나온 사람만 봐도 부잣집 사장님처럼 생각되던 기억이 있다.
빈곤에 지쳐가던 농촌 가정에서는 재롱을 피울 나이의 어린 딸들을 도회로 식모살이를 보내 식솔을 줄여야만 할 정도였다. 어린나이에 집을 떠난 가엾은 농촌의 딸들은 낯 설은 도회지의 에일 듯한 추위와 고된 일에 손등이 터지고 갈라져 쓰라려 피가 나도 맨솔다마 한번 발라보지 못하고, 주인마님의 매서운 핀잔과 구박으로 가슴에 피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지독한 독감을 앓아도 얼은 몸 하나 녹일 곳이 없어 기껏 엄동의 양지바른 곳을 찾아 의지하며 언 몸을 녹여야 했고, 혹한보다 더 추운 외로움과 그리움 속에 부모가, 형제가 보고 싶어 뒷간에 숨어 흘린 눈물은 또 얼마이던가.
그러던 그 어린 어린 딸들이 지금은 아들, 딸들의 어머니가 되어, 절약을 모르고 함부로 낭비하는 자식들에게 지난세월의 어려움을 들려주며 절약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절약의 고귀함을 목이 뫼이도록 설득해도 부모가 일군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그 자녀들은 다만 귓전으로 흘릴 뿐 외려 경제를 모른다고 핀잔을 주기 일쑤다.
거지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요즘 젊은이들은 지금 그들이 흥겹게 부르는 각설이타령이 그 시절의 슬픈 산물임을 알기나 하는지……. 밥 때가 되면 어김없이 대문을 열고 깡통을 두드리며, “작년에 갔던 각설이 잊지도 않고 또 왔네.” 라며 떼를 지어 몰려다니던 전경이 지금도 선하다.
그러나 빈곤의 나락에서도 새벽 종소리는 울려 퍼져,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 국민이 새마을 깃발아래 팔을 걷어붙이며 하나가 되어 경제개혁이 시작되었다. 농경사회는 이내 산업사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의 활기 넘치는 모습에선 힘이 넘쳐났다. 오직 노동력에 의지하며 해머로 깨부수던 건설현장은 불도저와 크레인으로 도약하였다. 열사의 사막에서 작열하는 태양에 구릿빛 살을 태우면서 거대한 운하를 만들고, 끝없는 사막에 거미줄 같은 고속도로를, 하늘을 찌르는 고층빌딩을 세우며 우리나라의 경제 위상을 세계만방에 떨쳐나갔다. 수출 3000만 불을 부르짖던 우리경제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도약하였고, 아시안 게임과 하계 올림픽 등 각종 세계적 스포츠 대회를 유치하며 한강의 기적을 세계만방에 과시하였다.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가 우리의 비약적 발전을 놀라워하였고 제3세계 국가들 중에는 우리를 경제모델로 삼아 배우려 하는 곳도 생겨났다.
이 시점에서 단순히 집을 지키거나 보신을 목적으로 토종 삽살이와 똥개를 키우던 것에서 나아가, 일부 부잣집에서는 선진국의 수십 수백만원짜리 애완견을 수입하여 키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고가의 애완견 키우기는 이후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점점 대중화 되어 오늘에 이른다.
토종 견들과 그 생김새부터 다른 수입 애완견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삭막한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그 주인들에게 귀엽고 앙증맞은 즐거움을 선사하였다. 일터에서 돌아온 주인을 향해 가장 먼저 길길이 뛰어오르고 매달리며 반긴다. 엎드린 듯 엉덩이를 치켜세우며 꼬리를 흔들고, 때로는 애교어린 콧소리로 어린아이가 옹알이하듯 짖어대며 제 나름의 사랑의 찬가로 주인의 피곤을 씻어주는 존재가 되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우리 경제는 그러나 위정자들의 오만하고 허세 가득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IMF라는 위기를 맞아야만 했다. 힘들게 쌓아놓은 곡간이 텅 비어감에 따라 급기야 일터에서는 사오정에 조기퇴직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어제의 사장님은 빌린 회사운영자금을 막지 못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숨어사는 거리의 노숙자가 되었다. 잘나가던 중산층 엘리트 사원들은 통닭집 주인에서 아파트의 경비원으로, 목욕탕 때밀이로 전락하였고 그들의 평화롭던 가정은 거짓말처럼 여기저기 쓰러져 갔다.
그토록 사랑 받던 애완견들도 한 순간에 거리로 버려지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가정에서 영원히 사랑 받을 것 같던 그 애완견들이 지금 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것이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가끔은 발길질에 질겁하며, 기억 저편의 옛 영화가 그리워 애처로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맑고 선한 눈으로 내 눈을 사로잡은 거리의 애완견, 너의 애처로운 눈망울은 무너진 경제를 하루빨리 일으켜 노숙의 주인을 돌아오게 하고, 파산의 질곡에서 절망하는 네 주인의 일터를 다시 세워 달라하는 충성스러운 소망이 담긴 애절한 눈망울이 아니었느냐.
돌아가는 산책길에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더라도 우리 집 애완견 깜찌에게 줄 간식거리라도 사들고 가야겠다. 가서 눈을 맞추며 무너진 경제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된, 길에서 만난 그 개를 생각하며 대신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 측은한 눈망울을 위로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리라. 애견센터에 들러 경제(치즈)를 한 봉 사려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숲의 속삭임
금 동 춘
삶이 힘드시거든
머뭇머뭇 숨지 말고
마음이 괴로우시면
펑펑 눈물 감추지 말고
몸이 아프시면
절뚝절뚝 오십시오.
오랜 풍한의 세월
인고를 연명하며
파 아란 생명의 숲
솔바람 불어넣어
피곤한 당신을 위해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쑥 내음 솔향기에
마음 닦으시고
새소리 벌레소리
속닥속닥 담으시고
조잘조잘 여울물에
지친 몸 담그시오.
청솔가지 냄새 태워
매연에 갇힌 영혼을
씻으리이다.
개똥벌레의 정겨움으로
누더기 된 피곤을
감싸 안아 주리이다.
熱帶夜
금 동 춘
활화산의 진노인가.
작열하는 태양의 이글거림은
삶의 숨통을 멈추게 한다.
통절한 아픔을 허우적이는
낙지발의 저항처럼
주린 배 갉아먹는
삶의 끈질김에 오열하듯
7월의 열대야는 더운 입김을
쉬 임 없이 토해내어
이 밤을 송두리째 앗아 간다.
간만의 소낙비는
석쇠 위 지글거리는 대지에
어화 둥둥 생명수 되니
지하방초들 안도하고
나락의 노숙자는
차디찬 지난겨울
공원벤치의 언잠을 떠올리며
비옷입고 날아온 냉골바람에
고향 꿈길 나래 펴고
열대야를 식혀보네.
평안을 축원합니다.
금 동 춘
폐암투병에 급성폐렴
하늘을 의지하며 힘겨웠던 그가
한 점 검은 연기를 남기고 갔다.
인연의 끈 미련을 잡으려
한 가닥 간절함을 여명에 걸고
하느님 살려 달라 빌며 기도하고
그 몹쓸 아픔도 인내 하였건만
명줄이 거기인 것을
그는 몰랐던가 보다.
간다는 말 한마디 남겨두지 않고
인록자락에 묻어있는
체온도 거두지 않은 채
공허한 슬픔만 산자의 가슴에
빈 모습으로 남겨놓고
이별의 봇짐도 준비하지 않은 채
미련의 끈도 잡은 그대로
잠시 고향 길 다녀올 량
두꺼운 이승의 이끼에 손 흔들며
밤사이 가신이여,
황망한 발걸음 오죽이나 외로웠겠소.
석별의 말은 우리가 함께 하였던
경비초소, 지하주차장, 로비에
그림자로 남겨져 당신의 숨결로
오늘도 다정다감히 속삭인 다오.
고통의 무게를 선행으로 인고하던
생전의 당신의 그 모습
이제야 기억하며 사죄합니다.
어디에서나 만나리오.
방금도 불숙 나타나며
집사님 수고 했어요, 라며
정겹게 불러주던 당신의 음성
귓전을 스칩니다.
