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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나원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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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민 선생(1736~1799)의 초명은 순민(舜民) 자는 심경(心卿) 호는 학고(鶴皐)이며 울산 학성인(鶴城人)으로 영·정조 때 울산의 석학이었다. 이때의 시속(時俗)은 숙종시대의 탕평책으로 사색당쟁이 퇴락되자 많은 사대부들은 귀향하여 가학(家學)을 재조명하고 보학(譜學)을 정리하자 이에 반발하는 성손(姓孫)들은 실학사상을 고창(高唱)하면서 자유사상이 만연하자, 이에 뒤질세라 여항문학(閭巷文學)이 성행하는 영·정조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 시대를 우리는 보수층이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기치 아래에서 여항문학에 맞서는 문체복고(文體復古) 운동으로 맞서는 양상이 방방곡곡의 토호가문들 마다에는 큰 홍역을 앓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보수와 혁신의 갈등시대라 하여 문학적으로 영·정시대라 하고, 사회적으로는 보수와 혁신간의 갈등이 홍경래란과 동학혁명으로 이어져 갑오경장을 맞게 되자 기어이는 순조 원년(1801)에 계급혁파라는 신시대를 맞게 되었다. 학고공은 영정시대의 와중에 태어나 일생을 혁신편(革新便)에 서서 사신분이다.
선생은 신묘(1771)년인 36세에 성균관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당시의 중앙 환반(宦班)들은 삼포(염포·부산포·제포)는 해읍인(海邑人)이라는 고정된 천시관념 때문에 대과(大科)는 아예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과 문객으로서 루정(樓亭)에 초빙 받았다. 그러는 가운데 문숙공(文肅公)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선생과는 격의없는 문우(文友)였고, 충헌공(忠憲公) 졸옹(拙翁) 김한구(金漢·~1769) 선생에게는 많은 총애를 받았다. 그것은 학성이씨 시조공(李藝)의 청시호소(請諡號疎)를 김한구 선생이 상소한 것으로 입증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를 억누르는 정신적인 괴로움이 있었다. 그가 철이 들고부터 시영(時榮)할아버지 등께서 일차소지(1743)에 본간(本幹)의 지파시조(支派始祖)이신 곤자 할아버지를 <본지실서(本支失序)>라는 내용으로 각파 문로(門老)들과 함께 울산도호부를 드나드는 것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내용인즉 1602년부터의 좌수(座首) 곤, 1623년부터의 별감 연중(連重)이란 당당한 가문에 가변(家變)이 생겨 일가가 잠시 지경(地境)으로 피접(避接)하고 있었다. 그 사이 당가(當家)에 연락이 되지 않아 수단의 기회 없이 무신보(戊申譜)가 간행되었다. 곧 무신보(1668)의 본간(本幹)의 지파시조 가운데 좌수(座首) 이 곤의 함자가 빠진 체 아들 주장(注章)이 그 자리에 들어갔으니, 곤과 주장의 함자가 실서(失序)되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당해 파손들은 무신보(1668)를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가계를 바로잡는 개보를 위해 송사(訟事)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좌수 성손들의 한 맺힌 지난날의 고통을 역지사지로서 타파는 물론 향중은 그 심정고통을 헤아려야 될 것이다.
학고공은 절치부심하면서 숙항(叔行)인 어수 이굉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정진한 끝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두 사제(師弟)의 이름은 울산 유림의 꽃이었다. 당시 울산에 부임하는 부사들마다 입암서당(立岩書堂)을 찾았다. 마침 삼부자 급제자가(及第者家)인 정재원(丁載遠·1730~1792)이 울산부사로 부임(1789)하자 아들 정약전(丁若銓·1758~1816)과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차례로 울산을 방문함에, 학고공과 반계(磻溪) 이양오(李養吾)는 울산의 선비로서 자주 부사의 말벗이 되었다.
