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뉴턴에 의해 완성된 고전 물리학의 결정론적 과학관을 뒤엎고 불확정성 원리를 기초로 한 양자 역학을 제창하여 과학계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사람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이다. 그에 의해 전통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과학자들은 사상적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바로 미시적 영역에서 물질이 고정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는 놀라운 실험 결과가 과학계에 발표된 것이다.
전자의 위치를 관측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빛을 충돌시켜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에너지를 가진 일종의 빛을 전자에 충돌시킬 때 그것이 반사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전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복사가 전자에 충돌하는 순간 전자의 궤도는 변하고 만다. (전자자 괘도에서 사라져 버리고 다른 궤도로 수정하는 것을 양자도약이라고함)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고 노력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가해야 하므로, 전자의 속도에 더 많은 변화가 초래된다. 반대로 전자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길 원한다면 빛의 간섭을 최소화시켜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원자의 세계에서는 일어나는 이러한 불가사의한 현상을 바로 불확정성 원리라 한다.
불확정성 원리가 의미하는 바
뉴턴에 의해 정립되어 이후 300여 년 동안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결정주의 과학관을 붕괴시키고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법칙이나 원리의 절대성을 흐려놓았고, 기계론적 세계관까지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불확정성 원리가 의미하는 것은, 입자나 양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물체들과 같이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물체들을 보고, "이것은 여기에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입자의 본질적인 성질들을 동시에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알기 위해 행하는 우리의 관측 행위 자체가 이들 중 최소한 하나 이상의 양을 불가피하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단지 그 확률, 즉 통계적인 결과를 예측해 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증명했던 세계가 점점 모호해진다는 실험 결과로 세상은 점점 불안한 공간으로 내몰려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적 활동과 함께 과학자로서의 양심을 지키려 애썼던 하이젠베르크가 부분과 전체를 통해 드러내려 했던 문제의식은 좀더 심오하다.
부분을 넘어 전체로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운행되는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이며,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집합에 불과하다. 따라서 가능한 작은 단위로 분석해 보면 전체에 적용하는 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물리학 분야를 넘어 모든 학문 분야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철저히 나누고 쪼개는 분석적 사유 체계는 현대의 학문과 직업을 지나치게 전문화시키고 세분화시켜 결국 '전체와의 단절'을 초래했다. 학문간의 단절로 힘 있는 거대 이론은 점점 줄어들고, 직업간의 전문화는 소외라는 현대적 병폐를 만들기도 한다. 결국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하는 바는 부분과 전체는 별개의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밀접하게 상호 작용하는 관계이며, 모든 사물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전체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과학자로서의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로써 과학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불가능한 세계가 있다는 것이<합리=과학>이라는 전통적 도식을 일순간에 붕괴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중 충격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과학자는 아마도 아인슈타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리 세계의 불확실성을 심정적으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그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9세기 초 이래 빛이 '파동'이라는 정설에도 불구하고,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여 빛이 물질에 닿았을 때 전자가 방출되는 현상에 대한 이론인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 이론을 통해 빛이 '입자' 라고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그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것도 상대성 이론이 아니라 광전효과 이론이었다.
그 다음의 아원자 물리학의 발전으로 빛뿐만 아니라, 모든 소립자들도 입자의 파동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어 관측 장치에 따라 입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와 같은 물질의 이중성은 엄격한 합리주의 기반위에 세워진 과학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지만, 모든 물리적 실험은 그 입자성과 파동성을 다같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문제를 밤늦게까지 닐스 보어와 토론하다가 집에 돌아가면서 "자연이란 이렇게도 불합리한 것이냐?"고 한탄했고, 아인슈타인도 그 당시를 "땅이 꺼지는 것 같았고 물리학은 다시 설 자리가 없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 역학을 수립하고 아원자세계의 관찰 사실들을 수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입자 물리학은 혼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물리학자들 사이에 양자 역학을 어떻게 해석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끝까지 합리주의 입장을 고수한 아인슈타인의 주장과 합리성을 초월한 실용주의적인 보어의 주장 사이의 충돌이다.
객관적 세계의 합리성을 신봉했던 아인슈타인은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 역학이라는 미완성의 학문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학문이 완성되는 날에는 그 불확정성은 사라질 것이고,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보어는 양자 역학이 미완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불확정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20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들이었지만 양자역학의 해석에는 상반되는 패러다임을 갖고 있었고, 아인슈타인이 죽을 때까지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양자 역학이 세월과 더불어 더욱 강력한 학문으로 발전되는 것을 보고 자기는 이제 박물관에 들어앉은 과학자가 되어버렸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1920년 보어를 처음 만난 아인슈타인이 "당신처럼 단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나에게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내 생애에 드문 일입니다"라고 한 것처럼, 그들은 학문적 견해차를 넘어 평생 동안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정 관계를 유지했다. 2004년 8월 외신을 통하여 그동안 양자역학과는 다른 이론에 근거한 ‘블랙홀’이론을 주장하였던 스티븐 호킹도 그의 이론을 수정하며 ‘마침내 양자역학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