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 윤씨 씨족사
글쓴이: 海空/윤준섭 조회수 : 75 08.12.11 16:12 http://cafe.daum.net/yoonjs/3L3d/211
씨족史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후삼국시대에 왕건(王建)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고려개국공신에 책록된 윤신달(尹莘達)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파평윤씨세보(坡平尹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유검필(庾黔弼),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유차달(柳車達) 등 11인과 함께 개국통합삼한익찬공신(開國統合三韓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한다.
관직은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올랐다.
그는 파평현(坡平縣)의 용연(龍淵)에 떠있던 옥함(玉函)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의 세계(世系)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후손은 계속 파평현(坡平縣)을 근거지로 삼아 토착세력이 된 것 같다.
태사공(太師公) 이후 선지(先之)―금강(金剛)―집형(執衡)으로 이어진 후손은 계속 중앙정부에서 관직에 나아가 고관에 이르렀는데, 현손인 윤관(尹瓘)대에 이르러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
윤관(尹瓘)은 고려중기의 문무를 겸비했던 재상으로 동북면(東北面)의 여진족을 정벌, 9성(城)을 쌓고 선춘령(先春嶺) 아래 공험진(公嶮鎭)에 고려의 강역임을 증명하는 비를 세운 인물로 유명하다.
이후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고려조에 윤언이(尹彦頤), 윤인첨(尹鱗瞻), 윤돈신(尹惇信), 윤상계(尹商季), 윤선좌(尹宣佐), 윤안숙(尹安淑), 윤세유(尹世儒), 윤척(尹陟), 윤승례(尹承禮)를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가장 대표적인 문벌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 개국공신 윤곤(尹坤)을 비롯, 윤번(尹璠), 윤형(尹炯), 윤자(尹慈), 윤암(尹巖), 윤사분(尹士昐), 윤사윤(尹士昀), 윤사흔(尹士昕), 윤호(尹壕)에 이어 성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을 배출하면서 계속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조선조에 4백18명의 문과(文科) 급제자를 내었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8백44명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국혼(國婚) 가문으로는 청주한씨(淸州韓氏) 5명에 이어 여흥민씨(驪興閔氏)와 함께 4명의 왕비를 배출했고, 연산군(燕山君) 생모인 윤비(尹妃)까지 추가하면 한씨와 맞먹는 수다.
정승수는 총 3백65명 중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 안동김씨(安東金氏) 19명, 동래정씨(東萊鄭氏) 13명, 청주한씨(淸州韓氏)ㆍ여흥민씨(驪興閔氏) 12명 다음에 11명으로 7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구수는 64만여명으로 성씨별 전국인구 순위 8위이다.
파평윤씨(坡平尹氏)에서는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만큼 과거에 얽힌 숱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문강공(文康公)(윤언이(尹彦頤))의 아들 3형제(인첨(鱗瞻)ㆍ자고(子固)ㆍ돈신(惇信))와 문정공(文定公)(윤인첨(尹鱗瞻)의 아들 3형제(종악(宗諤)ㆍ종함ㆍ종양(宗言昜 ))가 양대에 걸쳐 모두 대과 급제, 이를 일러 ‘삼제택양사택(三第宅兩師宅)’이라 불렀고 드물게도 나라에서는 문강(文康)ㆍ문정공(文靖公)의 부인들에게 녹봉(祿俸)을 내렸다.
또 참판공(參判公)(윤민신(尹民新))은 다섯 아들이 나란히 급제하고 그 중 한 사람이 장원을 하여 세상 사람들은 참판공(參判公)이 사는 마을을 ‘오자등과(五子登科)터’라 불렀다.
파평윤씨(坡平尹氏) 세계(世系)는 시조 밑에 5세 윤관(尹瓘)까지 주로 단계(單系)로 이어지다가 윤관이 다섯 아들 (언인(彦仁)ㆍ언순(彦純)ㆍ언암(彦巖)ㆍ언식(彦植)ㆍ언이(彦頤))을 두어 그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파로 분파된다.
따라서 분적종을 포함한 파평계(坡平系)의 모든 윤(尹)씨는 윤관(尹瓘)장군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큰 아들 지후공(祗候公) 윤언인(尹彦仁)의 후손은 11세 윤희보(尹希甫)의 후손이 함안파(咸安派), 윤영찬(尹英贊)ㆍ윤신갑(尹莘甲)ㆍ윤신을(尹莘乙)의 후손이 남원파(南原派)이다.