잡초로 우거진 내 聖心을
햇살의 분별로 솎아주던
각성의 자상함도 당신의 소리로는
이제 들을 수 없습니다.
더러는 오해로 다투며
교만의 틈에 끼여
마음마저 웅그려 져
미움의 세월을 키우던 것
이제 당신에게 용서를 빕니다.
배옥경 집사님!! 영면의 길에
육신의 먼지 훌훌 털고
가벼움으로 자유하시여
아름다운 하늘낙원에서 평안하소서.
어머니의 미수(米壽)에 부쳐
김의식
여든 여덟 번(米=八十八)의 손길 끝에 올라온 밥상은 더하기 사랑
어머니의 사랑은
곱하기 사랑(8×8)을 뛰어 넘는 자승의 사랑(
)
누에쳐서 명주길쌈
삼농사하여 삼베길쌈
목화심어 무명길쌈
빨래줄에 하얗게 바랜 무명바지 적삼
어머니 운전사되어 골무, 인두, 다리미가 기다리네
오뉴월 보릿고개 허리띠 졸라매고
헛기침으로 시장기 달래면서
술찌김이 한 대접 후루룩 들이키고 보리타작 할 때면
새참에 못먹인 아기젖이 흘려내려 소꼿을 적신다네
디딜방아 찧은 현미쌀로 밥짖고
물레방아 돌려 빻은 밀가루로 국수만들고
연자방아 돌린 보리쌀로 쑤어주신
갱시기 한 대접이 사뭇그리워 지네
어머니손길 찧고, 빻고, 돌려 닿지않은 곳이 없으신
만병통치 어머니 손길
내손이 약손이다라고
아랫배 쓰다듬어 주시던
따사한 그 손길
삶의 뼈마디에 새겨지네
세월담긴 나이테도 주름살로 고을지어
설한풍 인동초(忍冬草)도 오는세월 못막고
가는세월 못 잡는구나
낫놓고 기역(ㄱ)자도 모르시던 어머니
김의식
문장은 이백(李白)이요
풍채는 두목지라
한학에 문장이신
아버지 불호령
여자는 두문불출
모름지기 살림만을
낫놓고 기역자도 못익혔네
행랑채 천자문 읽는 소리
귀동량하고
마실사람 이야기
어깨넘어 도둑질 했네
글씨에는 까막눈이
귀는 열려서
입으로 따라하길 십수번
혀가 닳았네
가자밖의 점한점 갸
거자안의 점한점 겨
고자안의 점한점 교
구자밖의 점한점 규
가갸거겨고교구규......
공들여 얻은 자식
금(金)이냐 옥(玉)이냐
어머니정성 구만리길
그정성에 감전되어 초등학교 입학전
천자문 따라 읽고
사람내음새 물씬 나는 춘향전, 심청전 따라 외니
이 자식의 사람꼴 바탕되었네
인생최고대학 경로대학 학사모가 반짝이네
하나님 크신사랑 천국이치 깨달아
찬송과 기도로 예수님과 동행하니
이것도 은혜이고 감사일세
2007년 9월 30일 저녁예배후 큰아들 김의식(어머니에 효도하지 못함을 아쉬워 하면서)
진달래 꽃
김의식
모처럼 틈을 내어 올해 88세로 미수(米壽)미수를 맞는 어머니와 정든 고향땅을 방문하며 옛 추억을 회상해 보았다.
차창밖에 스쳐가는 수많은 풍경들과 함께 어머니 뇌리에 가득찬 옛추억은 어머니 여생 한평생을 보여주는 생생한 삶의 흔적이 흠뻑 담겨진 앨범과도 같았다.
진달래 핑크색의 꽃송이를 무수히 잘라 멀쑥하게 서있는 모습이 눈에 확뜨이는가 했더니 담장의 연초록 잎새가 돋아나기 시작한 개나리 꽃이 장에 오가는 분들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옅은 보라색으로 핀 오랑캐무리와 앉은뱅이의 샛노란 민들레가 인상적이다.
별 특징이 없는 꽃다지, 달래냉이, 나무 찍어 흩어놓은 듯한 냉이꽃, 이름 모를 풀꽃들......어머니와 나물캐던 옛 시절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릴 때 곤충채집하던 고추잠자리, 장수잠자리, 비단벌레, 호랑나비, 흰나비, 풍뎅이와 함께 여름밤 무수히 작은 별들의 속삭임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마당에 멍석 깔고, 화롯불 피워 모기 쫓으며 지난날 어머니가 들려주신 그 이야기 어머니 팔 베게삼아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 속의 속삭임을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귀 기울였던 모습들......
은하수의 양쪽 둑에 있는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오작교(烏鵲橋)에서 1년에 1번 만난다고 하는 전설 따라 칠월칠석 견우직녀가 만난다는 이야기......
울타리 포플라 나무사이로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에 자정이 넘어 이슬이 내리기 시작하여 제법 오싹해지는 여름 한밤.
호박죽에 완두콩 넣어 한 대접 밤참 먹고 다시 옛이야기에 꽃을 피우는 여름밤.
별하나 나하나, 별둘 나둘, 북두칠성, 북극성 푯대삼아 고니자리, 거문고자리, 사다리꼴 별자리인 오리온자리를 사이에 두고 은하수(銀河水)물결 따라 별똥별(流星) 떨어지는 여름밤의 모습들......
그때 함께 놀던 고향 친구 추억속에 언제나 싱그러운 꿈보따리를 안겨주며 영원히 그곳에 함께한 그 밤이 그리워진다.
때묻지 않은 친구들의 웃음을 기억하며 땅따먹고, 그네타기, 딱지치기, 윷놀이, 오줌싸서 키 뒤집어 쓰고 소금 꾸어 오던 날의 모습들......
칡뿌리 캐고, 소나무 송화가루 긁어 먹고 버드나무 잎 따서 아랫배 부여잡고 보리죽 쑤어먹던 그 시절, 가을추수후 떡을 만들어 캄캄한 어두운길 헤치고 윗마을 아랫마을 50여호를 일일이 돌리던 일, 구수한 흙냄새 맡으며 보리밭에서 종달이 노래소리를 회상해본다. “가난해도 정직하게 살아라. 남의 빚 보증서지 말아라. 꾸이는 것보다는 베풀며 살아라......”라는 어머니의 교훈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른 봄 따사한 양지바른 쪽에 할미꽃이 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온통 산은 진달래 꽃으로 물을 들인 것 같다.
어릴 때 같이 놀던 내 또래의 동네 조무래기들 달이, 상욱, 상기, 재열, 옥자, 인순 이렇게 공묵 뒷산에 진달래 꽃 꺾으러 갔던 지난날들도 떠올려 본다.
너무도 고목이어서 나무의 나이는 모르지만 동구 밖 팽나무 밑에는 쉬어가는 사람들로 즐비하다. 5일마다 상주장이 열릴 때면 예외 없이 쉬어 가는 장돌뱅이 문둥병자가 있다.
코가 뭉그러지고 눈썹이 다 빠져서 허옇고 손에는 고름이 난다.
이맘때가 되면 언제나 낙동 운평 재너머에서 오는 문둥병자가 쉬어가는 팽나무란다.
장날 이 시각때면 어깨에 망태기를 메고 머리에는 모자를 쓴 그 문둥병자가 우리친구들과 늘 마주친다. 오늘은 여느때와는 달리 보이지 않아 불길한 예감이 들여 머리끝이 섬짓했다.
어디엘가고 없단 말인가?
이날오후 우리는 갑장산 밑에 진달래꽃을 꺾으러 동구밖 팽나무를 지나 개울을 건넜다. 얕은 언덕 아래로는 실개울이 흘렀고 그 개울 양옆으로 배추, 상추, 쑥갓, 아욱, 시금치, 두릅, 냉이, 도라지가 심어져 있는 밭이 있었다.
뒷산 약간의 언덕을 지날 무렵이었다. 앞에서 “푸드득”하고 새가 나는 소리가 들렸다.
산기슭에 만들은 따비밭에 종달이가 새끼를 낳아 인기척을 안 탓인지 새끼 보호 본능에 못이겨 나는 모양이다.
무덤 몇 개를 지났다.
무덤사이로 원추리, 고사리, 제비꽃이 제법 싹이 돋았다.
