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옥
김 명 규
상자 속 왕겨를 헤치면 빨갛게 웃고 있던 사과. 물에 띄워 씻는 동안 벌써 입 안 가득 침이 괸다. 첫아이 입덧 때 모든 음식이 메스꺼운데 먹을 수 있는 건 오직 사과뿐이었다. 그때의 사과 맛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지금은 사과 품종이 개발되어 홍옥이 귀하지만 그 시절엔 값도 싸고 맛이 있었다. 자잘하여 나는 한 자리에서 대여섯 개씩을 먹어댔다. 홍옥은 껍질이 얇고 새콤달콤하면서 연하고 부드러웠다. 그 매혹적인 붉은빛과 향기를 나는 입속 가득 삼키며 행복했다.
사과를 먹을 때면 금단의 열매를 훔쳐 먹었다는 하와가 생각났다. 아마 이런 홍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지 싶다. 맛이 좋아 창조주 몰래 남편에게 따다주었을 열매, 훔친 사과를 먹다 목에 걸렸다는 결후(結喉)를 아담스애플이라 한다. 사과에 얽힌 이야기들은 많다. 독재에 맞서 싸운 빌헬름 텔의 사과 이야기, 백설공주를 꾀었던 마법의 사과,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등등…. 그 중에서도 황금사과에 얽힌 트로이전쟁의 이야기는 인류 역사에 영원할 것이다. 세 명의 여신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의 싸움은 여성의 본질적 질투가 화근이 되어 십년 동안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예술적 가치를 타고나는 것이 여성이기도 하지만 요염하면서도 요사스러움을 지닌 것 또한 여성 아닌가. 나도 여자이지만 여자로 태어난 것에 후회는 없다.
가을 사과밭은 철조망 안에서 순례자의 마음과 발걸음을 붙잡는다. 가을 햇살을 만나 홍보석(루비)이 달린 듯, 붉은 보석 같기에 홍옥이라 불렀는지 모르겠다. 아기의 귀여운 볼기처럼 포동포동 살이 오른 홍옥이 주렁주렁, 어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순결에 싸여있다. 나는 그 유혹에 사로잡히고 싶어 사과밭을 찾곤 한다. 혼이 나간 듯 하염없이 서 있노라면 실려 오는 바람결에 스치는 향기에 취하게 된다. 여학교 시절 이십 리 길을 걸어서 친구네 과수원엘 종종 갔었다. 사과를 얻어먹는 재미도 있었지만 친구의 사촌오빠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고모 아들인 오빠는 고아였다.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었지만 부모를 잃게 되어 아홉 살이 된 조카를 친구 어머니는 입양하였다고 한다. 그는 과수원 일을 하면서 실업계 야간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오빠는 나를 보면 하얀 얼굴이 사과 빛깔로 붉어졌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족들과도 별로 대화가 없었고 말수가 적은 남학생이었다. 어느 날 그 오빠는 저만치 모퉁이에서 식구들 눈을 피해 나에게 손짓을 하였다. 다가가보니 책 한권을 건네주고는 얼른 달아나버렸다. ‘학원’ 잡지였다.
잡지에는 오빠의 시가 실려 있었다. 시도 쓰는 문학소년 이라는 걸 알고부터는 그가 좀 달라보였다. 자세히 기억은 못하지만 시 속에는 삶의 고뇌가 녹아 있었던 걸로 나는 기억한다. 과묵한 사춘기 소년의 정신세계는 어른처럼 성숙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오빠의 앞날은 동굴처럼 어둡고 시든 풀처럼 무기력해 보였었다. 친구의 방에서 우리끼리 도란도란 얘길 나눌 적이면 오빠는 사과나무 그늘 아래 앉아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황량한 벌판에 외로운 양치기 목동이 떠올랐다. 베이스를 넣어 부는 능숙한 연주는 왠지 모르게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오빠는 왼쪽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나를 향한 오빠의 순정은 연민이었을 뿐 그 감정을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탐스럽게 홍옥이 매달린 과수원에서 들려오는 하모니카 소리는 아련하였다.
벌레에 물린 것이나 상품 가치가 없어 선별하여 놓은 사과를 친구 엄마는 한 보자기씩 싸주시곤 하였다. 그런 사과나마 대나무로 엮은 소쿠리에 담아 방안에 둘 때면 그윽한 향기가 집안 가득 퍼져나갔다. 내가 어른이 되면 저 사과처럼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리라. 그때의 내 소망도 누구 못지않게 화려했을 것이다. 헐렁한 낡은 바지에 황토 흙물이 든 메리야스를 입고 일하던 착한 오빠가 문득 떠오른다. 오빠는 내게 때때로 절실한 편지를 보내왔지만, 그런 글들을 나는 문학의 꿈을 가진 한 소년의 습작 글로 읽었을 뿐이었다. 부디 지치지 않기를, 삶의 의지를 딛고 훌륭한 문필가가 되기를 빌어 마지않았었다.
사과에서 풍기는 단 냄새에 나는 또 매혹되고 만다. 이 아침, 그 향기로운 것과의 입맞춤으로 건강한 하루를 연다.
첫댓글 추억의 아름다움이 홍옥의 아삭거리고 달콤함으로 가슴을 적심니다.두 번 째 읽습니다.
대구영천에서 4년을 살면서 사과에 얽힌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사과를 많이 먹으면 얼굴이 예뻐진다고 했는데....
사과집 딸을 가진 집과 인연이 있을법도 하였답니다.
만약 그리 되었다면 지금쯤 사과농장에서 사과향내 맡으며
홍옥을 닮은 딸을 두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정읍에는 사과가 있는 영원에 제 친구가 사는데
그때는 맛이 어찌나 시큼하던지 알아주지도 않은
품종으로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