아버지의 소개로 다산은 학고공과 반계공을 만나고부터 당시 울산사회의 실상과 민초들의 불만을 알게 된다. 특히 다산은 두 분 선비의 시문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것은 정재원 부사가 울산에서 환갑을 맞았다. 그때의 수연시(壽宴詩)에 두 분의 운시(韻詩)와 또한 부사가 진주목사로서 종명(終命)하였는데 두 선비께서 만사(輓詞)와 조문(弔文)이 단산의 흠흠신서(欽欽新書)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다산의 세평시(世評詩)인 근간(根幹)이 우국애민(憂國愛民)인 것은 학고공의 시풍을 그대로 이어 받는 듯하다. 두 선비는 부사와 동갑이나 다를 바 없었다. 또한 다산의 치군택민(致君澤民)사상은 학고공의 정신이 다산의 가슴에 용해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다산의 풍감(豊感)한 20대가 울산의 현상, 즉 ‘울산은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다. 한발로 물은 없고 해충의 재해와 풍도(風濤)가 거듭되는 해변지방이다. 관개시설의 농속(農俗)으로 농토가 적고 시서자(詩書者)도 적다. 그런데 송사(訟事)만은 해마다 빈번하기가 극심하다’는 것을 보고 갔기 때문에 그에 세평시가 곧 궤를 같이 한 것이다. 아마 학고공의 일생 가운데 정재원과 만남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신변에 돌아오면 선세(先世)들의 회한을 매듭 짖고자 절치부심했다.
학고공은 영조46년(1770) 1월15일 용담(龍聃), 여당(汝堂), 의당(宜堂), 굉의 문중원로들 명의로 2차소지에 ‘①이세 종통 역차, ②삼세 형제 난차, ③오세(五世) 곤제견루’의 내용을 울산도호부에 제출하여 동년(1770)가을 ‘관전고적후개정신보(官前考籍後改正新譜)’하라는 긴 27년간의 소지(所志)는 승소(勝訴)로 끝을 맺었다. 당해년에 경인보(庚寅譜<1770)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여타 문중으로서는 첨추공계의 족보(族譜)로 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경인보에 이세가 역차(易次), 삼세가 난차(亂次)로 되었기 때문에 이는 무신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문장(門長) 이용덤(李龍聃)공이 앞의 ①②③의 내용소지(內容所志)에 서명했기 때문에 경인보는 합법화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파문(派門) 간에 시비의 단초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학고공은 선현들의 한을 푼 것으로 자위하면서 1799년에 생을 마쳤다. 그러나 선생의 절치부심도 결코 헛되지 않았다. 2003년도 가을 동화정사에서 당해가의 파문장이 <울산치적부(1602)>의 전적(典籍)을 제시하면서 본간지파 시조 가운데 이 좌수가 가변에 의해 무신보에서 누락된 학(鶴), 봉(鳳), 곤의 삼형제였음이 분명하다는 학술적인 역설에, 만장일치의 박수를 받았다. 실로 230년 만에 선생의 회한이 풀렸다. 따라서 족보도 바로잡았다. 혹 <학성이씨 정전(正典)>을 읽은 분께서 선생에 대한 표현에 불만이 있었다면 본의가 아님을 사과한다.
이수봉 교수 충북대 명예교수
▶정정과 반론
본보 지난 3월17일자 이수봉 교수의‘동명이인이 빚은 오해이야기’ 기사 내용 중 ‘김중원 공의 신분이 서리(胥吏)인 동부녹사(東部錄事)다’는 내용과 ‘양희지 선생은 향화인이었다’는 내용과 관련해 학성이씨와 중화양씨 측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가문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정정보도를 요구해 왔습니다.
이와 관련, 학성이씨 대종문회(회장 이채경)와 중화양씨 대봉공파 대종중(대표 양표환)측은 “충숙공 이예선생의 아들 이종근 공은 서리가 아닌 문의현령을 지냈고, 양희지 선생은 조선시대 대사헌을 지낸 울산분으로 향화인이 아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양희지 선생의 장인(김중원 공)은 동부녹사를 지냈으며, 그의 증조부께서 조선에 귀화한 것이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는 또 “녹사는 경아전중 7품에 해당하는 상급 서리직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