가파른 바위 담을 지나는 길에는 할미꽃이 꽤나 피었다.
이른 봄 산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꽃 인지도 모르겠다.
돌담뒤에 망개넝쿨이 있고 그 뒤에 진달래가 만발하여 소복소복 꽃 뭉치가 모여 있었다. 가끔 동리 어른들 하는 말 불현 듯 뇌리를 스쳐간다. 문둥병자가 아이를 잡아먹으면 병이 났는다고 한말이 생각이 난다. 그래서 진달래가 우거진 곳 뒤에 오늘 보이지 않던 문둥병자가 숨어 있지나 않나하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무서워진 나는 함께간 인순이와 같이 꺾자고 제의를 했다. 인순이는 상욱이가 부르면 재빨리 달려 가지만 내가 부르면 모른척한다.
이럴때면 속이 상한다. 상욱이는 우리 보다 넓은 집에 살았다. 놀러가면 언제나 다락에 먹을 것이 있어 대접을 받아온 탓인 것 같다. 또한 나보다 살결이 희고 예쁜 얼굴이어서 상욱이를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뒤늦게 안일이지만 그때에는 인순이가 내가 부르면 왜 오지 않으려 하는지를 잘 몰랐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동갑내기 앞에서 본때를 보여줄 때가 있으리라 하고 다짐도 해보았다.
여하튼 진달래가 우거진 곳 뒤에 장보러 갔다오던 그 문둥병환자가 숨어있지나 않나하고 조심조심 곁눈질도 해가며 한아름 꺾어 가슴에 안고 산을 내려 왔다.
이른 봄이라 만물의 소생함과 같이 나비 등 땅속의 곤충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해 봄 가장 먼저 본 곤충이 흰 나비이다. 흰 나비를 먼저 보면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얘기가 있다. 흰옷 상복(喪服)을 입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지 않기를 속내 바라는 마음 이었다.
이제 세월은 흘러서 어릴 때 진달래 꺾던 친구들이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순이는 어디로 시집가서 살고 있을까?
어머니와 함께한 옛 추억은 오래도록 나의 뇌리에 살아남아 폐쇄의 너울을 걷고 나의 일상을 생기로 이끌어 간다.
어머니는 특별한 것보다는 평범함을, 화려한 것보다는 수수함을 그래서 어머니는 너무 화려한 진달래꽃보다는 철쭉꽃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다. 철쭉꽃은 진달래꽃보다 늦게 피는 꽃이다. 그러나 진달래꽃보다 향기는 조금 못할지 모르지만 오래가는 꽃이다. 화려한 꽃 뒤에는 문둥병자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생각이 들기때문이기도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다. 좋은일 다음에는 흔히 탈이 끼어들기 쉽다. 옛날보다 문명이 발달했지만 요즘 세상일에 외화내빈(外華內貧), 속빈강정, 빛좋은 개살구, 꽃뱀......등의 말들이 생각이 난다.
어머니와 함께하며 정든 고을과 진달래꽃 꺾던 옛산을 오르며 문중의 산소를 찾아보기는 이번이 마지막일런지도 모른다.
미수를 앞두고 어머니와 나와 단둘의 고향방문은 나에게 새로운 삶의 용기를 복돋아 준다. 단풍이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에 봄기운이 흐르면 나무들이 봄을 맞아 꼿꼿이 일어서는 것처럼 밟힌 잔디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듯 내 영혼에 아름답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의성서 나셔서 낙동, 상주, 충주, 서울 어머니의 한평생이 동행한 몇 시간에 내 머리 속에 다시 한번 각인이 된다.
나이가 들면 한해가 잠깐이라더니 봄인가 싶으면 여름이고, 가을, 겨울이 후딱지나고 어느덧 또 한해가 바뀔 날이 멀지 않겠지.
욕심 없고 제 자랑 할 줄 모르며 묵묵히 자기일에 충실하는 사람을 보듯 나는 길가에 민들레에다 함박웃음을 보낸다. 어머니와 함께한 그시간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그리워질 것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 지기 시작한다.
아침이 되고 햇살이 비치면 설한풍(雪寒風) 인동초(忍冬草)도 다시 활짝피어날 그때를 기다리며......
어머니와 함께한 사시사철
김의식
봄이면 아지랑이 눈길따라 먼산의 고사리, 도라지 캐러가던 그 시절.
막 알에서 깨인 병아리들에게 푸른 벌레 잡아다가
노란 부리 주둥이 때를 다투어 벌레들 콕콕 쪼아먹는 등살에 손등 찍히우는지도 모르게 피가 흐르다 말랐다.
여름이면 밀짚모자 햇빛가리우고 사래긴밭 맬때면 졸음에 못이겨 호미질 손등쪼아 흐르는 피, 흙으로 바꾸고 엄마는 앞서있고 나는 아직 뒤따라가기 바쁘네.
뒤돌아 보니 시작이요, 남은 골은 가물가물 아득하기만 하네.
해는 중천에서 작열하는데 왜 이 동생은 아직도 점심가져올 줄 모르는가.
가을이면 혼자 매달려 있기에도 버겁게 늘어진 볏자락.
알알이 벼알 업어 고개 숙여 절을 하지요.
익을 대로 익어지고 찰 만큼 채워져서 말없이 이 세상에 함께한 나날들.
낫으로 베기에는 너무나 안쓰럽다.
벼베어 타작마당 죽정이는 멀리가고 알곡은 소복소복 안으로 모인다.
탈곡기 소리에 장단 맞춰 엄마가 부르는 농가월령가.
돌고 도는 인생의 춘하추동 사시사철 풍월을 노래하네.
겨울이면 은빛칼로 소복이 쌓이는 눈길 안개 헤쳐
소나무가지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눈옆길 사이로 나뭇길 거닐때면
동상으로 얼어터진 발바닥에 진물이 고이니 어머니 밟은 발자국 마다엔 훈김이 설여나네.
밤에는 새끼꼬아 가마니치기 밤이 이슥해지네.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더니 어느새 미수(米壽)가 되어
침침한 눈비비며 서울자식에게 편지쓰며 돋보기 넘어 흐린 두눈으로 읽는 성경 말씀.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워지니 아직도 총기와 생각은 청춘인가보다.
내 가슴에 불을 질러다오
김의식
내 가슴에 불을 질러다오
어머니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잊지 못할 불효심
어머니 살아생전 회개하고 비노니
이 불효자식의 모진 소행 용서하여 주옵소서
새끼 꼬아 가마니 치기
짚으로 가로 지르고 상하를 바디로 쿵
밤새워 친 가마니 한 짝
밤은 이슥하고 사랑방 마실 사람 그득한데
안방의 소문난 효자 우당탕 웬말인가.
밤새워 친 가마니 낫으로 그려 내던지니
우째 이런 일이......
두 손으로 복창치니 천지가 개벽하네
못다 한 공부, 부모 탓
마음의 표현이라네
어머니 향기
김의식
억셀수록 찔레꽃 향기 그윽하여라
찔릴수록 아카시아 냄새 더없이 향기로운데
어머니의 베푸는 삶은 마음속의 끊이지 않는 음악인가.
내가 배 아플 때 ‘내손은 약손이다’라고 만져주신 그 손길
찔레꽃 향기 아카시아 내음새 되어 이시간도 코를 찌르네.
<간증문>
이 믿음 끝까지
나건주 집사
1. 방황의 유년시절
내가 강원도 정선 그중에서도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의 오남사녀의 아홉 남매 중 한가운데인 다섯 번째로 태어나 가난에 찌들은 생활속에서도 교장선생님이신 아버지의 품위에 눌려 배를 곯으면서도 도덕과 윤리를 앞세워 피땀흘려가면서도 체신머리 지키려고 애쓰던 중 나로서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곳 초등학교 사친회장(육성회장급) 과수원을 친구 두 명을 꼬시어 서리를 해가지고 나오다가 동네 여우(?)한테 들키어 다른 친구 두 명은 훈방하고 나만 혼내고 호랑이만큼 무서워했던 어머니에게 고자질하는 바람에 관사인 집에도 못가고 동네를 방황하고 있을 때 우연히 나이 드신 전도사님을 만나 교회숙소로 간 것이 나의 첫 교회경험입니다.