둘째 아들 어사공(御史公) 윤언순(尹彦純), 셋째 아들 윤언암(尹彦巖)의 후손은 전하지 않는다.
넷째 아들 복야공(僕射公) 윤언식(尹彦植)의 후손은 덕산군파(德山君派) 단계로 이어지고 있다.
다섯째 아들인 문강공(文康公) 윤언이(尹彦頤)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고, 그에 따라 나누어진 분파도 가장 많다.
문강공(文康公)의 큰 아들 윤인첨(尹鱗瞻)의 후손이 문정공파(文定公派), 둘째 아들 윤자고(尹子固)의 후손이 신녕파(新寧派)이다.
셋째 아들 윤돈신(尹惇信)의 후손은 11세 문현공(文顯公) 윤보(尹珤)까지 단계로 이어지고 그 아들 대 이후에서 다시 몇 개 파로 나누어진다.
윤안적의 후손이 대언공파(代言公派), 윤중조(尹中王且 )의 후손이 봉록군파(奉祿君派), 14세조 윤심(尹深)ㆍ윤인희(尹仁喜)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 윤혁(尹赫)의 후손이 야성파(野城派), 윤승휴(尹承休)의 후손이 전의공파(典儀公派)이고 윤승순(尹承順)의 후손이 세 아들 곤(坤)ㆍ목(穆)ㆍ향(向)을 파조(派祖)로 하여 소정공파(昭靖公派), 원평군파(原平君派), 소도공파(昭度公派)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윤승례(尹承禮)의 후손이 판도공파(版圖公派), 12세조 윤암(尹諳)의 후손이 소부공파(小府公派), 윤안비(尹安庇)의 후손이 태위공파(太尉公派)로 나누어진다.
여섯째 아들 윤언민(尹彦旼)의 후손은 그 아들 대 이후 자손이 끊어졌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주로 판도공파(版圖公派)(승례(承禮))와 소정공파(昭靖公派)(곤(坤))에서 대대로 고관 및 학자를 배출,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다.
판도공파(版圖公派)는 아들 대에서 다시 갈리는데 그 중 판도공파(版圖公派)가 유명한 ‘대윤(大尹)’ ‘소윤(小尹)’ 집안이다.
고려 태조의 개국공신이던 윤신달(尹莘達)의 아들 윤선지(尹先之)는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이고, 3세 윤금강(尹金剛), 4세 윤집형(尹執衡)은 각각 좌ㆍ우복야(左ㆍ右僕射)를 지냈다 하는데, ‘고려사’에는 윤집형(尹執衡)이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윤관(尹瓘)의 자(字)는 동현(同玄)이고 죽은 뒤 문숙(文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갔다.
숙종 때 동궁시강원학사(東宮侍講院學士),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역임, 숙종 9년 동북면행영병마도총사(東北面行營兵馬都摠使)에 임명되어 여진의 정벌에 나서 화맹(和盟)을 맺고 돌아왔다.
이 때 적(敵)은 기병(騎兵) 중심이고 우리는 보병(步兵)이 주체여서 전세(戰勢)가 불리했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온 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군사력의 증강에 큰 공헌을 했다.
그 뒤 참지정사(參知政事), 판상서형부사겸태자빈객(判尙書刑部事兼太子賓客)을 거쳐 중서시랑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에 올랐다.
3년 뒤인 예종 2년 여진정벌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가 되어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있는 여진을 정벌하고 웅주(雄州), 영주(英州) 등 9성(城)을 쌓고, 또 다시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여 다음 해 4월에 두만강(豆滿江) 건너 7백리가 되는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를 세우고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리부사(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가 되었다.
그러나 여진이 계속 북변을 침범하매 재 정벌에 나섰으나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대대로 자손이 조공(朝貢)을 바치겠다는 여진족(女眞族)의 간계(奸計)에 의지가 약했던 문신(文臣)들의 동조로 9성(城)을 반환하고 말았다.
1110년 태수보문하시중판병부사(太守保門下侍中判兵部事)에 복관되었고 예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장상(將相)으로 진중(陣中)에 있을 때도 항상 오경(五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다.
