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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시: 2024년 8월 31일 토요일.
2.참기인원: 전과동
3.코스: 호텔 조식 후 백화점 쇼핑 2곳 방문 뒤, 집안(약 2시간)으로 이동 광개토왕릉과 비 관람하고, 장수왕릉 거쳐 환도산성 방문. 북한마을 조망 후 심양으로 이동 조식 후 호텔 투숙및 휴식.
멘털호텔 벽에 걸린 그림.
춤추자 춤추자 인생의 춤을!
우리들을 여행 내내 태우고 다녔던 리무진 버스.
양쪽으로 2인 좌석이 버스끝까지 이어져 52인승 버스인데, 한쪽 좌석을 일인승으로 개조하여 한층 쾌적하다.
특이한 것은 시동 거는 시간과 속도까지 GPS로 통제를 받는다니 희한한 일이다.
게다가 운전 면허 시험도 1차 필기 시험 커트 라인이 90점이고,기능시험, 주행시험, 안전시험등 엄격하여, 10년 제수하는 사람이 허다 하다고 한다.
한때 제주도로 운전면허 따러 많이 들 왔었는데 이제는 허용이 안된단다.
헐! 위대한 중국의 운전사들.
번호판은 노란색이 영업용이고 파란색이 일반용인데 앞의 '요' 자는 요령성을 의미하고 바로 뒤 A는 등록 도시의 크기나 명칭이다. 나머지는 등록자가 고를 수 있다고 한다.
어제 너무 달리는 바람에 맛텡이가 갔다.
멘털호텔 로비에서...
아침 6시 30분의 조식.
계란 두개는 일인당 한개인데 내가 인당 두개인 줄 알고 홀라당 다 먹어버렸다.
옆에 있던 '딱선생' 이 어이없이 나를 바라본다. '얘가 왜 내거까지 먹지?' 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입구에서 계란을 배식하는 종업원에게 계란을 한개 더 달라고 하니 단호하게 안된단다.
헐 대륙의 인심이여!
조식후 백화점 쇼핑을 두군데 (침향과 보석)진행했는데, 우리 단체 여행 멤버들은 철용성들이다.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다. 뻘쭘 뻘쭘 똥구멍이 오무라들 정도로 몸둘 바를 모르겠다.
보다 못해 '남인' 이 진주 크림을 하나 샀다. '바람' 은 귓볼에 금강대협곡이 두개나 금가 있음에도 침향을 사지 않았다.
진주 크림은 6개입 한세트라 나중에 '남인'이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광개토왕비에 도착할 때까지 가이드의 독설(노쇼핑 대비 가격이 싼 이유)과 그 분위기는 냉냉했다.
우리의 역사 유적으로 중국은 돈벌이에 혈안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 석재를 사각형의 기둥 형태로 다듬은 비석이다. 각 면의 너비나 표면의 굴곡이 고르지 않아 다듬은 돌이라기보다 자연석의 느낌이 강하다. 높이는 6.39m에 이르며 비의 1면은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부에는 길이 3.35m, 너비 2.7m, 두께 0.2m 가량의 화강암 기단을 설치하고 홈을 파 비신을 세웠다. 기단은 세 부분으로 깨진 상태이다.
비의 몸 사면에는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글자 간격을 균등하게 새기기 위해 종횡으로 바둑판처럼 가는 선을 그어 공간을 구획하였다. 1면 11행, 2면 10행, 3면 14행, 4면 9행 총 44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비신의 형태에 따라 2면의 마지막 두 행과 4면의 첫 번째 행을 제외하고 매 행 41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전체 글자수는 1,775자로 여겨지나 비석에 손상이 가 150여 자 가량은 판독되지 않는다.
서체(書體)는 대부분 한대(漢代) 예서(隷書)이고, 글자의 세로 길이는 9~12cm, 가로 너비는 10~12cm이다. 다만 글자의 모양에 따라 획수가 복잡한 경우에는 세로가 긴 장방형(長方形)을 띠기도 한다.