그 인연 때문에 전도사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전도사님을 도와드린다고 언덕위에 매달아 놓은 산소통의 종을 주일날과 수요일엔 대신치고(종치는 재미도 있고)자연스럽게 주일학교도 다니게 되고 전도사님께서 시간이 나시면 쪽대 들고 강가에 나가 고기도 잡고 교회 뒤뜰에서 키우는 닭들이 낳은 달걀도 삶아 먹으며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교회만 좋아하게 되었습니다.(이땐 교회에서 전도사님이 제일 높은 줄 알았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장선생님이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은 접어야 했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집요한 설득으로 일 년 후에 중학교 진학을 조건으로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이고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학교에서 아버지의 빽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나이에 기능직 공무원(?)이 되어 창피함을 무릅쓰고 열심히 급사 일을 하였습니다. 요새 같으면 택도 없는 일이지요. 일년 후 중학교 간다는 기대도 잠시뿐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 속에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있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반항하게 되었고 그런 나를 붙잡고 설득하시는 어머니한테 크게 야단 맞고 벌칙으로 그만할 때까지 지게 지고 산에 나무해 오라는 엄명을 받았습니다. 지게질한 게 일 년이고 급사 생활 일 년 이렇게 하여 나는 본의 아니게 삼수를 하고 결국엔 동생과 같이 중학교를 입학하였는데 그땐 정말로 쪽팔려 학교를 포기하려고까지 했었는데 내 마음을 어머니가 헤아려 주셨는지 아버지 몰래 우연한 기회에 어머니의 묵인 하에 가출 아닌 가출을 하여 자식 사랑뿐인 어머니의 묘수로 다른 중학교에 전학하여 어렵게 학교를 다니면서 죽어도 졸업은 하겠다고 새벽엔 신문배달하고 일요일이나 공휴일엔 아르바이트 한답시고 끼키( 아이스케키)통 들러 메고 짜베기(꽁짜로)로 극장에 들어가 팔다가 들켜 화장실 청소에 극장 간판(옛날엔 초대형)올리고 내리는데 부역하고 풀려나온 일. 고 3 때는 무면허로 야간택시운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엔 야통증이 있어 통행금지시간에만 운행하는 택시)하다가 승객인 짭쌔(형사)한테 들키어 훈방 당한 일 .친구들과 어울려 우리들을 조금은 이해하여 주시는 생물선생님의 퇴근길을 막고 막걸리사달라고 재롱(?)떨어 막걸리 사시게한 일. 기타 글로 표현하기엔 쑥스러운 여러 일들.......그때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중고등학교를 퇴학 안당하고 무사히 졸업한 것 같습니다.
2. 기드온과의 인연.
군생활의 시작도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입영 장정을 태우고 논산훈련소로 향하는 야간 열차 안에서 인솔 기간병을 폭행한 게 나의 군대 생활을 어렵게 한 최초의 사건이지요. 논산훈련소를 마치고 광주 상무대에 있는 포병학교에서 사격지휘 교육을 7주간 받고 전방으로 올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 )입니까? 주특기 상관없이 재수 없게 차출 당하여 유격 조교가 되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 당시엔 훈련받다가 죽으면 개죽음이지요. 지금처럼 어디에다 항의합니까? 재수 좋으면 국립묘지나 갈까.....그리하여 훈련 중에 사고로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월남전에 참전하여 죽더라도 전사자로 처리되면 부모님께 효도라도 한다는 생각에 참전자원 하였는데 유격대 인사계님의 반대에 부딪쳐 특명이 나지 않아 할 수 없이 취사반으로 달려가 옛날성질 되살려 뭐 두개 양손에 들고 행패를 부렸더니 유격대장님이 영창대신 월남 보내줄 테니 절대로 죽지 말고 월남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시면서 저의 손을 꼭 잡아주셨고 3개월 후 유격대장님과 나는 월남에서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기드온 남선교회에 가입하면 안 되는 데(월반이니까) 그것 또한 인연이라 생각되는군요. 왜냐하면 월남에서 작전 투입되기 전 군장검사와 군목(군승)님의 기도가 있을때 나도 모르게 오~하나님! 하고 탄식이 절로 나오고 주머니 속엔 언제나 기드온이란 파란 성경책이 들어 있었고 그 기드온성경책이 부비츄렙에서 나를 지켜준 적도 있습니다. 한 번은 군목님의 기도에 불교 다니는 옆 전우가 한숨을 크게 쉬면서 오~하나님 하기에 "넌 쌔끼야 절에 다니는 놈이 나무아미타불을 찾아야지 왜 하나님을 찾느냐"고 했더니 저절로 나오는데 ‘어찌합니까? 꼭 살아 와야지요.’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그 작전에서 전우 몆 명 잃고 우리는 약속대로 살아왔습니다. 그 후로는 항상 내 정글복주머니엔 기드온성경책이 들어있었고 내가 참전한 18개월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니 기드온과 나의 인연은 보통이 아니고 나를 살려준 생명책입니다 .덕분에 무사히 귀국하고 제대하여 어렵시리 대학을 졸업하고 더 어렵게 이숙자 권사와 결혼하여 아들딸 하나씩 낳아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3. 명성교회와의 인연.
나에게 명성교회를 알게 하고 당회장 목사님 말씀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믿음을 알게 도움을 주신 김영희 집사님께 감사드리고 지금도 어린 시절의 전도사님과 집사님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명성교회에 등록하기 전 길동에 있는 개척교회(82년쯤)에 승합차는 있는데 운전할 사람이 없다기에 교회생활을 다시하고 싶어서 자진하여 운행을 하게 되었습니다.목사님과 성도님들을 태우고 다니면서(주일에만)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였는데 나와의 인연이 아닌지 내 성질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세상속의 일로 인하여 장로님과 멱살잡이를 하고 교회에 다시는 안가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몇 년을 세상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나의 눈을 다시 뜨게 하고 명성교회를 알게 하신 분이 김영희 집사님이십니다. 아무 목적도 없이 주일 낯 예배에만 교회에 나가 차량 안내하는 집사님들과 다투거나 예배시간에 졸다가 돌아오는 게 나의 교회생활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을 힘들고 어렵게 만든 I.M.F시절 문득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되는 한순간 저는 교회생활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되어 그전까지는 어영부영하던 교회생활을 모 아니면 도란 식으로 교회생활을 하자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 시작한 것이 이숙자 권사의 반대를 무릅쓰고(사실은 베델5기 끝나고 원주 수양관에서 당회장 목사님께서 봉사부서를 써내라고 하실 때 차량봉사 하겠다고 하였는데 소식이 없기에 명성교회는 인물이 많아서 봉사도 마음대로 못하고 서류심사에서 탈락된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고 내 성질은 누구보다 잘 아는 이권사가 봉사한답시고 시험 들어 그나마 교회에 안 올려고 하는 나의 술수로 알고 봉사지원서를 빼냈다고 합니다)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차량봉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 원주 수양관에서 숙소를 함께 쓰게 된 임현재 집사님과 정화영 집사님을 만나 기드온에도 가입하게 되었지요. (기드온에 가입하기 전 50년생 중에 최모 회장 집사님이 남선교회에 가입하라는 엽서가 여러 통 왔었는데 그때마다 이권사한테 삼수하여 50 년생짜리들과 학교 다닌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교회에서까지 어찌 알고 50년생 남선교회에 가입하라고 엽서를 보내느냐고 화를 내면서 그 엽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일도 있습니다.) 좋은 교회에서 좋은 목자 만나고 또 좋은 믿음의 차량부 집사님들이나 나를 월반시키어 기드온집사님들을 만나게 하시고 흔들림 없이 교회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4. 이 믿음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우리가정에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가정은 세상 속에서 방황하고 헤매이다가 세상 속에 버려졌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가정에 믿음의 옷자락을 주시고 그 옷자락 놓지 않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믿음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정에 임하시어 성령충만 은혜충만 모든 영광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믿음의 가정으로 지켜주시옵기를 우리가정을 끝까지 지켜주실 예수님이름으로 감사기도 드립니다. 아~멘.
<간증문> 신비로운 기도의 힘
김형복 집사
1. 하나님 은혜로 특별 수사요원으로 채용되다.