9성(城)을 쌓은 다음 선춘령(先春嶺)아래의 공험진(公嶮鎭)에 비를 세워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또 새로 지은 영주(英州)의 관청벽에 전공을 기록하였다고 전해지나, 그가 개척의 9성(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통일된 의견이 나와 있지 않고 영주(英州) 관청벽의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동북면(東北面)의 여진을 정벌 내지는 귀화시켜 우리나라의 영토로 확정한 것은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윤관(尹瓘)의 아들 윤언이(尹彦頤)는 인종조에 과거에 급제, 기거랑(起居郞)이 되었다.
인종 6년 예부시랑(禮部侍郞) 때 송(宋)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국교재개를 청하고 돌아왔다.
1135년 묘청(妙淸)의 난에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의 막료로 출전하여 이듬해 서경(西京) 함락 때 공을 세웠으며 의종 1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예종ㆍ인종 양조(兩朝)에 걸쳐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주역(周易)’에 밝았으며, 만년에는 불교(佛敎)를 깊이 믿었다.
그의 아들인 문정공(文定公) 윤인첨(尹鱗瞻)은 의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형부시랑(刑部侍郞),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참지정사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1172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
서경에서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원수(元帥)가 되어 삼군(三軍)을 이끌고 절령(岊嶺)에서 반군(叛軍)과 싸워 패퇴(敗退)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기탁성(奇卓城)ㆍ진후(陳後) 등과 출정하여 서경(西京)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추충정난광국공신상주국감수국사(推忠靖難匡國功臣上柱國監修國史)가 되었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죽은 뒤 명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윤돈신은 병부시랑(兵部侍郞), 아들 윤상계(尹商季)는 위위소경(衛尉少卿)을 지냈다.
윤보(尹珤)는 충렬왕 2년 과거에 급제, 삼중대광수첨의정승(三重大匡守僉議政丞)ㆍ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ㆍ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ㆍ판선부사(判選府事)에 오르고 치사(致仕)한 뒤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경학(經學)과 노장학(老莊學)에 밝았던 윤선좌(尹宣佐)는 첨의평리(僉議評理)ㆍ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ㆍ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지내고 치사(致仕)했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윤안숙(尹安淑)의 아들 윤척(尹陟)은 군부판서(軍簿判書)를 지내고 우왕 때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조선초에 파평윤씨(坡平尹氏)에서는 개국공신 윤호(尹虎)를 배출하였다.
그는 파평군(坡平君) 윤해(尹侅)의 아들로 공민왕 때 전략에 밝아 여러 번 왜구(倭寇)를 소탕한 공으로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우왕 11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때의 공으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록, 1392년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이 해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태조를 도운 공으로 개국공신2등(開國功臣二等)이 되어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윤곤(尹坤)은 고려 말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를 지낸 윤승순(尹承順)의 아들이다.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개국 후 제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협조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세종 1년 우참찬(右參贊)ㆍ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소도공(昭度公) 윤향(尹向)은 여러 관직을 지내고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냈다.
태종 15년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재직중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당시에 공을 세운 장수들의 공신녹권(功臣錄券)을 개정하라고 상소했다가 파직당하고 후에 풀려나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의 장인이었던 윤번(尹璠)은 대사헌(大司憲),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는데,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그의 아들인 윤사분(尹士昐), 윤사균(尹士昀), 윤사흔(尹士昕)이 각각 우의정, 예조판서, 우의정에 올라 가문이 번성하였는데, 뒤에 사분(士昐)과 윤사흔(士昕)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왕비가 나와 20여 년간 일가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중종은 제 1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尹)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제 2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尹)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繼妃)는 모두 파평윤씨(坡平尹氏)였는데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아우에 윤임(尹任)이 있었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아우에 윤원형(尹元衡)이 있었다 윤임(尹任)ㆍ윤원형(尹元衡)은 같은 종씨이면서도 서로 국구(國舅)가 되어 세력을 잡으려고 일찍부터 반목, 세간으로부터 대윤(大尹)(윤임(尹任)), 소윤(小尹)(윤원형(尹元衡))의 지목을 받았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尹任)이 득세, 윤언적(尹彦迪), 유관(柳灌), 성세창(成世昌)과 같은 사림(士林)의 명사를 많이 등용시킨다.
그러나 당시 뜻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윤원형(尹元衡)의 밑에 모여 사림(士林)과 반목하고 윤임(尹任)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본다.