-출전 우리 역사넷-
광개토대왕릉비는 414년(장수왕 2) 광개토왕이 사망한 2년 후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부왕의 능을 조성하며 건립하였다. 비가 세워진 곳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지역으로, 평양으로의 천도 이후에도 정치․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기능하였으나, 668년(보장왕 27)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는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한 채 방치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는 조선 세종(世宗) 때 만들어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루었던 업적들을 열거하며 찬송하고 있는데, 그중 1369년(공민왕 18) 압록강을 넘어 원의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했던 일을 다룬 제39장의 압강(鴨江) 주해(註解) 부분에서는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쪽 강 건너에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는 금(金) 황제의 성(城)이고 북쪽 7리 떨어진 곳에는 비(碑)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록을 남긴 이들은 정작 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평안도 강계도호부 산천조에서는 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금나라 황제묘(皇帝墓)와 황성평(皇城平)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황제묘는 곧 지금의 장군총(將軍塚)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조선 사람들이 이른 시기부터 집안 지역 경관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 역시 적어도 조선 초에는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이곳을 철저하게 여진족의 영역으로 여겼으므로, 남아 있는 유적이나 비 또한 여진족의 것으로만 여겼을 뿐 광개토대왕릉비를 직접 조사하거나 비문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17세기 이후 청(淸)의 봉금정책(封禁政策)으로 이 지역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서 비의 존재는 다시 한 번 망각 속에 묻히게 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재발견된 것은 1876년(고종 13) 이 지역에 청의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되면서이다. 1877년(고종 14) 회인현 지현(知縣)으로 부임한 장월(章樾)의 서계(書啓)를 맡은 관월산(關月山)이 민간을 방문하다가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비 전체가 이끼에 덮여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곳만 부분적으로 탁본을 하였다. 관월산이 자신이 뜬 탁본을 금석문 애호가들에게 소개하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끼에 덮여 있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비의 탁본을 뜨기 곤란했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지현의 명을 받은 마을 사람 초천복(初天福)이 비의 표면에 말똥을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르는 방법으로 이끼를 제거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비의 몸에 균열이 가고 일부 표면이 터져 나가는 등 심각한 손상이 발생하였다.
-출전 우리 역사넷-
우리가 광개토왕비의 역사 학술적 의미까지 이곳에서 열거하기는 어렵고, 다만 후손으로서 역사를 인지하고 가슴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호 누각은 삼성이 후원해 지은 것인데, 방탄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한다.
광개토왕릉 동영상.
동영상에 보이는 석관은 가묘이고,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어 부장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이곳을 지키는 중국 공안의 말에 의하면, 인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능을 보전하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고 , 그냥 방치하고 있단다.
이것이 말이여 방구여!
보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방치 아니여 방치!!
그리고 왕릉을 밟고 올라갈 수 있도록 조성한 것도 가슴 쓰리다.
우리의 단체 비자 멤버중 한명은 어떻게 왕릉을 밟고 올라가냐며 극구 올라가는 것을 사양했다.
옛날에 이곳 민가에서 집을 짓고 담을 쌓는데, 왕릉의 돌들을 들어내 사용했다고 하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장수왕릉은 호박돌이 아니라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런대로 보전이 된 것이라고 한다.
동북공정 때문에 나라에서 직접할 수는 없을 것이고 기업에서 기금을 협찬 조성해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조치했으면 좋겠다.
이번 홍수에도 많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우산나무?
장수왕릉 입구.
장군총(將軍塚)은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集安市, 집안시 퉁구通溝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돌무덤石塚, 석총으로서,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산 아래에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고구려의 제20대 태왕인 장수왕의 무덤, 혹은 그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33미터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미터로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한다.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출전 위키 백과-
공손히 가운데 손을 모으고 사진을 찍는다.
우리 조상의 무덤 앞 아닌가!
정부(頂部)는 만두형(饅頭形)을 하고 상단부에 1열의 구멍이 있어 정상에 건축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안쪽에는 향당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었으리라 추정했지만,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는 추세이다.