저는 직장을 오로지 천직으로 생각하고 33년 동안 몸에 배인 경찰관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경찰관 간부부터 시작한 계급이 높은 사람은 60세에 정년이 되지만, 저는 순경부터 시작하여 57세에 정년퇴임이 되니 남보다 3년 일찍 직장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년퇴임 후 하나님 은혜로 국민체육진흥공단 경정운영본부에서 사설 경정불법 행위자를 단속하는 수사요원 특별 채용에 어려운 여건과 수많은 경쟁 속에서 하나님 은혜로 합격하여 수사요원으로 3년간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는 3년 일찍이 정년을 퇴직한 여백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신 것입니다.
특별 채용한 수사요원은 경정운영본부 사장님 직속 특별부서로 신분비노출이 기본이고, 수사요원들은 수사∙정보 계통에 능숙하고 30여년 근무 경력자들로 모두가 서울 시내 A급 경찰서 수사∙정보 계장직을 한 사람들이었지만, 오로지 저 혼자만 지방 경찰 출신이었습니다. 경정운영 본부는 하남시 미사리 조정경기장이지만 각 지점은 서울시내와 수도권 대부분 인구가 밀집된 유흥가 지역이고 경기하는 날에는 수천 명이 모이는데 전국적으로 사기꾼, 도박꾼, 조직폭력범, 실업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사설 경정 불법 행위자를 신고한 사람에게는 포상금 200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주기 때문에 크고 작은 신고 사건이 종종 있었습니다.
수사요원들은 신고 사건 접수와 동시에 사건 수사가 진행되는데 사건 전모를 밝히는데 수개월을 요하게 되고 사건 자체가 조직적인 범죄자로 치밀 광범하기 때문에 대단히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였습니다. 그래서 매년 사설 경정 불법 행위자 단속 실적을 보면 대부분 포상금을 받기 위한 신고 사건이고, 수사요원이 인지하여 해결한 사건은 경정 운영본부 창립 이후 한 건도 없었습니다.
2. 사건해결의 은사와 은혜를 받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저에게 하나님께서 2007년도 큰 은혜를 주셨기에 지면에 간증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가까운 하남에 거주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한 시간 일찍 직장에 출근하여 주차장에서 사설 경정 불법 행위자들이 예상지 판매소에서 예상지 책을 구입하여 타지역으로 나가는 고객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감시 근무에 임하였습니다.
2007년 4월 25일 11시 20분 경 이상한 예감이 드는 고객 2명이 예상지 책 3권을 구입하고 주차장에 주차된 고급 승용차(BMW)를 타고 떠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저는 내 차량으로 차량 미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급 승용차는 미사동을 떠나 남양주시 남양주 경찰서 앞 노상 정류장에서 예상지 책과 가방을 들고 모자를 쓴 한 사람의 고객을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놓고 고급 승용차는 다시 유턴을 받아 신속하게 구리시 방향으로 도주하였습니다. 고급 승용차에서 하차한 고객은 잠실에서 마석 가는 일반 버스에 승차하기에 저는 타고 간 차량을 도로변에 주차시키고 미행하기 위하여 버스에 승차하여 버스 뒷좌석에 숨어서 본부 사무실에 지원 요청과 동태를 계속 감시하였습니다. 30여분 지나서 일반 버스를 타고 가던 이상한 고객은 남양주 경찰서 마석지구대 사무실 앞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영업용 택시를 타고 도주하기에 저도 버스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계속 미행을 하였습니다. 마석지구대 앞에서 25여분 지나서 남양주시 수동면 외방3리 마을회관 앞에서 택시에서 내린 고객은 마을회관 뒷길 50m 산길 따라 올라가서 외딴집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현장을 확인하였습니다.
외방3리 마을은 20여 가구로 버스가 하루에 아침 2번, 저녁 2번 운행되는 벽촌이었는데,낙후된 마을에 뜻하지 않은 소나기가 내려서 우산도 없고 들어갈 곳도 없어서 마을회관 출입문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으면서 여러 가지 고심을 하고 검거할 방법이 어려워 혼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이에 비하여 고급 승용차가 의문이 되고, 왜 외방3리 먼 외딴 별장에 드나드는가, 왜 예상지 책을 구입하여 왔으며 별장에 높게 세워진 안테나 등은 무엇인가 의문이 증폭되어 곰곰이 생각하고 기도한 끝에 주민을 상대로 탐문 수사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니 마침 수동기도원이 있었습니다. 저는 별장집 동태를 파악하는 데는 인접된 기도원이 수사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기에 기도원을 방문하여 인사드리러 갔더니 뜻하지 않게 명성교회 수동기도원이고 집사님과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저는 제가 명성교회 안수집사 김형복이라고 인사드렸는데 집사님과 권사님은 저를 믿어주지 않고 거부 반응을 보여서 매우 난감하였습니다. 그래서 명성교회 행정사무실로 전화 연락하여 저의 신분을 확인하고 적극 수사에 협조하게 되었습니다.
별장에 사는 고객은 대학교 다니다가 머리에 이상이 생겨서 전세를 얻어서 수양을 하는데 밤이면 밤마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도박을 하고 술 마시고 남녀가 술 취하여 싸워 울고 조직 깡패처럼 몸에 문신하고 놀다가 아침이면 경정장으로 분산하여 떠나고 주동자 10여명이 사설 경정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3. 은밀한 기도의 힘은 신비롭다.
저는 수개월간 조사한 결과를 광주경찰서에 신고하였고, 드디어 2007년 9월 19일 15시 광주경찰서 강력팀 전원(4개팀 20명) 형사들이 외방3리 외딴집 별장을 급습하여 사설 경정 불법 행위자 9명을 현장에서 검거, 불법 사설 경정 가담자 70명을 조사하여 지금까지 계좌거래액 1,400억원이었으며, 기소중지자 등을 일망타진하였습니다.
이번 사건을 검거∙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지만, 경정장 두목과 경마장 두목들이 연계된 사건으로 경마장 수사팀이 계속 저희처럼 내사하다가 밤 9시경 급습하면 많은 일당을 검거할 것을 계산하고 경마 수사팀을 2007년 9월 19일 21시에 검거하기 위하여 급습한 바, 이미 광주경찰서에서 검거한 뒤여서 그들은 검거에 실패하고 우리에게 검거우선권이 돌아오게 하신 것도 기도의 덕분이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생각되어집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여도 필요한 기도원을 통하여 일망타진하는 교량 역할을 해 주셨으며, 저로서도 잊지 못할 사건이었기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님이시여
김선인
아스라한 시간의 저편
그때 님은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
고고한 울음소리 울리던 날
님은 조용히 웃음지으며,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빛나던 시간속에서나
춥고 바람 부는 날들 속에서도
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님의 품을 떠나 방황할 때
상처입고 피 흘리며 목말라 헤메일 때
님은 나를 부르시며 찾으셨습니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님의 음성 듣고 돌아왔을 때
님은 잔치를 베푸시고 너무도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빛나는 천국. 그곳에 갈 때까지
님의 집에서 님과 함께 있겠습니다.
님이시여. 님이시여
님은 나의주님. 그리스도 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어머니와 예배당
박 기 준
나는 비교적 한가하고 여유가 있는 주일 5부 예배에 조금은 일찍 출석하여 맨 앞줄에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강단 위에 세워진 종탑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아련히 떠오르는 코흘리개 시절의 예배당 모습을 꿈꾸곤 한다.
어머니가 생존하고 계셨다면, 백세를 바라보는 연세가 된다.
옛날 시골에는 정규 교육기관은 없고 동네 개구쟁이들을 몇몇 모아놓고 나이 많으신 훈장님이 한문을 가르쳐주는 서당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오빠들은 서당에라도 갈 수 있었는데, 딸로 태어난 죄로 어머니에게는 그나마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 마땅히 글공부를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에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낭보가 전해졌다고 한다.