인종이 재위 8년만에 죽자 나이 불과 12세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자파세력의 기틀을 잡은 윤원형(尹元衡)은 당시 형조판서였던 대윤(大尹)의 보수 윤임(尹任)을 비롯해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 등을 반역죄로 귀양보내 죽이고, 그 뒤 5~6년에 걸쳐 윤임(尹任)의 세력을 모두 유배, 또는 죽이니 죽은 자의 수가 1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 것이 유명한 1545년의 을사사화(乙巳士禍)다.
소정공파(昭靖公派)의 윤삼산(尹三山)은 윤곤(尹坤)의 셋째 아들로 문장과 필법ㆍ죽화(竹畵)에 능해 ‘삼절(三絶)’로 알려졌으며 그의 아들이 성종의 장인인 윤호(尹壕)다.
졍정공 윤호(尹壕)는 성종 3년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다음 해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지낼 때 그의 딸이 성종의 비(妃)가 되자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488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오르고 다음 해 사복시제조(司僕寺提調)를 겸했다. 1494년 우의정(右議政)으로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은 윤곤(尹坤)의 둘째 아들인 윤희제(尹希齊)(한성부윤(漢城府尹))의 손자다, 이시애(李施愛)의 난(亂) 때 도승지로 공을 세워 후에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고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3년간 광릉(光陵)(세조의 능(陵))의 수묘관(守墓官)으로 있었다.
1474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의금부당상(義禁府堂上)을 겸직했고, 1479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 해 명(明)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할 때 우의정(右議政)으로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를 겸직,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했으며 1484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이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연산군 2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그의 증손이 윤현(尹鉉)인데, 중종 때 호당(湖堂)에 뽑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시문이 뛰어나 ‘국간집(菊磵集)’이 전한다.
윤임(尹任)의 아들인 윤흥신(尹興信) 장군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용장이다.
그는 1592년 4월 14일 왜적의 선봉군이 다대포(多大浦)를 포위하자 이를 일단 격퇴하였으나 다시 대군을 만나 종일토록 싸우다 끝내 성이 함락되자 동생 흥제(興悌)를 안고 함께 순절했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아버지와 형제 셋이 죽음을 당하였는데도 요행히 참화를 모면했었다.
윤인경(尹仁鏡)은 중종 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정언(正言), 사간(司諫), 도승지(都承旨), 예(禮)ㆍ호(戶)ㆍ이조판서(吏曹判書),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고 인종 1년 영의정에 올랐다.
명종 즉위 후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이 되고 뒤에 우의정에 올라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에 봉해졌다.
후금(後金)(뒤의 청(淸))에 대한 척화론자였던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는 병자호란 때 강화에 피난, 성문을 지키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아내인 이씨(李氏)는 자살했으나 그는 평민의 복장으로 탈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비겁하게 살아난 사실을 자책하여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평생을 학문(學問) 연구에 정진했다.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했고, 성리학(性理學) 전반에 걸쳐 당대의 대가(大家)가 되었다.
윤증(尹拯)은 현종 4년 학행이 뛰어나 은일(隱逸)로 천거되어, 숙종대에까지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서 이름났었다.
두포(杜浦) 윤지선(尹趾善)은 현종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대사헌(大司憲)ㆍ이조판서(吏曹判書)ㆍ좌참찬(左參贊)ㆍ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동산(東山) 윤지완(尹趾完)은 숙종대의 재상으로 우의정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뒤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숙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윤지인(尹趾仁)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영조 1년 청도군수(淸道郡守)를 거쳐 뒤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한원진(韓元震)과 함께 호론(湖論)을 주장했다.
정문공(靖文公) 윤동도(尹東度)는 영조 2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했다. 그 뒤 교리(校理)ㆍ대사간(大司諫)ㆍ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ㆍ대사헌(大司憲)ㆍ부제학(副提學)ㆍ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영조 37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했다.
영조 40년 좌의정(左議政), 다음 해 영의정(領議政)을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매헌(梅軒)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는 파평윤씨(坡平尹氏)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근대 인물이다.
1908년 충남 예산(禮山) 출신으로 고향에서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농촌문화운동을 펴다 상해(上海)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지휘 아래 1932년 홍구(虹口)공원에서 거행된 일본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전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백천(白川)대장을 죽이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과시한 뒤 순절했다.
매헌(梅軒)의 위광에 가려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윤준희(尹俊熙) 또한 조국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한 사람이다.
그는 보령공(保寧公)(윤부개(尹富漑))의 19세손으로 함북 회령(會寧) 출신이다.
