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종말(文終)
사람이 나이들어 자신의 연한이 다함을 알게 되면 말이 줄어듭니다. 젊고 혈기가 있을 때 부렸던 허세도, 자그마한 지식으로 번잡하고 산만하게 떠들며 다니던 경험들에 대한 반성과 부끄러움 때문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때 하는 말들은 짧고 간단하지만 삶을 통해 얻은 지혜와 교훈이 진하게 녹아있어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분들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예외없이 마지막 순간의 말들이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귀한 보배들입니다.
저는 대학시절 아버지의 강권으로 교회에서 '운구위원'을 했습니다. 당황했고 정말 싫었지만 집요한 아버지의 설득에 굴복했습니다.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좋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음이라, 남은 자(산 자)들을 이것을 마음에 둘찌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전도서 7: 2,4)
사랑하는 아들이 인생의 끝을 살피며,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에 그만 덜썩 운구위원을 신청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빈부차이가 심한 곳에 있었고, 특히 그 교회에는 교회묘지가 있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인들, 독거노인들이 자신의 마지막을 위해 많이 출석하는 곳이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이러한 노인들을 정성껏 장례를 치루고 교회묘지에 아무런 댓가없이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분들의 장례식이 한 달에도 여러차례 있는데, 대부분 가족이 없어 관을 들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운구할 사람을 정해 장례를 돕도록 했습니다. 운구위원이 바로 관을 드는 사람입니다.
관을 드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저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죽음이 있고, 빈약하고 안타까운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장례식장이 화려하고 조화로 그득하고 사람들이 분주하냐 아니냐에 따라 풍성한 죽음과 가난한 죽음이 나뉘는 것은 아닙니다. 화려하지만 가난한 죽음이 있고, 조촐하지만 아름다운 향기가 넘치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에는 반드시 죽음의 당사자의 아름다운 삶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지친 삶을 살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떠난 자리는 언제나 풍성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풍성한 장례에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인의 삶을 서로 이야기하며 그 분이 남긴 교훈을 마음에 새깁니다. 정말 닮고 싶은 죽음도 많이 있습니다.
한고조(유방)을 도와 '살림'(사마천은 곳간의 자물쇠를 잘 지켰다고 표현합니다)을 잘하여 창업공신이 된 소하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여러차례 삶의 위기에 처합니다.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함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었던 소하는 급기야 자신이 도왔던 고조의 의심도 여러 차례 받습니다.
소하의 삶을 보면서 지도자로 사는 삶이 별로 부럽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과의 문제가 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오늘 소하의 마지막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자 외딴 곳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담장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많은 자금을 관리하고, 개인적으로 많은 재산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이랬습니다.
그리고 짧지만 진한 말을 남깁니다.
"만약 나의 자손이 현명하다면 검소해야 함을 알 것이고, 만약 그렇지 못한다 한들 권세있는 자들의 목표가 되지 않을 것이오"
그가 세상을 떠나고 그에게 부여된 시호는 문종후(文終侯) 였습니다. 문(文)은 글을 뜻하는 말이지만, 아름답다, 아름다움이 선명하다,곱고 아름답다(鮮美)는 의미가 있습니다.
살아서도 최고권력자의 뒤에 숨어 정말 중요한 일들을 잘 맡아 시행한 분이지만, 그의 마지막은 모든 이에게 '아름다운 마지막' 이었습니다.
정말 부럽고 닮고 싶은 마지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