읍내에 눈이 파랗고 코가 큰 외국사람 선교사가 들어와 예배당을 세웠고 여자든 남자든 가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무조건 공짜로 글을 가르쳐 준다는 소문을 듣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쿵쿵거리는 가슴을 참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날이 밝자마자 부모님 몰래 예배당을 찾아가 공부를 하기로 작정을 하셨다. 예배당까지는 십 여리가 족히 넘고 특히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러한 물리적인 것 보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배당에 가는 것을 집안에서 알게 된 것이 더 큰 문제가 되었는데, 계집애가 살림하는 거나 배워 시집가면 됐지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예배당을 못 가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한글을 배우는 것이 너무나 신이 난 어머니를 막을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어머니는 예배당에서 글공부뿐만 아니라 성경말씀도 접하게 되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이 우리 집안에 복음이 들어온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지낸 어머니는 교회가 가깝게 있는 읍내로 시집을 가게 되지만 시집살이는 만만치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큰살림을 도맡아야하는 형편인데다 줄줄이 넷이나 되는 딸을 낳게 되는데, 아이들 기르느라 힘들기도 하였지만 아들 손자를 시어머니에게 안겨 드리지 못한 고로 시집눈치 보기에 급급하여 예배당의 "예"자도 내비치지를 못하고 처녀 때의 믿음을 살리지 못하였으나 다행히도 밑으로 형과 나 두 아들을 낳는 덕분으로 2% 부족하였던 며느리로서의 할 도리를 하게 되어 시집 어른들에게 체면도 서게 되었다. 그럭저럭 살림의 여유를 찾으면서 용기를 내어 20년 가깝게 가지 못하던 예배당엘 다시 다닐 수 있었고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생생하게 기억되는 내가 만난 최초의 예배당 모습은 “ㄱ”자처럼 생긴 엄청나게 큰 기와집이었다. 지금생각하면 그저 잘 사는 양반집의 규모였을 터인데, 어린 나로서는 무척 크게 느끼게 된 것 같았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이라 그런지 예배당 건물은 "ㄱ" 자 모양으로 되어있고 "ㄱ"자 의 꼬부라진 곳에 강단이 있으며 그곳에서 목사님이 좌우를 번갈아 보면서 설교 말씀을 전하는데, "ㄱ"자의 긴 편이 여자 신도들의 좌석이고 짧은 쪽이 남자들의 자리로 남녀의 자리가 완전히 구별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출입하는 문도 별개로 되어 있었다. 예배당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신발을 벗어야 되는데, 신발 벗는 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어서 신발이 귀하던 때라 어쩌다 새 신발을 신고가면 영락없고 그런대로 신을 만 하다고 생각되는 신발도 간수를 잘하지 못하면 잃어버리는 것이 다반산데, 바꿔 놓고 간 다 헤진 고무신을 끌고 집까지 가는 심정도 말이 아니지만, 어머니에게 혼날 생각을 하면 아예 집에 가고 싶지가 않을 정도였다.
신발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신발을 벗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구멍 난 양말이 또 문제가 된다. 발에 칼이 달렸는지 그 당시 양말은 잘도 떨어졌다. 양말의 앞부분이 떨어져 발가락이 보이는 것은 그나마 감추기가 쉬웠다. 떨어진 양말의 부위를 발바닥으로 끄집어내려 잘 밟고 있으면 되는데, 뒤꿈치가 구멍 난 것은 대책이 별반 없다. 그렇지만 개구쟁이 시절 그런 고민은 잠깐이고 장난치다보면 어느새 구멍 난 양말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해맑은 웃음만이 가득하기만 하였다.
세월이 지나 그런 고풍스러운 예배당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읍내 중앙 통에 새로운 예배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이 내가 만난 두 번째 예배당 모습이다.
시골에서는 제법 큰 건물의 예배당을 신식으로 지었지만 아직까지도 남녀가 내외를 하였는지 두꺼운 천을 늘여 뜨려 남녀의 자리를 엄격하게 구분하였는데, 목사님은 강단위에서 천으로 갈라놓은 남녀의 무리를 번갈아 보며 말씀을 전해야만 했을 것이니 나름대로는 재미있는 풍경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고 남녀의 자리를 구분하였던 거추장스럽던 커튼이 자연스럽게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마음속에 드리워졌던 장벽을 쉽게 허물지 못해 남녀의 자리가 확연히 나뉘었는데, 강단에서 내려다보아서 우측에는 남자 자리요 좌측은 여자 자리다. 집에서 잘 지내던 가족들이 예배당에만 나가면 남녀의 자리로 각각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마치 소 닭 쳐다보듯 하다 예배가 파하면 그때서야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 시절의 풍경이었다.
그 당시 교회는 종탑을 높게 세워놓고 예배시간 전에 초종과 재종을 치는데, 시계가 그리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성도들은 집에서 종소리를 듣고 서둘러 준비하여 예배당엘 오곤 하였다. 지금 우리교회 강단위에 세워 논 종탑위에 십자가만 달려있으면 옛날 내가 다니던 예배당의 종탑과 거의 비슷한 것 같다. 또 연보 돈 드릴 때 가끔은 민망하기도 하였던 생각이 난다. 헌금 드리는 시간이 되면 지금처럼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것이 아니고 마치 잠자리채처럼 검은 천으로 만든 자루를 긴 막대기에 매달아서 사용하였다. 그래서인지 예배당엘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이 있으니 예배당엘 갔더니 잠자리채를 돌려서 돈 걷어간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연보 돈을 받아 헌금을 드리게 되는데 종이돈은 단위가 높아 어쩌다 한 번씩이고 주로 동전 몇 개를 받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동전을 헌금주머니에 넣다보면 쩔렁하는 소리가 나게 되고 이 소리가 나에게는 왜 그리 크게 들리는지 옆에 있는 친구들 보기가 창피하여 얼굴이 빨개지기도 하였고 어쩌다 요령껏 자루 벽면에 잘 붙여 넣다보면 종이돈을 드릴 때처럼 소리가 나질 않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시선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 너무 기분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회의 예배 문화가 바뀐 것은 회중석에 긴 의자가 들어오고 부터가 아닌가 여겨진다. 물론 다른 여건의 변화도 있었겠지만 의자에 앉다보니 신발을 벗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녀가 섞여 앉게 되니 곳곳에서 가족이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만큼 예배의 분위기도 부드러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덕분에 또래 여자아이들과도 부끄럼 없이 잘 어울릴 수 있었으니 굳이 어머니가 챙기지 않더라도 예배당에 가는 것이 재미있고 기대가 되기도 하였다.
희미한 흑백 필름이 머릿속을 한참 스치고 지나가는데, 부 목사님이 인도하는 예배 전 준비찬송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요즘 초현대식 교회가 곳곳에 세워지면서 내가 어렸을 때의 예배당의 맛을 느끼기는 쉽지 않지만 다행히도 우리교회의 종탑이 잠시나마 나의 마음을 이렇게 따듯하게 만들어주니 감사하기 그지없다.
반세기 동안 내가 만나본 예배당의 모습을 떠 올려 보면서 예배당은 많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내 믿음은 어느 정도로 성장하였을까? 복음을 받아드린 특별한 계기나 동기가 분명하지 않아서인지 평생을 믿노라 하였지만 뜨겁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차지도 못한 나의 믿음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부족한 대로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또한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라 여겨진다. 매일 새벽마다 자고 있는 내 머리 곁에서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어머니의 기도를 잠결에 들으면서 커왔지 않았는가. 지금도 우리 집에는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찬송가와 성경책을 귀하게 잘 보관하고 있다. 문득 생각이 날 때면 성경책을 열어보게 되는 데 몇 장 넘기지 않아 옛 한글체로 쓴 거친 어머니의 글씨를 보게 되고 어느새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리어 예배당엘 가던 어린이가 되어버린다.
요즘 나에게 기도 제목이 있다면 어머님의 귀한 믿음이 작년에 이룬 내 큰 아들의 가정에, 또 앞으로 이룰 막내의 가정에 잘 이어져서 자자손손 대를 이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다.
계절의 끝자락에서
우 성 훈
찬란했던 계절도
숲속의 교향악도 뒤로한 채
애잔히 번지는 가을 햇빛
산길 따라 길게 드리운다.
계절의 끝자락에서
여민 가슴속을
파고드는 공허로움은
떠나는 계절의 탓일까.
산길 가장자리에
가로 누운 아카시 나무
삶이 무거워
아예 눈을 감으려나.
안스러운 청다래 넝쿨
초롱 눈뜨고 감아 안는다.
이웃 물박달 나무
정결한 삶이고 싶어
오늘도 껍질을 벗고 벗는
인고의 세월을 견딘다.
