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이 주목한 시집 |신작시 - 김재근
사과잼과 오리 외 1편
봄날이었고 바람이 따뜻했습니다. 사과꽃이 필 때 봄은 절정입니다. 하얗게 사과꽃이 피면 나비도 햇빛도 찾아옵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사과잼을 먹고 있습니다. 사과잼이 혀에 닿으면 끈적하고 달콤합니다. 봄날맛입니다. 창문에는 사과꽃이 흩날리고 봄은 사과의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소파는 구름처럼 떠올라 어디든 날아갈 것 같습니다. 이때 사과꽃 사이로 새하얀 오리가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넙적한 부리로 창문을 마구 두드렸습니다. 나는 친절하게 창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오리는 들어와 큰 날개로 기지개를 켜더니 소파에 편안히 앉았습니다. 다리를 쭉 펴고 제집인 듯 말입니다. TV에서 동물의 왕국이 막 시작 되었습니다. ‘사자의 일생’편이었는데 우리는 함께 사자를 지켜보았습니다. 늙은 사자가 무리에서 쫓겨나 풀밭을 배회하는 장면에서 오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사과잼을 접시에 담아 오리에게 건넸습니다. 위로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오리는 꿀꺽 삼키더니 기분이 좋은지 하얀 날개를 퍼덕였습니다. “아주 당도가 높고 좋은 잼이야” 나도 맞장구치며. “이 고장 사과잼이 최고입니다” 우리는 다시 사자에 집중했습니다. 이번에는 사자가 물소를 사냥하는 장면인데. 사자는 무섭고 물소는 불쌍했습니다. 하지만 사냥은 번번이 실패하고 어깨가 축 처진 채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자는 오늘도 굶어야 할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이 끝나자 오리는 일어섰습니다. 나는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했습니다. 몇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릅니다. 저녁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방이 어두워지려 했습니다. 이때 돌아가신 삼촌이 떠올랐습니다. 왜 삼촌이 떠올랐을까요 문을 열고 뒤뚱거리며 사라지는 오리 때문일까요 아니면 달콤한 사과잼 때문일까요? 사과꽃이 하얗게 피어나는 봄날은 이상한 날들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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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
소금이 떨어졌네
좀 사다 줄래
어디서 소금을 사야 하나요
그 어려운 걸 시키다니
어디서 파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집을 나온다
산을 두 개 넘고 강을 세 게 건넌다
넓은 들판이 열려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염소가 풀을 뜯는다
소금 파는 곳 아니?
가르쳐줄래
찌개가 졸고 있거든
소금이 없으면 세계는 싱거워지고
싱겁게 사는 걸 배우지 못해
엄마도 동생도 집을 나가버릴 거야
매에에
매에에
소금만 생각하며 걷는다
생각만으로 몸은 짜진다
이제 짜게 살 수 있겠는 걸
찌개에는 소금이 필요하고
소금을 넣지 않아
오늘은 싱겁고 재미 없겠지만
짜진다고 미래는 뭐가 달라질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
소금은 슬프고
달려도 달려도
심부름은 도착되지 않는다
하늘에서 흰빛의 소금이 내린다
도로가 꽁꽁언다
집이 얼고 가스불이 새파랗게 얼어버린다
소금을 사고 찌개에 넣는 일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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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순간이 모여 영원이 된다
영원이 모이면 순간이 될까
죽음을 나누기 위해
사랑하는 거라면
순간은
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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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부산출생
2010년 《창비》 등단
시집 『무중력 화요일』『같이 앉아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