15세 때 이상설(李相卨) 문하에서 공부하고 3ㆍ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간도(間島)에 있는 조선은행(朝鮮銀行) 행원이 회령(會寧)지점으로부터 현금 15만원을 이송한다는 정보를 탐지하여 동지 최봉설, 임국정, 한상호 등 3인과 비밀계획을 세우고 이를 탈취, 러시아로 들어가 독립군에 댈 무기를 구입, 운반대를 결성했다.
그러나 조직 중엔 엄인섭이란 첩자가 일본 헌병대에 밀고, 결국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정신이상이 되었다가 서대문(西大門)형무소로 이감되어 3인(人) 모두 옥사했다.
서울 불광동에 삼의사(三義士)묘가 있다.
한말(韓末)의 독립운동가 윤기섭(尹琦燮)은 1908년 최남선(崔南善)ㆍ김좌진(金佐鎭) 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 민족 계몽에 힘쓰다 만주(滿洲)로 망명했다.
1919년 서간도(西間島)에서 한족회(韓族會)를 만들어 학무부장이 되고, 1935녀 남경(南京)에서 신익희(申翼熙)ㆍ김규식(金奎植) 등과 민족혁명당을 조직,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항렬표(行列表)
함안파(咸安派) 세(世)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검(儉)○ ○희(喜) 석(錫)○ ○수(洙) 림(林)○ ○용(容) 재(在)○ ○종(鍾) 원(源)○ ○상(相) 섭(燮)○ ○기(基)
남원파(南原派)
세(世)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태(泰)○ ○병(秉) 섭(燮)○ ○재(在) 호(鎬)○ ○영(永) 상(相)○ ○현(顯) 배(培)○ ○종(鍾) 원(源)○ ○수(秀)
덕산군파(德山君派)
세(世)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자(字) 여(汝)○ ○래(來) 희(熙)○ ○규(奎) 종(鍾)○ ○영(永) 상(相)○ ○열(烈) 재(在)○ ○두(斗) 일(一)○
문정공파(文定公派)
세(世)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방(邦)○ ○여(汝) 상(相)○ ○섭(燮) 종(宗)○
치(致)○ ○병(秉)
○석(錫) 훈(勳)○
원(源)○ ○재(在)
○식(植) 병(炳)○
지(志)○ ○규(奎)
○곤(坤) 종(鍾)○
종(鍾)○ ○영(永)
○수(洙)
신녕파(新寧派)(화산군파(花山君派)))
세(世)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희(熙)○ ○재(在) 종(鍾)○ ○원(源) 동(東)○ ○환(煥) 규(圭)○ ○강(康) 재(宰)○ ○중(重) ○○ ○용(用)
대언공파(代言公派)
세(世)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주(柱)○ ○영(榮)
○진(鎭) 토(土)○
자(滋)○ ○의(儀)
○상(相) 수○
병(炳)○ ○상(相)
○중(重) 섭(燮)○
석(錫)○ ○기(基)
○여(汝) 용(鎔)○
식(植)○ ○원(源)
○섭(燮) 동(東)○
재(載)○ ○희(熙)
○종(鍾)
전의공파(典儀公派) 세(世) 30 31 32 33 34 35 36 37 38
자(字) ○치(致) 석(錫)○ ○호(浩) 락(樂)○ ○섭(燮) 재(在)○ ○진(鎭) 영(永)○ ○식(植)
소정공파(昭靖公派)-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 세(世)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진(鎭) 자(滋)○
재(宰)○ ○상(相)
○임(壬) 병(炳)○
규(揆)○ ○중(重)
○갑(甲) 석(錫)○ ○여(汝)
○병(丙) 식(植)○
녕(寧)○ ○섭(燮)
○무(茂) 재(載)○
범(範)○ ○종(鍾)
○강(康)
소정공파(昭靖公派)-백천공파(白川公派)
세(世)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영(永)○ ○의(儀) 수○ ○주(柱) 희(熙)○ ○기(基) 석(錫)○ ○수(洙) 병(秉)○ ○섭(燮)
소정공파(昭靖公派)-구방파(九房派) 세(世)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보(普)
○영(榮)
○영(榮) 주(周)○
혁(赫)○
왕(王)○ ○현(鉉)
○종(鍾) 한(漢)○
승(承)○ ○근(根)
○동(東) 열(烈)○