안팎 전부를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석축릉으로 구조가 정연하고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한 듯하여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으며, 축석분으로서 거의 안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출전 위키 백과-
장군총 동영상.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묘실은 횡혈식으로 벽화가 그려졌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석실의 위치는 높고 밑으로부터 3단째 단을 상(床)으로 하고 있다. 최상단의 상면(上面)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장방형의 거대한 1매의 천정석이 있으며, 연도(羨道)는 서남방으로 있으며 천장은 큰 돌 3매로 되어 있다. 현실의 4벽은 6단으로 쌓고 각 벽의 위에는 굵고 모진 기둥을 옆으로 높여서 천정석으로 받치고 있다. 현실의 크기는 가로·세로의 높이가 모두 5미터 이상이며 상(床)으로 오기(基)의 관대(棺臺)가 있으며, 기단의 4주에는 넓이 4미터의 돌을 두르고 자갈로 채워져 있다. 4벽과 천장에는 본래 칠을 하였으며 벽화가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전부 박락(剝落)되고 없다. 각 층의 외부에는 기와로 덮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출전 위키 백과-
장군총은 돌무지무덤 축조 기술상 가장 완성된 형식으로, 그 축조 양상이나 딸린무덤으로 보아 왕릉임에는 이견이 없다. 구릉에 자리하여 산상왕릉(山上王陵)으로 비정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국내성에서 마지막으로 사망한 공개토왕이나 즉위한 장수왕의 왕릉으로 비정한다.
고구려에서 수릉제(壽陵制)가 시행되었다고 보는 중국 학자들은 대부분 장수왕릉으로 비정한다. 우리나라와 일본 학자들은 태왕릉 및 광개토왕릉비와의 관계에 따라 광개토왕릉 또는 장수왕릉으로 비정하며, 최근 남한 학계에서는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조금 우세하다.
장군총 이후의 왕릉으로서 돌무지무덤은 국내 도성 일대에서는 확인되지 않아서 장군총 이후 고구려왕릉은 돌방 봉토분 또는 사신이 그려진 돌방 봉토벽화분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출전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장군총은 강돌을 깔아 기초부로 삼고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을 형성한 후 그 위로 계단 7곳을 구성하여 석재를 쌓아갔다. 장군총에는 석재 1,146매를 사용해 외면을 구성하였고 내부를 강돌로 채웠다. 장군총에 사용된 석재들은 태왕릉의 석재보다 더욱 가공되고 한층 규격화되었다. 특히 장군총의 가장 아래 부분인 1단에 사용된 석재는 그 위에 쌓인 석재에 비해서 훨씬 크다. 또 1단의 계단에 사용된 석재를 보면 살짝 들여쌓아가면서도 석재가 맞물리는 면에 과속방지턱처럼 턱을 두어 하중으로 적석총의 형태가 어그러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러한 건축 기법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장군총을 적석총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이자 완성된 형태로 보는 것이다.
-출전나무위키-
장군총의 주변으로는 배총이라 불리는 왕의 근신자(近臣者)의 무덤으로 현재까지 2기가 확인되었다. 1호의 경우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마치 장군총의 축소판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장군총과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2호의 상태는 잔존상태가 불량하여 잘 거론되지 않는다. 또 2호 배총의 서쪽으로는 이른바 제대(祭臺)라고 불리는 추정 제사시설이 위치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물질증거로도 제사와 관련된 시설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연접된 적석총의 기초부라는 견해도 있으나 마찬가지로 명확히 알 수 없다.
-출전 나무 위키-
왕비의 무덤이라고 한다.
압록강이다.
이직 수해의 여파가 온전하여 흙탕물이 탕탕히 흐른다. 건너편이 북한땅이다.
건너편을 보니 수해가 극심하여 높은나무 위에, 물에 밀려 온 흰비닐 봉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뭘 봐?
압록강 동영상.
통일은 언제나 될 것인가?
산을 깍아 밭을 만들었다.
아마도 이번 수해도 산에 나무가 없다보니 물을 가둘 수 없어 수해가 더 커졌을 것이다.
악순환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북한쪽 초소인데 몇몇 군인들이 얼차려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소고기 무한 리필.
재중 동포가 운영하는 소고기 무한리필인데, 사료를 먹이지 않고 방목한 소라 맛이 기가 막힌다.
우리는 소고기를 12판 이상을 먹었다. 그래도주인장은 오며 가며 웃는 낯으로 우리를 대해 주었다.
우리는 음식점을 나오면서 엄지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또 다시 엄지척이다.
'바람'은 소고기를 특히 좋아하여 무려 4판 이상을 입으로 쓸어 담아, 다음날 일정이 설사병으로 방해를 받았다.