무거운 짐
때 묻은 내속의 껍질 벗어
떠나가는
저 계절에 끝자락에
실어 보낸다.
길게 드리운 가을햇살은
어느새 등 뒤로 다가와
공허한 나의 가슴을
따스함으로 채워온다
가을에 만나고 싶은 사람
박종건
가을은 저 신라 첨성대의 별빛으로 쏟아지며 달려오고 있습니다. 릴케의 시 구절처럼 ‘주여,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라고 외치며.
여름의 거나했던 소문들은 스러지고 새로운 계절을 알리는 신호가, 여기 저기 보입니다. 풀잎도 성장을 멈추고, 물기를 내리려고 준비하는 많은 수목들. 길을 가다 구석에 버려진 사금파리 위로 떨어지는 가느다란 햇빛도 보았습니다. 사금파리가 반사해 오는 창백한 빛살 끝에도 가을은 문득 저미게 묻어납니다.
무엇보다 가을은 9월특별새벽집회가 시작되면서 옵니다. 그리하여 영혼에 잔뜩 물이 오릅니다. 정욕의 살을 줄이고 영혼을 살찌워 가을을 맞이합니다.
이 가을에 난 백악관의 뒤뜰로 가려 합니다. 그 곳에 살던 가슴 따스한 사람하고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내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정원을 걷고 싶습니다.
그는 미국의 26대, 27대 대통령이었던 데오도어 루즈벨트(Thedore Roosevelt)입니다. 32대 대통령을 지내며 세계이차대전까지 4선에 당선된 유명한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의 삼촌이기도 합니다.
1858년, 뉴욕에서 태어나 1919년 까지 살다간 데오도어 루즈벨트는 세상에 잘 알려진 대로 노일전쟁의 조정, 모로코 문제의 해결에도 힘썼으며, 1906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또 그는 ‘미국과 세계전쟁’ 이라는 저서도 펴냈습니다. 심지어 백악관의 시종들조차도 그를 사랑하였다 합니다.
어느 날, 백악관의 시종인 제임스 아모스의 아내가 우연히 대통령과 대화 할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아내는 자신은 메추라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녀를 위해 메추라기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답니다.
언젠가 밤이 깊어갈 무렵, 시종 제임스 아모스의 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물론 시종의 집도 백악관 안에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긴급한 전화임을 알고 그는 매우 긴장하여 급하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 자넨가, 지금 백악관 뒷 정원에 메추라기가 앉아 있으니 어서 부인과 함께 나가보게. 아, 글쎄 자네 부인이 메추라기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질 않았는가!’
그리고 대통령은 전화를 끊었습니다.
시간은 흘러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물러나고 민간인의 자격으로 백악관을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백악관 뜰을 거닐며 정원사와 청소부와 마주 칠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습니다.
‘아 애니, 잘 있었나, 제임스?’
특히 주방 하녀 앨리스를 만났을 때,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앨리스 아직도 옥수수 빵을 만드는가?’
그러자 그녀는 하인들을 위해서만 만들고 있고, 요즘은 윗분들은 드시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아니 이런, 그 사람들은 진짜 맛을 모르는군, 내가 태프트 대통령을 만나면 말해주지. 그리고 앨리스, 자네가 만든 옥수수 빵을 몇 개 주겠나?’
루즈벨트는 그 빵을 받아들고 천천히 뜯어 먹으며 말하였습니다.
‘앨리스, 난 자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빵을 맛있게 만든다고 말하고 싶네. 수고하게.’
앨리스는 어쩔 줄 몰라 눈물을 흘리며 그 노신사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가을에 나는 백악관의 뒤뜰로 가 그의 시종처럼 빵을 굽는 상상도 해 봅니다. 마음이 누구보다 따뜻한 그 사람과 어린 시절, 배급 타 먹던 옥수수 빵을 함께 먹고 싶기도 합니다. 육이오 전쟁 후, 어린 시절. 그 딱딱하고 씁쓸한 옥수수빵을 먹던 기억이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냄새 풍기는 그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또 생각합니다. 내 옆에 이런 아름다운 사람이 열사람 있으면 좋겠다고. 그럼 어쩐지 온 세상이 아름답고 평화로워지며 하나님도 저 하늘에서 빙그레 웃고 계실 거라고. 참, 왜 열사람 이냐구요? 그건 아브라함의 기도를 잠깐 빌렸습니다. 몇 자 적는 동안에 벌써 내 마음이 아늑하며 평온합니다. 좋은 생각을 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이 가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데오도어 루즈벨트 같은 사람입니다. (끝)
바람(風)
최 문 수 지음
이번 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웠다.
밤엔 열대야가 몹시 심하여 새벽이 되어도 기온은 떨어 질줄 모르고 바람 한 점 없는 짜증스러운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 되었다.
이때 문득 바람이라도 불어 줬으면 얼마나 시원 할까 하는 생각이 났다.
바람(風)!
너는 누구인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냄새도 없는 바람!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바람!
바람아!
너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모른단다.
봄엔 따뜻한 태양과 함께 얼었던 대지를 녹이고 씨앗의 싹을 틔우며 초목의 움을 돋게 하지, 여름엔 시원하게 더위를 식혀주고 오곡을 무르익게 하며 과실 나무에 꽃을 피우지, 또 태풍으로 바다의 더러움을 청소하기도 하잖니?
너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구나.
한 여름 무더위에 시달릴 때 산 위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특히 이번 여름 같은 땐 네가 정말 아쉽구나.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고운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솟는 땀을 씻어 준데요.”
바람(風)!
너는 내가 숨 쉴 수 있고 활동 할 수 있게 하는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넌 우주 공간을 자유 자재로 다닐 수도 있고 어느 곳에서도 갈 수가 있어 좋겠다. 그러나, 너는 기분이 좋을 땐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지만 화가 날 땐 무서운 태풍으로 돌변하여 우리에게 커다란 해를 줄 수도 있단다.
너의 이름이‘사하라’로‘쓰나미’로 붙여 지면서 너의 무서운 괴력은 대 자연을 파괴하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잖니?
내가 네게 간절히 부탁한다.
제발 성내지 말아라. 우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제발 훼손하지 말아라.
봄엔 명주 바람으로 다가와 새싹을 돋게 하며 향기로운 꽃을 피워라.
여름엔 순풍으로 산천 초목을 무성하게 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노래 하게 하라.
가을엔 상풍(商風)으로 오곡을 무르익게 하여 농부들의 수고를 풍성히 채워 주거라.
결실의 계절에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바람이 되거라.
우리가 지금까지 너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구나,
앞으로,
우리가 너의 그 본래의 기능을 잘 발휘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 줄께.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며 공기를 정화하는 일에 전심전력 할 것이야.
자동차 연료도 천연 가스로 교체 해 가고 있잖니?
장차 물로 가는 자동차가 개발 되고 에어컨이나 냉장고 등 가전제품도 프레온 가스 대신 다른 대체물로 바꾸는 연구가 계속 되고 있단다.
바람, 너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주겠다. 고마운 바람으로 말야.
코스모스
최 문 수
산뜻한 들녘에
실바람 하늘하늘
햇살이 따가워
붉은 얼굴 되었나?
달빛이 부끄러워
분홍 볼로 변했나?
별빛이 차가워
하얀 입술 되었구나
여린 손 가는 옷깃에
달빛 사랑 고이 안고
가을 길 들녘 위에
향기로운 미소로
산들산들 가을 길에
고운 님 맞이하네.
한가위
최 문 수
휘영청 드높이 솟은
둥근 달을 바라보며
간절한 나의
작은 소원을 빌어 본다.
휘영청 드높이 솟은
둥근 달을 바라보며
덧없이 흘러간 나의
60평생을 돌아 본다.
휘영청 드높이 솟은
둥근 달을 바라보며
암울 했던 나의
과거를 회상 해 본다.
휘영청 드높이 솟은
둥근 달을 바라보니
어두웠던 나의
과거 그늘이 벗겨진다.
휘영청 드높이 솟은
둥근 달을 바라보니
우울하던 나의
어두운 마음이 밝아진다.