열(烈)○ ○준(埈)
○기(基) 수(銖)○
호(鎬)○ ○태(泰)
○택(澤)
소정공파(昭靖公派)-영천부원군파(鈴川府院君派) 세(世)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식(植) 현(顯)○ ○오(五) 석(錫)○ ○원(源) 주(柱)○ ○희(熙) 재(在)○ ○용(鏞) 영(泳)○ ○직(稷)
원평군파(原平君派) 세(世)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상(相) 병(炳)○ ○재(在) 석(錫)○ ○영(泳) 모(模)○ ○영(榮) 규(圭)○ ○현(鉉)
판도공파(判圖公派)-제학공파(提學公派) (나의 뿌리) 세(世)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영(永)○ ○채(采) 훈(勳)○ ○기(起) 용(鏞)○ ○태(泰) 상(相)○ ○희(熙) 규(奎)○ ○종(鍾) 락(洛)○ ○병(秉)
판도공파(判圖公派)-부윤공파(府尹公派) 세(世)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규(圭) 현(鉉)○ ○순(淳) 모(模)○ ○용(用) 구(九)○ ○병(炳) 녕(寧)○ ○성(成) 기(起)○ ○강(康)
판도공파(判圖公派)-정정공파(靖貞公派)
세(世)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토(土)○
배(培)○
영(榮)○ ○의(儀)
○선(善)
○교(敎) 수○
영(永)○
선(善)○ ○주(柱)
○수(秀)
○제(濟) 희(熙)○
용(容)○
채(采)○ ○기(基)
○덕(德)
○병(炳) 백(伯)○
녕(寧)○
중(重)○ ○태(台)
○성(成)
○의(義) 열(烈)○
범(範)○
순(淳)○ ○효(孝)
○강(康)
○상(相)
소부공파(小府公派)-장방파(長房派) 세(世)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대(大)○ ○효(孝) 진(鎭)○ ○영(永) 상(相)○ ○희(熙) 재(在)○ ○용(鎔) 영(泳)○ ○표(杓)
소부공파(小府公派)-이방파(二房派) 세(世)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병(秉)○ ○헌(憲) 재(在)○ ○현(鉉) 태(泰)○ ○영(榮) 병(炳)○ ○기(基) 호(鎬)○ ○락(洛) 동(東)○ ○환(煥)
대위공파(大尉公派) 세(世)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자(字) 대(大)○ ○성(成) 태(泰)○ ○식(植) 병(炳)○ ○기(基) 종(鍾)○ ○영(永) 동(東)○ ○묵 용(用)○ ○석(錫)
첫댓글 조선전기엔 이른바 명문.벌족이라하면 왕비.부마.공신을 배출한 가문을 고귀하게 여겼고 사림이 등장한 이후로 그 관념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한 가문을 으뜸으로 쳤습니다. 혹자는 이를 소급하여 파평윤문을 치마양반이라고 폄훼하곤 하는데 다 못 가진 자들의 시기 질투가 아니겠습니까?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파평윤가다 하면 첫마디가 양반이시네요.
현대는 언행이 올바르고, 존경받도록 처신해야 양반이지요.
지나 개나 양반아닌 사람 있나요? 사대부집안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올바로 처신해야지요.
윤가 중에서도 한점 부끄럼움 없는 소정공할아버지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훌륭한 명문가에 태여 난것을 깊이 깊이 선조님 들께 감사를 드리고 있답니다
윤가라고 하면 첯 마디가 파평 이냐고 묻 습니다 그리곤 최고의 양반가 라고 합니다
이런 훌륭한 문중에 가끔씩 먹칠을 하는자 들 땜 맘이 안타 깝습니다 잘못된 일에
간간이 나오는 윤가라는 놈들 땜에요 윤창중은 특히나 파평 윤가 명문가를 먹칠 했는데 용서가 안되는 군요~
하지만 이젠 모든것을 뒤로 미루고 잊고 살아야 지요 고맙 습니다 대신에 벼슬을 많이 하였 으니까요
첯째는 소정공파 이고 둘째는 판도공파 로서 우리 후손들은 자랑 스럽 습니다 고맙 습니다 ! ^*^
올려 주신 귀한 글 잘읽었습니다. 아울러 조심스럽게 한말씀 드립니다. 마지막 부분에 독립운동가 윤기섭 선생이 언급되었는데 이 분은 파평윤씨 문중이 아니라 해평윤문으로 알고 있으니 확인하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