아마도 우리 여행 일정 내내 오늘 먹은 소고기가 제일 맛이 있었으리라.
한국에서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소고기를 배터지게 먹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환도산성입구.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인 집안에 있는 평지성 '국내성'과 산성인 '환도산성'이다. 국내성은 집안 시내에 돌로 쌓은 평지성이다. 국내성 중앙엔 왕궁과 중요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환도산성은 전란이 일어나면 피난가는 산성의 역할과, 고구려 역사의 대부분 전란으로 인하여 도성으로서의 역할도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집안시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석축 산성으로 산성자산성이라고도 한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서쪽으로는 통구하가 흐르고 있어 자연 해자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노령산맥이 둘러싸고 있어 다른 지역에서 쳐들어오기 쉽지 않다. 국내성의 규모는 동벽 550여 m, 서벽 700여 m, 남벽 750여 m, 북벽 730m로 모두 2,738m이고 성벽은 폭 9m, 높이는 6m이다. 성문은 남벽과 북벽에 1개씩, 동벽과 서벽에 2개씩 모두 6개로 밝혀졌다. 서벽의 남쪽문은 적이 바로 들어올 수 없는 어긋문이고 북문에는 적대가, 성벽 모서리마다에는 각루, 치는 42개가 조사되었다. 국내성 중앙엔 왕궁과 중요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환도산성은 전란이 일어나면 피난가는 산성의 역할과 고구려 역사의 대부분 전란으로 인하여 도성으로서의 역할도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집안시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석축 산성으로 산성자산성이라고도 한다. 남쪽이 지세가 낮고 나머지 험준한 산에 의지하고 있다. 남족도 입록강 지류인 통구하가 가로막고 있고 수직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둘레가 6,947m로 계곡을 껴안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평탄한 능선을 양면으로 쌓은 협축식이고 능선의 바깥경사면은 쐐기돌을 사용하였고 안쪽을 의지한 내탁식이다. 고구려 성벽의 전형인 6합방식으로 쌓았다. 문은 남문 3개, 동문 1개, 북문 2개, 서문 1개로 모두 7개이다. 성 안쪽에 있는 장대에서는 국내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성벽 안쪽에 평대를 쌓았고 여장을 비롯하여 물이 빠지게 수구문도 구비하였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산상왕 2년(198)에 환도성을 쌓고 13년(209)에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평지인 국내성도 함께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전 역사 문화 유산-
환도산성에서 등목하는 멤버들.
배 일부러 집어 넣었지?
중국은 2004년 "고구려의 수도와 왕릉, 그리고 귀족의 무덤"이란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였는데 고구려의 수도는 오녀산성을 필두로 두번째 도읍지인 국내성, 전란 때 임시 수도나 왕성의 주요 배후성으로 지목되는 환도산성이 있다.
집안현성의 북쪽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丸都山)에 위치하고 있어 환도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산성의 주위는 산봉우리들이 첩첩히 둘러싸고 있어 대단히 험준하다.
산성의 남쪽 바로 아래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通溝河)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면서 산성의 자연적인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 구실을 하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흘러간다.
산성의 서쪽은 칠성산(七星山)으로 험준한 봉우리들과 연결되어 산성의 자연 방어물을 형성하고 있으며, 산성의 동쪽은 통구하를 따라 비교적 넓은 산골짜기가 펼쳐져 있다. 산성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은 지형으로서 남쪽에서 바라보면 병풍을 두른 듯한 형세이다.
산성은 환도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넓은 계곡의 경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은 동·서·북 3면은 전체적으로 험준한 지형과 암반 등을 이용하여 자연 성벽으로 삼고, 산마루의 평탄한 곳은 군데군데 돌을 다듬어 성벽을 축조하였다.
특히 동남쪽의 경사진 부분은 높고 가파른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이용하고 있다. 성벽의 외벽은 돌을 잘 다듬어 쌓았으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들여쌓아 약간 경사지도록 한 퇴물림방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축조 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만보정 1078호분은 방형 평면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각 변의 길이는 17m 내외이다. 무덤 상부에는 매장부로 추정되는 지름 0.7m, 깊이 0.7m 크기의 함몰 갱이 있고, 널길로 추정되는 입구가 있어서 굴식 구조의 매장부로 추정된다.