[채린이네] 가족신문 덕담중에서
유헌열
"사고를 바꾸면 큰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어느 여행자가 낚시터에 가서 고기를 낚는 낚시꾼들을 보고 있었는데 한 낚시꾼이 고기를 잡으면 자로 재보고 자보다 크면 물속으로 던지고 자보다 같거나 작으면 좋아하면서 바구니에 담는 것이었다. 보고 있던 여행자는 하도 이상해서 낚시꾼에게 물어보게 되었는데 낚시꾼이 하는 말은 "우리집에 있는 프라이팬이 자크기만한 고기밖에 굽지 못해 큰 고기는 버리는 것입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프라이팬을 바꾸지 않으면 큰 고기는 계속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 것이다. 우리의 사고가 프라이팬이고 기회가 고기라면 우리의 사고를 바꾸지 않는 다면 무수한 큰 기회들을 모두 버리게 될 것이다.
채린이네 가족들은 자신의 사고를 바꾸지 않아 큰 기회들을 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2004.11월)
준비를 하자"
일생에 기회는 3번 온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그 기회가 언제 왔다가 갔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때 추첨에서 당첨되어 금반지를 받은 것이 기회인지, 그러면 그 다음의 기회는 또 무엇인가 생각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안 왔다면 언제 올 것인지...일생에 기회가 3번 온다는 말은 희망을 갖고 살라는 메시지 일 것이다. 우리에게 기회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기회를 놓치고 있을 뿐이다. 꿈에 Lotto번호를 얻었다고 해도 Lotto를 사지 않으면 당첨의 기회는 생기지 않을 것이며, 회사에서 승진의 기회가 있어도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면 승진의 기회는 오지 않는다.
채린이네 가족들은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미리 미리 준비를 하기 바라며, 2005년은 준비를 많이많이 하여 바라는 모든 기회가 잡히기를 기대한다.
(2005. 1월)
"부자가 되려면"
가난한 젊은이가 부자노인을 찾아가서 부자 되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노인이 감나무를 가리키면서 부자 되는 방법을 배우려면 올라가라고 하여 젊은이가 감나무에 올라갔는데, 중간쯤 올라가니 가지에 매달리라고 한다. 젊은이는 다시 큰 가지에 매달렸는데, 노인이 왼손을 놓으라는 것이었다. 오른손으로 온 힘을 다하여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려 있었지만 노인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래서 젊은이는 팔이 아파 떨어질 것 만 같아 노인한테 "비결은 언제 알려 줄 거예요?." 하고 볼멘소리로 물었다. 그때 노인의 한마디는" 만약 돈이 들어오면 지금과 같이 꽉 잡고 절대 놓지 말게" 그러면 부자가 되네. 이 노인의 말은 낭비하지 않는 것이 곧 부자가 되는 방법임을 얘기한 것이다.
채린이네는 근검절약을 생활화하였음 한다. (2005. 4월)
인간의 마음
인간에게는 세 가지 형태의 마음이 있다고 한다. 우선 육체를 움직이는 생리적인 마음을 들 수 있고. 좀 더 깊은 마음으로는 '겉마음'과 '속마음'이 있다. 오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겉마음'은 세상에서 느껴지는 욕망을 '속마음'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속마음은 스스로 이게 좋다, 나쁘다는 판단을 하거나 결정하지 않는 다고 한다. 단지 겉마음의 '전달'에 따라 겉마음이 가라고 하는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샘물처럼 힘을 솟아 낸다. 따라서 지혜가 있는 이는 속마음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만, 어리석은 이는 속마음을 통제하지 못해 '상황의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가 생긴다. 풍성한 가을에 채린이네 가족은 속마음을 원하는 대로 움직여서 상황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기가 원하는 풍성한 결실이 만들어 지기를 기대한다.(2005. 9월)
일하는 태도를 바꾸자
S은행 석수동 지점 근무 청원 경찰이 석수지점 수탁고 500억의 절반이 넘는 300억을 예금으로 유치했다. 더욱 놀란 것은 정식 직원이 아닌 용역직 중졸 출신의 청원경찰의 신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20여년간 1300여명의 고객의 사소한 모든 정보를 대학노트에 기록하고 고객에게 맞춤서비스를 실행하였으며, 만족한 고객들이 유언과 유산까지 남겨주고, 또한 고객의 탄원에 의해 정식직원이 된 우리나라 역사상 매우 드문 일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주인공 한원태씨는 3가지 원칙을 갖고 실행에 옮겼다. 첫째 고객을 위해서는 은행 안과 밖이 없고, 둘째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셋째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성공은 무슨 일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일하느냐에 결정된다" 는 점이다.
채린이네 가족들은 현재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일하는 태도를 다시한번 돌아봄이 어떨까?(2006. 3월)
통합적 안목을 갖자
중세기에 있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어떤 철학자가 어느 마을을 지나면서 건축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 세 사람을 보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라고 질문을 하였다. 맨 앞에서 일하고 있던 인부가 "벽돌을 쌓고 있소", 그 옆에 있던 인부는 "벽을 쌓고 있소" 라고 대답을 하였다. 하지만 맨뒤에 있던 인부는 생기넘치는 표정을 지으면서 "성당을 짓고 있지요"라고 말했다. 이들의 대답을 들은 철학자는 세사람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예견하였다.
"맨처음 대답한 인부는 눈앞의 벽돌만 보고 있으므로 한 평생 벽돌만 쌓다 끝날 것이며, 두번째 인부는 벽의 크기만큼 보았으니 공장장이나 기술자까지는 발전할 것이고, 마지막 인부는 완성되지 않은 성당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크게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통합적 안목을 갖아야 함을 철학자가 지적한 것이다. 우리 채린이네 가족도 어떠한 일이든 통합적 안목을 갖고 일을 한다면 좋은 결과가 올 것이다
(2007. 8월)
어린 시절의 추억
정 화 영 집사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참 바쁘게 살아왔다.
앞뒤 좌우를 돌아 볼 틈이 없이 열심으로 일하며 달려왔다. 그 결실로 직장에서 대우도 받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딸과 사위도 얻게 되었
다.
하지만, 지나간 삶을 뒤돌아보면 대체로 건조한 삶이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그래서 우선 작은 것부터 실천해 보기로 했다.
출근길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숨을 헐떡이며 횡단보도를 건널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육교를 이용하기로 했다.
우선 뛸 필요가 없어서 좋고 교통신호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좋기 때문이다.
회사를 퇴직하여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않았을 때 어린시절 살던 동네에 가 보았다.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4~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국민학교 다닐 때이다.
유난히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날 따라 검정 비로도 치마와 나이론 양말을 신으신 선생님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선생님이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더욱 선생님이 생각난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선생님이 사진을 함께 찍자고 하셔서 밤잠을 설치고 마음을 설레었던일,
글짓기 시간에는 나를 지목하셔서 큰 소리로 읽고 의기양양 했던 일,
사친회비를 못 낸 아이들 집에 가서 부모님께 사정을 듣고 오라고 하셔서 우쭐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아~~ 그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신지 보고 싶구나...
6.25 사변 때는 안양으로 피난 갔다.
구불구불한 길, 냇가의 징검다리, 밥짓는 굴뚝의 연기가 그리워진다.
특히 작두놀이 하다가 동무의 손가락을 자른 일로 멀리 도망가 숨었던 일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는 참 신나게도 놀았다.
가끔 잠을 청하다가 그 시절을 회상하면 흥분하여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도한다.
특히, 방학이 되면 아침에 나가 "화영아~ 밥먹어~~" 하고 엄마가 부를 때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냉냉이 전차가 지나는 마포 길에서 굴렁쇠를 굴리며 놀았던 일,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로 항상 주머니가 두둑하여 좋아 했던 일,
동네 골목에서는 팽이치기, 땅따먹기, 제기차기, 말타기하고, 신작로에서는 자치기, 비석치기, 연날리기, 오련말놀이하고 밤에는 술레잡기, 다방구놀이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때 그 동무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구나...
어제는 옛 추억들을 뒤로 한채 실로 오랫만에 인사동 길을 걸었다.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과 어렸을 때의 향수가 배어 나옴을 느낄 수 있었다.
화랑에도 둘러보며, 한결 마음이 뿌듯해 졌다.
이제 의도적으로도 주변을 돌아보며 남을 배려하며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우리 곁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도 찾으면서 살고 싶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