이 함몰 갱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서 금동제 안장, 발걸이, 재갈, 말띠드리개, 보요부운주 등 기승용 마구가 출토되었고, 황색시유도기 화덕, 반(盤),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만보정 1078호 무덤은 황색시유도기와 발걸이, 재갈 등 마구의 연대관에 비추어 볼 때 5세기 중엽경으로 비정된다.
무덤군.
통구 옆에 동서로 길게 형성된 충적분지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에 수십 기의 돌무지 무덤이 널려 있다. 이곳에서 1562기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며 그 중 눈에 띄는 돌무지 무덤만 해도 40여 기는 된다.
옥수수가 내 키보다 크고 튼실하다.
알곡이 꽉 차있다.
궁터
계루부는 고구려 왕실의 부로, 고구려 초기의 5부 중 유일하게 『삼국사기』나 중국 문헌에서 동일한 이름으로 나와 있다. 고구려의 5부는 국내와 국외의 문헌에 전해지는 구체적 명칭이 달라 그 대응에 있어 혼선을 빚을 여지가 있어 연구자들마다 조금씩 이견이 있어 왔다. 하지만 계루부만큼은 발음과 해당 글자까지 완전히 일치하여 논란의 소지가 없다. 이는 계루부가 고구려 왕실의 부로서 그만큼 강력하고 중심적 역할을 하였기에 외국인에게도 정확히 전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출전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집안만보정고분군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통구분지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무덤군이다. 환도산성(丸都山城)의 남쪽에 자리하며, 칠성산(七星山)의 동쪽 기슭과 통구하(通溝河)를 낀 평지에 분포한다.
1966년 분포 조사에서 1,526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1980년대 문물지 편찬에 따른 조사에서는 1,594기가 확인되었고, 1997년도 실측 조사에서는 현존하는 고분 1,082기, 파괴된 고분 392기 등 1,474기로 줄어들었다. 현존하는 고분 중 돌무지무덤은 639기이고, 나머지는 봉토돌방무덤과 크기가 작은 동실묘(洞室墓)이다.
2005년에 행한 재조사에서 1,547기로 늘어났으며, 서대파편묘(西大坡片墓), 통구10조편묘(通溝10組片墓), 통구11조편묘(通溝11組片墓) 등 3개소로 나뉘어 분포한다. 무덤은 통구하변의 대지에는 돌무지무덤이 주로 분포하고, 구릉으로 가면서 봉토돌방무덤이 늘어난다. 중요한 무덤으로는 만보정 242호분, 1078호분, 1368호분이 있다.
돌무지 무덤 앞에서...
토석 혼축 무덤.
고구려 우적을 탐방하고 장장 5시간을 이동하여 심양으로 간다.
점심에도 간 어텍 이동중에도 간 어텍(북한 토속주인 들쭉술)중인데, 안주로 준 명태가 맛이 있다.
2번의 쇼핑이 노쇼핑으로 끝나 못내 미안한 마음도 들고해서 가이드가 제안하는 농수산품들을 우리 멤버들은 공통으로 깨와 백두산 잦 그리고 명태를 샀다.
'남인' 은 능이 그리고 '바람' 은 능이, 송이. 도라지를 추가로 산 것 같다.
이제야 우리의 면이 선다.
나머지 우리의 단체 멤버들은 우리를 믿고 있었는지 여전히 굳세게 지갑을 닫고 있다.
버스 안에서.
식당으로 이동 중.
그동안 먹은 음식들.
식사.
보통의 우리 식사와 다름 없다.
식사.
그런데 가이드의 특별 주문이라 고수와 같은 향신료가 거의 들어가지 않고, 기름기도 많이 빼서 담백하고 먹을만 했다.
저녁은 우거지 감자탕인데 점심을 너무 거하게 먹어 음식을 거의 남기다시피 했다.
먹다 남은 고량주 반병과 들쭉술 반병은 내일 먹기로 하고 식당에 키핑했다.
오늘이 우리의 여행 마지막 밤이다.
오늘 나의 파트너는 '그윽한미소'이다.
호텔은 심양의 민산 호텔이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첫댓글 무너져내린 광개토대왕릉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